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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갇힌 불꽃
 
 
 
카페 게시글
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박남준 시 모음
동산 추천 0 조회 264 13.03.02 21:2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박남준 시 모음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아름다운 관계
치명적인 상처
참을 수 없는 슬픔
슬픔
먼 길에서 띄운 배
별이 지는 날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한 송이의 꽃도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젊은 느티나무
바람에 실어
별빛에 실려
몽유별빛
지친 어깨 위에 작은 별
기다림이 지는 밤
분열증세
한 걸음의 발자욱도 부르는 노래가 되어
그대라 이르는 화두
개울에서 세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슬픔도 없이
가슴에 병이 깊으면
멀리 있는 것이 마음에 자리잡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떠나고 오랜
흰빛에 갇혀
미루나무가 쓰러진 길
가을
억새
유목의 꿈
떠도는 떠도는
눈길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
모든 자살은 용기가 있다
겨울 편지를 쓰는 밤

* 박남준 작가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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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숫가락 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
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 마련
한 돈 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 매달
려 있었다지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아름다운 관계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치명적인 상처


별똥별 하나 소원보다 먼저
별보다 먼저 상한 마음이 쓰러진다
한순간 삶이 저렇게 져 내리는 것이겠지
흔들리며 가기에 짐이 되었던가
발목을 꺾는 신음처럼 뚝뚝 풋감이 떨어지는 밤
저 별 저 감나무
그 어떤 치명적인 상처가 제 살을 베어내는가
길이 끊겼다 다시 나는 발등을 찍는 바퀴에
두 발을 우겨넣는다
이것이 끝내는 치명적인 상처를 부르리라
자라난 상처가 그늘을 이룬다
더 깊은 그늘로 몸을 던져야 하는지
아픈 꿈이 절뚝거리는 몸을 끌고 꿈 밖을 떠돈다


 

참을 수 없는 슬픔


눈물처럼 등꽃이 매달려 있다
모든 생애를 통하여 온몸을 비틀어 죄고
칭칭 휘어 감어 오르지 않으면
몸부림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무게로
다만, 등나무는 등꽃을 내다는게다
그것이 절망이다 그렇다

등나무는 자학성 식물이다

 

 

슬픔


흰 종이 위에 새라고 쓰고 나는 세상의 흐르는 강물
들이 그러했듯이 별을 향해 걸어갔다. 떡갈나무 작은
숲을 지나 소나무숲의 그늘 아래 내 어린 날개를 묻었
던 애장사리. 숲은 스스로 깊어져 길을 버리고 길이
끝난 곳에 먼저 날아간 새는 별이 되었을까 나는 아직
기억상실증이므로 잊혀졌는데 병으로 얻은 슬픔은 내
별의 중력에 자유로울까 더 가벼워져야겠는데 기다려
야 하나 날아가야겠는데 그때, 무덤 위 와불처럼 피어
난 도라지꽃 한 송이 아 - 내 날개, 처음 같은 도라
지꽃 그 곁에 누우니 비로소 강물은 흐르고 돌아오는
가 바람을 타고 달려오는 새떼 새떼들. 이제 날개를
돌려줘

흰 종이 위에 새 - 도라지꽃이라고 쓰자 도라지꽃
한 송이 별을 따라 흘러간다


 

먼 길에서 띄운 배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 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었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끝에서 발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 눈 나리고
궂은비 뿌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그 강엔 자욱이 물안개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날 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흩어져
띄워 보낼 마음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요

흘러가겠지요
이미 저는 잊혀진 게지요
아 저의 발길은 내일도
배를 띄운 강가로 이어질 것이어요

 

 

 

 

별이 지는 날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그가 떠나서만이 아니고요
산다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빨래를 널듯 내 그리움 펼쳐
겨울 나뭇가지에 드리웠습니다
이제 해 지면
깃발처럼 나부끼던 안타까움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을까요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별이 뜨고 별 하나 지는 밤
언제인가 오랜 내 기다림도
눈 감을 테지요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 일도 어쩌면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지
후두둑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
진다 덧없다 덧없이 진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다

