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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품으로 프랜시스 J. 사이저
1장 부인할 수 없는 부르심
어떤 종류의 직업을 생각하든지 거기엔 항상 주님이 보였다. 법관을 생각해 보더라고 ‘성경의 원리대로 사람의 권리와 가치를 수호하며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하는 마음이 들었고, 의사가 될까를 생각해도 내게 떠오르는 건 온통 나를 더 가까이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장뿐이었다.
물론 이런 일들도 대단히 가치있고 훌륭하지만 주님께서는 날 다른 길로 부르시는 듯 했다.
하늘의 사냥개 - 마음의 소리에 순종하기까지 내 안에 평안이 없었고, “가까이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초대 앞에 내 의지를 굴복시키기 전에는 영혼의 안식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종교란 방치될 때 메마른 의식으로 전략한다. 종교 그 자제가 목적이 될 때 인간과 하나님 모두가 비인격적인 존재들로 변한다. 그러나 끈덕지게 쫓아다니며 두드려대는 하늘 사냥개의 부르심에 용감히 귀를 기울일 때 욥이나 요나처럼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시편 139편에서 다윗이 고백했던 그대로 주님 앞에 부르짖게 된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믿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괴롭기까지 두드려대는 부르심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들은 영혼의 귀로 하나님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으며, 삶의 맥박에 손을 얹을 때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주님의 피를 느낀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내가 그랬듯이 그들도 그들의 삶이 자기보다 크신 분의 소유라는 사실 앞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뜻이 결국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에 대한 응답이란 비밀을 비로소 깨닫게 되리라. 주님의 부드러우면서도 집요한 부르심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적하고 계신다. 하늘의 사냥개는 풀려졌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무도)멸망 않기를”(요3:16)갈망하고 계힌다. 왜냐하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요15:16)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만남 – 만일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가 심히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만나거든 하나님께 감사하라. 나는 하나님을 향해 울며 몸부림쳤다. 그러던 중 무슨 일이 일어났다.
위대한 환상을 보았거나 밤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형체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과 평안이 내 속에 들어왔고 겉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삶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리란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현 상태에 만족할 수 없고, 그 이상의 무엇을 간절히 원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힘, 재능,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 하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이 필요하다. 바로 그 순간, 즉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런 조건 하에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를 터치한다.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겉으로 드러내실 때 더 이상의 말이나 찬양, 혹은 그 어떤 의식도 필요 없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 앞에 자신을 낮추고 침묵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육체가 개인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떠난다. 왜냐하면 그의 영광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날 때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에 주목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님께 더 많은 관심을 돌려야 한다. 표적과 기시가 놀랍긴 하지만 이런 일은 그분의 임재를 가리키는 징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장 청사진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해 보여주신 양식은 구약시대뿐 아니라 오늘날도 유효하다. 사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예배하는 장소를 짓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짓는 일이 곧 우리 삶을 통해 주님께 영적인 삶을 지어드리는 일인 것이다(고전3:16). 모세의 성막 가운데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과 점점 더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거룩함으로 안내하기 위해 하늘의 건축자께서 우리에게 남겨 놓은 청사진이다.
모세의 성막 –
하나님께서 성막 구조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소원은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와 함께 있고자 함이다.
뜰로 들어가는 문이 동쪽 끝에 하나만 나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어떤 지파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모두 똑같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번제단 –
단이란 단어는 “높이 들린다”는 의미가 있고, 그 중요성은 요한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말로 확인된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물두멍 –
커다란 둥근 대야가 낮에는 반사경이 되어 씻으러 나오는 제사장들에게 돋보기 역할을 했다. 제사장들은 거기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죄 된 본성을 씻어야 함을 상기했을 것이다.
정금 등대 – 등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밝혀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진설병 상 – 진설병이란 단어는 얼굴의 떡 혹은 임재의 떡을 의미한다.
금 향단 – 향은 항상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를 뜻함
성막 구조 – 성막은 금으로 싼 48개의 널판과 96개의 은 받침으로 구성
성소는 길이가 20규빗 폭이 10규빗, 지성소 가로세로 10규빗으로 만들어졌다.
