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여행] 삼례문화예술촌.......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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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삼례 문화예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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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다. 특별히 삼례(三禮)는 시골이라는 이미지 와 특별히 볼거리
가 적다는 핑계를 들어 그냥 지나처 버리며 등한시 했던 면이 있었다. 그러던 삼례가 최근 많은 변화
를 이루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 예가 오늘 방문한 문화예술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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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완주역 근처에는 흥미로운 예술 공간이 하나 있다. ‘디지인뮤지엄’, ‘목공소’, ‘책공방’, ‘북아
트센터’, ‘미디어아트갤러리’가 한 동네를 이루는 삼례문화예술촌이다. 90년 전까지 쌀 창고로 쓰였던
공간 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 곳간에는 쌀 대신 보물 같은 예술품이 가득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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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는 창고도 미술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물론 공간을 넘나들며 예술 체험도 즐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삼례문화예술촌에 새겨진 우리네 아픈 역사도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기
회 이기도 하다. 역사도 배우고 문화공간에서 문화 활동도 할수 있는곳 문화예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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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칭구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문화 예술촌 내부로 들어섰다. 마땅히 누구에게 물어볼수 있는 안
내판이 안보여 두리번 거리다가 한곳을 발견했다. 들어가 문화촌을 관람할수 있는 동선을 알아보고...
그러나 지금은 동절기라 문을 연 공간이 일부 닫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뭐 이해는 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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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코로나가 판을치는 세상인지라 일부는 운영의 묘도 살리려 할것이다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삼
해를 넘어 이해를 할수 있었다. 이내 발길을 돌려 광장을 들어서니 과거 의 창고였던 그 방식대로 광
장을 몇 개의 콘크리트 건물이 둘러 안은 형태다. 휑하니 분위기는 좀 을씨는 스러웠지만 현재 처한 사
회적인 분위기를 감안하고 이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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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러분들도 삼례하면 고개를 갸우뚱 하리라 생각한다, 이번 기회에 삼례에 대한 짧은 공부좀 하
고 갈까요?ㅎㅎ 그런데 지명부터가 왜 삼례(三禮) 이름을 썼을까가 궁굼하여 유래를 찾아 보았다.
삼례(三禮)라는 지명의 유래를 찾아 보았더니만 삼례(三禮)는 ‘세번 예를 갖춘다’ 는 뜻으로서,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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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야기가 무순 소린고 하니 때는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에 태종인 이방원과 그 형
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다툼으로 2차 왕권을 다투던 왕자의 난이 있었다. 이는 전처 신의왕후 소생 간
의 권력 다툼 → 이방간 귀양 → 이방원 제3대 왕 태종 즉위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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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방원이 싸움에서 이기고도 형을 살려주었다. 권력다툼에서 패하고 한양에서 밀려난 이방간은
처음에 황해도 귀산현(鬼山縣)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훗날 전주이씨의 초기 발상지이던 전주의 근
교이던 완산 부성의 동포(東浦 : 지금의 완주군 봉동읍 소재)으로 이송되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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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곳을 지날때마다 왕족에 대한 예의로서 이방간을 향해 세 번의 예를 표했다고 하는데서
삼례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한다.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자면 이방원이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스승이면서 장인이던 심온과 자신을 왕위에 공헌한 처남들을 다 죽여 멸족시켰던 인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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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형이 자신에게 다시 반역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웠을 것이다. 결국 이곳 삼례에서 목숨을 부
지하던 이방간은 세종(3년) 1421년 4월 10일 봄 왕명으로 한양으로 소환 도중 충청도 은진(恩津) 땅
을 지날 무렵 원인 불명의 병으로 그 파란만장의 일생을 마쳤다. 당시 방간의 나이는 56세였는 데 일
설에는 시해당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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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날 이곳 미곡창고가 예술촌으로 거듭나게 된 동기가 있다. 사실 이곳은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쌀을 쌓아둔 창고였다. 왜 이곳에 미곡 창고가 있었을까?. 호남평야가 있
는 전라선 삼례역이 있는 삼례면에는 오래전 일본인 지주가 세운 미곡 창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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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세워진 미곡 창고는 일제강점기 양곡 수탈을 위한 전진기지였다. 비록 지나간 과거라고 해도