모진 바람불고 비,
밤비 내리는지 처마끝 낫숫물 소리
잎 진 저문 날의 가을 숲 같다
여전하다 세상은
이 산 중, 아침이면 봄비를 맞은 꽃들 한창이겠다

하릴없다
지는 줄 알면서도 꽃들 피어난다
어쩌랴, 목숨 지기 전엔 이 지상에서 기다려야 할
그리움 남아 있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너에게, 쓴다


 

 

한 송이의 꽃도

 

한 포기의 풀을 볼 때 생각했습니다 한 포기의 풀이
꽃을 피울 때 가슴 쓸어내렸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저처럼 꽃피워 지는 것이라면 꽃으로 말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차 피어나는 꽃

꽃 꽃 꽃 꽃 꽃
기다림 끝에 피어납니다
그 사랑으로 피어납니다
가슴 저미는 그리움
그리움 가득 없이는
한 송이의 꽃 피울 수 없습니다
열매 맺지 못합니다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내리듯
구멍가게 셔터문이 내려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도 이젠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리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 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발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가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발 실을 수 없겠다.

 


 

젊은 느티나무


지난가을의 잎들
온전히 떨치고 나서야 봄은 온다
세월의 나이테가
한 줄 한 땀 켜켜로 쌓여갈수록
이 땅, 사람의 곁에 내린 뿌리들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
무성한 가지들 부끄러움 없이 곧게 뻗고
푸르게 푸르게 잎들을 키워내서
품안이 너른 그늘도
드리워야 한다는 것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추운 겨울 건너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랜 가뭄 이겨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큰바람 앞에 꺾이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범람하는 홍수를 막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돌아보면
아득하지 않은 길이 어디 있으랴
어질병의 현기증 일던 모진 시련 없었으랴
말문이 막히고 기막히던 일들 이루 말할 수 있으랴

여기 이 땅의 바람머리 언덕에 서서
나는 보았다
사람의 아이가 자라나서
아버지가 되어가는 일
세상의 한 하늘을 넉넉하게 받쳐줄
기둥을 세운다는 일이다
그것은 떳떳한 삶의 밥을 지어 나누는 집을 짓고
어둔 밤길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등불을 내건다는 일이다

처음 한 알의 씨앗으로
새싹을 틔웠을 때를 잊지 않는다
까치들이 둥지를 틀고
사람의 마을에 희망의 일들을 전하는
나의 이름은 언제나 젊은 느티나무
무더운 여름날 일하는 자의 아름다운 땀을 식히는
나의 나이는 하늘 아래 싱싱한 푸른 그늘의 나무

 

 

 

바람에 실어


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
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미는 아미
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
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 피워올리니 따듯한 불기가 간절하구려.

보고 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듯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노니 어디 한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별빛에 실려

 

겨울밤의 하늘에 별들
참 낮게도 내려와 빛을 뿌려요
저 맑고도 고운 별빛
내가 키발을 딛고 훠얼 훨 손짓하면
금세 다가설 것 같은 별 하나
당신의 환한 얼굴 실려왔어요

 

 

 

 

몽유별빛


별을 보며 길을 묻던 날이 있었다

반짝이는 것을 생각한다 어린 날에 달음질로 두근거리다
가까이 가면 이내 빛을 거두고 말던 사금파리나 유리 조각
깨어지고 부서진 것들이 반짝일 수 있다니 별처럼

무지개를 좇아 얼마나 숨차게 안타까웠던가 살아 있다는
일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의 거리로 아른거리며 달아난다
다는 신기루 같다 툇마루에 나앉은 햇살이 어느새 마당으로
내려선다 제 속에 지닌 수분을 남김없이 토해내기까지 형벌
처럼 매달린 빨래들이 좀처럼 평행이 되지 않는 외줄을 타며
가는 햇살에 몸을 뒤척인다

이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 삶의 구비구비에 이미 묻어
두었으나 아련한 것들이 몽유로 서성인다 그때마다 침엽의
숲속이 마른 바람에 젖어 잠겨간다 문득 풍경 소리 마당을
가르는 개울물 소리

날개 없는 것들이 비누 방울처럼 허공을 달고 반짝인다 모
든 것이 반짝이다니 쓰러진 것들이 구천 저자 거리를 떠돈다
떠도는 것들이 저물 녘마다 제 이름 부르며 별빛을 보고
길을 묻던 옛날을 더듬는다

 

 

 

지친 어깨 위에 작은 별


밤 깊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섶에는 저 높은 하늘의
작은 별들 동무 삼아주려는지, 지상으로 내려왔는지,
연록빛, 참 곱기도 고운 빛 뿌리며 밤길 훤히 밝혀줍니다.
반딧불 말이어요. 여기는 가시덤불이교요. 여기는 허방이에요.
낮은 어깨 위로 날아오르며 힘내요. 힘내요. 혼자가 아니예요.

