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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2,7-9; 3,1-7
7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3,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12-19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4,1-11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사순 첫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유혹입니다.
제1독서는 에덴동산에서의 유혹이요, 복음은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는 아담이 유혹에 걸려 넘어진 결과와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신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대전환을 가져온 거대한 두 사건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이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낙원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유혹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생명을 받게 되었던 사건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된 사건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합니다.
세례 때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하느님의 영은 이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최초로 하신 일은 바로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곳이요,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호세 2,16-18).
또 불모의 황폐한 사막이요 유혹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을 아껴주신 곳이요(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주고 인도하신 곳이요(신명 2,7;8,15; 느헤 9,18-19),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신명 8,2),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요(1열왕 19,4), 사랑을 알게 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예레 2,2-3).
또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귀와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는 하느님의 부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천사가 시중드는 곳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우리 삶을 뒤흔드는 위협에 맞서, 하느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자리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세상이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허기지셨던 예수님은 쇠약해지셨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태에 처했습니다.
가장 허약한 순간을 노려 악마의 끈질긴 유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유혹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사막에서 받은 유혹을 상기시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유혹받으시나 승리하시는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모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물질적 유혹입니다.
빵에 대한 유혹이요,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벽에서 뛰어 내려라. 그리고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정신적 유혹입니다.
영예에 대한 유혹이요,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 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증명해보라는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이 세상 왕국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영적, 신앙적 유혹입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체 악마는 무엇을 노리고 다가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토록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곧 이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신비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이나 기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유혹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가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이 헌신에 힘입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자 누구입니까?
환란입니까? 궁핍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5-3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광야로 가자, 하늘을 보자>
사순 제1주일은 똑같이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류의 조상과 주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인류의 조상이 유혹을 받아 하느님처럼 되려다가 죄를 지었다고 전하는 데 반해, 복음은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탄과 그 유혹을 물리치고 죄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대조적으로 전합니다.
이런 대조를 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았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떠올리며, 우리도 인류의 조상처럼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자는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인류의 조상은 하느님처럼 눈이 열리는 유혹에 넘어간 데 비해,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유혹을 연달아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다운 선택을 하셨는데, 우리도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주님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묵상을 또한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눈이 열려야 한다면,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 열려 빵이 아니라 말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빵을 보는 것은 눈이 열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고 저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눈앞에 있어 눈을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빵을 보고도 그 너머의 말씀을 보려면, 너머의 것을 보려는 의지와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보려는 의지는 내가 지녀야 하지만 볼 수 있는 능력은 주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주어져야 하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처럼 유혹을 받기 전에 요르단강에서 세례와 성령을 받고는 성령의 인도로 유혹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가서 단련까지 받아야 합니다.
사탄과 유혹으로 단련되는 기간이 40일입니다.
이 기간을 덜 채우면 안 됩니다.
덜 채우면 덜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이 기간엔 천사의 시중을 받으라고 사탄이 유혹해도 천사마저 시중을 들지 않고 그 시중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산꼭대기에서 세상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를 경배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으시고 하느님 나라를 올려다보시며 하느님께 경배합니다.
산꼭대기까지 가서 세상을 내려다볼 일이 뭐 있습니까?
세상 영광을 소유하려면 세상 가운데로 돌진할 것이지 세상을 떠나 뭣 하러 산꼭대기까지 애써 올라갑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처럼 세상을 떠나 광야로 가고 산꼭대기를 오르더라도,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도록 합시다.
사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유혹을 주신 하느님을 보도록 합시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유혹을 물리치는 길>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 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 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그분에게서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전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은 거룩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혹은 달콤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끊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유혹은 언제나 그야말로 ‘유혹적’입니다.
그래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유혹자와 자주 접하게 되면 유혹에 둔감하게 되고 결국은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충성심’으로 유혹의 기회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 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명성(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 주리라.’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 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띄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남몰래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됩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만해서 그렇습니다.
이사야서 47,10에서는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 다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데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한 탓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
(야고 1,14-15)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장 10절,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칼로 무장되어, 괘락과 욕망을 향한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를 떠나지 않는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 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하면 유혹은 은총입니다.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으니 말입니다.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쌓기를 희망합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독서 보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이 세상과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돌아오게 하였다면,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유혹을 이겨내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이겨내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유혹을 이기는 법: 말씀의 검을 갈아놓으라>
인터넷에서 어떤 가톨릭 신자의 이런 근심 거리를 읽게 되었습니다.