상처가 남았던 곳을 다시 돌아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삼례역에서 맞닥뜨린 고요한 공
기는 애써 수확한 쌀을 빼앗겨야 했던 농민들의 숨죽인 한숨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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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 상류에 위치한 전북 완주군 삼례읍은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도 온화해 군산, 익산, 김제 와 더
불어 곡식이 풍부한 곡창지대였다. 농민들 의 기쁨이 되던 땅은 일제강점기가 들어서자 양곡 수탈 의
중심지가 됐다. 1914년에 문을 연 삼례역 철도는 일본으로 곡식을 옮기는 발이 됐고 삼례 양곡창고에
선 이출되는 양만큼 수탈한 양곡이 농민들의 깊은 한숨만큼이나 차곡차곡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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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 신축한 삼례 양곡창고는 무려 100년 간, 양곡창고로서 기능을 이어왔다. 나라 잃은 백성들
의 설움과 산업 발달로 급격히 성장하는 시대의 변화를 모조리 품은 커다란 창고였다. 아픈 역사에도
한 세기 동안 제 기능을 해온 창고였지만 저장 기술 발달과 환경 변화로 제 기능을 잃고 흉물이 될 뻔
했으나. 2013년, 완주군에 의해 삼례문화예술촌 ‘삼삼예예미미’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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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의 외관 과 뼈대는 살리되 미술관, 디지털체험관, 소극장과 목공소 등이 들어선 문화예술공간으
로 거듭난 것이다. 예술가들은 수탈이 남긴 상처 위에 근현대 예술의 씨앗을 심은것이다. 가서 보면 알
겠지만 예술촌의 입구는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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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와 야외무대, 아이들을 위한 개구리와 달팽이 조형물등…... 삼례 문화예술촌에 이르면 세월조차
시나브로 더디게 흐른다. 참고로 후정리 '삼례 양곡 창고'는 등록문화재 제5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
례 문화예술촌에서 마지막으로 들론곳은 모모미술관은 녹슨 철재 벽면과 높은 천장을 받치는 나무 구
조물이 옛것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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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안에선 삼례 예술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 걸리고, 문 앞에선 언제까지고 이곳을 지
키겠다는 듯 태권 V 조형물이 방문객에게 든든한 어깨를 내민다. 그리고 책공방 아트센터에선 책 만
드는 기계 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활자가 공간에 가득하다. 기름 냄새 속에서 탁탁탁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이곳에서 직접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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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책을 만드는 곳 반대편에는 나무의 시간처럼 묵묵히 소임을 다한 연장들과 한 편의 시 같은
목가구가 있는 김상림목공소가 있다. ‘어느 날,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하나, 둘
이파리를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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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소 앞에서 방문객을 맞는 시구처럼 삼례문화예술촌에선 걸음을 뗄수록 사람은 하나의 나무가 된
다. 곡식을 빼앗기던 아픔 의 공간에 반창고가 되어준 예술. 역사 의 벌어진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고
있음을 유랑자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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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는 사통팔달의 고장이다. 삼례우체국 네거리에서 인근지역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 이리 가면 이
리(익산의 옛 지명), 저리 가면 전주, 고리 가면 고산, 그리 가면 금마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조선시
대 삼남대로 최대 역참지가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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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정보통신의 중요성 때문에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의 총지휘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암
튼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안고 삼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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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cafe.daum.net/b2345/9t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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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81-13 (070-8915-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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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향이지만. 가본적이 없는곳 문화예술촌..
꼭. 가봐야 될것같네요.
그리고 담아갑니다
네 문화 예술촌은 생각보다는
아기자기한 곳들이 많습니다.
되도록이면 주말을 이용 하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볼곳들이 많거든요..
가까운곳에 이런곳이 있었군요, 한번 다너와야겠어요,,자세한 설명도 좋네요
감사 합니다.
가까운 곳이면 산책 삼아서 함 다녀 오세요.
참고로 4km정도면 물 한병들고 운동삼아서 걸을만 합니다.
왕복 1만보 이내요.
간간히가볼만합니다
그렇군요. 네 처음엔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돌아보니 의외로 알차다는 생각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