언약궤 – 하나님의 임재를 장엄하게 표현하며 성막에 있는 모든 기구들 중 가장 성결하다. 히9:4절은 이 속에 세 가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만나, 지팡이, 돌판.이 들어 있었다.
속죄소 – 속죄소의 “속죄(propitiation)”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이는 우리의 죄를 속하는 피라는 의미다. 만일 속죄소 뚜껑을 열어 제친다면 거기에는 율법이 작동하게 되어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곧 죽음을 뜻한다. 속죄소라 할 때 ‘소’는 앉은 자리를 말하며 여기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피 뿌림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제하여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죄를 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오직 한 분, 참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대해 그리고 그의 율법에 대해 범한 죄의 대가를 치렀다.
3장 문 밖에서
앉은뱅이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의 대표이다.
문을 통해 하나님의 뜰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로의 여행에 있어 출발점이다.
교회 가운데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에 눈이 감긴 채 하루하루 먹을 빵 부스러기를 구하는 앉은뱅이처럼 앉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실체가 아닌 모조품, 그것도 그릇된 모조품에 익숙해져 버렸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을 단지 빵을 건네주는 일로 전략시키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찮은 대용품에 불과하다.
진짜를 향한 굶주림 –
구걸하는 자가 되려거든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목말라 나아가라. 포기하기를 거절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상을 주셨다. 하나님을 향해 굶주리고 하나님이 주실 기업을 끈질기게 요구할 때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문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라고 가르친다. 무엇이 우리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도록 하는가? 간절함과 배고픔, 그리고 강력한 중보다. 이런 것들을 통해 돌파구가 열린다.
어둠에서 나와 –
헬라어에서는 “무지”와 “어두움”을 뜻하는 단어는 같다. 진리를 모르면 어둠 속에 사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어두워진 마음을 회개하고 진리의 빛 가운데 살자. 그러면 마음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오고 하나님의 임재로 이끌림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문이다.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에 들어갈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오며, 믿음의 행동을 통해 문에서 주님을 만난다.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터치가 그 동안 문 밖에서 지냈던 모든 날들을 하찮은 것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멀리 계시며 이상주의적인 관념에 불과했던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내 삶에 실제적인 분이 되신다.
너무도 위대한 높으신 분이 이제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변한다. 하나님과 만날 때 그 임재의 세계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된다. 주님과 가깝게 만나는 중생의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열어 준다. 이런 새로운 감각이 열리면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주님과의 관계는 이제껏 가졌던 다른 어떤 관계와 비교할 수 없는 흥분된 경험이 된다.
4장 중대한 결정(번제단)
번제단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놋으로 만들어진 이 단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태우기 위해 그곳에 놓여 있다.
죄 없는 어린 양의 머리에 안수할 때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양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대신한 양 덕분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롭게 된다. 번제단은 성막의 입구를 마주 보며 뜰에 놓여 있다.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감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원죄 –
사람은 세상에 나올 때부터 선천적으로 이기적인 경향을 띠며 이로 인해 다양한 심리적인 특성 및 몸의 질병과 약한 부분을 가지고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아주 사랑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원죄에 감염되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 천천히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죄에 대해 잠들도록 속아왔고, 어느 덧 자신의 죄가 무언지조차 모르도록 길들여진 죄인이 되고 말았다.
구원 –
침실에 무릎을 꿇었다. 난 흐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행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다. 그 순간 그분이 나와 함께 방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의 임재와 평안이 울고 있던 나를 덮었다. 주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약점과 한계 속에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용납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거룩함이 내 안에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주께서 우리를 주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으로 부르고 계신다. 우리 삶에서 죄악은 끊어져 주님께 영원히 맡겨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위해 신부를 준비하시되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게 하신다. 정결하게 하는 심판의 불은 육과 영을, 빛과 어둠을, 의와 죄를 나누고 분리하기 위해 역사하고 있다.
죄를 짓는다고 우리가 돌아 맞아 죽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삯은 여전히 사망이다. 우리의 죄가 다뤄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공급은 끊어질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위에 세워져야 한다. 결코 사람 위에 세워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기초를 두어야 한다.
