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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여행] 전주 한벽당.......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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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전주 한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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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과 맛(味)의 도시, 풍류(風流)와 애향(愛鄕)의 도시에 있는 아름다운 한벽당(寒碧堂)! 호남제일(湖
南第一門) 문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전주!, 전주에서 어찌 정자 한두개쯤 안보고 갈수 있으리, 유랑자
는 가끔씩은 충전이 필요하고 힐링이 필요할땐 먹거리를 찾아 전주를 다녀오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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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개인적으로 전주 여행이 몇 번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동안은 여행기를 남겨놓지 안아서 잘
모르겠지만 암튼 제법 여러번 전주 여행은 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안 가본 곳 역시 많은
지라 이번 여행에서 칭구의 도움으로 편하게 다닐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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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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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역시 칭구의 미적감각(美的感覺)을 따라 나선곳이 한벽당(寒碧堂)이다. 알고보니 전주(全州),崔
(최)우리 조상님 과 관련있는 정자여서 다시한번 공부하는 계기도 되었다. 한벽당은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전주 한량(閑良)들의 동경 대상이기도 하다..
먼저 전주를 통틀어 예찬했던 선탄(禪坦)의 시가있어 입가심으로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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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山四月浣花前, 天氣籠人醉欲眠, 洗馬幾家樓近水, 鳴鳩沙木雨濺濺
(완산사월완화전, 천기롱인취욕면, 세마기가누근수, 명구사목우천천)
완산의 4월 완화(浣花) 앞에/, 하늘 기운은 사람을 가두어 취한 듯이 잠이 오네./
말을 씻기는 집은 몇 집인고, 누(樓)는 물가에 있는데/. 모래 물가에 우는 산비둘기, 비는 촉촉이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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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寒碧)’이란 이름은 이곳이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 같다 하여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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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의 승려 선탄(禪坦)이 전주의 객사 풍패관(豊沛館)에서 읊은 시다. 그도 전라도를 들려 누
정에서 많은 시를 남겼다. 완화(浣花)는 두보(杜甫)가 일찍이 성도(成都)의 완화리(浣花里)에 살았는
데, 그 근처에는 금강(錦江)과 완화계(浣花溪)ㆍ완화교(浣花橋) 등의 경치 좋은 곳들이 있어 예찬했
던 곳이다. 전주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전주의 아름다운 풍치(風致)를 감상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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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고, 각시바우, 서방바우에서는 지금은 물새들이 대신하고 있지만 아이
들이 고기잡고 멱감기로 유명했던 승암산 기슭의 승경(勝景)절벽을 깎아 세운, 전주 옥류동고개 옆
한벽당(寒碧堂),을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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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寒碧堂)호남의 명승이며 전주8경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곳으로, 조선초에 월당(月塘) 최담(崔
澹)이 세워 수많은 시인 묵객이 찾았으며,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아름다운 한벽청연(寒
碧晴煙)의 정자인, 전북 전주의 경승지인 한벽당(寒碧堂)과 요월대(邀月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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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碧堂(한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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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전주팔경 중 한 곳이었던 한벽당을 가서보면 느끼게 되겠지만 조금만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전혀 모른다 해도 자연속에 묻혀있는 그 절경(絶景)이 너무나도 뛰어나 그야말로 비경(秘境)중
에 秘境임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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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선비나 시인들의 기행은 으레 누정의 유람을 겸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여행을 노래한 기행가사
는 누정문학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었다. 정철이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관
동별곡”에는 그곳의 북관정(北關亭)·산영루(山暎樓)·총석정·백옥루(白玉樓)·청간정(淸澗亭)·죽서루·
망양정 등을 구경하던 시흥이 담겨 있어, 기행가사도 누정문학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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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碧堂 (한벽당에서) 이정보(李鼎輔)
躍馬當年地(적마당년지)용마를 달리던 당년의 이 땅에
興龍卽此州(흥용즉차주)제왕이 일어난 바로 이곳이었다오.
灘聲孤枕撼(탄성고침감)여울물 소리에 외로운 베개 흔들거리고
山色一簾幽(산색일렴유)산빛은 한 주렴 밖에 그윽히 비치네
世事催雙晩(세사최쌍만)세상일 쌍 수염이 늙음을 재촉하니
羈愁屬九秋(기수속구추)나그네 시름 가을 내내 잇따르네.
