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운주사를 찾았던 때는 89년 가을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운주사로 오는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길에서 버스를 만날라치면 더 넓은 장소로 후진하여 양보했던 길이었는데 삼십 몇 년년 사이에 많이도 변했다. ‘천불산 운주사’라는 일주문이 들어서고 너른 주차장, 그리고 절로 향하는 길에는 옛 시절 운주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때는 가을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고 탑 왼쪽으로 펼쳐진 논들에는 누런 벼 이삭들이 황홀하게 물결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가을의 끝자락이고 그사이 잘 정돈된(?) 경내의 석탑과 불상들만 예전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탑이 운주사 구층 석탑이다. 높이가 10. 7m이며 보물 제 796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거대한 암반위에 별도의 지대석이 없이 암반 자체에다 3.4단의 단의 굄대를 각출하고 그 위의 귀단부위의 면석을 올렸다 옥개석 마다 여러 개의 선문이 이상한 형태로 조각되어있는데 이러한 조식기법은 운주사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상으로서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9층 석탑 우측의 산 아래 자락 그늘에 예닐곱 개의 석불들이 여러 식구들의 모습을 닮은 채로 지나는 길손을 맞고 그 위쪽에는 허튼 돌을 그대로 쌓아놓은 일명 동냥치 탑이 소나무들과 이웃 한 채로 서있다.
다시 대웅전 쪽을 향하면 7층 5층과 원형의 탑들이 마치 기러기 떼처럼 솟아있고 좌우측의 산들에도 여러 탑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다. 많아야 두세 개 혹은 다섯 개 쯤의 탑들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절집들 중 유독 이 운주사에서만 수십여 개의 탑들과 수십여 개의 불상들을 만날 수가 있는데 이토록 높지 않은 산 이름 자체가 천불산이고 봉우리 이름이 다탑봉인 것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천불산 계곡으로 온 세상의 바위들이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기슭에 위치한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제 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서 나지막한 산속에 들어 앉아있다. 이 절 이름을 배(舟)자로 삼은 것은 중생은 물(水)이요 세계는 배(船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중생이 모여 바다를 만들고 세계라는 배가 그 중생의 바다위에 비로소 뜨는 것이며 역사는 중생의 바다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라는 깊은 뜻이 운주사의 배(舟)자에는 숨겨져 있다고 한다. 창건당시 운주사의 명칭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雲住寺)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후 중생과 배의 관계를 의미하는 운주사(澐舟寺)로 바뀌었다가 다시 훗날에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운주사(雲舟寺)로 전해왔다. 그러한 이름 탓이었는지 이절을 처음 지을 때 해남의 대둔산이며 영남의 월출산 그리고 진도와 완도, 보성만 일대의 수없이 많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일어나 스스로 미륵불이 되기 위하여 이 천불산계곡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설화는 신라 때의 고승인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 주는 신령스런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는 설과 중국설화에 나오는 선녀인 마고할미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운주화상이 천일기도를 하여 흙 같은 것으로 탑을 쌓았는데 탑이 천개가 완성된 다음 천동선녀로 변하여 불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거의 똑같은 솜씨로 만든 돌부처들의 모습을 보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들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석공들이 석탑과 석불을 만들었던 연습장이었을 것이라는 허황한 설도 전해진다. 그러나 운주사의 창건에 관하여 가장 널리 유포된 설화는 화순과 이웃 영암 출신 도선국사와 관련된 풍수비보설이다. 그는 신라말기에 영암 구림에서 출생하여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동리 산 태안사의 혜철에게서 배웠다. 도선은 일찍부터 고려 왕건의 탄생과 건국을 예언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산천비보사상과 풍수지리설․음양도참설 등을 토대로 국가시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입적한 후에 도선은 선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에 무게가 실려야 하므로 선복에 해당하는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화로는 영남 쪽에 산이 많고 호남 쪽에 산이 적으므로 배가 동쪽으로 기울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술을 부려 근처 30 리 안팎의 돌들을 불러 모아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운주사 유적들이 12~13세기 양식들인데 비하여 도선국사가 활동했던 시기는 그 보다 3~4세기 앞선 9세기 인 만큼 연대부터가 맞지 않는 일이다. 풍수비보설 못지않게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는 미륵신앙이다. 그것은 운주사일대의 미륵불의 이미지가 권위적이지 않고 민중적인 것으로서 천불천탑이 세워진 이 운주사일대를 반란을 일으킨 노예와 천민들이 미륵신앙을 염원하며 신분해방을 꿈꾸었던 해방구로 설정하였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