원수를 이기는 능력 – 바깥뜰은 죄가 사함 받는 곳이며 동시에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이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을 때 죄와 죽음, 그리고 악에 대한 승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희생과 그 보혈의 능력을 믿는 우리 모두는 이제 죄와 원수의 저주로부터 자유하고 보호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보혈로 간청함은 우리가 주님의 자비하심만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의 보혈은 악에 대해 기도할 때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예수께서 담당한 죽음의 희생은 어둠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증거한다.
5장 갱신(물두멍)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으로 우리 인격의 결점과 필요를 위해 또 다시 한 방법을 예비하셨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물두멍이 바로 그것이다. 피가 십자가를 말한다면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피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을 가리킨다면 물은 우리의 상태를 말해준다. 비록 예수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고 여김을 받았지만,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더럽혀져 있고 오염된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물두멍을 제공하시고 우리로 씻게 하신다.
물두멍은 마음을 정결케 하는 장소이다. 물두멍은 육체에 거하는 더러움을 드러내고, 우리를 씻기고 새롭게 하여 영으로 성소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킨다. 우리가 죄된 습성과 악한 욕망들을 극복하려면 성령이 필요하다.
죄는 수치심을 가져오고 수치심은 거짓 자아를 만들어낸다. 상처 받은 사람은 온전해지기 위해 잘못된 방법들을 강구한다. 거짓된 자아는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죄로부터 비롯된 형상을 갖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의 권세와 능력을 그 속임수와 함께 파하셨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5). 거짓된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함 앞에 굴복한다. 버려졌다는 느낌, 거절감, 불안정, 자기 증오와 같은 부분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의 물로 씻을 수 있다.
물두멍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감당할 만큼 충분히 크다. 물두멍을 채우기 위해 하늘부터 내려오는 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공급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결코 다함이 없다.
우물가의 여인 –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점점 변화시켜 가신다. 그 변화시키는 과정을 보면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초정을 통해서이다. 목표는 여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눈 속에 담긴 깊은 우물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부분을 자신이 채우고자 헛되게 살았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한다. 용서와 사랑과 주님을 감싸고 있는 생수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가족으로부터 거부당할 때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무능함을 통해 능력을, 연약함을 통해 강함을, 왜소함을 통해 위대함을, 묶임을 통해 자유를 만들어내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복음에는 우리의 죄를 무효 처리하는 장치뿐 아니라 죄의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 구속의 길도 포함되어 있다.
6장 은사 (정금 등대)
거룩함의 본질 – 바깥뜰이 죄를 제거하는 장소하였다면, 성소는 거룩함을 이루는 방법을 보여주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주의를 지지하지 않으신다. 율법주의는 종교적인 영의 표현이고 하나님의 커다란 적이다. 종교의 영은 현재 그 종교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죽이는 일, 그 무엇이라도 하리라.
성소의 성격을 이해할 때 거룩함으로 가는 길이 드러난다. 성소는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은사를 부여하는”장소이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은사로 아낌없이 부어주신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받을 수 있다. 앤드류 머레이는 “거룩함은 공의와 사랑이 멋지게 결합된 하나님 존재에 대한 가장 놀라운 비밀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장 핵심적인 성품은 거룩함이다. 그분은 거룩함을 뿜어 내신다. 그가 우리를 터치하실 때 우리가 거룩해진다. 특별히 그 이름에 거룩하다는 칭호를 가지신 성령(거룩한 영)께서 하나님의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이들에게 거룩함을 날라다 주는 장소가 바로 성막의 성소이다.
찬란한 빛 –
기름부음은 권능을 가져오고 그 권능이 일을 감당하게끔 만든다. 멍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서진다. 능력과 기름부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우리 존재 속에 부어진다. 우리는 스스로 성력의 능력을 키울 수 없다. 이는 선물이고 하나님을 “더” 갈망하는 우리 안에 깃든다.