지난 겨울 별똥별들 무척이나 떨어져내렸었는데····


 

 

기다림이 지는 밤


 

눈을 감았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첫 만남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신과의 이별이
첫 이별이어서도 아니고요
빈 방에 눅눅한 적막이 흐르고
꿈도 없이 무릎 꿇었습니다
이제는 잊자고 잊었었지요
무너지며 무너지며 어깨 들먹였었지요
산숲 가득 바람 불고
눈물 같은 비 젖어오는데
뚝 뚝 감꽃이 지는 밤
멀리 호랑지빠귀 소리가
아득해졌습니다
이제 사위어질지요
타고 남은 재로 다 타고 남은 재로


 

 

분열증세

 

푸른 별을 세던 밤이 있었던가
거울 앞에 섰는데 분명 낯선 얼굴 하나
딱 정확하게 깨졌는데 비명소리가 고통스럽지 않는데 
깨인 꿈도 그러할까 조각난 찢어진 만신창이의 누가 있었는데
별들은 붉은 것인가 뚝뚝 떨어지는 하나 둘 별들이 지는가


 

 

한 걸음의 발자욱도 부르는 노래가 되어

 

한 걸음의 발걸음도 그냥 뗄 수 없는데
한 걸음의 발자국도
부르는 노래가 되어 나오는데
노래했지요 꽃 피고 꽃 지는 일
더러 피지 못하고 피어오르던 꽃
지고 말았어요

다시 노래했어요
눈물 흐르는 일
흘러서 흐르는 일
흐르는데로 흘러 보내며
해 뜨고 해 지는 날로
눈을 감고 눈을 떴어요
무심코 발걸음을 떼고 또
그 길을 따라 걸었다는 것이지요

흰눈 내려 쌓이는 날
뒤돌아보니 하얀 눈길 위 도장을 찍듯
뚜렷이도 따라오는 내 발자국
아 길을 간다는 것, 산다는 것이
저렇듯 눈길 위에 발자국을 새기며
간다는 것이었는데

여기는 어디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제껏 살아온, 지나온 삶과
그 길 위에 내가 새기며 걸어왔을
무심한 발자국들, 참담하던 날
한 걸음의 발걸음도 그냥 뗄 수 없구나
저 무수한 길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
그 발자국마다에 실려오는
숨가쁜 땅의 역사

한 걸음의 발자국도
부르는 노래가 되어 나오는구나

 

 

그대라 이르는 화두 / 박남준


선암사 저녁 예불 운판을 친다 날짐승들아 그만 고단한 날개
를 접어라 목어를 친다 냇물의 고기들아 범종을 친다 산중의
모든 짐승들아 이 밤이 편안하거라 법고를 친다 떠도는 나를
않히고저 이는 번뇌로부터 마음을 끊고저 가슴은 북이 되어
울리네 두드려도 울어도 이 세상 그대라 이르는 찾을 길 없고
풀 길 없는 화두 하나 마음은 머리 풀어 구름처럼 헤매이네

 

 

 

 

개울에서 세수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개울가의 투명한 김발 손을
담그면 간밤의 꼬리에 긴 꼬리를 물고 뒤척이던 온갖 시름이
며 상념들 깜짝 놀라서 모두들 단숨에 줄달음 한다. 문득
손을 놓고 올려다본 하늘

세수라는 것, 내 마음의 얼굴을 명경처럼 맑게 해야 하는
것임. 그것일 터인데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나 오래 침엽의 숲에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감각을 곤두세운 숲의 긴장이 비명을 
지르며 전해오고는 했지. 욕망이 다한 폐허를 택해
숲의 입구에 무릎 꿇고 엎드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한때 나의 유년을 비상했던 새는 아직 멀리 묻어둘 수
없어서 가슴 어디께의 빈 무덤으로 잊지 않았는데

