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천탑이 있는 화순의 운주사에서 2,
미륵이 일어서는 것은 개벽과 혁명이다.
소설가 박태순 선생이 <국토기행>에서 언급한 “봉건구조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노비들이 내세불인 미륵의 용화세계를 염원하며 신분 해방 운동을 일으켰던 지역이며, 그 당시 천민마을이었던 나주시 문평면 일대와 인접한 점으로 보아 천민마을의 민중생활사와 관계된 공동체 사회의 신앙처였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과 황석영의 장편소설 장길산에서 나타나는 예일 것이다.
황석영은 관군에 참패한 장길산이 능주로 숨어든 것처럼 운주사의 천불천탑과 누워있는 미륵불을 작품에 삽입한 것이다. 그는 장길산이 진도와 전라도일대의 섬들 그리고 나주 영암일대에서 일어난 노비들과 함께 도읍지가 바뀌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통한의 장소로 운주사를 설정하였다. 그는 이곳 운주사 일대를 역성혁명의 성지로 이해하였고 누워있는 미륵이 일어서는 것을 개벽과 혁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호 이익이 홍길동洪吉童, 임거정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명명했던 장길산이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 숙종연간이었고 운주사의 유물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려 초로 보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는 문학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길산 보다 한 술 더 뜬 소설이 작가 이재운이 지은<토정비결>인데 이 책에서는 황진이의 미모에 무너졌다는 지족선사를 등장시켜 천불천탑을 깎고 있는 도인으로서 묘사하고 말았다. 그러저러한 연유로 운주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남겨 놓았다.
설화나 문학에 앞서서 운주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 석탑이 약 1천개씩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개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개천사가 천불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 천불산 좌우의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산재한 것과 일치되며, 석불둘이 등지고 있는 것이 일치되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이
전남도청에서 펴낸「전남의 전설」에는 도선국사와 운주사의 전설이 이렇게 실려 있다.
“도선이 여기에 절을 세우기 위해, 머슴을 데리고 와서 천상(天上)의 석공들을 불러 용강리 중장 터에 몰아놓고, 단 하루 사이에 천불천탑을 완성하고, 새벽닭이 울면 가도록 일렀다.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절위의 공사바위에서 돌을 깨어 열심히 일했으나, 도선이 보기에 하루사이에 일을 끝내지 못할 듯싶으므로 이 곳에서 9km쯤 떨어져 있는 일괘봉에 해를 잡아놓고 일을 시켰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었지만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 때 이들의 일손을 거들어주던 도선의 머슴들이 지쳐 꾀를 생각해 냈다. 어두운 곳에 숨어서 닭 우는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꼬끼오, 일을 하던 석공들은 가짜로 우는 닭소리를 듣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 때문에 운주사에는 미처 세우지 못한 와불臥佛이 생겼고, 6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도암 하수락 일대의 돌들은 천상의 석공들이 이곳으로 돌을 끌고 오다 버려두고 가서 중지된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절 뒷산에는 말발굽 모양의 흔적들이 수없이 찍힌 바위들이 있는데 중장터에 전해오는 민담에는 이렇게 전해진다. ” 세상의 악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신들이 이절을 세워 용화세계를 이루기 위해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서 이절을 세울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신들의 말발굽이 그 바위에 찍힌 것이다. “줄지어 서있는 탑들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석조불감 안에 남북 쪽의 석불 두 분이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조각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보물 제 797호 지정되어 있다., 다시 발길을 옮기면 만나게 되는 탑이 원반형 다층 석탑이다. 보물 799호로 지정된 이탑 또한 우리나라에서 찾아 볼 수가 없는 탑으로써 사람들은 큰 호떡들을 얹어 놓은 듯 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운주사는 새롭게 지어진 여러 가지 불전들로 인하여 옛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김현준기자의 말대로 손을 대면 댈수록 버리는 절이 이 운주사인데 이 운주사를 지금이라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달라고 떼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전남대 박물관에서 네 차례에 걸쳐서 발굴하고 종합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현재의 운주사 입구 보다 훨씬 앞쪽으로 사지(寺地)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지가 줄어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연대도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어느 때 폐사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발굴 조사 때 ‘운주사 환은 천조 홍치 8년’이라는 명문의 암막새 기와가 출토되어 본래의 이름이 구름이 머문다는 뜻의 운주사였음이 밝혀졌고, 홍치 8년이라는 명문은 1496년에 중창된 적이 있음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그 무렵까지는 운주사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지》에 따르면 고려 때의 승려 혜명이 1000명의 대중과 함께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천불천탑이 조성되었다는 것이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도 본다.
