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신이치(이케다 선생님)가 법화강(法華講) 총강두(總講頭)와
학회 회장을 사임했기 때문에 젊은 승려들이 더 이상 학회를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5월 1일에는 종무원(宗務院)이 통달을 내려
다음 사항을 주의시켰다. "법회 등에서 '어서'를 근간으로 하는 교의
이외에 설법은 엄중히 금한다. 전부터 이 점을 여러번 통달했으나 잘 지켜
지지 않았다. 앞으로는 철저히 자계(自戒)하기 바란다." "창가학회원에
대해서는 본인의 의지로 단도(檀徒, 시주하는 신도)가 되겠다고 희망하는
사람은 받아들여도 괜찮지만, 그 외에는 절대 강요하지 않도록 한다."
닛타쓰 법주가, 통달을 무시하고 학회를 비방하는 승려를 질책하기도 했다.
그런데 젊은 승려가 주지로 있는 사찰은 대부분, 법회 등에서 여전히 학회를
중상하고 공격했다. 또 학회원을 단도로 포섭하려는 움직임도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어느새 젊은 승려들은 종무원의 말도, 법주의 말도 듣지 않았다.
종문(宗門) 내부는 차츰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7월 22일 오전 6시가
지났을 때였다. 신이치에게 닛타쓰 법주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닛타쓰는 17일 후쿠오카에 있는 사찰에서 법요에 참석하고 18일 총본산으로
돌아왔는데 이튿날인 19일 아침 몸이 안 좋아 후지노미야 시내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22일 오전 5시 5분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일흔일곱이었다. 신이치는 곧바로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조문하러
갔다. 오전 9시 전에 총본산에 도착해 정성스럽게 창제, 분향하고 명복을
빌었다. 이날 밤에 대객전에 분향소가 마련되고 이 자리에서 중역인 승려가
'중대발표'를 했다. 총감인 아베 신노가 지난해 4월 닛타쓰에게서 은밀히
상승을 받았기에 제67세 법주로 내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학회는 이때도 광선유포를 위해 화합을 바라며 종문을 지키고자 했다.
8월 6일부터 8일까지 닛타쓰 법주의 장례가 치러져, 신이치를 비롯해 학회
중심간부와 대표가 참석했다. 이해 여름 세계 41개 나라 3개 지역의 SGI
멤버 1300명이 일본을 방문했다. 신이치는 SGI 회장으로서 13일에는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개최한 국제친선우호의 모임에 참석하고, 15일에는
도쿄도다기념강당에서 개최한 세계평화기원근행회에 참석해 멤버를 격려
했다. 신이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광선유포를 위해 분투하고 세계 각지에
서 구도심을 불태워 일본에 온 다기진 동지를 격려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법화경의 일구일게(一句一偈)를 설하는 자는 '마땅히 일어나 멀리 마중하여
응당 부처를 공경하듯이 하라'는 도리이므로 부처와 같이 서로 존경할지어다"
(어서 1383쪽) 더욱이 대성인은 이 "당기원영 당여경불" (법화경 677쪽)을
"최상 제일의 상전(相傳)" (어서 781쪽)이라고 하셨다.
어디까지나 대성인의 지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이치는
드디어 세계광포의 신시대가 찾아왔음을 강하게 느꼈다.
신이치가 국제친선우호의 모임에서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세계에서 1300명이나 되는 멤버가 대성인의 불법(佛法)을 구도해 일본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불법사상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껏
없던 세계 광선유포의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이자 역사의 창조자라는 자각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각자 나라에 돌아가면 멤버가 아직 많지 않아, 광활한
지역에서 신심하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은 혼자서 광선유포의 파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학회를 재건할 때도 도다 조세이
(戶田城聖) 선생님이 오직 홀로 일어서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불법자(佛法者)의 정신이고 학회정신입니다. 지금 바로 사자(師子)가 되어,
홀로 일어서지 않겠습니까! 저도 일어서겠습니다!"
8월 20일 오후, 신이치는 도쿄 다이토문화회관을 방문한 뒤 나가노현 가루이
자와마치에 있는 나가노연수원으로 갔다. 가루이자와는 도다 조세이가 서거
하기 1년 전인 1957년 8월에 방문해 마지막 여름을 보낸 곳이다. 가루이자와
에 머무는 동안 도다는, 신이치와 모리카와 가즈마사를 불러 차를 타고 오니
오시다시로 가서 기암괴석이 이어지는 경관을 구경하고 호텔에서 함께 식사
했다. 오사카사건으로 부당하게 체포된 신이치를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사하면서 사제(師弟)가 나누는 대화는 더욱 활기를 띠어, 이야기는 도다가
'묘오공(妙悟空)'이라는 필명으로 집필한 소설 '인간혁명'에 이르렀다.
