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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량 신도비(朴東亮神道碑) 김상헌(金尙憲) 찬(撰)
이 비는 1725년(영조 1년) 경기도 시흥에 건립된 박동량신도비(朴東亮神道碑)로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지었고, 송시열(宋時烈)이 글씨를 썼으며, 민유중(閔維重)이 전액을 하였다.
박동량(朴東亮 : 1569~1635년)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자룡(子龍)이며, 호는 오창(梧窓)이다. 1590년(선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검열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호조좌랑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왕을 호종하는데 위험함을 무릅쓰고 먼저 해서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1596년(선조 29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인 연안부사가 되었으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상을 당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에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며, 인목대비가 유폐되었을 때 상소하였다가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복직되었으며,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유배를 갔다. 유배에서 풀려난 지 2년만에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 후에 아들인 박미(朴瀰)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방일유고(放逸遺稿)』가 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박동량신도비
행우참찬 금계군 증영의정 시충익 박공신도비명
유명조선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선공신 숭록대부 행의정부우참찬 겸판의금부사 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금계군 증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금계부원군 시오창 박공신도비명-서문을 겸하여
숭정(崇禎) 8년인 을해년(1635, 인조13) 2월 5일에 고(故) 판부사(判府事) 오창(梧窓) 박공(朴公)이 졸하였다. 나는 시골에 은거해 있으면서 병이 나 달려가 곡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 떠나가는 상여를 전송하였다. 발인을 하고 난 뒤에 그의 아들인 도위군(都尉君) 미(瀰)가 동양위(東陽尉) 신군석 익성(申君奭翊聖)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이는 내가 외람스럽게도 죽은 아버지의 벗 중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공이 귀양 가 있을 적에 일찍이 편지를 보내 주어 서로 알게 되었는데, 그 일을 스스로 서술하고는 또 한두 명의 다른 사람들과 나의 형제가 능히 그 뜻을 알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그 글을 읽어 보고는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 다시는 읽을 수가 없었다. 공이 지금은 졸하고 없다. 그러니 명을 짓는 것을 또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동량(東亮)이고, 자는 자룡(子龍)이며, 자호는 오창이다. 만년에 분진(汾津)의 봉성(鳳城)에 거주하였으므로 또 호를 봉주(鳳州)라고 하였다. 박씨는 실로 신라의 국조(國祖)이다. 후세 자손들의 계파가 나뉘어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으로 이주한 분이 공의 선조이다. 고려 때에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상충(尙衷)이 있어 직언을 하다가 죽었는데, 《고려사》에 이분의 전(傳)이 있다. 이분이 은(訔)을 낳았는데, 우리 태종을 도와 좌의정(左議政)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올랐다. 재차 세대를 전하여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임종(林宗)이란 분이 있었다. 이분이 이조 정랑 조년(兆年)을 낳았고, 정랑공은 사간(司諫) 소(紹)를 낳았다. 사간공은 대사헌(大司憲)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공은 바로 대사헌공의 넷째 아들이다.
박씨는 본래 귀족이었는데, 공의 숙부인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에 이르러 표창을 하여 은혜를 기록함에 따라 사간공에게 영의정을, 정랑공에게 좌찬성을, 목사공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문이 더욱 성대해졌다. 의정공이 기묘사림(己卯士林)으로 추중을 받고 그의 아들 다섯 사람이 모두 재행(才行)으로 드러나게 되고 공의 형제와 여러 사촌들이 모두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면서부터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모공(某公)의 아들과 손자는 그 재목이 이러한 자리를 차지해 마땅하다고 말하여 외척이라는 이유로 혐의를 두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현자가 많다는 것을 안 것이다.