夕陽楓葉晩(석양풍엽만)석양에 단풍잎 느지막이 지는데
錦瑟醉高樓(금슬취고누)아름다운 비파 소리 높은 누각에 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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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부윤(光州府尹), 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낸 동계(東溪) 박태순(朴泰淳 1653~1704)이 전라관찰사
(全羅觀察使) 재임시에 이곳에 오르고 느낀 감흥의 붓초리는 길게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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斜日肩輿薄領餘, 紅亭百尺近州居, 閑論莊叟觀魚樂, 笑指公孫躍馬墟
어깨너머 기우는 햇살 옷깃에 비치는데/높이 솟은 빨간 정자 근교에 자리했네.
한가로이 장자의 물고기 즐거움을 보고/웃으며 공손룡의 말달리던 터를 가리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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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氣送寒侵晩席, 水光凝碧漾前除, 官醪數盞仍成醉, 醉後吟詩信筆書
차가운 산공기가 늦은 술좌석을 침노하고/짙푸른 물빛은 앞 뜰에 출렁이네.
관청 막걸리 몇 순배에 미련없이 취하였고/취한 뒤에 시를 읊고 또 글씨를 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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肩輿晩出城南陌, 獨上高樓百尺餘, 山雨乍晴溪水急, 溟雲纔捲洞天虛
가마를 타고 느지막이 성남 거리에 나와서/호올로 백여 척의 높은 누각에 올랐네.
산중 비가 잠시 개니 시냇물이 급히 흐르고/어둡던 구름 겨우 걷히니 골짜기가 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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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舟長笛憑檻外, 紅燭淸樽待月初, 幽興未闌秋夜永, 不坊扶醉暫躕躇
외로운 배 긴 피리 소리에 난간 밖에 기대어서/붉은 촛불 맑은 술동이 달 오르기를 기다리네.
그윽한 흥취 무르녹지 않고 가을밤은 깊어가는데/취한 몸 부축하여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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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은 결국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소요하며 출입하던 곳이므로 누정제영으로서의 한시는 물론, 가사
와 시조 등 국문시가까지 지은 곳으로, 시가 문학의 산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문학(文學)을 발전
시키는 데에 크게 한몫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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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樓亭 文學)의 차원에서도 우리 나라 문학사상 누정 시인의 비중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
다. 우리 문학에 특히 산수시가 많은 점을 생각할 때 누정문학 의 주종이 이 산수 시임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한벽당(寒碧堂),역시 마찬 가지다. 유랑자는 오늘 선대(先代)의 길을 따라
가볼 요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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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寒碧堂)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이곳의 경치를 찬
양한 23개의 시문(詩文)이 시판(詩板)으로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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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寒碧堂)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문신이었던 월당(月塘) 참의(參議)를 지내신 최담(崔霮)선생
께서 1404년(태종 4) 71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처음 의 이
름은 그의 호를 따서 월당루(月塘樓)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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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은 전주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그칠새 없이 찾던 곳으로 원래 힌
옥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혀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고 푸르러 마치 벽옥한류(碧
玉寒流)와 같다라는 글귀에서 한벽이라는 어원을 발췌하여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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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춘(海春) 온옥찬(溫玉燦)
奇嵒水廻頭, 湖南第一州, 山色藏萬古, 波光碧千秋
(기암수회두.호남제일주. 산색장만고, 파광벽천추)
기이한 바위와 물이 감도는 머리/ 호남 제일의 고을인데
산빛은 만고에 그대로요/ 물빛은 천년(千年)에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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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逕雲深處, 僧寺鍾聲幽, 携酒佳人席, 名士豪傑遊
(석경운심처.승사종성유, 휴주가인석, 명사호걸유)
바윗길에 안개 고요히 잠겼고/ 승암사의 쇠북소리 은은히 들려.
술과 미인이 함께 어울린 자리에/ 명사(名士)와 호걸(豪傑)이 질탕 노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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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은(菊隱) 강진옥(康眞玉)이 읊었다.