결론적으로 크리스천의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예수의 세례이고, 회개를 위한 요한의 세례와 구별되는 요소는 성령이다. 성령의 임재와 경험은 크리스천이 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자원하는 등대 –
그날 밤 우리 교인 중 120명이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 숫자는 오순절 다락방에 모여 있던 수와 정확히 같아. 이 숫자는 대단히 중요한데, 창세기를 보면 노아가 방주를 120년간 지었다. 이 수는 인간과 육체의 일이 끝나는 동시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기적의 능력 –
첫날 집회를 마친 후 주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내게 하주셨다. “고맙다, 프랭크. 내 백성들에게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보여줄 기회를 줘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게 기회를 주렴. 내게 고칠 기회를 주면 내가 고치리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열쇠는 이것이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으로만 마구의 멍에를 부서진다.
돕는 천사 –
1975년 성령께서 내게 아픈 사람을 고치도록 특별한 천사를 내게 붙여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천사의 이름은 라파엘이라 하셨다. “라파”라는 말은 치료를 뜻하고, “엘”은 하나님을 뜻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더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영적인 일에 대해 눈이 열린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의 천사들도 포함한다.
우리가 나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의 문으로부터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나간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우리 영혼의 연인이신 그분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 얻어진다. 하나님 안에 깊은 보물을 캐내기 시작하는 곳이 바로 이곳, 성막에 있는 성소이다.
7장 팀 플레이(진설병)
“진설병”이란 임재의 떡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소제로 드려졌다. 진설병은 열두 덩이의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이다.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게임의 목적 –
진설병 상은 연합과 평등이 인생의 최우선적인 가치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놓아두신 경주를 할 때 그분의 법칙과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러려면 인생에 대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목표와 정의를 세울 필요가 있다.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우리도 진설병의 임재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생명의 떡을 먹을 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품은 물러난다.
이기적인 성품 – 나르시즘은 삶의 시작부터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자기중심적인 성향이다.
남녀를 무론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하나님의 핵심적인 본질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형상과 성품을 따라 창조되었다. 주님은 그의 영을 우리 안에 넣으셨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때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을 어기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때 학대를 가져온다. 이는 자연법칙을 어기는 일이다.
생명의 양식 –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나은 만족을 주실 수 있다. 진설병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란 사실을 일깨워 준다. 사람이 형통하려면 우선 하나님을, 그 다음 동료 인간들을, 그 다음으로 땅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새 계명 –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다. 사랑은 결코 깨끗하기만 하거나 무균상태 가운데 있지 않다. 우리는 기꺼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 더러워질 각오를 해야한다. 사마리아인이 불행을 만난 사람을 자신이 탈 짐승 위에 태웠듯이 우리도 내 자리를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참된 인종적 평등은 사회적인 합의에 의한 외적인 태도가 내적인 헌신과 원칙으로 동화될 때 성취된다.
평등 –
하나님께서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시야를 넓히려 할 때에도 고정관념 때문에 그 사실을 보지 못했다. 고넬료를 만나는 사건(행10:17)은 그에게 계시적이었고 비로소 그의 눈이 열린다. 결국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셔서 인종의 벽이 없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시기에 이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님의 손을 움직인다.
룻 – 룻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왕의 족보 가운데 들어간다. 룻3:8절에 보면 룻이 타작마당에서 보아스 발치에 눕는다. 타작마당이란 이삭을 떨어서 겨를 벗겨내는 곳이다.
참된 사랑과 서로를 향한 배려가 있을 때 가려졌던 것이 벗겨진다. 서로에게 가려진 것이 벗겨질 때 실수로 오해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참된 사랑에는 허식이나 거짓이 없다. 타작마당은 겨와 알곡을 함께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혹은 더 못한 존재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로 드러나리라!
우리를 향한 궁극적인 명령은 이것이다. 우리도 성별되고 거룩한 떡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고 나눠지는 것이다.
경배 –
경배기도는 최상급의 기도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는 것이 경배의 기도가 갖는 목적이다.
향 –
향단에 드려지는 향은 향료를 사용되던 향기 나는 마른 수액이다. 가루로 빻으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향품을 통해 참된 기도란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도의 의미를 배우려면 주님의 임재에 들어가야 한다.
