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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7일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제1독서 : 집회 3,2-6.12-14
제2독서 : 콜로 3,12-21
복 음 : 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길가에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습니다.
이 노점상에는 가격을 알리는 푯말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하나에 300원, 세 개에 천 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 개를 사면 더 싸야 하는데, 이 가게는 여러 개 사면 더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격 푯말이 너무 이상해서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에서 이렇게 가격을 책정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 개를 살 만큼의 돈이 없거든요.”
이런 이유로 적게 살수록 오히려 이득이 될 수 있도록 가격 책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라서 실제로 이런 곳이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전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드러난다면 함께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떨까요?
가족 안에서 합리적일 수 없습니다.
하나를 줬으니, 나도 하나를 받아야 한다는 철저히 계산적인 사고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유일한 법칙이 있다면 사랑의 법칙이지요.
받은 것이 없어도 기쁘게 모두 줄 수 있다고 하는 사랑의 법칙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어떤 불합리도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만든 성가정을 기념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가정 안에 세상의 합리적인 기준들이 드러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세상의 합리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행복한 가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의 예언처럼,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는 아픔도 있었지만,
사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는 사랑이 충만한가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다 보면, 그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가정 축일- 남편과 아내
류해욱 요셉 신부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부터 일주일은 가정 성화 주간입니다.
부부를 중심으로 성가정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틱낫한 스님은 남편과 아내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남편의 문제는 아내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묵상을 하면, 자신과 다른 이와의 연관성과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알게 된답니다.
이러한 이해 없이 원망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 여인이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았다면,
남편과 자신의 깊은 연관성,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먼저 아내가 변화되고 이어서 남편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고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내의 본분에 이어서 남편의 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은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느 자매님의 고백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때때로 남편을 원망할 일이 있을 때 금방 자 나신도 역시 잘못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험하고 못되어도 가 바뀌면
남편도 따라 바뀐다는 놀라운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이십년도 더 된 옛적에 남편과 한없이 불편했을 때가 있었지요.
서로 불화가 끊이질 않았고 매사 남편이 특이하고 이상해서
살기 힘들다고 단정 지으며 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정말 맞춰가기 힘든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지요.
그런데, 신자로서 이혼을 하지 않을 바에야
이렇게는 앞으로 긴 세월을 살 수 없어 가만히 문제점을 짚어 봤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남편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문제가 발생하고 부부싸움이 일어난다고 느껴졌습니다. 아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문제점을 알게 되자,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지요.
남편을 무조건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게 해 달라고요.
어느 날 정말 남편의 어느 한 순간의 모습이 제 눈에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따라서 남편을 보는 제 눈이 하트로 동글동글해진 건 물론입니다.
그러자 제 눈빛을 본 남편이 그동안의 경직된 불편한 태도를 일순간 바꾸면서
바로 제게 따뜻한 태도와 눈길을 주더군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지요.
그후 계속 남편이 멋져 보여 제 눈은 늘 하트였고, 남편 역시 같은 화답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성가정을 회복하였지요.
사랑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곱게 늙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둘이 된
고독을 가르쳐 주고
나는 당신에게
둘이 된 그리움을 가르쳐줍니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위로의 대명사가 되는 것입니다.
눈길에 빗나간 가난한 발자국,
그 발자국 따라가며
꽃씨를 심는
사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둘이 된 고독을 가르쳐주고
나는 당신에게 둘이 된 그리움을 가르쳐줍니다.
김현성 시인의 ‘사랑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제가 김재훈, 안미경 부부와 신성용 신부님이 함께 쓴 성공하는 결혼 이야기,
『나를 웃게 하는 당신』이라는 책의 서문을 써 주면서 인용한 시입니다.
『나를 웃게 하는 당신』은 저자들이 자기들 결혼 생활에 얽힌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줌으로써,
행복한 결혼 생활로 이끌어 주는 관계의 비법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감싸 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배우자와 참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에 대해 소탈하게 나눕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서로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마음을 지니는 것,
서로를 바라보면서 때로는 서운함 때문에 고독도 느끼지만
둘이 함께 했던 시간들 안에서의 그리움, 안쓰러움, 따스함을 지니는 것입니다.
고독은 꼭 혼자 있어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둘이 된 고독이 더 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자서 외로우면 그러려니 하지만 둘이 있으면서 외로우면 섭섭함까지 드니까요.
혼자 있으나 둘이 있으나 삶에서 고독, 외로움은 밀려오게 마련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고 읊었지요.