1951년 4월 세이쿄신문 창간호부터 연재한 이 소설은 1957년 7월에 단행본
으로 막 발간한 터였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간(巖) 씨'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공동주택에 살면서 인쇄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그런 간 씨가 '마키타 조사부로(牧田城三郞,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가명,
나중에 출판할 때는 본명으로 고친다)에게 절복되어 니치렌대성인 불법을
실천해 신앙의 실증을 나타내고 이윽고 인쇄회사 사장이 된다. 또 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마키타 회장을 보좌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군부정부의 탄압을 받아 회장인 '마키타 선생님도, 마키타를 스승으로 섬기
는 '간 씨'도 함께 투옥된다. '간 씨'는 감옥에서 거듭 창제하고 법화경을
읽으면서, 자신이 법화경에서 설하는 허공회(虛空會) 회좌에 있던
지용보살이라고 오달(悟達)한다. 그리고 평생 이 법화경을 넓히겠다고 결의
하는 데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소설 전반부에서 '간 씨'는 도다 조세이와
전혀 다른 가공의 인물로 그려지는데, 후반부에서 '간 씨'가 겪은 체험은
도다 자신의 체험이다. 특히 체포되어 감옥에서 광선유포의 사명을 자각하는
'옥중 오달'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창가학회 정신의 원점이
새겨져 있다. '나는 지용보살이다!'라는 간 씨의 외침이 바로
창가(創價)의 확신을 낳은 원천이다.
도다 조세이가 쓴 소설 '인간혁명'은, 주인공 '간 씨'가 인간혁명하는 과정을
주축으로 스승 '마키타 조사부로'가 광선유포를 위해 홀로 일어서 사신홍법
(死身弘法)을 실천하는 모습을 그렸다. 도다는 1954년 11월 마키구치 쓰네
사부로 초대 회장의 10주기 법요 때, 감옥에서 큰 은혜를 입은 마키구치의
서거 소식을 들은 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그토록 슬픈 적은
없었다. 그때 나는 '좋다, 두고 봐라! 선생님이 옳았음을 증명하고야 말겠다.
만약 내가 별명을 사용한다면 암굴왕(巖窟王)이라는 이름으로 반드시
큰 일을 해내 (마키구치)선생님에게 보답하겠다'고 결심했다."
'암굴왕'은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구로이와 루이
코가 일역한 이름이다. 음모에 빠져 외딴섬 이프 감옥에 갇힌 젊은 선원
에드몽 단테스는, 갇혀 있는 동안 노신부에게서 여러가지 지식을 물려받고
몬테크리스토섬에 숨은 재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14년에 달하는
유폐생활 끝에 거액의 부(富)를 거머쥐고 탈옥에 성공한 단테스는, 몬테크리
스토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파리의 사교계에 나타나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선량한 은인들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다.
도다는 이 '암굴왕'처럼, 지금의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반드시 군부정부의
탄압을 받다 순교한 스승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했다.
도다가 하려는 복수는 은사의 정의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키구치
를 죽음으로 내몰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쓰라린 고통을
안겨준 '권력의 마성(魔性)'과 벌이는 대결이었다. 민중의 행복과,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도다는 소설 '인간혁명'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암굴왕'의 발음만 따서 '간쿠쓰오(巖九十翁)'라 하고 심혈을
기울여 마키구치의 정의와 위대함을 글로 남겼다.
스승의 정의를 꿋꿋이 선양하는 일이 바로 제자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도다의 부름을 받고 가루이자와에 달려온 신이치는, 도다가 쓴 소설 '인간혁
명'을 읽고 느낀 감동을 이야기하며 마음속 깊이 다짐한 것이 있었다.
도다가 쓴 '인간혁명'은, 도다의 분신이라고 해야 할 '간 씨'가 감옥에서 생애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겠다고 결의하는 데서 끝난다. 1945년 7월 3일,
도다는 옥사한 스승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유지(遺志)를 이어 살아서 옥문을
나온다. 그뒤 도다가 실제로 무엇을 이루고 일본 광선유포의 기반을 어떻게
구축했는지, 신이치는 그 진실을 글로 남기지 않으면 스승의 위업을 선양할
수도, 마키구치와 도다에게 흐르는 창가(創價)의 사제정신을 후세에 전할 수
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이치는 이렇게 자각했다.
'선생님의 진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또 그것이 (도다)선생님이
내게(이케다 선생님) 거는 기대이자 제자로서 해야 할 내 사명일 것이다.'
신이치는 전부터 몇번이나 도다가 쓴 '인간혁명'의 속편에 해당하는 전기 소설
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때 결의를 확고히 굳혔다. 이로써 나가노현은
창가의 사제정신을 영원히 남기겠다고 굳게 약속한 땅이 되었다. 나가노연수
원은 1년 전인 1978년 8월에 개원했다. 신이치에게는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신이치는 광선유포를 향해 새로운 막을 여는 첫 여름에, 도다가 생애 마지막
여름을 보낸 곳을 찾았다. 숙연 깊은 이 땅에서 가정방문과 개인지도의 흐름
을 일으켜 새로운 창가학회를 건설하자고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세계광포라
해도 '한 사람'을 격려하는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연수원으로 가기 위해 올라탄 열차에서 결의를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신이치를 알아보고 인사하러 온 청년에게 '우연히 만난/ 자네도/ 내 제자
로구나/ 행복한 여정'이라는 시를 써서 선물했다. 또 열차에서 내릴 때는
"부모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고 악수했다. '결의즉행동'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도쿄에서 두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가루이자와는,
밤안개가 깔려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이치가 나가노연수원에 도착하자
현지 간부 몇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회장을 사임한 뒤 세이쿄신문 등 기관지
에서 신이치의 움직임을 거의 보도하지 않아서인지 모두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신이치는 동지의 그런 기분을 날려 버리듯
힘차게 말했다. "저는 건강합니다! 자, 출발합시다!"
