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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후연의 평주라는 곳이 어느 어느 지역인지요?
憂國과 愛國 추천 0 조회 406 08.12.24 20:15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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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2.28 22:05

    첫댓글 평주는 지금의 조양시(朝陽市) 인걸로 압니다.

  • 08.12.26 14:15

    후연의 평주는 대략적으로 수도 용성 인근지역을 말합니다. 그리고 '후연이 있었던 지역은 유주관할'이라고 적으셨는데, 유주가 물론 대체적으로는 북경 주변을 지칭하는 말이기는 하나 정권에 따라 소속 군현의 규모와 관할 영역 등이 여러번 바뀌었기 때문에 '유주라는 주 안에 후연이 있었다'는 표현은 좀 모호하다고 느껴집니다^^; 한 예로 후연은 북위와의 일전(참합파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북 지역의 대부분을 잃게 되자 유주의 군현들을 요서 인근 지역으로 전부 옮깁니다.

  • 09.02.05 15:07

    본래 유주의 중심지는 북경 지역이지만, 진짜 유주를 잃게 되자 어거지라도 유주를 자국 영토 내에 따로 하나 만든거죠;; 또 다른 예로 동진의 경우는 하북 일대를 5호 16국 시대의 혼란으로 잃게 되자 화중 일대에 화북의 군현들을 이치시킵니다(이걸 교주군현이라고 하죠). 마찬가지로 유주라는 땅이 전 시대에 걸쳐 딱 떨어지게 불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후연>유주는 성립할 수 있지만 유주>후연은 무리가 있다고 보시면 될 듯 하네요.

  • 08.12.27 15:24

    당시의 용성(한나라 때의 유성)은 지금의 조양시로 비정되고 대릉하 중류 쯤에 해당됩니다. 북경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평주는 사마씨 진나라때 유주를 분할해 설치되었습니다.(요동,현도,낙랑,대방,창려) 그 뒤 낙랑, 대방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되었고 요동, 현도군 땅(즉 요동땅)은 고구려와 모용씨가 서로 뺏고 뺏기기를 거듭했는데 전연의 모용외가 공식직함이 원래 평주목이었습니다. 중간과정은 알 수 없으나 이 직전에 후연의 모용희가 고구려의 신성, 남소성을 함락하고 700리 땅을 개척했다는 점과 우국과 애국님이 제시한 기사로 볼 때 이때 당시의 평주는 용성과 고구려 사이, 즉 요하를 둘러싼 지역으로 생각됩니다.

  • 08.12.27 15:42

    그리고 이 뒤 모용희는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패배했고, 구니예를 진동대장군 영주(營州)자사로 삼아 숙군성을 진수하게 했는데(진서), 광개토태왕에게 요동땅을 결국 빼앗긴 뒤 서쪽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재편했고 평주는 폐지되거나 유명무실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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