그래도 우리들의 가슴에 고독이나 외로움보다는
그리움, 따스함이 더 가득히 고여 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부부간의 사랑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랍니다.
저는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지 않으세요?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중요해요. 그 이유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해요.
부부가 부모보다도 자식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인 까닭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둘인 신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이입니다.
가깝고 소중하기에 더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요.
소중할수록 깨기기 쉬우니 조심해야 하고요.
늘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야 하고 늘 서로에게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하고
늘 서로에게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둘이 된 고독이 찾아들 때면 둘이 된 그리움으로
그것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제가 졸역한 조 만나스의‘가정을 위하여’라는 소개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위하여
여기 당신 앞에
우리의 작은 가정을 대령합니다
우리의 희망과 꿈을 가득 지니고서.
당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아시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에.
우리 가정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 가정에게도 선물, 세상에도 선물입니다.
당신이 제게 말씀하시는
온갖 놀라운 방법 중에서
첫째이며 가장 깊고, 가장 행복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저의 가정의 목소리입니다.
저의 사랑스러운 그대들에게만은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저 자신이고 싶습니다.
저의 가정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기쁨과 웃음과 눈물과 일,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고유한 선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가정을 이루는 사랑의 선물에 대해.
그 사랑은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우리가 느낌으로 알고 있는 사랑, 바로 그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매시간, 아니 매순간
당신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가없는 돌보심 없이
어찌 우리가 서로를
사랑의 유대 안에 묶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여
우리를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인류의 온 가정이 알게 하소서.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음을.
가정이 사랑의 진원지
치유의 근원지
기쁨의 샘터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서로서로
당신의 커다란 가정의 일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는 “가정”이었습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가정”은 모든 생활과 관계의 기초이며,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파괴되면 사회도 국가도 공동체도 파괴되고,
가정이 새로워지면 사회도 국가도 공동체도 교회도 새로워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을 표징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씀과 같이, 성모님은 성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으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고,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 마리아, 요셉 사이에 그 어떤 다툼도 불평도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성가정을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혹은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성가정이나, 성수도가정이 될 수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고통이 없는 것이 성가정이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성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란 그것은 결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거나 가난하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가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성가정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루카 2,35)
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해줍니다.
곧 부모가 아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가정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12월 27일은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주님 성탄 다음에 오는 주일이기에 사도 요한의 축일 대신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 가정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요한 사도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요한 사도는 기꺼이 자신의 축일을 성 가정 축일에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전례력으로 요한 사도의 축일을 지내지는 않지만
축일을 맞이하는 모든 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저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양보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성 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화목한 가정은 가족들이 모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이 아프면 맑은 날에 먹구름이 끼듯이 걱정과 근심이 생깁니다.
정신적으로 아픈 가족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습니다.
모두가 건강하면 좋겠지만 뜻하지 않게 아픈 가족이 생기곤 합니다.
화목한 가정은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집이 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직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실직은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화목한 가정은 대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같은 취미활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여행을 가는 것도 좋습니다.
추억이 있으면 대화할 수 있는 소재가 됩니다.
화목한 가정은 같은 신앙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감사드리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위로하고,
가족들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있는 가정과 신앙이 없는 가정은 어려운 상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나자렛의 성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 가정은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성모님은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순명은 성 가정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성 가정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비록 가족이 건강하지 못할지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대화가 부족할지라도,
신앙이 서로 다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성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욥 성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 소경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육상 경기는 항상 출발선이 있습니다. 이 출발선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사회생활, 경제생활,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모든 것의 출발은 바로 가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요, 교회입니다.
이 가정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와 윤리를 배우게 됩니다.
인류의 구세주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도
바로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서 출발했습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기도하는 가정, 이웃을 돕는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다.(루카 2, 40)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아픈 가정에서 자랐다.
힘겨움과 버거움의
여정 안에서
기도와 감사를 배우게 되었다.
아픔과 사랑이
교차하는 가정(家庭)을
만드신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사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가정 안에 답이 있다.
돌봄과 보호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자라난다.
기쁜소식의 시작은
언제나 가정이다.
가정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지향한다.
성가정은
하느님 사랑이 중심이 되는
인격체들의 공동체이다.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다.
가족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을 걸어간다.
가정 안에서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
가정 안에서
우리의 인격은
가르침을 받는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다.
교회는
하느님과 우리의
소중한 관계의 여정이다.
사랑을 알게되듯
하느님을 닮아간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셨다.
