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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레위기의 말씀 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레위 19,2)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성덕으로의 부르심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에 의해 “아버지의 뜻”으로 선포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테살 4,3)
그리고 이 부르심은 오늘 복음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행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기준은 신앙이나 종파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인이냐 이방인이냐도 아니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도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비 체험이나 관상도 아니요, 기적이나 예배도 아닙니다.
교리나 신심도, 신분이나 성공도, 부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뿐입니다.
특별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에게 해준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 4,20)
한편, 이 심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을 받은 왼편의 사람들이 어떤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적극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사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음, 곧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 4,17)
그런데 이 심판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베푼 이든, 베풀지 않는 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둘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가 자신이 행한 것을 모름은 마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에게 빠져 타인에게 무관심하여 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사랑을 베푼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서 온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베푼 것임을 말해줍니다.
전자는 자신에게 푹 빠져 어둠에 갇혀 눈이 멀어져 버린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이 사라지고 빛이 되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품위를 생각하며 >
오늘 독서 레위기와 복음의 핵심을 뽑아봤는데 제 생각에 그것은 이렇습니다.
“나, 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누구한테 한 것이냐 하면, 레위기는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게 하신 말씀이고, 복음은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의 주인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하고, 나처럼 거룩하다면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진정 내 제자라면 가장 작은 이에게 잘해줘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잘해줘야 하느냐 하면 당신에게 하는 것처럼 잘해줘야 하고, 왜 그리해야 하느냐 하면 그가 바로 당신의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나의 관계만 있지 않고, 나-이웃의 관계만 있지도 않고, 하느님-나-이웃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릇 참 신앙인이라면 이래야 하는데, 그런데 만일 아무 관계도 없고 나밖에 없으면 나는 이기주의자이거나 고립주의자이고, 하느님과의 관계는 없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만 있으면 무신론자이며, 이웃과의 관계는 없고 하느님과 나의 관계만 있으면 얼치기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이고 참 신앙인이라면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사무쳐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가슴에 사무치지 않는다면, 사무치기는커녕 스치지도 않고 지나간다면, 그래서 이 말씀이 아무 감동도 감사함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닐뿐더러 참으로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형제라고 하시다니!
이웃에게 한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동일시하시다니!
이것은 주님께서 나도 당신과 동일시하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듯 나의 품위와 이웃의 품위를 높여주시는데, 이웃을 개자식이라고 하며 무시하고 짓밟음으로써 품위를 떨어뜨리고, 이웃의 품위를 떨어뜨림으로써 나의 품위도 떨어진다면, 주님께서 애써 올려주신 품위를 스스로 뭉개는 꼴이 되니 너무 허망하겠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 말씀에 자극받아 내 주변에 가장 작은 이 그러나 주님의 형제인 가장 작은 이가 누구일지 한번 둘러보니 작다고 무시한 한 분이 즉시 떠올랐습니다.
말로는 ‘나는 작은 형제’라고 하면서 작다고 무시하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품위를 떨어뜨리면서 나의 품위도 떨어뜨린 잘못을 부끄리며 뉘우치는 오늘 저이고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오늘 저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줬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인 듯했습니다.
속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저는 눈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5-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 주위 카인과 아벨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심판을 이기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웃 사랑을 하라는 것인데, 여기서 신중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본성상 피조물이기 때문에 먼저 생존에 대해 걱정합니다.
내가 생존하려면 다른 이의 생명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먼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부모에 의해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선이라고 할 것도 없이 결국엔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형제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생존을 위해 형제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브리타니아에서 전쟁 중 사망하면서 시작됩니다.
사실 아우렐리우스는 망나니 아들들보다 피 한 방울, 혈통 하나 없는 당시 최고의 장군인 막시무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질투한 아우렐리우스의 막내아들 코모두스는 갈등합니다.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막시무스와 그의 가족을 죽이려 합니다.
코모두스는 황제가 되고 겨우 살아남은막시무스는 가족을 잃었지만, 결국 유명한 검투사가 되어 코모두스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왜 카인은 아벨을 죽였을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존에 대한 걱정이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지만 그 안에 감사가 섞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이 적어지니 당연히 형제에 대한 사랑도 줄어듭니다.
그렇게 형제를 살해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모두가 생존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하느님을 믿고 사랑해야만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사실은 그 부모를 주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십계명을 지키고 그러면 부모를 공경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카인과 같은 부류가 확실합니다.