寒碧一川抱石頭, 登臨縱目是雄州, 繁華文物完山久, 淸轉書聲玉洞幽
맑고 푸른 한 냇물이 바위를 안고 흐르는 곳/올라와 바라보니 이 바로 웅주로구려.
오랜 완산 고을 문물이 번화하고/옥류동(玉流洞) 글 읽는 소리 맑고 곱게 전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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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木臺前烟十里, 麒麟峰上月千秋, 凉生仍做江鷗夢, 晩覺西天步下樓
오목대 앞엔 하얀 안개 자욱이 펼쳐졌고/기린봉 위엔 밝은 달이 천추에 비치네.
서늘한 기운이 생기니 갈매기 꿈을 꾸는데/늦게야 해 저물어 정자에 내려올 줄 깨달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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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월당루(月塘樓)를 한벽당(寒碧堂)이라 불리게 된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월당 최담 선생의 유
허비에 월당루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애초 월당루라고 불렀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항간에는 주자의 시 중 ‘벽옥한류’(碧玉寒流 라는 글귀에서 따왔거나 옛 지명에서 따왔을 수 있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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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오늘 유랑자는 조상님 덕에 유명한 곳을 보았다는 자부심마져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각설하고
흔히 한벽루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전주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호
남의 명승 한벽당에는 시인 묵객들이 쉴새 없이 찾아 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길 가던 나그네
도 이곳들러 잠시 쉬어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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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 역시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
조 28)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
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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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배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는 머름 과
계자난간(鷄子欄干)만이 둘려져 있어 자연과 일체를 이루려는 누정건축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공포
는 2익공식의 구조이다. 쇠서[牛舌]에는 당초문을 초각(草刻)하였으며 연꽃모양의 주두가 특이하
다. 한벽당 바로 동편에는 1986년에 복원된 요월대(邀月臺)가 함께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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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孫秉照(후손병조)
百尺高岡爽嵦頭,(백척고강상애두)까마득한 높은 언덕 상쾌한 꼭대기
堂名寒碧冠南州,(당명한벽관남주)한벽당 명성은 남쪽 고을 으뜸일세
飛湍漲澋魚游濶,(비단창횡어유활)물살 빠른 여울에는 물고기도 활발하고
秀嶂繁陰鳥語幽,(수장번음조어유)빼어난 봉우리 나무 그늘 새소리만 그윽하다
先祖考槃遺萬代,(선조고반유만대)선조께서 은거한 집 영원히 전해오고
後孫肯構誓千秋,(후손긍구서천추)후손들은 유업을 영원히 이어가니
登臨仰想英靈跡,(등임앙상영령적)정자에 올라 영령의 흔적을 우러러 그려 볼 때
夜夜東天月上樓,(야야동천월상누)밤마다 뜨는 달이 누각을 비추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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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차한벽당운(敬次寒碧堂韻). 후손 갑열(後孫甲烈)
山水炳靈豊沛頭, 難形勝槪擅南州,산수가 빼어난 풍패의 들머리/ 빼어난 경치를 남쪽 고을에는 비길 데 없고
千層石勢當簷屹, 百折江聲八檻幽,천 층 바위절벽 위 처마는 우뚝하고/ 구불구불 강줄기에 여덟 난간 그윽하다.
雪白鷺翔誇晩景, 錦丹楓葉報先秋,눈처럼 흰 해오라기 날개 짓에 저무는 경치/ 붉은 비단 깔아 놓은 단풍잎 가을을 알리고
月翁芳躅今猶在, 峭絶高岡一古樓,월당공의 훌륭한 행적은 지금 더욱 또렷하니/ 험준한 절벽 높이 홀로 선 옛 정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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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바라보는 정자의 정면에 있는 한벽당(寒碧堂)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호남의 명필 강
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 선생의 글씨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서 의문 하나가 생긴다. 한
벽당??, 한벽루??, 사람들이나 언론에서도 한벽당과 한벽루가 혼용되고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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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으로 따지면 ‘한벽당(寒碧堂)’이 높지만, 현재 남아 있는 형태상으로 보면 ‘루’에 가깝다는 평이다.