사랑은 배우고
깨닫고 배우고
나누는 실천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여정은
성가정의 여정을 걸으셨다.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랑이 필요하다.
가정 공동체는
성화가 필요하다.
함께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밝히는
사랑의 빛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족이
되어 오신 예수님,
우리 가정공동체를
성화하여 주소서!
성가정은 석탄에서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는 곳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의 구성원은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 아드님의 양부, 이렇게 셋입니다.
어마어마한 집안입니다. 이렇게 세 분이 모두 엄청난 분들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세 분이 가정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모두 무엇이 되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그릇입니다.
예전에 철로 금을 만들려는 등의 연금술이 성행했는데,
어떠한 재료에 그렇게 변형될 수 있는 촉매제와 결합하는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그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우선 사람이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고 완성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석탄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석탄의 원소 구성은 매우 2차원적이기에
불안정하고 다이아몬드의 탄소 원자는 3차원적으로 매우 결속력 있게 뭉쳐져 있습니다.
2차원적인 분자구조를 변형시켜 3차원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석탄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3천℃ 이상의 열과 3만 기압 이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우선 3천도의 열과 3만 초고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대부분 물질은 이 열과 기압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지하 200km 이하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또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일을 해냈습니다.
1955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탄소를 이용해 인공다이아몬드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공다이아몬드는 현재 유리칼이나 다른 금속재를 깎는 연마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산보다야 그 아름다움과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흑연과 같은 것으로 보석과 버금가는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내고 있기는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석탄으로 태어납니다.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잃었지만, 그 가능성만은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과 닮아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열과 압력이 필요합니다.
‘열은 은총’이고 ‘압력은 진리’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진리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과 진리가 인간 분자구조를 바꾸기 위해 생성하는 힘은 ‘믿음’입니다.
항상 예로 드는 것이지만, 늑대에게 자란 아이를 생각해봅시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아직 석탄의 상태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아직 인간이라는 믿음이 생성되지 않았기에
인간이란 분자구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아직 인간이 아닙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이상 그 아이는 절대 두 발로 걷는 일은 없습니다.
몸만 인간이지 본성은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늑대 가운데 살고 있다면 절대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행복하다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늑대라는 믿음을 이미 실현하였기에 행복합니다. 인간 눈으로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인간에게 발견된다면 인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과 가르침,
즉 은총과 진리가 3천℃, 3만 기압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아이는 바뀌지 않습니다.
분자구조를 바꿀 믿음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발견된 늑대에게 키워진 이 아이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 채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습니다.
머물기는 하되 그들의 믿음을 바꿔줄 사랑과 가르침이 그 정도를 채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인간이 되려면 그 아이들의 친부모와 버금가는
사랑과 가르침을 지닌 공동체를 만나야 합니다.
그 공동체가 3천℃의 사랑과 3만 기압의 가르침을 가졌다면
그 공동체의 모든 인간은 반드시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이 아이들을 참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석탄을 보석으로 만드는 그릇입니다.
이런 면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를 참 인간으로 만들어줄 부모를 만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내가 낳은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하는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믿음을 생성할 온도와 기압이 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 손에서 큰다면
그곳에서 머무는 것은 그저 허무한 고생일 뿐입니다.
가정은 이렇게 석탄에서 보석으로의 새로운 창조가 이뤄지는 공동체이고
그래서 부모는 이 세상의 작은 하느님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은 이보다 더 나아갔습니다.
어머니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란 믿음을 지니신 분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위의 단계가 있다면 바로 성모 마리아가 그런 분이십니다.
여기서 실제로 새로 태어나는 분은 예수님이라기보다는 요셉 성인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가 여보, 또 아버지라 부르는 그 분위기에서 산다면
요셉 성인도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꼭 부모가 자녀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자녀들 속에서는 그 사람이 부모라도 자녀들의 믿음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믿음으로는 자녀가 부모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 안에서 보석의 가능성을 보아야 하고,
교회는 새로운 가정으로서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 합니다.
교회 자체가 자신을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면서
신자들 가정에서 자녀를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가정이 참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라면 교회는 참 하느님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인간의 자녀들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 수 있는 온도와 압력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새고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성가정은 한 가정의 믿음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교회 또한 어떤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그 온도와 압력을 품을 수 있는 수준이 안된다면
그 가정이나 교회는 누군가를 머무르게 만드는 것이 고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머물기만 한다면 석탄과 같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만드는 다이아몬드 제조 공장이 되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