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를 보거든 나를 생각하소
1999년 6월 말 ‘급양 향상 실태조사’를 하려고 남도지방으로 출장 갔다.
호남고속도로 길목인 주암휴게소* 뒤편에는 한 아름이 채 안 되는 제법 큰 팽나무 한 그루가 잘 보호되고 있으며 엽록색 잎사귀 속에 숨겨진 청록색 열매가 제법 알알히 맺혀 있어서 옛일이 회상되었다.
서해안의 갯바람을 막는 낮으막한 산인 신안재 아래에는 전형적인 시골인 화망마을*이 있다.
시골 함석집 야외 바깥창고 뒷켠에는 왕대나무 숲의 끝자락이 있었고, 대숲에는 두 그루의 팽나무*가 자생했다. 아이들이 두 팔로 감싸안고 오를 만큼 나무 등치가 어중간한 크기여서 고만고만한 또래의 동네 아이들이 팽나무 곁가지를 매달리면 서로의 엉덩이를 밀어서 위로 올리고, 나무에 먼저 올라간 아이가 위에서 아래에 있는 아이의 손을 당겨주면 나무에 오르기가 아주 적절했다. 곁가지가 안성맞춤하게 촘촘히 뻗어나가서 계집아이들도 올라탔으며, 함석집 쌍둥이 형제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굵직한 가지 사이로 넘나들었다.
팽나무는 여름철에는 청색의 조그만한 크기의 열매가 열렸으며, 가을에는 누렇게 익어 먹을 수 있다. 맛은 약간 달작지근하여 즐겨 먹기에는 다소 텁텁해서 많이 먹을 건더기는 별로 없었다. 다만 산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팽나무는 여느 나무와는 달리 잔가지가 잘 부러지기 때문에 가지를 움켜쥐고 굵은 곁가지에 걸터앉기에는 다소 위험스러웠다. 팽나무에 올라타고는 잔재주를 부려 또 다른 가지, 가는다란 가지에 이동하려다 보면 이따끔 잔가지가 부러져서 4m 높이에서 떨어지곤 했으나 휘어지는 대나무가 완충역할을 하기에 크게 다치지는 안했다. 대나무 가지와 날카롭고 까슬까슬한 잎사귀의 끝에 얼굴을 굵히곤 하여서 어머니의 애를 태웠다.
대천리(大川(里) 구장터에 있는 웅천국민학교 수업이 끝난 뒤 집에 돌아오니 팽나무 두 그루에 똥물로 온통 더렵혀져 있었다. 어머니가 잉꾼(일꾼 아저씨를 ‘잉꾼’으로 발음)을 시켜서 소망(바깥 똥수칸)의 똥을 퍼서 마구 끼얹었다. 구린내 나는 냄새를 가시려고 쌍둥이 형제는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러서 끼얹었으며, 신우대 빗자루 (2m 길이의 작은 대나무)로 팽나무 밑동을 쓸어내며, 닦아냈다.
장마가 끝나고 바람과 공기를 쐐서 똥냄새가 가신 뒤부터 다시 팽나무에 올라탔다. 이머니를 이긴 셈이었다. 그러나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 집에 돌아오니 팽나무가 밑동째 베어져서 모두 치워져 있었다.
큰딸과 큰아들을 어렸을 적에 잃은 뒤에 둘째 딸을 낳고, 쌍둥이 형제와 계집아이들을 더 낳아서 키우던 어머니. 일꾼을 시켜서 일꾼이 소마 똥-바가지로 끼얹었으며, 끝내에는 톱으로 팽나무를 아예 다 베어버렸다.
어머니로서는 이런 조치가 당연했을지라도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는 잃어버렸다. 아쉬움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 이후부터는 팽나무에 다시 오를 수가 없었지만 소년의 마음 속에는 팽나무가 늘 살아 있었다.
쌍둥이 형제의 나무타기는 계속 되었다. 함석집 뒤켠 울타리에는 아름드리 쭝나무(쭉나무, 수피가 붉은 참죽나무)가 있었다.
어머니가 2일 장날 7일 장날에 십리길 새장터에 장보러 가거나 마을 나들이로 집을 잠깐 비우는 낌새가 보이면 쌍둥이 형제는 쭝나무에 힘겹게 올라탔으며, 동네 아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침을 삼키며 가슴을 졸여야 했다.