숲을 헤매는 동안 지상의 슬픈 언어들과 함께 잔인한 
비밀은 늘어만 갔지. 우울한 시간이 일상을 차지했고 
빛으로 나아갔던 옛날을 스스로 가두었으므로 이끼들은 
숨어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포자의 눈물 같은 습막을 두르고 숲의 어둠을
떠다니고 있다.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먼 길을 걸어서도 당신을 볼 수 없어요
새들은 돌아갈 집을 찾아 갈숲 새로 떠나는데
가고 오는 그 모두에 눈시울 붉혀가며
어둔 밤까지 비어가는 길이란 길을 서성거렸습니다
이 길도 아닙니까 당신께로 가는 걸음
차라리 세상의 길이란 길가에 나무곤

 

 

 

슬픔도 없이

 

한때 나는 의연했었다. 신령스러웠지. 바람을 잠재우며

숲의 고요를 피워내고 무지개를 드리운 개울의 생명수와

등 따뜻한 어미의 쉴 곳 주었으나, 이제 나는 온갖 쓰레기와

쓰레기와 또한 쓰레기더미와 시멘트 건물과 허리와 가슴과

팔다리를 자르는 아스팔트 도로와

꿈도 없이, 이제 나는 몇 그루의 나무와 몇 포기의 풀과

몇 마리의 산새와 곤충들 다람쥐 몇 마리 잠재울 수 있을 뿐,

그 많은 노래가 뛰어놀던 나의 그늘, 이젠 밤이 와도 불러줄

자장가가 없어. 다시 나는 더 이상 품안을 떠나갈, 그리움이

없어, 정말이지 이제는, 슬픔도 없어.

 

 

 

 

가슴에 병이 깊으면


먼산은 언제나 길 밖의 발길로 떠돌았으므로 상여처럼

돌아가는 길가, 등뼈 깊이 봄날이 사무쳐서 어지러운데,

두 눈에 장막은 일어 몸, 휘청이는데 얼마 만인가

마당 가득 풀들은 어느 새 저토록 자라났는지, 나
먼 길 떠나고 사람 손길 닿지 않으면 이내 저 풀들,
어두운 내 방 방구들에도 솟아나겠지.

풀을 뽑는다. 한 포기의 풀을 뽑는 일도 마음대로
쉽지

않아서 모질게 다져먹지 않고는 손댈 수 없다.
쇠별꽃 봄맞이꽃 꽃마리 개미자리, 서럽다. 꽃들이

피어난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것은 조금 크고

어떤 것은, 보기에도 안쓰러우리만큼 작고 깨알 같지만

어느 것 하나 눈물나지 않은 것 없어 이 짓이 뭐람,

이 짓이 뭐야, 한 웅큼 뽑았던 풀들 놓아버리고 주저앉아

마음 처연한데, 앞숲인지 들려오는 너 두견, 울부짖느냐

무너져내리는 새소리

 

 

 

 

멀리 있는 것이 마음에 자리잡으면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 멀리 있는 것이 마음에
자리잡으면, 이윽고 깊어지면, 무너져갈 뿐 아름다운
빛은 되어가지 않는다. 봄날의 꽃들 피어나고 작은

새들 저마다의 보금자리를 위하여 둥지를 틀어갈 때

눈들어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 어쩌자고 마음에

닿지 않는 것 없어, 하염없다. 하염없다. 눈물난다.

눈물난다.