성소를 마무리하며 –
결국 성소는 깨어지는 아픔을 통해서 거룩해지는 장소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마치 하나님의 수술실처럼 우리에게서 육체를 잘라내는 장소이다. 인격의 참된 변화는 성소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이루어진다.
은사를 나르는 인격은 시험과 불 속에서 개발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성소로 들어가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인 수술을 행하시도록 허락해야만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죽고 주님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9장 그의 임재(언약궤)
휘장 – 성막 휘장은 사람에게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휘장은 말씀이 성육신된 사실을 말해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가장 높으신 주의 영광을 가리는 휘장처럼 예수님은 육신으로 가장 높으신 주님의 영광을 가렸다. 믿음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으면 비로소 “휘장” 너머, 다시 말해 예수님 인성의 “휘장”너머를 볼 수 있다. 믿음은 자연적인 겉모습을 초월해서 평범함 뒤에 가려진 비범함을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영적인 근시안 –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은 근시안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겐 극히 자연스런 반응이다. 성막 휘장의 비밀은 볼 눈이 있는 자들에게는 축복으로 열린다. 새로운 길이란 자아에 대해 죽는 길이다. 죽는 길이 곧 생명의 길이다.
순수한 선행 –
브랜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러브 스토리이다. 용서는 이미 주어졌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진정한 사면이고 완전 무료이다.”라고 말한다. 휘장 너머 들어가려 할 때 우리의 초점은 그에게 맞추어야 한다. 휘장 너머에는 오직 주님만이 계시다. 그분밖에 의지할 아무도 없다
.
언약궤 –
언약궤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핵심적인 열망을 상징하며, 성막에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특별하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만들라고 명하신 것도 바로 이 언약궤이다. 언약궤는 그리스의 본질을 상징한다.
초월성과 내재성 –
하나님의 임재의 궤는 우리의 생명줄이다. 우리는 그와 접촉해야 한다. 그 임재를 좇아가는 일이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의 임재에 거함이 곧 생명이다. 신자의 삶을 구별시키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다. 임재의 현현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일가 살고 있는 차원으로 뚫고 들어오심으로 우리가 그 임재를 감지하고 만질 수 있음을 뜻한다.
임재는 찬양과 경배 중에 온다. 그 임재는 사람 가운데 거하면서 흡수된다. 임재 가운데 머물 때 사람들은 임재의 진수를 흡수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입었듯이 우리도 거룩함과 능력과 은혜로 빛을 발한다.
쉐키나 –
시내산에 머물렀고 성막의 속죄소 위에 머물렀던 것이 바로 이 쉐키나 영광이다. 때때로 겉으로 보이는 임재는 구름의 “빽빽한”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영광, 즉 카봇이라 일컫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가설 때 신을 벗어야 한다.
카봇이란 단어는 “무게”란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무게 아래 사람은 서지도 움직일 수도 없게 된다.
10장 부르심의 회복(속죄소)
속죄소를 만들 때 나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는 인간이 개입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의 신성만이 관계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속죄소는 성막 기구 중 최종적인 것으로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심판의 보좌가 긍휼의 보좌, 즉 속죄의 보좌로 바뀌는 사건을 상징한다.
속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은 속죄소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속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다 치렀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죄가 단순히 덮어지거나 용서되기보다(물론 이것도 사실이지만), 면제되고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이제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빚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속에서도 사라졌다. 우리에게 남은 기억 유일한 기억은 주님의 커다란 긍휼하심에 대한 감사이다.
만남의 장소 –
하나님께서 속죄의 장소 즉 긍휼의 장소에서 우리와 만나시겠다고 참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깨지고 회개하는 심령을 가진 죄인들과 만나신다. 하나님께서는 깨지고 회개하는 심령을 가진 죄인들과 어떻게 만나주셨는가?
⓵ 베다니의 마리아 : 예수님께 많이 탕감받을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적게 탕감받을수록 적게 사랑한다는 성경적 원리는 베다니의 마리에게 적용된다. 주님은 마리아를 건강과 치유의 자리로 불렀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 또 한 여인으로 존중해주셨다. 자신의 유익을 유해 그녀를 이용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주님은 한 순간에 그녀의 정욕을 열정적이고도 엄청난 사랑으로 바꿔놓았다.
