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기도
주님...
내 영이 주님 외에 딴 길로 새나가지 못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길,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기 원하오니 땅에 속한 넓은 길이 아니라 만물 위에 속한 좁은 길을 걷게 하소서.
주의 뜻이 거기에 있음을 믿사오니 나의 이 연약한 몸을 쳐서 주의 뜻에 복종하게 하시고 오늘도 나는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나를 받으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하게 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목숨보다 낫사오니 내가 거한 광야를 성소로 삼아 오직 주의 영광을 바라보나이다.
이 자리가 주의 영광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내 영을 사로잡아 온전히 주의 것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19:1-10
제목 :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의 차이.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 나의 묵상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어 깨달아 알고 나서 아가야 지방인 고린도로 갔다.
아볼로가 이렇게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은 위쪽에 있는 지방을 다니다가 에베소에 도착하여 몇몇 주님을 믿는 형제들을 만났다.
바울이 그 형제들에게 여러분이 주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형제들은 우리는 성령을 받지 못했고, 성령이 계시다는 것조차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바울이 재차,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한다.
그때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와 함께 요한이 증거한 예수에 대하여 전해주니까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를 하니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12명쯤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3개월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담대히 전하였다.
이 복음을 듣는 이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 앞에서 이 복음을 욕하고 다녔다.
그래서 바울은 욕하는 그들을 떠나 형제들을 데리고 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날마다 주의 말씀을 전하였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이렇게 주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2년 동안이나 하였다.
그로 인하여 소아시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 중에 유대인이 되었든 헬라인이 되었든 다 나와서 바울이 증거하는 주의 말씀을 들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예수를 믿는 유대인 기독교인으로 살았으며 그가 에베소에 도착하여 성경을 가르치는 지도자로서 회당에서 그가 아는 예수를 담대하게 전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통하여 온전한 복음을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의 설교를 들어보니 복음의 핵심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조용히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그에게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르쳐 주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입체적으로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회개하는 차원의 세례를 말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헤롯에게 순교를 당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만 알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직계 제자도 아니고 세례 요한의 제자의 제자라고 본다면 그가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지식에 큰 한계가 있다는 증표이다.
오늘 본문 2절 이하에서도 에베소의 형제들 역시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이 있다는 것조차 듣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보다 더 크고 중요한 세례가 있음을 전한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신데 그 분을 믿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성령으로 받는 세례가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바울이 그 형제들 곧 12명 정도 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 중에 방언하는 사람도 있고 예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 이런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100% 반드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역사는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는 증표로써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항상 가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계시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이 말씀으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날마다 확증해야 하며,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의 복음인 말씀 앞으로 날마다 나아갈 때 그곳에는 반드시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곧 진리다.
요한의 세례를 유대인들과 같이 만물 안에 갇힌 신앙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만물 위로 올라가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 시대에는 세례를 한 번 받기 위하여 엄청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저 입으로 “나 예수를 믿습니다.” 정도의 고백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적어도 1년 이상 얼마나 경건하게 살아가는지 점검을 받아야 하며, 또한 그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은 그야말로 세례가 완전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세례를 받으면 이들의 심령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뜨거운 마음이 분출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비록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그 이상의 믿음과 확신이 터져 나올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그런데 요즘은 세례가 한 마디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나부터 마찬가지로 그저 교인 숫자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통과의례처럼 교회에 나온지 6개월~1년 정도 되면 그 사람의 믿음을 점검하거나 혹독하리만치 분명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4주 정도 교육을 시키고 입으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에 세례를 주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모 교회는 6개월 동안 온 새 신자들을 한 데 모아놓고 목사가 세례교육을 집단적으로 시킨다.
그리고 다음 주에 그들에게 세례를 준다.
그래서 일 년에 몇 명에게 세례를 주었는지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 숫자를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 목사들에게 문자로 알린다.
사실 청교도 시대처럼 그런 확실한 교육을 하려고 하면 교회에 나올 사람이 몇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요즘은 시쳇말로 널린 게 교회가 아닌가?
꼭 이 교회만 교회인가?
왜 이렇게 빡세게 시켜?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쉬운 교회를 찾아 나선다.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을 고르듯 교회 쇼핑에 나서는 것이다.
좀 쉽게 가르치는 교회.
재미있게 하는 설교.
사람을 울렸다 웃겼다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감정을 터치하는 그런 교회.
이 교회에 왔더니 남편의 사업이 잘 되더라는 식의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
아픈 사람을 위하여 기도했더니 그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퍼진 교회.
이런저런 이유들로 이런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물론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좋다.
그리고 고무적이다.
하지만 숫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교회는 아니다.
그렇게 많은 교인들을 나오면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를 넘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는 만물 안에 갇힌 신앙을 넘어서 만물 위로 올라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
땅에 있지 않다.
우리가 날마다 만물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는데 있다.
그것이 곧 영생이다.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영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육신의 고난을 넉넉히 수용하여 이겨낼 수 있는 파워이다.
주님은 위에서 나셨고 항상 위에 계시지만, 아담의 생명으로 난 자들은 땅에서 났으며 항상 땅에 속하여 살아간다.
눈이 비늘로 덮여 있기 때문에 만물 위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것이 곧 유대교식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어서 이 땅에서 잘 되는 복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간증을 하는 것은 신앙의 초보에 지나지 않는다.
박 모 전도사가 온 교회들을 다니면서 간증을 하는 것이 그것 아닌가?
‘최고 많이, 최고 많이, 최고 많이’를 외치면서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단다.
그렇게 해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고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받아도 그것은 결국 썩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 곧 쇠락의 법칙에 적용받는 만물 안의 것들이 아닌가?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것을 가르치고 이것을 구하게 하며 이것을 사모하게 하는 이들은 요한의 세례에 그치는 신앙인이다.
이들도 모두 주님을 믿는다.
믿되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 이들이다.
그러나 만물 안에 주님을 가두어 두고 믿는 신앙은 반쪽짜리 신앙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거기를 넘어서 만물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나 또한 요한의 세례에 머물던 신앙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나아가, 풀이나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떨어지는 그런 신앙에서 날마다 말씀 안에서 항상성인 그 나라를 경험하며 주님의 영광을 본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내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한다.
주의 영광이 가득하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나이다.
요한의 세례에만 머물러 있던 자요 만물 안에서 무언가 나의 필요만 채우려 했던 자가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함께 만물 위로 올라가 주님과의 영생의 교제를 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주님...
내 영혼이 새롭게 되었사오니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니이다.
주의 소유임을 인정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만물 안에서 매몰되지 않게 하시고 주의 자녀된 자들을 그 나라로 인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을 수 있게 하소서.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로 감당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심령이 주의 성령으로 뜨거워지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주의 뜻대로 행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