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제1독서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8,6-9; 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휘둘리는 사람이 휘두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나 악령에게 절대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얻으려고 그분 옷에 손을 대려 하자 예수님은 배에 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악령들도 그분만 보면 달려들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악령 들린 칭찬은 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허락 없이는 칭찬도 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자유는 인간 존엄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이유로 에덴동산에 선악과도 있었고 뱀도 있었습니다. 저절로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들이었습니다. 뱀은 특별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창세 3,1)
뱀은 타락한 천사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어떤 연유로 인간이 유혹받음을 가능하게 하도록 창조하신 동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치 뱀을 밟은 성모님처럼 뱀의 유혹을 하찮게 여겼어야 합니다. 어쨌건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에게도 당신을 배신할 자유를 주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게도 휘둘리지 않으셨기에 사람들을 마구 휘두르는 분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야말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성경에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려 그 일을 합니다. 그런 헤로데와 같이 우유부단한 사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독재자가 됩니다.
차르 니콜라스 2세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입니다. 그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폭군이었습니다. 그의 제관식 때 3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압사당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도 유명합니다. 노동자와 그 가족을 포함한 평화로운 시위자들은 니콜라스 2세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했습니다. 시위자들은 더 나은 근무 조건, 더 많은 개인의 자유, 선출된 국회의원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황실 근위대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천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러일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는데 많은 군인이 죽는 것 외에는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폭군은 정말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그는 아내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라는 정교회 수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라가 낳은 유일한 아들이 혈루병을 앓자 신비주의에 빠진 아내가 폭력적이고 음란한 라스푸틴을 소개합니다.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이는 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살리자는 희망으로 그들의 모든 뜻에 복종합니다. 그렇게 러시아 왕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라스푸틴은 물론이요 티콜라스 2세와 일가족은 모두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언가 잃을 것이 있으니 휘둘립니다. 잃을 게 없는 이만 자유롭고 자유로운 이만 자유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이는 자기 자유도 잃고 타인의 자유도 빼앗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아내와 아들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고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목숨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히려 타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귀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이 자신을 휘두르려 할 때도 ‘노’(No!) 하며 모든 결정을 자기 자유의지로 하는 사람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초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미국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성공을 바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미국행 배 승선권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노동했습니다. 드디어 승선권을 사고서 배에 오른 그는 돈을 아껴야 했습니다. 더는 쓸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아끼려고 식사 때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남긴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 조각을 모아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식당 지배인이 그가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그렇게 식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는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손님, 승선권에 식당 이용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어요?”
이 청년은 배에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기만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굳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알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 주님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면서 주님과 온전하게 함께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님의 축복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됨은 큰 은총과 주님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보여주셨던 사랑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특히 병자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죄의 결과로 병에 걸린 것이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 역시 공동체에서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이런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억이 마음속에 있는 한 나는 인생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헬렌켈러).
사진설명: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첫댓글 오늘은 17-21장 입니다.
20장 십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