⓶ 막달라 마리아 : 빈 무덤은 신약의 지성소이다. 피에 젖은 자리 양 끝으로 두 그룹은 서로를 마주보며 새롭게 마련된 “속죄소”를 응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속죄소이고 하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장소도 바로 이 새로운 속죄소이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인류를 위해 단번에 새로운 속죄소위에 뿌려졌다. 그리고 영생에 대한 밝은 미래를 열고 계신다.
⓷ 요셉 : 배신의 아픔은 뼛속 깊이 스며든다. 가장 친한 친구가 등을 돌릴 때,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게 될 때 사람은 참으로 황폐해진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배반했다고 잘못 인식하게 된다면 치유받기 힘든 상처를 안게 되는 것이다. 요셉은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수고한 땅에서” 창성케 되는 복을 상으로 주셨다. 이는 사단에 대한 요셉의 승리로 확대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적이 다스리던 땅에서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탕자 – “먼 나라에 가서”란 표현은 은유적으로 죄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결국 우리가 잘못되었고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드디어 돌이켜 집으로 돌아온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한 가지 메시지는 이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에 근거한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근사한 선행을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복음을 값싸게 팔아넘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거짓된 관념이 우리를 그에게서 갈라놓는 것을 묵과하실 수 없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꺼지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장소이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주께 나아오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이 항상 팔을 벌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속죄소는 부르심이 회복되는 장소이다.
11장 연합(지성소)
이곳은 우리의 마음이 신적인 만남에 매혹되는 장소이다. 숨 막힐 듯한 향기의 유혹은 몇 날이라도 또다시 주님만을 좇아가도록 붙잡는다. 비록 희미해진다 할지라도 사랑의 놀라운 기억은 시간을 넘어 남아 있다. 때 묻지 않은 이 기억은 또 한 번이라도 그 향기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은 욕망을 남긴다.
휘장 너머는 성결한 예식으로 열리는 세계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 일어난다. 거룩한 결합의 장소이다.
결혼 –
결혼예식은 내적인 사실을 겉으로 공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내적인 맹세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히 서로에게 헌신하겠다는 언약이다. 사랑의 관계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 그들은 독특한 사랑의 끈으로 묶여진 하나라고 세상을 향해 말한다.
결혼은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다. 마찬가지로 참된 사랑 역시 실제적이고 또한 영적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주는 것이다. 사랑의 유일한 소망은 상대방이 기뻐하고 만족스러워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며 그 보상은 사랑받는 대상이 채움 받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온다.
지성소로 들어갈 때 세상의 다른 욕망들은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된다. 휘장을 뒤로 하며 이제 주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다. 잠자던 열정이 깨어나고 발걸음은 그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이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두 헛되다는 깨달음 가운데 마음이 온통 그로만 꽉 차있는 이상 의미 있는 것이란 없다.
열정 –
마이크 비클은 인간과 예수님이 얻을 이중적인 기업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우리의 기업이 정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기업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영혼의 허전함과 그리움을 채울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오직 그분만으로 채워지게 만드셨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으로만 충만해지실 원하신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문을 열어 가장 거룩하신 그 분의 존재와 성품 속으로 들어갈 때 그를 더 많이 갖고 싶다는 열망 외에 다른 것은 존재 의미가 없다. 특별히 성소에 머무르고 있는 모두를 향해 부르고 있는 부르심이 이것이다.
혼인 관계를 생동감 있고 건강하게 유지하는 비결은 혼인한 두 사람이 계속 변화하며 성장하는 일에 있다. 성적 관계는 의미나 모습에 있어 창조적이며 달라져야 한다. 기계적으로 하게 될 때 서로에 대한 경이로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개인적인 필요에 대해 관심을 둘 때 결혼생활 가운데 신선한 생동감과 생기가 넘치게 된다.