대웅전을 지나서 공사바위 쪽으로 오르다 보면 또 하나 이상야릇한 탑을 만난다. 원구형 석탑으로써 떡시루나 주판알 모양, 또는 실꾸리 모양의 이색적인 탑으로,「조선고적보도」에 의하면 7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네 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곳에서 몇 걸음 옮기면 석불군이 펼쳐져 있다. 이곳의 주존 돌부처는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었으나 코가 깨어진 채로 앉아 있으며, 그 옆에 작은 부처는 더욱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이태호선생과 운주사 답사 차 왔을 때 당시 다섯 살 이었던 둘째 아이 하늬가 부처에 올라앉더니 “아빠 이 부처가 백성들 같다.” 그 말을 듣고 이태호선생이 “너 뭐라고 했니”하고 물었을 때 “백성들 같다고요” 그 말을 받아 이태호 선생은 “아주 탁월한 상상력이다.”라고 얘기 했었는데, 그 말처럼 이 운주사의 석탑들이나 석불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굶주리고 빼앗길 대로 빼앗긴 민중들의 모습들을 하고 있으며 한결 같이 못생겨서 부처의 위엄을 지닌 것이 한 분도 없다. 바위로 난 길을 따라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나타나는 바위가 이름 하여 공사바위라고 한다.
그렇다 이 공사바위에 올라서면 운주사의 전체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 얼핏 보면 사람이 앉았던 것처럼 움푹 파인 바윗돌은 그 옛날 천불천탑을 세울 때 총감독이 앉아서 지시를 했던 바위라 하여 공사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공사바위에서 바라보면 국사봉(440.3)과 개천산(497.2), 천태산(497)이고, 그 아래로 탑들은 줄을 지어 서있다. .
민중의 초상 운주사의 돌부처들
「와불님 뵈러 가는길 .」팻말 밑으로 탑이 솟아 있으며, 길은 반질반질하게 나있다. 산길을 조금 오르자. 큰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를 기단 삼아 탑이 솟아있고, 그 아래에 부처들이 서있다. 다시 길을 오르자 일명 머슴 부처라고 하는 부처가 길을 막고, 그 곳에서 몇 걸음을 올라가자 운주사의 누워있는 미륵이다. 야트막한 이 산 꼭대기에 누워있는 한 쌍의 부부미륵은 머리를 낮은 곳으로 두고 다리를 산 위쪽으로 둔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처박혀 있다. 남편 미륵이 12m이고 부인 미륵이 9m에 이르는 미륵불이 전설에 의하면 세상이 바르지 못함으로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미륵이 일어날 때 세상이 바로 서리라 했는데....
만감에 사로잡혀 바라보는 미륵불을 한 여인네가 수없이 돌고 있었고, 미륵불의 아랫자락에는 머슴 부처(일명 시위불)를 만들어 떼어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운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부처가 이 산의 정상에서 머리를 아래로 두고 누워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은 악과 선의 싸움에서 악이 선을 이긴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일 것이리라. 기독교 정신에서 흔히 말하는 “낮은 데로 임하소서” 진흙 속에서 연꽃은 피어나고 낮은 곳에서, 절망 속에서 새로운 힘은 용솟음 칠 것이라고 말하지만 글쎄 이 땅은 지금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대다수 사람들은 낮은데서 신음하고 있고,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인데, 저 미륵불이 일어서는 날은 그 날은 과연 존재할까. 그리고 저 미륵불이 일어서는 날 그렇게 그리던 용화세상은 오기나 할 것인가. 풀리지 않은 의문점을 안고서 내려오는 길에 또다시 의문점 투성이인 칠성바위를 만난다. 얼핏 보면 원반형 7층석탑의 옥개석으로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북두칠성이 이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모습과 흡사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운주사 탑들의 배치가 하늘의 별자리와 같다고 보고 있고, 고려시대의 칠성신앙의 근거지였다고 하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관측자료로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나는 칠성바위위에 걸터앉아 다시한번 운주사의 전경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 운주사에 과연 천기의 석탑과 천기의 석불들이 진실로 세워졌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천(千)을 만수로서 무량무수의 여래를 표상하고, 천불신앙은 과거 장엄겁 현재 현겁, 미래 성숙겁의 삼세 삼천불가운데 현재 현겁에 대한 신앙을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천불과 천탑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천불신앙에 천불천탑이었을 것이고, 그것도 하룻밤 새 도력으로 세운 것이 아니고, 11세기 초반에서부터 15세기까지에 걸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말이 정답일 것이다. 그러나 수백여 개에 이르렀을 탑과 석탑들이 이 절이 폐사된 뒤로 수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절의 관리가 허술해지자 그 틈을 타서 이곳 주민들이 탑을 뜯어다가 상석, 주춧돌, 디딤돌, 빨래판으로 만들었고, 돌부처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그 몸통으로 설거지통이나 구유, 다듬잇돌 등으로 개조하여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집의 정원을 꾸미겠다고 아예 통째로 실어나가기도 하여 천불천탑이라던 유형무형의 문화재는 자꾸만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일제식민지시대 까지만 해도 240여개쯤 되던 탑과 불상들이 오늘날에는 돌부처70여개와 석탑17개 등 80여개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나마 남은 돌부처의 얼굴도 성한 것이 별로 없다. 이 지역 사람들이 남편이 바람을 피거나 부부사이에 아이가 없거나 몹쓸 병에 걸리면 미륵불상의 코를 떼어 빻아 가루를 만들어 먹으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돌부처들의 코가 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운주사 답사는 아무리 여러 차례 와도 미완의 여로이고, 수수께끼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과 같다, 나라 안의 창의적이 석공들이 다 모여들어 석탑과 불상을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외계인들이 지구라는 행성에 불시착하여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떠나오자마자 다시 그리운 것은 그 무슨 연유인지,
2024년 1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