높은 나무 가지에 지은 새 둥지에는 해마다 여름철새인 땅까치가 알을 까고는 새끼를 쳤다.
쌍둥이 형제가 나무에 올라가서 푸른 빛깔의 날개 털, 주둥이 부리와 다리가 붉은 새의 새끼를 꺼내들고 손으로 만질 때마다 어른 새들의 비통한 극성이란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암컷, 수컷의 새들이 하늘과 둥지 주위를 낮게 날고, 빙빙 돌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꽉꽉 날카롭게 내지르며, 시끄럽게 했다. 때로는 급강하해서 아이의 손등과 얼굴을 날카로운 부리로 쪼으려고 마구 달겨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뭇가지에 걸터 앉아서 한 손으로 작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한 손으로 휘저어서, 쪼으려고 덤벼드는 어미새를 내쫒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나무타기는 지극히 위태롭고 무모한 짓이었다.
새끼들한테 잔털이 어지간히 나고, 두 날개로 날기 시작할 무렵에는 쌍둥이는 둥지에서 새끼를 꺼내서 밑으로 내려왔다. 새끼-새의 다리에 노끈(모시로 짠 실)로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산과 들에서 잡은 땅깨비, 방아개비, 여치, 풀무치 등의 풀벌레를 먹였다. 더 크면 대숲에 놓아주었다.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나무 타는 재주가 있어서 새 둥지에서 새끼-새를 꺼내어 키우는 재미는 유별났다. 누가 말려서 될 일은 아니었으나 나무타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는 도회지인 대전으로 전학 갔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와서 나무 올라타기를 계속하였으나 머릿통이 커지고 몸무게가 나갈수록 아름드리 참죽나무를 껴안고 매달리기가 자꾸만 힘에 부쳤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무타기도 시들해졌고, 또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서 무창포* 갯바닷가로 내닫기 시작한 뒤로는 나무 올라타기 버릇은 어느새 없어지고 말았다. 해수욕장을 싸질러 다니는 것으로써 어머니의 속을 썩이는 빈도는 다소 줄어들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내 자식들은 서울 송파구 잠실지역에서 태어났고, 잠실 아파트에서만 자랐다. 여름방학 때에 시골로 내려온 아이들에게 감나무 밭에 있는 감나무에 오르기를 권해서, 시범을 보여주며 가르쳐도 아파트 단지에서 곱게 자란 아이들은 조그만한 나무조차도 제대로 올라타지 못했다. 조금만 올라타고는 무섭다며 더 이상 오르기를 꺼려했기에 수십 년 전의 산골아이와 대도시 아이들의 정서에는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하였다.
그대여. 이곳을 지나가거든 그 옛날 나무를 잘 탔던 산골아이(쌍둥이 형제)의 추억을 되살려서 팽나무를 올려다보기 바란다. 높고 푸른 하늘도 바라보고...
* 주암휴게소 : 전남 순천시 주암면 고산리 호남고속도로 소재.
* 화망마을 :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花望). 서해안고속도로 무창포나들목(IC)에서 나오면 바로 코앞의 산골 마을.
* 무창포해수욕장 : 충남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 소재
* 팽나무 : 수고 20m 낙엽교목으로 정자목으로 이용되는 거목.
* 참죽나무(쭉나무, 쭝나무) : 멀구슬나무과의 큰키나무로 높이가 20m까지 자라며, 고급 목재임. 어린 순은 봄나물로 식용함.
1999. 7. 9. 환이가 씀..
후기 :
내 시골집 뒤 주변은 많이도 변했다.
1990년대.
철근옹벽을 치려고 아름드리 쭝나무(참죽나무)를 목공소 업자를 불러서 모두 베어냈고, 포클레인으로 나무 뿌리를 다 캐버렸다. 아름드리 쭝나무와 거대한 뿌리조차도 목재소 업자가 트럭으로 실어갔다. 건축업자를 불러서 철근 옹벽을 쳤다.
2020년대인 지금.
텃밭 언저리에는 팽나무와 참죽나무가 다시 자라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들의 어린 묘목이 생겨났는지를 모르겠으나 제법 굵고, 크게 자라고 있다.