공이 이미 1품(品)의 품계에 올라서는 대사헌공에게 여러 차례 추증하여 영의정에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을 추증하고, 어머니 임씨(林氏)를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하였다. 정경부인의 아버지는 좌승지로 추증된 임구령(林九齡)으로, 석천(石川) 선생 임억령(林億齡)의 아우이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 7월 2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사람됨이 잘 담금질하여 벼린 칼날 같았는데, 어렸을 적부터 곧바로 그 날카로움이 드러났다. 서너 살이 되었을 때 글을 배웠는데, 곧 철저히 깨달아 알았다. 아홉 살 때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밤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천둥이 치자 공이 옷깃을 바로 하고 일어나 앉아 있었다. 이에 할머니가 이상하게 여겨 “아가는 어찌하여 홀로 공경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들으니 천둥 번개가 치면 반드시 변고가 생긴다고 해서 그럽니다.” 하자, 할머니가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서는 훌륭하다는 명성이 자자하여 동년배들 사이에서 혁혁하게 뛰어났다.
19세에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집안에 장가들었다. 생관(甥館)에 거처하고 있을 적에는 날마다 부모님에게 가서 문안하였고, 물러나서는 친하게 지내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놀면서 잡극(雜劇)을 벌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깊은 밤까지 책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늘 그렇게 하였는데,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조차도 실로 그렇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문사(文事)가 있을 적마다 공의 글재주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공이 신령의 도움을 받는다고 여겼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다음 해인 경인년(1590)에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가 사관(史館)에 천거되어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순서에 따라 승진하여 대교(待敎)와 봉교(奉敎)가 되었다. 경연(經筵)에서 기주(記注)를 함에 있어서는 민첩함이 남들보다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때 마침 사관(史官)을 새로 천거하게 되었는데, 공은 권세 높은 집안의 자제들로서 급급하게 진출하려고 하는 자들을 다 물리치고 청빈한 가문 출신으로서 선비들의 추앙을 받고 직임을 능히 수행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였다가 권세가들의 뜻을 크게 거슬러 논핵당해 파직되었다.
임진년(1592)에 전례에 따라 호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호조는 공문서가 몰려드는 곳이라서 일에 익숙한 관리라도 혹 그 번거로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관리들이 제수된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는 자못 깔보았는데, 공은 손으로 붓을 잡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한 번 보고 나면 빠진 것이 없었다. 이에 노련한 아전들이 크게 놀라면서 모두 혀를 내둘렀다. 병조로 개차되어서는 마정(馬政)을 주관하였다. 일을 다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왜적들이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급히 올라왔다. 그 때문에 장사(將士)들 가운데 전쟁터에서 사람이 탈 말과 짐을 실을 말을 공에게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는 자가 날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도 공은 여유작작하게 대처하였다. 서쪽으로 파천하는 날까지도 말이 아직 4000여 필이나 남아 있었다.
공은 어가(御駕)를 따라가 밤에 임진(臨津)에 도착하였는데, 호위 군사가 모두 달아나고 상께서 홀로 배 위에 앉아 있었다. 공이 도승지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직접 호위 군사들을 불러 모아 60여 명을 얻은 다음에야 어가가 비로소 행렬을 이룰 수가 있었다. 송도(松都)에 머물러 있을 적에는 장관(長官)과 함께 문 아래에서 숙직하였는데, 군인들이 밤중에 놀라 소동을 일으키자 장관 역시 창졸간에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성문을 밀치고 나가려고 하였다. 공이 그 까닭을 깨닫고 저지하면서 동요치 못하게 하니, 조금 뒤에 안정되었다. 장관은 평소에 공을 재주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더 공의 담력을 칭찬하였으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박랑(朴郞), 박랑’이라고 하였다. 또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을 겸임하여 기밀에 관계되는 일에 참여하여 들었다.
