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당시의 장소는, 본래의 장소에서 옮겨진 것으로 본다. 본래의 장소를 알 수 없다., 초론하기로는 물가에 있었으리라.
굴-남근석-암각화
팔공산에도 절이 있는 곳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를 한 곳이라든지, 원효대사가 도를 닦은 곳이라든지, 고려시대의 지눌대사가 수행한 곳이라는 전설을 가진 곳이 많다. 이것은 불교 이전에 신앙지였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불교가 들어와서 토속신앙과 습합한 사실을 전설을 통하여 말하는 것이다. 선발 종교과 후발 종교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팔공산 전설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굴의 전설, 고대 신앙지인 남근석과 알터, 그리고 암각화를 꼽는다.
암각화 등 모두 선사시대의 제사 유적지이다. 대구에도 진천리의 입석(선돌) 바닥에 성혈이 있다. 지석묘(고인돌)는 일반적으로 평야지대에 분포함으로 산악신앙과 연계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수가 많다. 그러나 암벽에 새겨진 바위 그림은 암벽이 바로 신앙지였음을 말한다. 팔공산의 암각화는 은해사의 입구 지역인 영천군 청통면 보성리에 암각화가 있다. 초례봉의 남근석 아래에도, 또 초례봉을 오르는 길의 바닥에도 알터가 새겨져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다. 이 사실은 팔공산이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제사 의례를 올리는 신성한 성지였음을 증언한다.
초례봉과 암각화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또한 물을 끼고 높이 솟은 암벽이 기도처가 되었다. 물가에 있는 바위에 암각화가 새겨진 사실은 이곳이 신성지였음을 말한다. 울주 천전리와 대곡리 반구대가 말해준다. 이들은 물가에 높이 속은 암벽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경주의 형상강변 금장대도 서천과 북천이 만나서 깊은 소를 만드는 곳에 솟아 있는 암벽이다.(김동리 소설 무녀도의 배경지이다.). 여기에는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최근까지도 굿을 하던 장소였다. 이곳이 고대의 신성지로서 굿을 하던 기도처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관된 견해이다.(이것도 뒤에 한 번 다루겠습니다.)
고령의 양전리 암각화는 물과 제법 멀리 떨어져 있으나 지리적 조건을 보면 선사시대는 물길이 바로 앞으로 흘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영주시 가흥리에 있는 암각화도 물가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가흥리의 암각화가 있는 곳은 시사하는 점이 아주 많은 유적지이다. 같은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