한 젊은 여자가 누군가를 도와주러 지방에 가게 됐는데 일이 끝나고 주인 사모가 사례를 못해서 미안하다며 다른 분에게 무당집 복비를 건네주며 그 자매를 꼭 데려가서 점을 보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식사하러 가는가 했더니 무당집이었습니다.
자매는 기분 좋게 하루 휴무를 풀로 도와주고는 기분 완전히 잡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안 모든 식구가 성당을 다니고 자신은 여유가 없어서 계속 못 갔는데 최근 들어 어떻게든 다녀야겠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당이 자매에게 “신내림을 받아서 무당 할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당은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그 자매의 앞날에 재수 없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 겁을 주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무시하고 절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무당이 되어야지 안 그러고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반드시 병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권태기인데 그 사람과도 끝장이 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무시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 충고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은 ‘기도’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한 자매가 무당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안 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몸도 아프고 가족이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요즘 누가 무당이 되고 싶겠느냐며, 그러나 자신은 어쩔 수 없다며 무당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탄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느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십니다.
다시 말해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말싸움에 졌기 때문이고, 유혹을 이기는 이유는 그 말을 이길 엄청난 힘의 말씀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이길 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은 따 먹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흐렸습니다.
말씀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힘이 말에 더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유혹의 달콤한 말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힘, 곧 성령을 말씀에 더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어떤 말보다도 믿을만하고 진리라는 확신을 주어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다른 말을 이기게 합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을 이겨낼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닉은 엄청난 부자인 친구인 탐에게 초대 받아 함께 머물게 됩니다.
탐의 아내 데이지는 개츠비의 옛 연인이었습니다.
개츠비는 가난했지만 주류 밀수로 큰 돈을 벌어 빼앗겼던 연인을 찾기 위해 데이지의 집 앞에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고 매일 데이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순진하기만 한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나고 그녀의 사랑을 얻습니다.
탐도 자기 아내의 불륜을 조금씩 눈치챕니다.
그러다 데이지가 탐의 내연녀를 차로 치는 사고를 냅니다.
순진한 개츠비는 이것을 자신이 다 뒤집어씁니다.
그러자 데이지는 개츠비를 버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가 다시 탐에게 가려고 합니다.
이를 눈치챈 닉은 개츠비를 위해 데이지를 그만 믿으라고 말합니다.
평생 데이지의 사랑만을 믿으며 살아온 개츠비는 데이지의 실수로 죽은 아내의 남편에게 총을 맞아 사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데이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개츠비는 정말 위대한 사랑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닉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사랑만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개츠비는 닉보다 데이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개츠비가 살 수 있는 길은 닉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닉과 시간을 보내며 그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기도와 같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유혹이 끼여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결혼해서 자녀를 많이 낳아 사제도 만들고 수녀도 만들면 더 주님께 나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말이 저에게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널 원한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던지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하시는 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는 그 말씀에 힘이 없었습니다.
마치 천사의 말을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말씀이 인간이 되게 하셨듯이, 기도를 거친 말을 말씀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 묵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 무기가 많을수록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유혹을 이길 한 마디의 말씀이 없어서 우리가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광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광야에서 말씀의 무기를 가져 모든 유혹을 물리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나도 누군가를 위한 사람이 되고 그만큼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도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갑시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거칠고 황량한 유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사순절을 시작한 우리도 스승 예수님을 따라 깊고, 황량한 광야,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절, 광야로 들어갈 때는 다른 해처럼 준비 없이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에 이끌려,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들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순절이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난 이유는, 주님 없이, 성령 없이, 내 힘만 믿고, 나 홀로 광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낮에는 피할 곳도 변변치 않은데, 엄청난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또 얼마나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 퍼센트 인간 조건을 그대로 지니셨던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허기와 갈증은 또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언젠가 겪게 될 골고타 언덕에서의 극심한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광야에서 미리 맛보셨던 것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광야인 이번 사순시기, 여느 해처럼 갖은 고통과 시련, 세찬 모래바람과 극한 체험으로 가득하겠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큰 문제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여행길에 밀착 동반하신다면, 광야 생활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우리 앞에 펼쳐질 광야는 어디일까요?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 정말이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안 되는 그가 득실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광야입니다.
