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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린왕자의 들꽃사랑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그린리버
제주의 전통가옥은 초가집이다.대부분 안거리를 중심으로 밖거리, 이문간(대문)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우리 외가만 하더라도 집의 구조가 이런 형태로써 집안의 장남이 결혼하여 새 가정을 이루면 안거리에 거주하던 외할머니는 안거리를 장남에게 내주고 밖거리에 거주하셨다. 물론 거동이 가능할 때까지 식사,빨래도 당신 스스로 하셔서 완전 독립적 생활을 하게된다. 어떻게해서 이런 관습이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제주 여성들이 가사를 하며 바깥일(농사,물질)을 하였기에 노부모가 어느정도 며느리의 과중한 집안 일에서나마 덜어주기위함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이 초가들 사이에 마을사람들이 이동통로를 '올레'라부르는데 조무래기들이 이 올레에 모여서 노는 장소이기도하다.'올레'는 폭2~3m, 길이 10m 이상되는 골목길이며그 중간에는 '정낭'을 걸쳐 대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초가의 각방마다 겨울에 난방을 할 수있도록 '굴묵'이라는 아궁이가 있었는데 겨울날 어느 어둠이 다가오는 시골어귀에 들어서면 각자의 집안'굴묵'에 그날밤 따뜻하게 지내기 위하여 불을 떼는 연기가 마을 하늘가로 날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이쁜 비바리(처녀)가 바닷가 용천수에서 길어온 물을 집안 물항아리에 길어넣는 모습이다. 옛부터 제주는 화산활동에의한 지질학적 원인에 기인하여 땅속에 물이스며들어도 저장할 수있는 암반구조가 못되어 땅속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바닷가 해안가에서 스며나와 이곳까지 걸어가서 물허벅에 물을 길어오곤했었는데 주로 집안의 딸들이 이 역할을 했었다. 나의 어린시절에도 이 물허벅을 볼수가 있었는데, 그때는 공동수도가에 가서 어머니가 물표를 주고 이 물허벅에 물을길어 오던 생각이 난다.제주의 노동요 중'이야옹 타령'이있는데 이 물허벅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는 공연을 하던모습이 몇십년전에 봤었는데 지금도 이 '물허벅'에장단을 맞추며 공연을 하고 있을것이다.
제주의 아낙과 선비!
제주의 아낙은 참 부지런했다. 낮에는 밭에나가 밭일을하고 오후무렵 바다날씨가 잔잔하면 바다로 물질을 나가 해산물을 채취해 집안살림에 보태었고, 가사와 양육까지 했었으니 이 얼마나 고달프랴. 하지만 글읽는 양반네는 집안에 틀여박혀 "공자님이 이러셨고,맹자님이 그러셨다"를 하루종일 글만 판것으로 육지사람들은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제주의 남자들도 밭일을 하였었고, 배를 타고나가 어로작업을 하였었다. 그러다 어느날 어선이 풍랑을만나 불귀의 객이되어 '이어도'사람이 되버림에 홀로남은 부인네는 남겨진 시어미와 자식새끼들을 위해 들과 바다로 나설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인이 이러하니 제주남자들은 게으르다 생각하시지 말기를...
제주의 부엌과 대청마루사이에 있는 주방이라보면된다. 이곳에 제기들과,식기들,그리고 쌀 뒤주나 쌀항아리를 보관했었는데 제주의'조냥정신(절약정신)'이 살아있는곳이다. 제주의 어머니들은 매일 밥을하기전 일정량의 쌀을 이 조냥항아리에 넣고 밥을 하셨다. 나중 이 쌓아둔 곡식을 장에나가 생활필수품으로 바꾸기도 하였고,자식들 교육비,집안에 급한 용채가 필요할 때 사용하였다. 제주의 '조냥정신'을 여러분도 한번 실천해보시는것이 어떠실런지....
제주의 전형적인 부엌모습이다. 제주말로는 '정지'라 칭하는데 이곳에서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어머니께 여자의 道를 배웠고, 시집살이 설움에 눈물을 쏟았던 곳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철모르는 어린 자식들은 어머니의 눈물에 왜 우시냐 물으면 흘러나온 눈물을 훔치시면서 지피는 매운 연기때문에 그렇다 넘기셨던 바로 그곳! 제주 여인네들의 恨을 삭히던 바로 '정지'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외가댁에 갔을 적 사촌누이가 불을지피던 모습이 아름답고 따스해 그곁에 붙어 대신 장작개비를 얹혀놓으며 놀았던 정지인데 이제는 이런곳은 없을것이다.