사제의 땅에 사자후(師子吼)가 울려 퍼졌다. 신이치는 나가노현장인
사이다 다카시와 악수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이다는 서른일곱살 젊은 현장
이었다. "저는 명예회장이 되었으니 광포활동을 쉴 수도 있고,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편하겠지요. 그러나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미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는 창가의 사제가 아닙니다. 도다
선생님이 격노하실 것입니다. 지용보살의 사명을 자각하면, 아무리 활동을
구속하고 막으려 해도 투쟁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지혜와 용기를 내는
투쟁입니다. 대성인은 '아직 단념하지 않노라' (어서 1056쪽) 하고 말씀하시
며 어떠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싸우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도
생애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처지나 상황에 놓여도 광선유포의 투쟁을,
신심의 투쟁을 결코 멈추면 안 됩니다. 저는 회원을 위해 계속 싸우겠습니다"
신이치는 나가노에 9일 동안 머물 예정이었다. 도착한 이튿날인 21일은 아침
부터 청년부 행사진행요원들을 격려하고 점심식사도 열명 남짓한 초창기
동지들과 함께 먹으며 대화한 뒤, 바로 고모로지역 부지역장인 기바야시
다카시 집을 방문했다. 11년 전에 만났을 때 '꼭 집에 와달라'고 말했는데
그때 한 약속을 지킨 셈이다. 저녁에도 현지 회원 대표를 잇달아 만나
간담했다. 거듭 대화해야 생명의 대지를 일구어 행복으로 가득한 꽃밭을
만들 수 있다.
▶2p입니다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신시대를 나아간다 [8]
인재의 빛을! 새바람을 일으켜라
지난 4월 5일, 봄 햇살 가득한 무사시노를 달려 우리 소카(創價)학원에 다녀
왔습니다. 생각해보면 1960년 4월 5일에도 이 길을 달린 적이 있는 추억이
서린 길입니다. 회장에 취임하기 직전, 학원을 건설할 부지를 시찰하러
아내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과거 잡목이 우거진 곳에는 57 성상을 거친 지금,
올려다볼 영지의 대성(大城)이 우뚝 솟았습니다. 바야흐로 세계 교육계도
주목하는 대발전을, 소카학원 관계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개학 하루전이었지만 동아리 활동과 신입생 환영 준비 등으로 학원생이 발랄
하게 약동하는 생기에 기뻤습니다. 학원 창립 50주년, 간사이소카학원도
눈부실 정도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삿포로소카유치원을 비롯해 한국,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라질의 자매학교에서도 훌륭한 창가의 세계시민이
자라고 있습니다. '교육의 승리'가 곧 '인류의 영원한 승리'라고 외치신
마키구치(牧口) 선생님과 도다(戶田) 선생님이 흡족해하며 웃으실 얼굴이
떠오릅니다. 창가교육을 지원하는 모든 분에게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학원에 응시한 모든 벗이 창가동창이라고 날마다 기원합니다.
벚꽃이 활짝 핀 다치카와문화회관에도 오랜만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40년 전에 개관한 회관으로, 새로운 '본진'으로 정하고 지휘한 회관입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한 사람'을 사자(師子)로!
신시대의 반전공세를 이 법성(法城)에서 열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새긴 '원초(元初)의 방'에서 근행하고, 지금 광포를 위해
씩씩하게 달리는 총도쿄를 비롯해 모든 동지가 복덕 가득하기를, 크게 승리
하기를 진지하게 기원했습니다. 기념전시실에서는 제2총도쿄의 그리운
광포의 공전보를 바라보고 이 벗과 저 가족의 근황도 물으며, 자랑스러운
보토(寶土)에 제목을 보냈습니다. 4월 2일, 은사의 기일은 '제2총도쿄의 날'
이기도 합니다. 그 의의는 깊습니다. "좋은 제자를 두었을 때는 사제(師弟)
불과(佛果)에 이르고" (어서 900쪽) 정의로운 넋을 남긴 제2총도쿄에서
창가 후계의 '좋은 제자'가 미래 영원히 춤추며 나아가기를
나는 확신해 마지않습니다.
인재는 시련 속에서 육성됩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지용보살로서, 스스로 원해서
일부러 어려운 고난에 도전한다. 왜인가. 당당하게 싸우고 승리해,
뒤를 이을 사람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용기를 보내기 위해서다."
자, 인재의 빛을 사회에 내뿜읍시다!
희망과 용기의 새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