평생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벗어나 보려고 그토록 발버둥쳐 봤지만,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내 악습과 결함이 광야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갖은 유혹 거리로 가득 찬 내 부끄럽고 참혹한 매일의 일상이 광야입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새출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로부터의 유혹도 많겠지만,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유혹>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이야기겠지만,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유혹들을 상징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히브 2,17-18)
우리가 유혹을 받는 일 자체는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리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죄가 됩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유혹하는 존재이고, 예수님의 신앙인들을 늘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충실한 신앙인들은 더욱 심하게 유혹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혹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물리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이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지만, 온갖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에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유혹을 받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나 ‘백전백패’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은 ‘몸의 편안함’을(육적인 것을) 추구하라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돌들’일까?
여기서 ‘돌들’은 ‘생명력 없음’을 상징하고, ‘돌들로 만든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라는 말씀은 살기 위해서는 빵도 필요하지만, 빵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육신만을 배부르게 하는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어야 합니다.
‘빵’은 분명히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라는 말씀은 ‘말씀대로 사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6).
이 말씀은 현세적인 복만 추구하는, 즉 빵만 추구하는 세속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또 ‘빵의 기적’ 후에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군중에게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6,27).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마태 27,42-43)
이 말은 예수님을 유혹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께 반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하느님을 의심하지 마라.”입니다.
십자가, 고난, 시련, 고통, 무엇이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그런 일들은 그 자체로 심각한 유혹이 됩니다.
참기 힘들다는 점도 큰 유혹이 되지만, 그런 일을 왜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점이 가장 큰 유혹입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 왜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래도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고 믿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사실 기도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했던 말에 연결됩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요한 7,3-4)
세속의 헛된 명성만 찾는 것은 마귀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그런 유혹이 유혹인 줄도 모르게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려면 우선 먼저 유혹을 유혹으로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아보는 방법도 역시 ‘기도’뿐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승리의 삶 - “악마의 유혹, 하느님의 말씀, 구원자 예수님”>
지금 세계는 전쟁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총칼만 안들었지 흡사 좌우의 갈등이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바 평화인데 역설적으로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된 전쟁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보니 “교황님의 슬픔과 평화를 위한 지칠줄 모르는 호소”라는 제하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 종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기사가 길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2월초 일간신문에서 스크랩한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1월7일 하루에만 러시아군 전사자가 1천명을 넘었다고 주장했고, 러시아군은 지난 한달간 우크라이나군 6500명이 전사했다며 맞섰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해 2월24일 개전이후 러시아군 전사자가 13만 3190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그러니 개전 이후 정확히 1년이 넘게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1년간 러시아군 전사자가 13만 3190이라니 한달 평균 1만명이 넘고 우크라이나군까지 합치면 한달 평균 2만명쯤 전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의 일같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뿐인 나의 아들이 전사했다면, 하나뿐인 내 남편인 가장이 전사했다면, 그 가정의 불행과 비극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어처구니 없는 전쟁인지요!
전 세계가 혼돈 상태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미친 짓이요 악마의 소행이라 개탄하는 교황님입니다.
새삼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러니 이런 전쟁을 영적전쟁의 상태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예로부터 수도생활을 영적전쟁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내외적으로 영적전투 치열한 전장터같은 세상입니다.
제가 참 많이 강조해온 주제도 영적전쟁이요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어제 조용히 피정왔다가 떠나는 목사님의 다음 메시지에 화답하여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오늘 피정을 마치고 떠나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오후 4시 떠나는데 떠나기 전 면담을 하고 싶습니다.
아침에 우연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책을 읽으며 면담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연락을 드립니다.”