대나무로 짜놓은 아기의 요람'애기구덕' 나 역시 이 애기구덕에서 자랐고 나의 동생들도 이 구덕에서 자랐다. 제주의 여인들은 이 '애기구덕'을 짊어지고 밭이며 갯바위로 나가 밭일을 했으며 물질을 하였다. 나 역시 어릴적 어머니 대신 갓난쟁이 동생을 보라하면 이 '애기구덕'을 좌우로 흔들며 동생을 재우거나 얼렸는데 글쎄 이놈이 자라는 잠을 안자거나 빽빽 울어싸면 이 구덕의 좌우흔들림을 과격하게 하기도 하고, 또 숙제한답시고 한쪽발로 구덕을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빨리 이놈을 재워야 올레에 나가 친구들과 놀텐데 이놈이 안잘 때가 제일 얄미웠었다.
사진에서 보면 아내가 서방 올 시간에 맞춰 밥상차려놓고 갓난쟁이 자장가불러주며 잠을 청하는것 같다.
서방이인지 남방인지 이양반은 언제나 오실려나....
뒤에 커다란 베틀은 본적이 없다. 아마도 많은 옷감을 만드는곳에서나 있었을까? 그 앞에 물레는 시골집에서도 있었다. 외가에가면 할머니가 아랫목에앉아 면화솜뭉치가 쌓여진 바구니에서 면화솜을 쥐고서는 스르르 스르르 물레질을 하며 솜뭉치를 길게뽑은 실을 보며 신기하게 여겼던것! 아~~~ 옷은 이렇게 만들어 입었었구나
제주의 갈중이옷(갈옷)이다. 노동복으로써 미국의 청바지를 연상하면 될것이다. 질기고 오래가는옷.
밭에나가 밭일을 할때 입던옷으로 땡감을 따 색을 입혀 제주사람들이 즐겨입던 옷이다.
지금은 60년대 제주가 나은 가수 은희씨가 십몇년 전에 제주에 내려가 이 갈옷을 시중에 상품화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 고풍스럽게 보이는것으로써 생활 한복지로 입고다녀도 좋을것이다. 하지만 여름에는 좀 더울걸?
우리의 여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들에대한 소망이 깊은것 같다. 그때 역시 아들을 낳게해달라고 제주의 여인들도 祈子를 위한 정성을 들였었는데 그 대상은 당연 삼신할망이었다. 과연 삼신할망께 치성을 드려 나 역시 우리 어머니가 나셨는지 모르지만 사진에서 보여주는 제주에서 영험하다고 알려진곳은 한라산의 영실,제주시의 개천이라 부르는 한내의 내왓당, 동광양의 물통이 있었던 기자석(祈子石)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것이다.
제주의 장례식장 풍경이다. 우리제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장 났다"고 한다. 그러면 이웃, 친지들이 이 영장난곳에가서 예를갖춰 고인을 추모하였으며 품앗이로 장례일을 품앗이 해줬다.뒤에보이는 상여는 육지의것과는 약간은 다를것이다. 육지의것들은 조화로 장식을 하였는데 제주의것은 그러지가 안한것 같다.
내가 대학 4학년 실습을 마치고 집에와보니 시골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시골로가서 할머니를 모신 상여가 시골길을 돌 때 이 상여뒤를 따르며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대처로 시집간 막내따님을 그리도 염려하셨고 그 자식들 애지중지 하셨던 모습이 상여를 따르며 실타래 풀리듯 줄줄 새여나와 주위의 사람들 아랑곳않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장지를 따라갔던 그 일들이 중년이 다된 이 나이에도 그때의
의 일들이 생생하다.
제주의 먹거리 보리떡, 오메기떡, 빙떡
보리떡은 5월 보리 농사를 마치면 방앗간에가서 보리를 갈아와 만들었던 떡으로 구수하고 맛이있다. 먹을게 항상 모자랐던 그 시절 학교다녀오면 어머니는 장에서 사온 보리쌀을 갈아와 이 보리떡을 해 주셨는데...