‘당’은 여러 건물이 있을 때 건물의 중심이 되는 곳이며, ‘루’는 멀리 넓게 볼 수 있는 다락구조의 집을
뜻하기 때문이다. 전주시 관광홍보 사이트에는 ‘한벽당’으로 정리됐다. 이 혼용을 피하기 위해 전주
시의 결론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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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서울 가던 길에 명필 이삼만(李三晩)을 이곳에서 교우하며 남긴 등한벽당
(登寒碧堂)의 시(詩)로,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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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衣當水樹(전의당수사) 농사꾼차림으로 물가 정자에 다다르니
云是故王州(운시고왕주) 이곳은 왕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지
谷靜수聲遠(곡정수성원) 계곡은 고요한데 새 소리 멀리 들리고
溪澄樹影幽(계징수영유) 맑은 시냇물에 나무 그림자 그윽히 비치네
遞商催晩日(체상최만일) 바쁜 장사치는 저문 길을 재촉하고
積雨洗新秋(적우세신추) 흠뻑 내린 비에 씻은 듯 산뜩한 가을
信美皆吾土(신미개오토) 진실로 아름다운 우리 땅이여
登臨寧賦樓(등임녕부루) 누각에 올라 어찌 노래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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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을 노래한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1579∼1651)의 시(詩)도 있다,
屢策羸驂作遠遊 晩登寒碧騁雙眸 누차 여윈 말 채찍질해 먼 길 나서 / 저물녘 한벽루에 올라 경관을 조망하노라
孤帆逆浪看漁艇 萬玉隨風見水鷗 물결 거슬러 오르는 외로운 돛단배 어선을 보고 / 바람 따라 나는 만 점의 옥 같은 백구가 보이네
十里瓊沙明落照 千重翠峀挹淸幽 십리 고운 백사장에는 낙조가 환하고 / 천 겹 푸른 산봉우리는 맑고 그윽하여라
黃流十酌難成醉 正値賢東禮客秋 막걸리 열 잔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으니 / 바로 어진 주인이 손님 대접하는 때 만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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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한벽당은 일년내내 무료 개방이다, 누구나 다 지나가다 생각나면 올라 시 한수쯤 읊고 갈 수 있
는 편안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주 시민들이나.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이 한벽당
에 대한 관심은 적은 듯 하다. 워낙 한옥마을에 유명하다 보니 유명세에 밀리 버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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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마을을 구경 하였다면 도보로 오목대,→이목대,→자만벽화마을,→전주향교,→한벽당한옥체험
마을,→한벽당, 코스가 의외로 가까우면서도 알찬 코스다. 운동삼아 천천히 걸어도 2시간대 코스로
한옥마을 코스중에서는 당연 으뜸인 코스중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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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월대(邀月臺)는 최담(崔霮)의 후손이,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추가로 곁에 지은 정자로,6.25동란으
로 파손되어 1986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요월대란 달을 맞이하는 다락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요월대(邀月臺) 현판으로, 왼손 악필법으로 유명한 석전(石田) 황욱(黃旭)의 왼손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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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행을 하다보면 아니유랑자의 여행기를 보면 알겠지만 어느 고을이나 대표되는 누정들이 있다.