목사님은 저에게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고, 저는 하루하루 산다고,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산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저의 지론을 피력했습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그래서 영적전쟁에 승리를 위한 영적훈련이 필수입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승리자 파스카 예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어떻게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저는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유혹의 현장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악마의 유혹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에덴동산에도 악마를 상징하는 뱀의 유혹이 있었고, 이집트 탈출 시 이스라엘 백성도 유혹을 통과하지 못해 죄를 짓고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과 악마와의 영적전투 치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악마의 유혹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요, 이 유혹없이는 영적성장도 없습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하와와 더불어 아담이 유혹에 빠져 죄를 짓는 장면이 너무 생생한 가르침이 됩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애초부터 유혹하는 악마와 대화하지 말고 침묵했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요 선택입니다.
이점에서 하와도 아담도 실패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 데 정말이냐?”
악마의 유혹에는 이렇게 교묘한 과장이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와 역시 과장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와 역시 부풀려 과장하여 악마의 유혹에 화답함으로 유혹에 말려듭니다.
마침내 유혹에 빠져 나무 열매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또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워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습니다.
부부가 유혹에 빠져 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악마는 늘 우리와 함께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보다 과장하여 부풀려 말하며 부추길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유혹하는 뱀의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과장하거나 부풀려 부추기는 말을 듣거나 이런 마음이 들면 즉시 입을 닫고 대화를 중단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하와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면 미풍에 끝났을 유혹이, 유혹에 넘어감으로 미풍이 태풍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유혹하는 악마의 유혹이요,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악마의 유혹에 대한 최상의 무기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악마와의 치열한 영적전쟁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광야에서의 악마의 유혹이 참으로 집요합니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는데,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몹시 시장하신 상태중의 유혹입니다.
세 차례 아슬아슬한 유혹인데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으로 세 차례에 걸친 공격을 일언지하에 격퇴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당신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서두의 말이 벌써 예수님의 허영을 부추기는 유혹입니다.
참 견디기 힘든 것이 배고픈 몸의 욕구 식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기의 하와와 아담과는 달랐습니다.
단호히 하느님 말씀으로 물리칩니다.
하와처럼 악마와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래서 평생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평생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이렇게 말씀 공부와 훈련으로 평상시 영혼을 튼튼히 해야 즉각적으로 악마의 유혹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악마의 공격은 무엄하게도 하느님께 대한 시험입니다.
간교하게도 먼저번 유혹과 같이 예수님의 허영심을 부추김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말씀 훈련의 달인인 예수님께 허영심이 있을리 없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하며 악마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하나 예수님은 거두절미 대화를 끊어버리고 한말씀으로 악마를 제압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정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믿음이 약하면 악마의 성경의 인용에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과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악마의 공격입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영광과 권력,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단도직입적 지칠줄 모르는 참으로 집요한 악마의 유혹입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모두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감미로운 것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위와 같은 유혹들에 빠져 패가망신하는지요!
예수님의 단호한 대응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참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믿음의 모범, 믿음의 용사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계시기에 살 희망과 용기가 생깁니다.
이 모든 유혹이 40일간 단식후의 극한 상황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된 예수님의 삶인지, 그 사랑이, 믿음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런 영적승리에 이어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하니 천사들의 양식으로 심신의 허기를 채웠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또한 은총의 미사시간 때마다 생명나무의 열매, 천사의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심신의 원기를 회복합니다.
여기 주목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 악마와의 영적전투 중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배경 둘, 양편에 계신 수호자 성령과 천사들입니다.
바로 성령과 천사들이 늘 우리의 양편 수호자로 도움이 되고 계심을 생각한다면 용기백배, 사기충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분명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예수님 유혹에 실패했지만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영적전투, 악마의 유혹이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했을 때 베드로를 통한 사탄의 유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을 모독하던 자들을 통한 마지막 사탄의 유혹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마태27,40)
셋째,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영적승리의 모범, 참으로 하느님의 용사, 새아담 예수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 살 희망이, 살 용기가, 살맛이 납니다.
아담과 새 아담 예수님의 비교가 참 적절하고 은혜롭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합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우리는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았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결정적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구원자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과 수호천사의 도움과 주님 말씀에 힘입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란 성부의 음성을 들은 예수님은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과 달리 하느님 나라 선포의 사명을 곧바로 시작하지 않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 40일간에 걸쳐 단식하며 대피정을 하십니다.