신랑과 신부 –
신자들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혼인관계로 묶여있다. 신랑 신부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남자들은 성의 개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남자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한 지체라 말할 때 이는 예수님과의 선택된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려면 예수님의 심장에 기대야만 한다. 주님의 박동과 움직임을 아는 것이 그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열쇠이다. 그분은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우리의 온전한 충성을 얻으신다. 신랑이 구애하여 신부를 얻듯이 예수님도 그의 교회를 향해 사랑을 호소하신다.
사랑하는 주님의 방에 머물 때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존재 깊숙이 스며들고, 양념이 배듯 사랑하는 이의 냄새와 향취가 우리에게서 난다. 주님의 마음 가운데 완전히 빠져버린 우리는 신의 사랑에 더욱 갈급해진다.
영혼의 르네상스 –
참된 생명의 양식은 주님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영혼은 사랑과 애정과 공동체를 통해 회복된다. 주님의 단 한 번의 터치, 그의 임재 안에서의 단 한 순간, 그의 단 한 번의 속삭임이 우리의 갈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12장 우리 가운데 있는 성막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으로 형상화되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구약에 성막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 인간 예수 속에 나타났다. 하나님은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을 그의 거처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심으로” 성막은 신약에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의 성육신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을 본 것이다. 하나님께 있는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반영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성막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기 위해 지금 교회 가운데 행하시는 일 중 하나는 종교를 죽이는 것이다. 알맹이 없이 껍질만 남은 종교를 싫어하시며, 자기 의가 내 뿜는 교만한 영을 몹시 미워하신다.
종교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주었고, 어떤 율법이나 규칙, 혹은 전통이나 현상유지를 존중하는 시대풍조에 순응하면서 마치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을 낳았다. 그리고 겸손한 체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성령을 죽인다. 왜냐하면 성령을 마음대로 컨트롤하려 하기 때문이다.
행함의 종교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할 수 없고, 단지 더 많은 육적인 일을 만들어낼 뿐이다. 성령께서는 성령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움직이신다. 성령으로 사는 삶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다.
앞서 달려가는 선구자들 – 유월절에 희생의 양을 선택하는 일이 바로 대제사장의 임무였고, 하나님께서 임명한 참된 제사장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갈 희생의 양을 지목했다.
주님은 우리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변화시키려 하신다. 창세기는 멜기세덱이 BC 2085년 무렵 살렘을 통치하는 의의 왕이었고 아브라함을 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14:18-20). 주목할 점은 아론의 제사장직은 한정적으로 구별된 반면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예수님처럼 “영구적인” 특성을 지닌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심을 맞아드리기 위해 요한과 엘리야의 영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선구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오심을 예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의 재활용장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에 응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올 탕자들을 찾고 계신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음을 다해 내게로 돌아오라” 예수님께는 지금 그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는지를 알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며, 거의 다 꺼져버린 잿더미를 휘젓고 계신다. 주님은 당신의 열정과 은사를 불일 듯 일으키실 것이다.
당신도 모세처럼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일을 위해 숙성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추수를 위해 추수할 낫이 되라고 탕자를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온전해진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그물을 버릴 때 삶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발 밑에서 지질구조적인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새로운 관심,새로운 우선순위, 새로운 비전이 제시되며, 주님은 값비싼 진주가 된다.
휴거, 환란,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 – 가장 중요한 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이 마지막 때 용사들을 통해 성취될 것이란 사실이다. 추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를 위해 거두어진다.
선구자의 특성 –
지성소를 향해 감히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앞서 달려가는 선구자와 같다. 그들은 개인적인 관심에 대해 죽고 오직 주님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한다. 그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관심사이다. 그들의 몸은 참된 성전이 되어 주의 임재를 담는다. 선구자는 하나님이 거룩함을 지닌 새로운 법궤들이다.
마지막 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의 말에 굴복하는 종교적인 전통의 압박에 대항한다. 그들은 순종을 이해하며 권위를 존중하지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난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다
성령께서 성막 안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준비시키고 물러내실 때 마귀는 떤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소멸하는 불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다.