카인은 사실 아벨을 살해하기 위해 먼저 하느님을 저버린 인물의 대명사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받는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시금 활짝 꽃피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근원적 결핍과 근본적 나약함을 지닌 우리이기에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다양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때로 그 고통의 강도가 너무 세서 울부짖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혹독한 환난 중에 앉아 있는데, 이렇게 참혹한 곤경에 빠져있는데, 주님께서는 대체 어디 계시는 건가요?
대체 계시기나 한 건가요?’
작게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우리뿐만 아니라 위대한 성인 성녀들께서도 자주 심각한 주님 부재 체험으로 힘겨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양과 염소’ 관련 비유 말씀은 때때로 주님께서 아니 계신 듯하여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좋은 힌트 하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 인간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분, 우리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시는 분,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지니신 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겪으시고 상처를 입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따지고 보니 그토록 뵙기 힘들었던 주님께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어 계셨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도처에 현존해 계셨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무료급식소 봉사를 가면, 그곳에서 굶주리고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가출청소년 쉼터에 간식이라도 사서 가면, 그곳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 가득한 마음을 안고 병실을 찾으면 그곳에서 너무 아파서 신음 중인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꽤나 부담스럽지만 씩씩하게 교도소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답답해하시는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상 생활 내내 다양한 결핍과 고통 속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힘겹게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향해 지속적으로 시선을 돌릴 일입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라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우리의 작지만 한결같은 이웃사랑의 실천은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고통에서 벗어날 힘을 선물로 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겠지만,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큰 고통은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향한 우리들의 사심 없는 봉사를 통해 서서히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 우리가 그토록 뵙고 싶어했던 주님께서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시며, 우리에게 다시금 시작할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결국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생기를 더해줄 것이며 우리 인생을 다시금 활짝 꽃피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최후의 심판>
오늘 복음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인들입니다.
또 “나는 신앙생활을 잘했다.” 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멸망을 선고받는 것을 수긍하지 못하고, 왜 그런 선고를 내리시느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의 뜻은 “주님께서 언제 그런 곤궁한 처지에 계셨습니까?”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런 처지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자기들은 기꺼이 주님을 도와드렸을 것이라고, 몰라서 못한 것이라고 변명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처지를 몰랐다는 것은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 무관심한 채로 살았음을, 즉 사랑 없이 살았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처지에 계신 적이 없었다고 주님의 말씀을 반박하는 말일 수도 있는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면 주님의 심판이 잘못되었다고 주님을 비난하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주님을 주님으로 섬긴 것이 아니었음을, 즉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너희 곁에 있는 ‘가장 작은 이’가 바로 나다.”, 또는 “나는 ‘가장 작은 이’로 너희 곁에 있다.”입니다.
‘작은 이’를 밀어내는 것은 ‘주님’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마태 7,21-23)
‘하느님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신앙인이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인이라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여기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그들의 말은 ‘그들의 주장’일 뿐이고, 주님께서 그 일들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런 일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심판을 받는다면, 그러면 ‘신앙 없는 사랑’은 어떤 심판을 받게 될까?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들보다 더 착하게 살고, 신앙인들보다 더 많이 사랑 실천을 한 사람들은 심판 때 어떻게 될까?
우리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또 복음을 전해 준 이가 없어서,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야 했던 사람과 예수님을 알았으면서도 믿기를 거부한 사람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은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사람은 자기가 거부함으로써 그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선행과 사랑 실천은 아무 쓸모가 없는가?
종교와 신앙과 상관없이, 선행은 선행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거부했더라도 선행과 사랑 실천을 인정받는다면 지옥은 피하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떻든 우리에게(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예수님께서 사랑만 강조하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오해하다가 신앙의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실천만 잘한다면 신앙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는 사랑 실천을 강조하셨지만,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실현되고, 사랑은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 때의 일에 관한 말씀이라는 점만 생각해서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나중의 일’이 아닙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의 ‘지금의 삶’이 심판 결과를 결정합니다.
믿는 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일도, 모두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제까지 안 했다면, 오늘 회개하고 오늘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일로 미루면 안 됩니다.
“나는 나중에 믿겠다. 나는 나중에 사랑하겠다.” 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지금 안 믿고 있고, 지금 사랑 실천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 될 뿐입니다.
“나는 지금 믿고 있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다.”가 되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 최후 심판의 잣대는 사랑>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시편 19,15)
제가 요즘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영적훈련인 수행입니다.