이 피정이 끝날 무렵, 유혹자인 악마는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루카 4,3.9)이라고 말문을 뗍니다. 사십 일 전 요르단강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아들"(루카 3,22)이라 부르셨던 하느님의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하며 광야의 고독과 시련을 견디신 예수님께 악마의 입에서 나온 이 전제는 격려나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또 한 번의 시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홀어머니를 떠나 광야에서 죽을 각오로 사십 일을 보냈지만, 지금 남은 건 굶주린 육신뿐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마음속 신념 밖에는 아직 손에 잡힌 것이 없으니까요.
권위자의 인정도 없고, 추종하는 무리도 없으며, 소위 말하는 타이틀도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나약한 육신을 취하셨으니, 굶주림이 자꾸만 영의 지향과 의기에 브레이크를 걸었을지도 모르고요.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루카 4,3)
하느님과 목숨을 건 대면의 시간을 마무리하시는 예수님께 악마는 첫 기적으로 빵을 만들어 네 허기나 채우라 합니다.
네 뱃속 먼저 채우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그동안 애썼으니 너 먼저 안정시키고 새 출발하라고,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냐는 의미 같습니다.
또 세상 구원 같은 거창한 꿈까지 꿀 것 없이 지천에 널린 돌로 빵이나 많이 만들어 나눠줄 수 있으면 그게 사람들을 돕는 거라고 주입하고 싶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응수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루카 4,4)
물론 하느님 백성이 굶주리고 있다면 당장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그런 기적도 일으키실 것이고요.
하지만 성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파견하셨을 때는 인간 전 존재의 총체적 구원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육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능력은 하느님 아들 아니어도 나눌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두번째로, 악마는 자기에게 경배하면 "내가 받은 것"(루카 4,6), 곧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더 큰 권한을 지닌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경배란 한 분이신 하느님께만 드리는 하느님 백성의 의무라는 걸 이스라엘에서 나고 자란 이라면 삼척동자라도 아는 사실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긴 말 할 것 없이 그 원칙을 알려 주십니다.
'이 원칙은 나도 알고 너도 아는데, 네 말에 모순이 있구나' 하는 뜻이었겠지요.
세번째로, 악마는 네가 그렇게 성경 말씀으로 내 제안에 대응한다면, 그 성경의 진위를 시험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몸을 던져 보라고 제안합니다.
어차피 네가 믿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줄 테니까 걱정 없지 않냐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의 안전과 안위를 성부 하느님께서 얼마나 바라시는지 그 사랑을 시험해 보라는 부추김은 믿음의 허를 찌르려는 시도입니다.
혹시라도 아직 자기 정체성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해 의혹과 불신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면 확인을 위해서도 그럴듯한 과정이 될 것이기에 정당할 수 있으니까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루카 4,12)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고 산뜻하고 또 상쾌하기까지 합니다.
누군가를 시험하는 것은 설령 사랑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어도 결국 불신의 표현이기에, 참존재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에게는 시도조차 무의미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 자리 잡은 후 하느님께 맏물을 봉헌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칩니다.
이 대목은 그리 길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사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 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신명 26,5)
하느님께서 부르시어 관계 맺기 전에는 그저 보잘것없고 초라한 뜨내기 신분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겸손히 인식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점은 우리를 더 겸허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신명 26,10)
약속의 땅에서의 삶, 일, 수확, 성과는 모두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것임을 믿기에 되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사이의 관계성은 이 믿음이 바로 설 때 가능합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10)
사도 바오로는 구약 하느님 백성에게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로마 10,12) 확장되어 차별 없이 열매 맺는 풍성한 은혜임을 이야기하면서, 구원의 조건으로 종족도 율법도 뛰어 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에 대항하신 힘은 성경 말씀과 믿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믿음은 자신이 하느님 없이 어떤 존재인지, 또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일 때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고 기억함으로써 제대로 꼴을 갖추어 나갑니다.
그런데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는 믿음은 작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무너질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또 믿음 없이 말씀을 들춰내어 떠벌이는 것 또한 신앙을 영혼 없는 얄팍하고 현학적인 지적 행위 정도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악마도 예수님 앞에서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 또한 우리보다 앞서 세 가지 유혹을 당하십니다.
