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여행] 전주 부성 풍남문.......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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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전주부성 풍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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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는 우리나라 전라북도 중앙에 있는 시로서. 전라북도의 도청소재지로 지방 행정·교육·문화의 중
심지이며,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도시이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전주에는 전주 부성
의 남문인 풍남문과 태조 이성계 영정을 모신 경기전(慶基殿), 향교, 객사 등 조선조 문화유산들이 산
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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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성계가 운봉 황산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오면서 승전 연회를 열었던 오목대, 이성계
의 고조부가 살던 터인 이목대, 조선 첫 천주교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이 처형된 자리에 세워진 전동
성당, 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전주에는 한옥 600여 채가 이마를 맞대고 있는 한옥마을이 있다. 한
옥마을 중심가인 은행로는 화강석으로 인공 실개천이 조성되어 한옥 고유의 전통적인 멋과 어울려
독특한 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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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308호. 1층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지붕은 겹처마를 둔 팔
작지붕이다. 전주부성(全州府城)의 4대문 가운데 남문(南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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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에는 전주전통문화센터와 한옥생활체험관, 술박물관, 공예품전시관, 한지공예원과 전주비빔
밥과 막걸리, 전통찻집 등등 우리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 것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번에 유랑자는 전
주의 상진인 풍남문을 찾았다. 풍남문은 한옥 마을 경기전에서 약 200여m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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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먼저 남부시장 야시장이 있는 시장 중간에 주차를 하였다. 물론 양쪽다 보기위함이다. 전주
여행에서 지나는 길에 웅장한 풍남문을 보면서 언제한번 들러 보아야지 하면서도 지나만 첬던 풍남문!.
드디어 오늘에야 제대로 보게 되었다. 유랑자는 시장골목길을 나와 인도에서 풍남문을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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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관찰사 홍낙인(洪樂仁, 1729∼1777)이 새로 건립하고는 풍남문 과 패서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홍낙인은 한나라 고조의 향리(鄕里) 이름인 ‘풍패(豊沛)’를 따서 풍남문이라고 지었다고 풍남문
상량문(上樑文)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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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 위치는 교차로 로터리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차도를 건너야만 들어갈수 있는 형태의 구조다.
먼저 로타리 밖에서 감상에 젖는다. 마치 서울의 숭의문 같이 2층 한옥으로 된 구조로 제법 웅장하다.
전북 전주시 전동 83-4에 위치한 풍남문(豊南門)은 전북 전주의 관문이자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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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의 왕도였으며 조선 왕조 의 발상지인 전주를 상징하는 풍남문은 유서 깊은 성문으로 근래에
복원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전주의 명물이다. 본래 전주 부성은 호남 곡창지역을 지키
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이전에도 성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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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은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98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동서남북 4대
문 가운데 하나인 남문(南門)으로 창건되었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전주는 풍패지향으로 중시되어
태조 원년(1392)에 완산유수부로 승격되면서 호남지역을 관할하는 전라도의 수부(首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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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관찰사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기록에 의하면, 전주 부성은 고려 말에 최유경(崔有慶,
1343∼1413)이 쌓았는데,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때 왜적이 전주부성으로 침공하자 성을 굳
게 지키고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하였고, 이 때 왜군이 며칠을 머무르면서 불태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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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는 조선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 의 관향. 그래서 유방 의 고향 풍패에 견주어 과거에는 전주를 흔
히 풍패향, 풍패지향이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에는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전주성의 남문이 바로 풍남문이다. 후백제의 왕도였으며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상징하는 풍남
문은 유서 깊은 성문으로 근래에 복원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전주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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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방치 되었다가 137년 후인 조선 영조 10년(1734년)에 조현명 관찰사가 성곽을 중건하면서, 남문
에는 3층 문루(門樓)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부르고, 동·서·북문은 2층으로 건립하고서 각각 판동
문(判東門), 상서문(相西門), 중차문(中車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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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조 43년(1767)에 당시 성내를 휩쓴 정해년 대화재로 다시 불타버렸으며 그해 9월에 부임한
관찰사 홍낙인(1729∼1777)이 재건하고 남문을 명견루에서 풍남문(豊南門)으로, 서문을 상서문에서
패서문(沛西門)이라 고처 부르게 되었다. 이는 풍남문 상량문(上樑文)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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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뒷면의 가운데칸 기둥 위에는 용의 머리를 새긴 초공(草栱)을 바깥으로 뻗도록 놓았는데, 귀기둥