전주에서는 산수가 수려한 곳에 자리한 것과 1404년(태종 4)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그의 별장으로 616여년의 역사성을 견주어 전주시에서는 한벽당(寒碧
堂)이 그 대표성을 지닌다 해도 무방하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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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명 누정에는 산수의 수려함은 물론 그 물길이 정면으로 흐르면서 오랬동안 감상하는 것이 기본
이었다. 그것은 우리네 선인들은 물을 두고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인륜의 최상 의 선(善)은 물(水)
과 같다.'는 노자의 무의자연(無爲自然)의 물의 성질에 비유한 무위 사상을 흠모하기 위해 누정을 지
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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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寒碧堂)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한벽당 사적을 적은 한벽당기적비(寒碧堂紀跡碑)가 있다,
1957년에 김문옥(金文鈺, 1901~1960)이 비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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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碧堂紀跡碑(한벽당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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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수가 수려해야 유명한 정자라 할 수 있지만 정자가 자리한 위치가 적벽의 물길을 정면으로
흘러 들어 정자가 있는 자리에서 휘어 돌아 나가는 곳에 있어야 더 가치를 부여했다. 한벽당도 그런
조건을 다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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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5평 남짓 너른 마루와 서까래, 처마 밑을 에두른 시인 묵객들이 제영한 수많은 시주로 소통의
공간으로 삼았다. 당시에 전라도 감찰사들의 단골 순례의 낙지였다. 여기서 당시 전라도 감찰사는 조
선시대인 1413년(태종 13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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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 정자에 오르면 상관의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무척 시원하다. 어디 그뿐이랴 서산
에 해 기울고 저녘 밥 짓는 연기 피어 오르면 마주치는 남고산성 남고사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중소
리는 더욱 한벽당의 운치를 높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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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승암산 기슭 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이다.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
(寒碧晴烟)'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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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라도는 전주에 관찰사를 두고 현재 의 전라북도, 전라북남 와 제주도에 걸친 1부(府) 4목(牧),
4도호부(都護府), 12군(郡), 31현(縣)의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갑오경장시대인 1896년(고종 33
년)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북도로 분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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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부터 이름만 들어도 묵직한 시인 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題詠)한 시
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 등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등 20 여명의 저명한 인
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지금도 누군가의 의해 보존되고 해석해서 그 시절의 풍류를 엿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많은 걸린 시문 중 몇수만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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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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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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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이곳 한벽당 일대에 수심이 깊어 주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낚시대를 드리
우고 풍류삼매에 젖기도 하였다. 현재 남교천인 오룡교를 건너 남원, 구례, 곡성, 순천, 진주로 빠지
는 나그네들의 발을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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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 잠시 앉아 있다보면 상관의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무척 시원하다. 마주치는 남고
산성 남고사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중소리는 더욱 한벽당의 운치를 높게 한다. 정자를 둘러보고 나
면 그 정자 아래의 암벽에는 여러곳에 암각서들이 있다.이를 둘러보는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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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스러운 이 남녀는 지금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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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가 핧고 지나간 전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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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년~1847)은 조선후기의 3대 명필의 하나로,이곳 바위 위에 글씨 연습
을 하다 잘 써진 글씨는 직접 바위에 새겼는데, "취리한중" "건곤일월" "수풍(水風)" "백화담" "연비어약"
"옥류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 땅속에 매몰되거나 유실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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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蒼巖)이 명필로 그의 이야기 중에 한벽당 근방에서의 부채장수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함 소개해
본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어느 날 초라한 몸차림으로 한벽당 산마루에 걸터앉아 삼복의 찌
는 듯 한 더위를 피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곳을 남루한 옷차림을 한 부채장수가 등짐을 짊어지고 누각
에 올라 짐을 내려놓고 시원한 냇바람에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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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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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추억에 빠져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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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는 여름이 한철인데 부채의 원선(圓扇)이 저렇게 밋밋해서 쓰겠는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 창
암(蒼巖)은, 때마침 더위를 피할 겸 모든 부채에다 글을 써 해두었다. 이윽고 잠에서 깬 부채장수는,
자기 부채에 먹칠을 하듯 가득가득 글씨를 써 놓은 것을 보고 아연 실색(失色)하여,“그나마 이 생업마
저 망쳐 놓으려는 당신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오”라고 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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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게 된 창암(蒼巖)은 “임자 몰래 글을 쓴 것은 실례로되 그냥 밋밋한 원선보다는 졸필(拙筆)이
나마 기왕 쓴 것이니 갖고 나가보오”라고 말하였다. 뭐~ 기왕지사 어떻하리 부채장수는 하는수 없이
부채를 들고 남문 쪽으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명필 이삼만(李三晩)의 글씨라 하여 부채가 그 자리에
서 다 팔려 버렸다 한다. ㅎㅎㅎ 재미있는 일화가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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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 청춘들은 인생 말년에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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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은 전주인들의 풍류와 문화가 서린 곳이다. 한벽당은 초의선사, 추사와 창암 그리고 많은 사람
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이곳을 지나가는 대목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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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 바로 밑 바위에는‘매화향기를 찾아 가는 작은 소로’라는 뜻을 가진 심매경(尋梅逕)이란 암각
서도 있다. 한벽당에 들르는 일이 있으면 좀 더 꼼꼼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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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관광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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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 관광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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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b2345/9t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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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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