오메기떡은 좁쌀을 갈아서 만든떡이다. 제주는 토양이 육지와 달라 밭농사를 주로한다. 그 대표적인 곡식이 보리와 조인데 이 좁쌀로 만든 오메기 떡은 원래는 '오메기술'을 만들기위한 술떡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이 좁쌀가루를 되게 반죽하여 도넛형태로 빚어 찜통에서 쪄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 오메기떡을 하얀 설탕에 찍어 주시곤 하였다. 그러나 이 떡은 그리 많이 먹지 못한다. 이떡을 누룩과 함께 아랫목에 담요를 칭칭감아 한달여 놔두면 발효되어 맛있는 '오메기 술'이 되는데 어머니는 간혹가다 이 술항아리를 열어 국자로 건더기를 헤쳐풀며 오메기술을 떠 오신 손님에게도 대접하고 당신도 간혹 홀짝거렸던 모습이 기억난다. 지금의 오메기떡은 좁쌀이 귀해 찹쌀에 팥고물을 묻혀 판매되고있는데 정통 오메기떡은 아니다.
빙떡은 겨울 설날 때 차례상에 올렸던 떡인데 메밀가루를 아궁이에 솥두껑 엎어놓은 곳에 돼지 기름칠을한 후 얇게 부친 후 고물로 숙주나물, 무우채,를 참기름에 달달 볶아 펼쳐놓은 메밀판위에 놓고 돌돌말아 만든 떡이다. 참 담백하고 고소했었는데 이 빙떡 먹어본지가 몇십년은 된것같다. 그 빙덕을 만들어주시던 어머니가 가신지 이제 14년이 되었길래....
제주는 죽의 종류가 참 많았던것 같다. 콩가루로 만든 콩죽, 그리고 팥죽,바다의 고향답게 전복죽, 소라죽, 보말죽(고동),고등어죽, 성게죽 등등... 아마도 모자란 식량 많은 식구들과 나눠 먹기위하여 불리는 형태의 먹거리가 발달한것 같다. 특히 제주의 콩죽과 고등어죽은 별미인데...
젓갈류 역시 그러하다. 자리돔으로 만든 자리젓,개웃젓(전복내장),그리고 갈치젓, 멸치젓
특히 이 멸치젓은 삼겹살에 궁합이 딱 맞는것 같다. 몇해 전 제주에 갔을 때 동생의 안내로 신제주 어느 삼겹살집을 갔는데 삼겹살 불판 가운데 멸치젓 종지사발을 얹혀놓고 부글부글 끓인 뒤 노릇노릇 구워오른 삼겹살을 상추에 싸 먹으니 여태 맛보지 못했던 삼겹살 맛을 볼 수가 있었다. 지금은 서울강남에 있는 어느 삼겹살집에 이 멸치젓을 쌈장대용으로 내놓는곳이 있었다. 여러분도 삼겹살 먹을 때 이 멸치젓 따끈하게 뎁혀 찍어 먹어보시라
궁금하지 않으신가? 밥상위에 밥은 하나인데 그 위에 얹혀진 숟가락은 세개이니....제주의 전형적인 가족 밥상이다.옛날의 제주는 개인 밥그릇이 없었다. 있다면 집안의 어르신인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밥그릇 뿐이 였으니까. 아마도 고려시대 몽골군사가 제주에 100년간 살면서 전해 내려온 풍습인것 같다. 커다란 양푼이에 보리밥가득 담아 각자의 수저로 삽질했던 기억이 있다. 여섯남매의 우리는 서로 먹겠다고 숟가락질을 게눈감추듯이 하였고 마침내 빨리 못먹는 어린 동생들을 위하여 큰 누이가 각자의 분량에 맞게 경계선을 쳐주고 그 이상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촌극도 연출됐었으니...
여섯남매의 숟가락질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시는가?
