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2. 7. 수요일.
음력 섣달 스무여드레. 사흘 뒤에는 음력설이 온다.
<한국국보문학> 문학지 '2024년 3월호'에 낼 글 하나를 고르려고, 내 고교 여자 동창생의 카페에서 글 뒤적거리다가 아래 글을 발견했다. 만21년도 더 된 옛 글이다.
원 제목은 '왜 싼 구두를 신느냐고 묻는다면'이다.
'싸구려 구두'으로 제목을 바꿔서 <한국국보문학카페> '세상사는 이야기방'에 올린다.
문학지에 낼 글은 더 찾아봐야겠다.
싸구려 구두
지난해 2001년 2월. 서울 송파구 잠실롯데백화점에서 ‘랜드로바’ 제품의 캐주얼 구두 한 켤레를 샀다.
대전에서 사는 누나가 "아들 결혼식에 외삼촌이 꼭 와야 한다. 옷 한 벌 해 입고 내려오라"며 돈을 서울로 부쳤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돈을 다 써야 했다. 무슨 옷을 살까 고민하다가 가죽옷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봄옷이 나오기 직전이라서 가죽옷은 세일했다. 기백만 원의 정찰제를 비웃기나 하듯이 가격이 헐했다. 세일가격으로 샀다. 그러고도 남는 우수리로 구두 한 켤레와 넥타이 한 개를 더 골랐다.
나는 구두를 고르려면 매번 까다롭게 고민했다. 발 길이는 짧았으나 살찐 발등으로 볼이 넓은 구두를 골라야 했다. 상점에 진열된 구두는 젊은이의 취향에 맞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구두길이가 길고, 구두코가 뭉텅 잘려 나가고, 마귀할멈의 삐죽한 코를 닮은 구두가 태반이었다. 구두코가 동그랗고 앞볼이 넓되 점잖아 보이는 것을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몇 군데의 상점을 돌아다니면서 발에 꿰어 보고 산 구두가 캐주얼 구두였다. 발이 편하다는 이유로 캐주얼만을 고집하여 2001년의 춘하추동 사계절을 다 지내고 또다시 한 해를 보냈다. 일 년 하고도 아홉 달을 신고 있으니 어지간히 오래 신었다.
최근 어쩌다 보니 오른쪽 구두밑창이 반으로 딱 꺾였다. 이물질로 구두밑창이 갈라진 것 같다. 그 틈새로 물이 샐지도 모른다며 걱정을 했으나 아직은 더 신을 만하다는 핑계로 계속 신은 게 불찰이었다
서초구 양재역(지하전철)을 빠져 밖으로 나오니 가을비가 내렸다. 오른쪽 발바닥이 차가웠다. ‘앗차, 이제 정말로 구두가 새는구나’ 후회했지만 이미 시내로 나온 이상 별 수 없었다. 질퍽거리는 물속을 밟지 않는 것이 최상책이었으므로 빗물이 덜 괴는 보도블록 위로 오른발을 잽싸게 옮겼다. 양말이 젖어서 발바닥은 척척했고, 기분도 께름칙했다. 11월 중순경의 가을비는 마음까지 춥게 했다.
허참 낭패이다. 어쩌자고 가을비는 내리는가. 2002년이 다 지나가는 11월 중순경에 비가 올 줄을 누가 알았는가. 촉촉이 내리는 비에 속마음이 거슬려도 문상(問喪) 가야 했다.
충남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은 올해 신축한 건물이기에 보기에도 산뜻했고, 영안실의 내부와 방바닥도 깨끗했다.
양말에서 밴 물기가 매끈한 나무판자의 마룻바닥에 조금이라도 묻을까 봐 걱정했다. 또 亡人의 영정과 喪主에게 절을 하려고 엎드렸을 때에 양말바닥이 남의 눈에 보일까 봐 걱정했다. 양말이 검은 색깔이고 물기가 살짝 배었기에 흔적이 내비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해도 혹시 남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마음은 산란했다. 구두를 벗어야 하는 짧은 순간이라도 가난한 티를 내보이기가 무척 싫었다. 다행히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며칠 동안이나마 가을날씨가 건조하였으므로 헌 구두를 신고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있는 직장에 다녔다.
