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벗기다
이희근
여든 살에서 백 살까지의 노인들을 이르는 말이 모기(耄期)이다. 경자년이 되고, 팔십이 되어 모기에 접어드니, 할아버지라는 말을 피할 수 없는 노인이 된다. 듣기 싫다고 안간힘으로 버티며 부정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늙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고 다니던 때를 벗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때가 끼면 보기에 흉하다. 빨리 벗겨낼수록 좋다. 개운하게 목욕을 해야 한다. 목욕은, 남의 손을 빌릴 때도 있지만, 자기 손으로 때를 벗기는 행위이다. 따라서 어렸을 때 부엌에서 큰 물통 안에 끓인 물을 붓고, 어머니의 손으로 씻거나 또 죽어서 염습으로 하는 씻기는 목욕이 아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목욕이기 때문에 그에 얽힌 이야깃거리도 많다.
맨 처음 아버지와 함께 공중목욕탕에 갔을 때,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들어가면, 목욕탕 안은 나체의 천국이다. 남은 모두 발가벗고도 의젓한데, 자기만이 죄를 지은 듯이 거시기를 손으로 가리고 다닌다. 이내 용기를 내어 손을 치우고 걸어본다. 개운하다. 때를 벗기러 공중목욕탕에 가서 배우는 용기다.
아버지가 탕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 시원하다”고 하신다. 그 말을 듣고, 탕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앗, 뜨거”하면서 줄행랑을 친다. 아버지한테 속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뜨거운 물속에 발을 넣다 빼다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탕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은 백색 거짓말이다.
손으로 밀어서 잘 벗겨질 정도가 되면, 아버지와 나란히 앉는다. 아버지의 말대로 돌아앉으면,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때리며 제법 통통하다고 하시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자식이 크는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반대로 아버지가 돌아앉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의 등을 간질인다. 품앗이이다. 자식은 아버지의 등을 손으로 만지면서 든든함을 느낀다. 부자간에 정을 나누는 화기애애한 이심전심의 순간이다.
목욕탕 안에서 아버지와의 품앗이는 한시적이다. 자식의 사타구니가 시컴시컴해지면 품앗이는 끝난다. 아버지의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옴을 깨닫고, 아들이 스스로 멀리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용감하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수건으로 혼자서 해결한다. 목욕탕의 품앗이가 호락질로 바뀌어가는 과정이다.
성인이 되면 혼자서 대중탕을 이용한다. 온·냉탕을 들락거리며 사우나실에도 들어가본다. 자연적으로 시설이 좋은 목욕탕을 찾게 되고, 멀리 온천탕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관광지마다 시설이 좋은 대형 목욕탕이 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새벽에 전주시청 앞에 가면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부곡하와이 온천장으로 향하는 버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없다. 주위에 온천목욕탕이 많이 생겨서 부곡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또 생활여건의 개선으로 목욕의 풍토도 달라졌다. 매일 가정에서 샤워시설을 이용하니 공중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경영난을 겪고 있는 동내 목욕탕도 많아졌다.
오래 전에 부곡에 갔을 때였다.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걸어다니는 남자들이 있었다. 부곡하와이 종업원들이었다. 손님이 줄어들고, 운영난을 겪게 되자, 찾아오는 고객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하는 퍼포먼스였다. 그들은, 세상이 변한 줄도 모르고, 발을 끊은 전라도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늘 입고 다니던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번쩍번쩍 빛나는 구두를 신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때 빼고 광낸다고 놀렸다. 요즘은 모처럼 음식점으로 고기를 먹으러 가면서도 목구멍의 때를 벗기러 간다고 한다. ‘때’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또 ‘때’는 우리 몸이나 일상에서 제거되거나 사라져야 할 불필요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장수시대가 되어 회갑연이나 칠순잔치도 벌이지 못한 주제에 팔순이 된다고 시끌벅적하게 판을 벌이며 목구멍의 때를 벗기기에도 어중되다. 또 중년만 되어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데 산수(傘壽)가 되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미 시작한 일들도 끝내지 못하고 가버리는 게 인생이라는데, 무슨 덕을 보겠다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판을 벌이겠는가. 차라리 지나온 날들을 음미하고 때를 벗기며 재해석하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대부분의 지나온 행적들은 추억이란 미명으로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내 글이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을 모아본다. 각종 문예지에 투고한 것들도 있고, 생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요량으로 반복해서 읽어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나이 탓인지 전에 감지하지 못했던 때들이 보인다. 퇴고과정을 거치면서 윤색이란 핑계로 들어간 연자와 연문이다. 식후 이 사이에 낀 빨간 고춧가루처럼 행간에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사족은 잘라내고, 긴 것은 줄이고, 때를 벗기며 읽어본다. 또 하나의 창작이다.
오랫동안 안고 있던 때를 벗기자, 글들이 개운하다며 마냥 싱글벙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