위에 얹은 공포인 귀포에도 살미인 귀한대(限大)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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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순종 때(1907) 도시계획에 의해 종각, 포루등 성문이 헐어지고 풍남문만 남았다 이후 1978년 3
년간에 걸처 옹성여담 쌓기와 치석 등을 통해 종각과 포루를 보수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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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풍남문은 전주의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1905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의
해 전주부성 4대문 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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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농민군이 고창, 함평, 원평을 거처 노도와 같
이 전주로 진격하여 관군과의 치열한 격전 끝에 관군을 물리치고 입성하여 마침내 일시적이나마 화
약을 맺기도 한 의의가 큰 성문이다. 풍남문과 지척에 있는 전동성당은 풍남문의 성벽을 헐어 낸 돌
로 성당의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순교한 뒤, 그의 목을 풍남문의 누각에 매달아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기도 한 곳이다. 풍남문(豊南門)이란 이름은 이곳 전주가
태조 이성계의 관향(貫鄕)으로 중국을 처음 통일했던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豊沛)에 빗대어 전
주를 ‘풍패향’이라 부른것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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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도깨비 얼굴[鬼面]·꽃병·짐승상[獸像] 등의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
각된 화반(花盤)이 올려져있다. 이처럼 공포에는 조선 후기 의 건물에 나타난 복잡한 조각이나 기교,
재치 등이 였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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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성 가운데 남쪽 성문을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란 뜻의 풍남문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 중심 천하
관을 가졌던 조선 사대부의 단면을 보는 듯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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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0년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 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문루의 양
편에는 ‘풍남문’과 ‘호남제1성’이라는 현판이 앞뒤로 걸려 있다. 현재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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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은 1층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2층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되어있다. 성문의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는 2층의 문루가 있다. 성벽은 아랫부분부터 네모반듯하게 다
듬은 큰 화강암을 여러 층으로 차분하게 쌓아 올렸으며, 홍예문 정상부분에는 마감돌을 얹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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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 주변에는 벽돌로 여장(女墻)을 쌓아 둘렀는데, 좌우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우고서 문짝을 단
일각문(一角門)을 협문(夾門)으로 두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하였다. 문루의 1층과 2
층은 평면이 다르고, 규모 또한 갑자기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원래 3층 구조로 설계되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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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면에는 ‘풍남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북쪽면에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쓴 현판
이 걸려 있다. ‘풍남문’ 글씨는 1842년(헌종 8)에 전라도관찰사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것
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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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는 앞뒤로 각각 4개의 고주(高柱)를 세웠는데, 이것은 2층까지 그대로 이어져 2층의 모서리 기
둥이 되었으므로, 2층의 너비는 갑자기 줄어든 모습을 보인다. 이런 기둥 배치는 우리나라 문루 건축
에서는 예가 많지 않아, 풍남문은 건축적인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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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안에는 나무로 만든 계단을 놓아 2층으로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반자가 없는 연등천장[椽背天障]이며, 각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이 달려 있다. 문루의 각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昌枋)만 돌리고서 주심포(柱心包) 건물처럼 공포(栱包)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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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위에 올린 쇠서는 다포(多包)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앙서(仰舌)와 수서(垂舌)의 모습인데, 앙서에
는 연꽃 봉오리 모양이 새겨져 있다. 암튼 4대문 의 복원은 연간 1000만 관광객이 찾는 한옥마을 과
인접한 전주 부성 과 연계되어 있다. 4대문 주변지역은 70~80년대 근대 문화유산과 풍남문·전동성당
·객사·전주부성 등 문화재와 연계한 관광자원 활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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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당시 풍남문 종각에서 파루를 쳐서 부성 안에 조석을 알렸던 종소리는 사라지고 이제는 서울 보
신각 종처럼 제야(1월1일 0시)에 종소리를 울려 이 고장의 새해 새 희망을 안겨주며,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게 한다. 문화재는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전주시는 하루빨리 나머지 3
개문 다 복원되어 수원 화성처럼 전주 부성의 옛 명성과 영광을 되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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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cafe.daum.net/b2345/9t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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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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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있는 사진과 자세한 글 잘 보았습니다. 가끔 오며가며 보는 곳이랍니다^^
감사 합니다.
저의 여행기에 관심을 가져 주신데 대하여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앞으로도 함께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