어가가 평양에 머문 지 한 달이 지나자 백성들이 그것을 믿고 안도하였으며, 외방에 사는 자들 역시 처자식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임진에서 군사들이 궤멸되고 왜적들이 패강(浿江)으로 진격해 옴에 미쳐서는 조정의 의논이 어가를 옮겨 가야 한다고 하였다. 뭇 신하들이 대부분 함흥(咸興)으로 가자고 하였는데, 우상 윤두수(尹斗壽)와 공 및 이유징(李幼澄)만이 평양을 굳게 지키고자 해 힘껏 다투었으나, 반대 의견을 꺾을 수가 없었다. 백성들이 어가가 출발할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듣고는 길을 막고 떠들어 대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공이 급하게 계책을 진달하여 그 계책대로 함에 따라 백성들이 비로소 물러갔다.
영변(寧邊)에 이르렀을 때 세자에게 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고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상께서는 강을 건너 요동(遼東)으로 들어가 중국에 내부(內附)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잇따라 도망쳐서 상을 따르는 자가 10여 인에 불과하였는데, 낭서(郞署)들 가운데에는 겨우 공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에 육조(六曹)와 비국(備局)과 춘추(春秋)와 내승(內乘)의 여러 임무가 모두 공에게 맡겨졌다. 공은 여기저기 분주하게 오가면서 온 힘을 다해 일을 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그런데도 매번 위태롭고 힘든 때를 당해서는 번번이 척후병을 자처하여 직접 어가를 호위하니, 상께서 마음속으로 중하게 여겼다.
이때 대사헌공이 늙어 병든 몸으로 분조(分朝)에 소속되어 가던 도중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이 실정을 진달하고는 남아서 구료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해 허락하는 전지를 이미 받았는데, 대사헌공이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이미 어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는바, 차마 또 신의 아들로 하여금 아비를 먼저하고 임금을 뒤로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듣는 자들이 측은해하였다.
공이 마침내 어가를 따라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얼마 뒤에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당시에 기무(機務)가 더욱더 많아져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들 황황해하였다. 공은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영특함을 발휘하여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는데, 재상이 공의 계책을 좋게 여겨 시행한 바가 많았다. 얼마 뒤에 조정 관원들이 차츰차츰 모여들었는데, 지난날에 바른 사람을 헐뜯던 자들이 다 없어지지 않아 스스로 불화(不和)의 단서를 드러내었다. 이에 분별하자는 의논이 크게 일어났는데, 공은 한결같이 잘 조정하면서 치우침이 없이 주의(注擬)하였다. 그러자 여러 노성한 분들이 앞 다투어 공에게 세도(世道)를 바로잡을 책임을 떠맡으라고 권면하였다.
공은 중국말을 잘하였으므로 전후로 중국 조정의 관원들을 접대할 때면 반드시 상의 앞에 있었는데, 매번 고문(顧問)을 받을 적마다 대답하는 것이 아주 상세하고 단아하였다. 이에 중국 사람들이 모두들 주목하여 보았으며, 상께서도 역시 재주가 있다고 여겼다.
계사년(1593, 선조26) 10월에 상께서 해주(海州)로 돌아와 머물러 있으면서 공을 직급을 뛰어넘어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공은 감당해 내지 못할까 두려워 재차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좌승지로 전보되었다가 병으로 체차되었다. 다음 해인 갑오년(1594)에 도승지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가 겨우 26세였다. 공은 더욱더 두려워하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마침내 사임하였다. 공이 전에 기성(騎省)에 있을 적에 장관으로 있었던 사람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공을 끌어들여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로 삼았는데, 이는 공을 대우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자리를 만든 것이다. 공은 불가한 점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극력 사양하였다.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경사(京師)에 조회 가서 동지를 하례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이 침입했다는 경보가 다시 급박해지자 왕비와 후궁을 받들어 모시고 수안(遂安)으로 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고을들이 잔파되어 일이 대부분 안정되지 않았으나 공에게 의지하여 꾸려 나갈 수가 있었다. 얼마 뒤에 도승지로 소환되었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상이 제천(堤川)으로 내려가 주둔해 있으면서 응원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제천은 왜영(倭營)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혹자들이 이르기를, “성상을 옹위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적들에게 임할 것이다.” 하였으므로, 종신(從臣) 가운데 뽑힌 자들이 모두 가지 않으려고 머뭇거리면서 속으로 두려워하였다. 공은 전에 외방에 있었으므로 선발된 사람 가운데 끼어 있지 않았으나, 상소를 올려 따라가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상께서 내려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해직되고서 귀성(歸省)하였다. 그러자 특명으로 품계를 올려 주어 떠나가는 길을 빛나게 해 주었다.