 

 

아름다운 사람이 떠나고 오랜

 

변한 것은 없었지
사랑이 가버린 날에도 밤은 오고
새들은 은밀한 숲속에 또 그렇듯
저문 날개를 풀어놓겠지

늪을 찾아 떠나야겠어
망각의 늪이라는
그 늪에 빠지고 싶어
잊혀진 채 이미 잊혀진 채
나는 남았는데 나만 남았는데
산 위에 산 아래
길가에 도회의 낯모를 지나는
뒷모습에서 옆모습에서
강에 나가면 흔들리는
흔들리지 않는
수면의 파문에서 아 독약처럼 달고 쓴
절망 같은 소줏잔 속에서
너는 떠나지 않고
너는 보이지 않고

 

 

 

 

흰빛에 갇혀


혼자였나 옆이었나 그때 누가 있었는가
혼자였지 보이지 않는데 거대한 흰빛에 갇혀
혼자였나 숲이었지 흰 숲 흰 나무 흰 흰 푸른 새는
죽었는가
혼자였지 흰 산이었는데 혼자였는데 저 앞이었나

흰 벼랑 뒤였나
혼자였나 흰 길 끝이었는데 갈 길 없는 어쩌지도

죽지도 못한 채

 

 

미루나무가 쓰러진 길



꿈을 꾸었다 꿈을 꾸는 동안 바람이 불고 나무가 쓰러지고

큰비가 내렸다 꿈 밖은 아직 여전한데 쓰러진 나무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낯익은 길을 베고 저 세상의 길을 떠난다

잔 바람에도 미루나무는 얼마나 반짝이는 푸른 손짓으로

바람을 불러모았던가 나무가 누워 있는 동안 이 산길

미루나무의 노래는 다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바람의 나무,

바람의 손바닥들이라 부르던 저 쓰러진 나무와 다 버릴 수

없어 허리를 자른 나무들 사이에 나는 오래 망설인다

나무에 등 기대어 거기 스스로를 가두고 나무처럼 쓰러져

있다고 여긴, 나무가 쓰러지며 지워버린 한평생 저 허공중의

길과 내가 한때 쓰러졌다 여긴 이 길위에서 나의 오늘을

물어본다

 

가을


맴맴 푸른 하늘이 동그란 것은요
잠자리가 하- 그 붉은 고추잠자리가
자꾸만 그 하늘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죠 뭐


 

 

억새


꽃이 있었네. 하얀꽃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

바람 부는 들녘의 언덕에는 하얀 소복으로 바람 날리며

너울거리는 억새들의 잔잔한 한숨이 묻혀 있다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억새밭의 곁에 서면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렬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 


 

 

유목의 꿈


차마 버리고 두고 떠나지 못한 것들이 짐이 된다

그의 삶에 질주하던 초원이 있었다
지친 것들을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생각한다
한 꽃이 지며 세상을 건너듯이
산다는 일도 때로 그렇게 견뎌야 하겠지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때 머물렀던 것들이 병이 되어 안긴다
아득한 것은 초원이었던가
그렇게 봄날이 가고 가을이 갔다
내리 감긴 그의 눈이 꿈을 꾸듯 젖어 있다
몸이 무겁다
이제 꿈길에서도 유목의 길은 멀다

 

 

 

떠도는 떠도는


지난 밤 풀벌레 소리 들려오지 않네
노래하지 ?네 새들
새들은 어디 갔을까
먼동의 햇살을 타고 날아오른
새들 돌아도지 않고
나 어디에 서 있는가
취한 모 그만 곤한 잠 뉘려는데
떠돌아야 하나
치둥치둥 바람은
갈잎새 휘휘 돌며 눈발처럼 불어오고
돌아가야겠는데, 갈 곳 없는데

 

 

 

눈길


 

그 눈길을 걸어 아주 떠나간 사람이 있었다
눈 녹은 발자국마다 마른 풀잎들 머리 풀고 쓰러져
한쪽으로만 오직 한편으로만 젖어가던 날이 있었다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


쑥부쟁이 그 목 긴 꽃그늘이 바람결에 사위어가는 강길을 따라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랑을 보냈는가
짐승처럼 웅크린 채 한 사내가 울고 있다
언젠가는 사랑에 비하면 오늘의 상처는 턱없이 가벼우리라
쑥부쟁이꽃들 그 여린 꽃잎 가만가만 풀어 보내
사내의 물결쳐가는 뒷등을 잔잔히 껴안는다

 

 

 

모든 자살은 용기가 있다


눈물나더군. 더럽게도 아름답더군. 거기에 정말 숨어

있었는지. 쏟아놓았는지. 새싹들 솟아서 하루가

다르게 그늘을 드리워 가는지. 꽃 피워 가는지.