이 유혹은 우리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으로 식욕, 소유욕, 명예욕입니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넘어간 것과 달리,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제2의 아담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유혹을 받으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당하게 될 유혹들을 미리 보여주시고, 어떻게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요?
이 유혹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내 안에 어떤 유혹이 이미 도사리고 있는지 오늘 잘 살펴봅시다.
나는 어떤 음식이든지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며 먹고 있는가?
쓸데없는 음식투정을 부리거나 맛있는 음식만 먹으려는 미식가, 탐식가는 아닌가?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문에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없어도 될 것인데도 소유욕 때문에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도 많이 사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남들보다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장(長)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상류층의 부류에 속하기를 바라고, 아니 그런 이들과 친분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가 높아졌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우리가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그 뱀의 유혹에 다시 빠지는 길이고, 이것을 의식하고 과감히 물리칠 때 예수님처럼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욕심이 없는 나라일 겁니다.
그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소명이라면, 우리 먼저 이러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 유혹은 늘상 다른 얼굴을 하며 나타날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자기 힘만으로는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늘도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이라고 기도합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던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떨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의욕적으로 준비했던 홍보와 강의는 저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교회도 문을 닫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비 오는 날 저녁 바티칸 광장에서 홀로 기도하였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에 푹 빠져서 하느님을 멀리했던 우리들의 삶을 반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모친도 2020년 9월 10일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한국에 가지 못하고, 뉴욕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With Corona'라는 말을 할 정도로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었고, 치료약도 나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한 번씩은 걸렸기에 면역력도 생겼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초창기에 한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우(Drive Through)'라는 신속하고 안전한 검사를 개발했습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자발적으로 코로나 확진지역으로 찾아가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한국은 ‘검사(Test), 추적(Trace), 치료(Treat)'라는 방식으로 코로나의 확산을 막아내는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인류는 이전에도 많은 ’역병‘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나치게 바쁘고 분주했다는 것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오염되었던 대기가 깨끗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자연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다시 오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설사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무증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유혹은 달콤한 과일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유혹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찾아오기도 합니다.
마치 나방이 불 속으로 날아들 듯이 우리는 유혹이라는 강렬한 불 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류에게 첫 번째로 찾아왔던 유혹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 질 것이라는 교만은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웃의 공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박수칠 때 떠날 줄을 모릅니다.
교만한 사람은 차별과 편견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의 위험성을 잘 아셨기에 언제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발을 씻어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 동안 단식하셨던 예수님께 찾아온 3가지 유혹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은 너무도 달콤하기에 우리는 스스로 그 유혹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위선에 대한 유혹입니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잉태하기 마련입니다.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했던 카인은 하느님께서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가식도 비난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완장을 차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교만, 재물, 위선, 권력’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능숙한 모든 일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이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 버벅거렸고, 실수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반복과 연습을 통해 능숙하게 또 ‘잘한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말은 어떻습니까?
또 글 쓰는 것 역시 처음부터 잘할 수 없습니다.
원래 잘했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은 펜을 잡는 손을 바꿔서 써보십시오.
아마 글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앞으로 걷지 말고, 뒤로 걸어보십시오.
평상시에는 너무나 쉬웠던 걷기가 뒤로 걸을 때는 그렇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과 연습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깨닫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얼마나 잘못된 감정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왜 나는 운이 없을까? 왜 나는 잘하지 못할까?’ 등의 말은 모두 반복과 연습의 부족에서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의 실수 끝에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수천수만 번 넘어진 뒤에 지금 잘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수천수만 번 글씨를 적다 보니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는데, 커서는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좌절할까요?
바로 남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하면서 비교 대상이 보입니다.
그들보다 늦은 ‘나’를 바라보며, 자기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합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과 비교하면서 하지 못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성장시키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반복과 연습이라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한 뒤였습니다.
배고픔과 피곤함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태에서 악마는 유혹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즉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보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혹은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시겠다는 유혹이었지요.
이 모든 유혹은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만 이겨내십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에만 집중하니 그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광야에서의 사십일의 시간, 어쩌면 우리 삶 안에서 체험하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이 아닐까요?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늘 그 뜻에 맞춰 살 수 있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멋지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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