좀더 분명히 도식화 하면 ‘선택-훈련-습관’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의 수행생활이 평생 이 도식대로 이뤄집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기도와 노동과 공부가 균형잡히고 조화된 일과표에 따라 평생 훈련병처럼 살아가면서 습관이, 제2천성이 되고 비로소 순수하고 자유로운 참사람이,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입니다.
이런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구체적 수행의 훈련이 없이 참사람이 되는 길은 없다고 봅니다.
이런 수행의 훈련에 항구히 충실할 때,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성인이요, 그렇지 않고 소홀하여 욕망대로 살 때는 괴물도 되고 급기야 폐인도 됩니다.
참으로 평생 가장 힘든 것이 사람이, 참사람이 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교황님의 수요일 일반 알현 시 강론은 노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인류 역사상 일찍이 이렇게 노인이 많은 때는 없었다.
버려질 위험이 너무 크다.
지금처럼 버려질 위험이 많은 때는 결코 없었다.
자주 노인들은 짐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미 가장 약하고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무리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너무 많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보지 못한다.
젊은이는 노인들과, 노인들은 젊은이와 대화해야 한다.
이런 다리가 인류에게는 지혜의 전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사회에서 노인들은 나무의 뿌리들과 같음을 잊지 않도록 하자.
그들은 온역사를 지니고 있고 젊은이들은 꽃과 같고 열매와 같다.
만일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물이나 영양분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번창할 수 없다.
사회가 지닌 아름다운 모든 것은 노인들의 뿌리와 관련된다.
노인들이 소모품처럼 쓸모없다 버려져선 안된다.
노인들은 사회의 축복이다.”
새삼 잘 늙어 공동체의 튼튼하고 좋은 뿌리가 되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뿌리가 병들고 약하면 꽃도 열매도 부실함은 불문가지입니다.
이래서 불가에서는 사찰의 두 중요한 자산을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라 합니다.
새삼 평생 영원한 현역의 훈련병으로, 좋은 습관의 노인들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어제 저는 조선시대는 물론 한반도 역사를 통털어 최고의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대왕의 평전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계 인류 역사상 아마 이런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은 처음일 것입니다.
말그대로 그 옛날 세계 최고의 문명국 조선이었습니다.
그 일부 내용을 나눕니다.
“세종은 노인복지 문제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세종 14년부터 가을철에 80세 이상 된 노인들을 궁궐로 초대하여 양로연 잔치를 실시했다.
남자의 경우는 임금이 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열어주고, 여자의 경우는 왕비가 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신분 차별은 전혀 없어서 노비라도 나이가 80세 이상이면 모두 초대되었다.
양로연에 노비를 초대한 것과 또 여자 양로연을 따로 베풀어 준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뜰에는 악공들이 참석하여 음악을 연주하고, 노인 앞에는 탁자가 있고 술과 음식이 놓인다.
집사관들이 노인들에게 술을 따른다. 그때마다 음악이 연주된다.
다음에는 식사를 올리고, 그 다음에 또 술을 올린다. 술은 다섯 순배로 그친다.
식사가 끝나면 임금에게 절을 올린다.
세종 14년 가을에 처음 시작된 양로연은 크게 흉년이 든 해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가을에 거행되었고, 세종 15년에는 노인들에게 임금에게 절하지 말라고 명했다.
잔치가 끝나자 여러 노인들이 술에 취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붙들고 인사하며 차례대로 나갔다.
88세 최고령인 이귀령 노인은 자리를 피하여 37세 임금에게 말했다.
“신이 나이 88세 이온데 역대의 임금으로 오늘처럼 늙은이를 공경한 분이 없었습니다.
원하옵기는 신의 나이에 열두해를 더하여 헌수하나이다.”
같은해 여성 노인들을 위한 양노연도 왕비가 사정전에서 베풀었는데, 362인이 참석했고 남자 노인보다 배 이상이 되었다.
역시 사대부 부인에서부터 노비 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노인이 망라되었다.
이 해에 열린 지방의 양로연은 고을마다 남자는 수령이 주관하여, 또 여자는 수령 부인이 주관하여 거행했다.
세종시대는 역사상 양로연이 가장 많이 열린 시대였고, 시대가 내려가면서 양로연은 점차로 쇠퇴해갔다.”
또 세종대왕의 애민사상에 감동하게 되는 바 노비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참으로 평등한, 하늘이 낸 천민天民으로, 하늘의 시민으로 생각하면서 이들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다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의 성인 반열에 올려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차고 넘치는 성인이 세종대왕이었습니다.