주님의 마음에 사로잡혀 그의 임재로 변화받고 유다의 사자처럼 나아가는 교회 말이다. 첫 번째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양을 지목했다면, 헌신된 신자들이 전신갑주를 입고서 유다의 사자되신 주님을 가리키리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날 그때에는 양이 아닌 사자로 오신다.
13장 영광의 구름
하나님께서 모세에가 한 일에 흡족해 하셨고, 영광의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 보여주심으로 모세와 그 백성들에게 보상하셨다.
이 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되고 주를 위해 헌신된 삶을 보상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 안에서 순종하며 살 때 우리 삶을 인도하고 지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또한 그의 머무시는 임재가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중요한 의미도 있다.
마리네이드(양념에 재우기) -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잠길” 때 하나님의 맛이 우리에게 밴다. 주님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묻어난다.” 모세의 거룩함이나 또 우리의 거룩함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로 비롯되지 않는다. 거룩함, 즉 “카 닷”이란 단어는 분리되고 끊어낸다는 의미로 세속과 부정함에서 떼어놓으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떤 종교처럼 옷을 다르게 입는다고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죄의 확신과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인격을 반영할 때 참된 거룩이 성취된다.
제사장 나라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출19:6)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교회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2:9)으로 구별될 때 성취될 것이다.
신약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성막을 통해 걸어 들어가 높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 더 이상 한사람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지 않고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가장 높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령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무는 구별된 성막들이다.
스미스 위글즈워스의 인생에 일어났던 놀라운 일화가 있다. 1992년 그가 뉴질랜드에서 부흥사로 사역하고 있었을 때, 열 한 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모임을 가졌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임재가 방을 가득 메웠고, 곧 하나님의 영광이 극도에 이르렀다. 빛은 너무 밝았고 열기는 너무도 강렬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모두 방을 떠났고 오직 스미스 위글즈워스만이 쉐키나 가운데 계속 머물렀다. 그는 성령에 사로 잡혀 거룩한 불로 빛나고 있었다.<조지 스토몬트, 스미스 위글즈워스 :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1989)
맺는 말 –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열심히 그를 좇도록 교회들을 준비하고 계신다. 많은 기회의 문이 열리되 하나씩 열릴 뿐 아니라 한꺼번에 열릴 수도 있다. 만일 교회가 이제껏 알았던 것 이상의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면 말이다. 주님을 좇으라는 부르심은 거룩하게 구별되기를 소원하는 모두를 향해 외쳐지고 있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막을 온 땅에 지어 나르도록 부르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의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주님을 따르라는 놓칠 수 없는 목소리에 그의 백성들이 귀기울이기를 원하셔서 부르고 계신다. 주님은 세상 것을 비우고 영원한 것으로 채우길 원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매일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하늘의 사냥개처럼 주님은 우리를 추적하시며 그를 좇아오라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를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실 수 없으며 삶을 통해 주님 좇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분명한 길을 제공하신다.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좇는 일이, 삶의 다른 어떤 우선수위보다 주를 가장 먼저 두는 삶이, 주의 거룩한 성전에서 주님만을 예배하는 일이 제사장 된 모든 신자를 향한 부르심이고 분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안일보다 마리아의 기도하는 삶을 더 인정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의 목적과 이유가 주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여기신다. 하나님을 분깃과 기업을 삼는 삶은 다른 어떤 백성들보다도 우리를 부요하게 만든다.
에필로그 :
복음서기자로서 요한 했던 최고의 공헌은 주 예수님의 신성을 부각시킨 점이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셨던 예수님과 함께 걷고, 먹고, 말씀을 나누었지만,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것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믿음을 요한의 눈이 증거했다.
말씀의 계시는 인간의 영혼의 눈을 열어 준다. 하나님께로 듣기만 했던 말씀을 이제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막을 따라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길을 “보게”된다. 이전과는 다르게 진리를 따를 수 있고, 우리가 항상 원했었던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 다시 말해 이제 당신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과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여러분 모두가 요한처럼 계시를 볼 수 있는 눈이 크게 열려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붙잡게 되기를 바란다.
☞ 출처: Daum Cafe, 목동 천사 (http://cafe.daum.net/angelone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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