3.오행설과 10간 12지설 1-1 우주의 창조는 소리(音) 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행의 10간, 12지가 생기게 된 것은 무극에서 탄생되는 공간 속에서 태극을 낳은뒤, 태극은 다시 1의 수를 (甲 乙) 대기권의 무한의 영역에 광대분산 되므로 창조능력이 부여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때 발생하는 1수 속에 음양의 공존법칙이 공생의 원리에 따라 순환하면서 길을 찾아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채 탄생되는 것이다. 하나 ( 1 ) 의 수가 생기면서 음과 양의 二律的인 二面性을 동시에 소생 할 수 있도록 규정지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 말은 능동적으로 태동될수 있도록 융통성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중요시할 것은 음과 양의 공존법칙이 문제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음 양 속에 <금><수><목><화>,토>의 생생한 오행이 쉬지 않고 자라고 있으며 그 속에는 만유의 모든 법칙이 닭이 알을 품듯이 품고 선회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금 수 목 화 토의 오행은 곧 “氣”를 내포시키고 있으며, 창생(創生)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존재되고 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행은 막연하게 전근대적인 낡은 물질처럼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많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원소의 근원적인 핵의 소산이 바로 오행이며, 대자연의 섭리 속에 존재하고 또 멸하면서 창생하는 원천이 바로 오행에 있다. 대기권내에서 존속되고 있는 무엇이라도 금수목화토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오행의 척도에 따라 효능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에 자못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 눈에 지나치게 물질세계에 현혹되어 있어 근원적 가치기준을 판단할 능력을 잃고 있다. 원자폭탄,수소폭탄, 중성자탄, 우주 로케트라고 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못한다. 폭탄 하나로 수백만명의 명명을 살상시킨다 하드라도 <목화토금수>의 오행이 교합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대자연의 힘 앞에는 무력한 미물에 지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철학의 본질이 탐구되지않고는 과학이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오행은 선구적 입장에서 과학의 길을 안내한다. 따라서 필요에 의해 과학문명을 낳게하는 것이라보겠다. 나타나는 물질만이 중요하다고 볼 수 없다. 물질을 나타나게 하기위해서는 그에 앞서 정신적 차원이 요구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오행은 이와같은 점에서 위대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행론이라 하니까 나와 현실과 먼거리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끼고 등한시하는 경향이 많으나, 사실 그것이 아님이 다음사항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매일 대기 속의 산소를 호흡하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도 우리들이 느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산소가 있는가보다 라고만 생각할 뿐이지 일상생활에서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태양의 빛도 위와같은 예이다. 이처럼 우리들은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식주만 해결되면 된다는 것 외에는 공기 속의 산소라든지 태양의 에너지 따위는 얼마든지 공짜로 있기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애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 인생에 있어, 아니 만물이 생존하려면 제일 시급한 것이 바로 자연의 힘의 섭리다. 이것을 무시하고는 우리들의 생활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근원적 요소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2천년대는 :노스트라 다무스“ 의 예언처럼, 대기권의 고갈로 말미암아 큰 이변이 생길 가능성이 없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행이 어느 물질로 현상화되었을 때, 내면적인 존재가치와 동시에 공존의 법칙에 의해 생존권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어느 한쪽 면만을 추구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만일 어느 한쪽의 “에너지”가 대기권에서 공존의 법칙을 잃게 된다면 우주는 파멸되고 존재가치가 없어지므로 절대적 중용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대학 교수는 元子 에너지라고 까지 애기한 일이 있다. 오행은 이와같이 이률적 특성위에 가치형성의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는 대인력의 법칙에 의해 영생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공존공생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생사 윤회가 끊이없이 이어지고, 무한공간 속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시키면서 제 갈 길과 제 할 일을 누구의 지시없이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다면 똑같은 원리에서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필자는 믿는다. 한 사람의 잘못이 자기 혼자만의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사회 나아가 국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행은 음양의 공존세계에서도 이원론적 입장에서 동시에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한대로 작용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부분까지 작용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내 곁에 함께 있고 함께 자고 함께 살아, 나를 살찌우고 내가 생존할 모든 권리를 나에게 절대적 차원에서 부여해 주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현대과학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이 착각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칠 필요가 있다. 그 예를 한가지 든다면 아무리 과학이 위대한 발명이 있다 하더라도 나(我) 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이 공염불에 지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 있고 내가 현재 뚜렷한 존재의 능력을 갖고 있다면 이 모든 것이 필요할 것이나, 그렇치 못하다면 어떤 보옥인들 필요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서 오행(목화토금수)의 불변의 법칙이 만고의 진리로 우리 인간과 더블어 존속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오행의 따뜻한 품속에서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창조자의 자애어린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야 어찌 기대할 수 있으랴...... 오행은 사랑하는 모정의 손길과도 같은 곳에서 새로운 씨앗의 생명으로 탄생되는 것은 대우주의 비밀속에 감추어진 진실된 진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곳에서 드디어 십간 십이지가 새싹처럼 생명의 눈을 뜨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장에서 계속) 율건 이동재 글 대통인 안조영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