팽나무에는 넝쿨식물인 으름덩굴이 칭칭 감아서 뒤덮는다. 작은 바나나와 같은 모양새의 열매가 열리기에 10월에 시골집에 가면 몇 개를 따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까만 씨를 내뱉는다.
참죽나무 긴 잎사귀는 봄나물로 무치면 제법 맛이 있으며, 재목은 직선으로 굵고 수피도 우수해서 고급 목재로 활용한다.
참죽나무
참죽나무(쭉나무, 쭝나무) 순
으름꽃. 냄새가 향끗하고, 맛은 달작지근함
으름 열매
위 사진은 모두 카페에서 내 임의로 퍼왔다.
독자를 위해서 퍼왔기에 용서해 주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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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일기장에서 위 글을 보았기에 컴퓨터 자판기를 눌러서 글 정리했습니다.
내 어린시절의 이야기.
60여 년 전의 일인데도 기억이 나는군요.
오늘은 2022. 4. 4. 월요일.
오후에 서울 송파구 탄천 강변을 따라 걸었지요.
2022. 4. 30.까지 '생태환경 복원' 공사를 마칠 예정이라기에 한번 기대해야겠지요.
나이 든 탓에 이제는 동네마실이나 슬슬 다녀야 할 터.
아직은 지팡이를 짚지 않았기에 다행...
첫댓글 소싯적엔 내 살던 고향(충청도 천안의 산속 마을) 어귀에는
몇 십 년 된 프라타너스 나무 10여 그루가 자라고 있었고
그 나무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지요.
그 나무에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여름에는 그 나무 밑에서 멍석을 깔고 누워 있으면
소쩍새도 날아와서 울다 가고
가을이면 나무 열매를 주워 아이들 뒤퉁수를 한 대씩 때리기도(군밤) 하고요.
최 선생님 고향의 나무 이야기를 들으니
내 고향이 생각나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요즘 고향에 가면 10여 그루의 프라타너스 나무도
내가 5학년까지 다녔던 학교 운동장가의 프라타너스 나무도 모두 베어지고 없더라구요.
추억만이 남아있을 뿐......
댓글 고맙습니다.
박 선생님도 어린시절의 추억과 기억이 많이 남아 있군요.
댓글에서도 아름다운 우리말이 잔뜩 들어 있군요.
멍석, 소쩍새 등.
외국 나무인 프나타너스 그거 엄청나게 큰 나무이지요.
@최윤환 고향 마을 입구도 우리말 어귀로 표현했습니다.
손녀를 데리고 공원을 돌다가 손녀가 오를 만 한 키작은 나무가 있길래 엉덩이를 밀어줬더니 잘도 오르더군요.
사진도 찍어주고.
훗날 나무에 올랐던 추억하나를 만들어주었지요.
어릴적 나무를 오르내리며 놀던 아이들은 그 추억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가겠지요.
베리꽃 김정미 선생님
댓글 고맙습니다.
손녀와 함께 보낸 시간들은 먼 훗날 손녀한테는 소중한 기억과 추억이 되겠지요.
세상 살아가는 데에 따뜻한 마음을 지니겠지요.
으름 참 옛생각이 납니다
산골이야기 풍경 애쓰지 않아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니 우리 세대의 고향이지요 산천은 변하고 옛사람은 가고 없어도
저희 마음 속엔 여전히 그 모습 그 길 우물가 동네 어귀..그리움으로 품고 있습니다.
운선 작가님
댓글 고맙습니다.
운선 님의 댓글에서 토박이 우리말을 봅니다. '길, 우물가, 동네 어귀' 등.
으름은 오래 전... 충남 성주산에 올라갔다가 으름 열매를 보았고, 씨를 뱉어낸 뒤 시골집 텃밭에 심었더니만...이게 자라서.. 지금은 많이도 번졌지요.
으름은 줄기성 식물이기에 남의 몸뚱아리를 칭칭 감지요.
운선 작가님의 글 또 기다립니다.
아!!시골집 풍경을 잘 읽어 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님의 닉네임이 좋군요.
'자연이다' 말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지요.
하늘 별 햇볕 바람 물... 나무와 동물 그리고 사람 등이 모두 함께 어울려서 사는 세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