당시에 타 지역에 살았다던 지인들도 그렇다하지만 나의 고향제주에서는 쌀밥 먹는 날은 정해져 있다. 조상제삿날,명절날, 그리고 자신의 귀빠진 날이다. 당시에 제주는 쌀이 귀해 평상시에 보리밥을 먹거나 좁쌀밥이 주식이었다. 그래도 좀 나은 집에선 아버지에게 드릴 쌀밥을 해드렸는데, 그것도 쌀전부가 아니라 보리쌀 위에 아버지 드실만큼만 가운데 쌀을 넣고 밥이 다 되면 쌀밥만 살살 퍼담아 뚜껑있는 주발에 넣어 아랫목에 모셔두고 나머지 남은 잔여물들을 뒤섞어 형제들에게 나눠주시던 어머니. 그때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가난했던 시절 그래도 다른집에비해 조금 나았기에 아버지의 식성때문에 어머니는 정성을 다했었다. 덕분에 우리 남매들은 그 콩고물을 얻어먹을수 있었고.... 바로 이 쌀밥을 우리는 곤밥이라했었다.
고운밥!
보리나 좁쌀처럼 까칠거리지않고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나던 곤밥. 우리는 이 곤밥먹는날 제사명절, 나의 생일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적이 있었으니 요즘처럼 먹거리풍부한 우리의 자식들은 그러한 시절을 이해나 할런지... "밥이 없으면 햄버거나 피자 사드시면 되잖아요."그럴까?
한여름 제주를 여행했던 사람들은 이 자리물회를 한번쯤은 먹어봤을것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돔을 가지고 쑥갓,파,마늘,청양고추에다 제주 재래식된장을 넣어비벼 수정얼음 동동띄워 내놓은 자리물회. 그 물회에다 제주 한라산소주 그것도 노지(도수21도쯤되는 소주를 냉장안시킨소주를 말함)걸로 한잔 쪼옥하면...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간다.
사진에서 보이는 옥돔국,갈치국,몸국에 대해선 다음에 소개하기로하고 그냥...
제주는 아마도 샤머니즘의 고향이라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아니 어찌보면 우리 한민족이 어느 절대자를 향한 기원의 마음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한다.그래서 우리나라에 선교 100주년이 지난지 이제 수십년이 흐른 이때 전세계5대 교회가 우리나라에있고 그 종교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지 않은가?
제주의 바닷가에는 이런 형태의 당집들이 많다. 바닷가 근처에 사는사람들은 모두 다 이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로 생활을하기에 그들은 바닷속 용왕님을 무서워했고,또 용왕님前에 무사 어로작업을 기원했었다.
사진은 제주의 대표적인 굿인 영등굿을 하는 장면이다. 해안마을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마을굿으로써 영등하르방또는 영등할망은 어부와해녀의 해상안전과 수호는 물론이고 해산물의 증식을 관장하는 신으로믿어지고 있다. 매해 음력2월1일에 들어와서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오곡과 해산물의 씨앗을 뿌려주고 2월15일에 섬 동쪽 일출봉곁 우도를 거쳐 떠난다.사진에서보는 이'칠머리당'은 제주시 사라봉 기슭에있으며 이제는 이 영등굿이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음에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수가 없다. 한 때 나라에서 미신타파라해서 전국의 당집이란 당집은 물론 이러한 굿행사를 금지까지 했었는데....
사진은 제주의 어부들과 어선들이다. 옛날이야 지금처럼 발동기가 없었기에 노를저어 바다로 나가거나 순풍을 타고 인근바다에서 어로 작업을 했었는데 앞의 어선이 황포돗대가 달린 일반 어선이고 뒤에있는 떼목같이 보이는배가 바로 '테우'라 불리는 자릿배이다. 이 자릿배의 원형의 큰 그물을 자리들이 노니는 바닷물속에 집어넣고 놋줄을 이용하여 걷어올리면 하얀비늘 펄떡펄떡 퍼득이며 배위로 올려지게된다. 나의 어렸을 적 잠시 살았던 조그마한 포구에 이'테우'끝에 커다란 고래를 끌고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그 고래가 어마어마 하게 컸었는데...
이 해녀란 글은 3년 전 제주를 방문했을 때 어느 해안가에서 물질하는 잠녀들을 보고 썼던 글이다.
지금의 이 잠녀들은 모두 나이가 들어 60,70대 할머니들이 하고 있어서 젊은 잠녀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렇지! 얼마나 힘든 작업인데....
하지만 우리네 제주여인들은 이렇게 물질하며 자식새끼들을 키웠고 집안을 지켰던 것이다.
강인한 제주의 여인들, 옛날 그렇게 고생하고 한이 많던 그녀들은 자식들에게 호강받고 살고있는지, 호강받다 살다들 갔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