퇴근길에 송파구 잠실 새마을시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3층 건물에 세든 허름한 구두가게가 눈에 띄었기에 ‘한번 둘러보자’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님, 어서 오세요. 한번 신어 보세요"라는 젊은이의 경쾌한 목소리가 신바람을 쌩쌩 일으켰다.
"편한 구두를 원하시죠?"라며 그는 허름한 구두를 신은 내가 어떤 종류의 구두를 살 것인지를 금방 알아맞혔다.
265mm의 구두는 발이 꽉 조여서 아플 것 같고, 270mm는 조금 클 것 같아서 망설이는 나에게 "구두밑창을 깔면 괜찮을 겁니다"며 밑창을 깔아주는 젊은이의 商術에 빙그레 웃기만 했다. 굳이 탓하지 않고 모르는 체했다. 270mm의 구두가 조금 작아진 느낌이었다. 4만 원을 주고 산 구두가 캐주얼 계통이며, 그 모양새가 투박했다.
집에 와서 "나 구두 한 켤레 샀어"라며 내 것만 산 사실이 미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거실에서 한 번 더 신어 봤다. 발목이 헐렁거렸다. 265mm의 발에 270mm의 구두를 신었으니 헐렁거릴 만했다. 직장의 책상설합 속에는 새 구두가 수년 동안 처박혀 있다. 볼이 좁고 발가락과 발등이 아파서 싣기를 포기한 경험이 있기에 나는 매번 헐렁거리는 새 구두만을 고집했다.
"왜 싸구려 샀어요? 백화점에 가면 발이 편한 랜드로바 구두가 많잖아요? 당신은 발이 편해야 되잖아요?"라는 아내의 볼멘 핀잔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는 발 편한 신발을 신을 줄 모르나? 싼 맛에 샀으니 조금 불편하면 그냥 참지 뭐. 싸구려를 신으면 어때?’ 속으로 앙앙거렸어도 내심은 아내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했다. ‘싸구려는 제 값을 한다’는 것을 익히 잘 알면서도 한번 더 속아보고 싶었다. 값이 쌀 수록 구두가 쉽게 망가지고 또 발이 불편하다는 과거의 경험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난해 2월 8만 원을 주고 산 랜드로바 구두는 21개월째 신었다.
새 구두는 랜드로바 구두의 반값으로 샀으니 구두를 신을 기간도 그 절반이면 된다. 2003년 10월까지 신어야 한다는 계산이나 기분은 그게 아니다. 일 년도 훨씬 못 미칠 것 같다. 임시방편으로 값이 싼 구두를 샀으니 어쩔 수 없이 제 값을 다 할 때까지 부지런히 신어야겠다.
그리고 내 인생도 싸구려가 아니더냐? 내 인생에 걸맞게 내 몸의 부착물인 양복 속옷 양말 셔츠 넥타이 혁대 구두 시계 지갑 등 온갖 생활용품도 싼 것으로 구색을 갖춰야겠다.
2002. 11. 27.
첫댓글 최선생님 검소하고
편안한 인품이
묻어납니다.
최선생님은 내면이 지식과
지혜로 가득차서
자신감이 넘치니
까 그런 검소한
생활로도 빛이 나
는 것 같습니다.
훌륭한 인품 잘
배우고 갑니다.
편안한 하루가 되세요.
저는 큰딸이 운동
화를 사주어서 새
신발을 신었어유.
롯데백화점 11층
에 가서 나이키 신
발로 270mm골
라서 샀어유.
아디다스도 갔는데 마음에
드는 나이키로
샀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제 외모는 보잘것없지요.
그런데 한번 성깔을 부리면 그 어떤 누구라도 몰아부치겠지요.
특별히 잘못하거나 죄 지은 게 별로 없고, 또 물건에 욕심을 내지 않기에 당당하게 맞서겠지요.
저는 밥을 먹을 때 밥풀 하나라도, 고추가루 한 점이라도 아껴서 다 먹으려고 하지요.
식물도 한 때에는 살아있는 생명이었지요.
남의 살점인 먹을거리이기에 저는 소중히 여기지요.
세상에나. 저같은 사람이 잔뜩 있으면 생산공장이 문 닫고, 장사꾼도 장사를 접어야겠지요.
적당한 소비가 있어야 재생산과 판매가 뒤따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