죽음의 문에 가까이 가면 그때마다 세상은 더럽게도

아름답더군. 눈물나더군. 어쩌면 저 작은 벌레 작은

새 저 작은 풀꽃들에 이르기까지 가만, 내게도

불새의 춤으로 화르릉 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지 몰라. 여태도 살아왔단 말인가.

정녕 그렇단 말인가. 으아 ― 무너진다 너는 자살할

용기도 없다 발악해봐 악악 악쓰고 있다

비참하게도 아직 숨 , 붙어 있다.

 

 

 

겨울 편지를 쓰는 밤


 

무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툇마루에 떠다놓은 물이 꽁꽁 얼음이 되는 날들도 있었다.
그 겨울 밤 문밖에 나서면
쩡쩡 거리는 소리가 들릴듯한 푸른 별들 부끄러워서
고개를 묻던 날들이 있었다.
반문처럼 그 별들에게 보이지 않는 길의 나침판을 묻기도 했었다.
불쏘시게로 쓰던 잔 나무가지들이며
소나무 잎들이 다 떨어진지도 십여일에 가깝다.
나무청의 나무들은 사흘이나 버틸 수 있을까.
새벽부터 구들장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채 이불을 둘러쓰고 미적거린다.
문밖이 훤하네 새들이 또 흉을 보고 있겠지.
결국은 일어난다. 금새 날이 꾸무럭 거린다. 심상치 않구나.
나무를 조금이라도 해야겠어.
갈퀴와 큰 자루를 찾아들고 앞산에 오른다.
노란 소나무 잎들이 어느새 저렇게 수북하게도 떨어져 내렸구나.
슬슬 갈퀴질을 몇번 하는데 소나무 잎새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
녹두알 만한 푸른 열매가 대여섯개나 보인다.
어디서 왔을까. 열매를 손에 들고 살펴보니 송진 냄새가 물큰 거린다.
무슨 나무의 열매일까. 어떤 새가 이 열매를 먹었겠지.
그리고 여기와서 실례를 했겠지.
새들의 튼튼한 뱃속에서도 살아남아 여기에 싹을 틔우려는 모양이구나.
그 씨앗들 다시 제자리에 놓아둔다.
나 여기 숲속에 살며 그간 나무 한그루 심지 않은 채 나뭇잎들을 긁어가거나
새파랗게 살아있는 나무들을 베어오지 않았던가.
내 한 몸 따뜻한 잠자리를 얻고자 그 나무들 깜깜한 아궁이 속에 들이밀고
불을 때며 살아 왔는데 새들은 나무들에 깃들어 둥지를 짓고 벌레들을 잡아

먹으며
이제 또 그 씨앗들을 옮겨서 숲을 키우려 하는구나.
갈퀴를 내려놓고 한동안 우두망찰로 앉아 있었다.
해가 뉘엿거린다.
너 뭐하니.
저만큼에서 직박구리가 꾸짖음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그래 나무하러 왔었지. 갈퀴나무 한짐을 해서 서둘러 내려온다.
툇마루에 앉아 담배한대 불을 당긴다.
뜰앞에 무성하던 지난 여름의 풀들이, 나무들의 낙엽들이 경배를 하듯 낮게

엎드린 채
다시 돌아올 거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길을 갈 수 있겠지.
돌아갈 수 있겠지.
새들이 돌아간 겨울 저녁 숲에 적막처럼 어둠이 깃든다.
편지를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올 겨울 길고 긴 편지를 써야겠다.
내가 나에게 써야겠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어찌 세상의 그리운 것들에게 떳떳할 수 있겠는가.
뉘우침의 편지를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이 겨울 밤,
밤새 세상을 하얗게 눈은, 흰눈은 내릴 것이다.
그 눈길위에 첫 발자욱을 새기며 걸어 편지를 전하러 갈 것이다.
그 발자욱을 따라 그리운 것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며 달려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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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시인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났다.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 등단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1990),
[풀여치의 노래](1992)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1995),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2000) 외 

산문집
[쓸쓸한 날의 여행](1993)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1998)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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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04 05:44

    첫댓글 감사합니다..

  • 13.03.06 20:19

    아름다운 관계...애송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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