그러니 훌륭한 노년을 위해 평상 시 사랑의 훈련 및 습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레위기 19장의 일부를 다룹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주제로 전개되는 내용이 이웃간의 구체적 사랑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시작되어,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속여서는 안된다”에 계속 이어지는 구체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금령이 헤아려보니 무려 16회 나옵니다.
그리고 해야 한다는 긍정적 명령은 넷입니다.
1.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2.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3.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리고 결론으로
4.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런 무수한 금령과 긍정적 명령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그리고 왜 통제되어야 하는지, 왜 자발적 구체적 사랑의 실천 훈련에 힘써야 하는지 깨닫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로 시작하여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끝나는, 바로 거룩한 사람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금령마다 못박듯이 후렴처럼 무수히 반복되는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바로 사랑 실천은 주님의 엄중한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새삼 이런 사랑의 실천 역시 자발적 훈련임을, 사랑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이것도 부족하여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무한한 이타적 아가페 형제적 사랑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아예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이런 구체적 사랑 실천을 최후심판의 잣대로 삼는다 하십니다.
십계명도 기도도 전례의 충실도 아닙니다.
종파에 무관하게 모든 곤궁 중에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형제라 칭하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오늘 복음은 장례미사 때 주로 사용되는 복음으로, 아마도 참석한 분들이 최후심판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오늘 최후심판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예언적 진술입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전반부 양들로 지칭되는 오른쪽 사람들은 준비된 나라를 차지한 복을 받은 의인들이요, 후반부 염소들로 지칭되는 왼쪽 저주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것으로 갑니다.
전반부만 나눕니다.
너희는
1.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고,
3.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4.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6.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과연 몇이나 해당되는지요?
우리 사랑의 삶을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이처럼 최후심판의 잣대는 십계명의 준수도, 거룩한 전례의 충실도 아니라 곤궁 중에 있는 불쌍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 직접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임금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들을 형제라 하며 자신과 동일시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새삼 살아 있는, 곤궁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이자 나의 형제요, 살아 있는 성체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일 것입니다.
“주님, 우리 마음을 주님의 밝은 빛으로 비추시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올바른 일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톨릭평화신문 2월 12일 가사에서 3가지 소식을 보았습니다.
1면에는 암 환자들을 위해서 20억 원을 기부한 김성주 씨의 이야기입니다.
김성주 씨는 가족들을 설득해 동생 김계숙 씨의 유산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마뗄암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김성주 씨도 매년 2억 원씩 5년간 더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유산 때문에 가족들이 불화를 겪고 재판까지 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김성주 씨 가족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유산을 봉헌하였습니다.
6면에는 교황님이 ‘민주콩고와 남수단’을 방문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님은 민주콩고에서는 내전의 상처를 딛고 서로 용서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수단에서는 난민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령의 교황께서 몸이 불편함에도 기꺼이 아프리카를 방문한 것은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7면은 매주 소개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입니다.
홀로 가족들을 돌보며 열심히 살았던 어머니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안타까운 소식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어머니의 건강과 가족을 위해서 정성을 나눌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 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 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갑곶성지에 있을 때가 생각납니다.
강화도에 있는 갑곶성지의 아침은 상쾌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맑은 공기뿐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새소리는 저의 기분을 최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성지 건물 안으로 새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이 새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나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서 창문에 계속 부딪혔습니다.
그러면서 들리는 소리는 자연 속에서 듣는 청아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넓은 창공에서 훨훨 날아야 하는 새가 어떻게 보면 좁다고 할 수 있는 건물 안에 있으니, 초조하고 불안한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유원지의 연못을 보면 그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크고 아름다운 잉어들을 보곤 합니다.
그 모습이 정말로 멋져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잉어가 여러분의 침대 위에서 펄떡이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때도 잉어가 멋져 보일까요?
아닙니다.
흉하게 보이고,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라면서 불안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만 아름답고 멋져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자리는 어떤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나를 아름답고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혹시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죄가 가득한 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자리 역시 그렇게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주님께서 보시니 좋게 만든 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자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장면을 말씀해주십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각 사람의 잘잘못에 따라 그들을 갈라놓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양을 의로운 사람으로, 염소를 죄인으로 표현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양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온유하며 누구에게 해를 입어도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인내를 가지고 있고, 염소는 변덕,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최후의 심판에서 당신 오른쪽에 세워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양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양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온유와 인내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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