공은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어 나갔다. 몇 달 뒤에 대사헌공의 상을 당하였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을 당하여 대궐에 나아가 곡하고 상차(喪次)로 되돌아왔다. 상기를 마치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산릉(山陵)의 자리를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상소를 올려 요설(妖說)을 깨뜨림에 따라 드디어 길한 곳을 얻을 수 있었다. 경기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면되었다.
병이 낫지 않고 계속되자 상께서 염려하여 의원을 보내어 병세를 묻고 약물을 하사하였는데,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예와 같이 하였으며, 다른 은혜로운 하사품은 또 더 많았다. 공은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였으며, 이를 인해 외직에 보임해 주어 병을 조리하고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말뜻이 아주 간절하였다. 이에 상께서 읽어보고 감탄하면서 수찰(手札)을 내려 너그러운 내용으로 답하고는 외직에 보임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다음 해인 임인년(1602)에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나왔는데, 접대하기가 아주 어려워 머무르는 곳마다 힘이 달렸다. 상께서는 기전(畿甸) 지역은 더욱 물품이 부족할 것이라고 여겨 곧바로 공을 재차 경기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공은 조처를 함에 있어서 올바른 방도를 얻어 두 사신이 끝내 많은 재물을 얻어 돌아갔으며, 백성들은 큰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그 뒤 병으로 인해 사임하였다.
또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도내의 업무가 한가로울 때가 많아 순행을 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여러 명승지를 둘러보았는데, 옛 친구나 빈한한 선비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몹시 즐겁게 놀았을 뿐, 나머지는 털끝만치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영월(寧越)에 갔을 때에는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는데, 묘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는 상심하였다. 상께서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는 실로 공이 발의한 것이었다.
조정에서 임진년(1592, 선조25)에 수고한 여러 신하들의 공로를 기록할 때 공이 건의하기를, “모두 사직을 위한 일이기는 하나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운 사람은 말고삐를 잡고 따라간 사람과 서로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니니, 의당 무공을 세운 사람을 많이 녹공(錄功)하여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러나 당시에 권세를 쥐고 있던 정승이 기각시켜 공의 말을 쓰지 않았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을 감정(勘定)함에 있어서는 본디 지나치게 인원수를 많이 뽑아 무시당하지 않는 경우가 드문데, 공은 제조(提調)로서 그 일을 주관하면서 일체를 다 문서를 살피고 행실에 의거하여 처리하였다. 그러자 녹공되지 못한 자들도 스스로 원통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윽고 이등공신에 책훈되어서 호성 공신(扈聖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며, 품계가 뛰어올라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다. 공은 양전(兩銓)과 탁지(度支)와 춘관(春官)과 추관(秋官)에서 참판(參判)과 참의(參議)의 직에 두세 차례 제수되기도 하였고,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과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된 것이 각각 한 차례였으며, 경연(經筵)과 관각(館閣), 금오(金吾)와 총관(摠管), 승문원(承文院)의 제조(提調) 역시 누차 겸임하였다. 그러나 모두 오래 있지 않고 옮겨졌다.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항상 나라 재정의 수입과 지출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묵은 폐단을 크게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에 바야흐로 참판과 더불어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는 큰길에 위치해 있어 사신들의 행차가 줄을 이었으며, 관할하는 곳이 넓어 공문서가 아주 많은 지역이었다. 그런 데다가 변경 오랑캐들의 침입이 자주 발생하였으며, 백성들의 풍속이 송사를 좋아하고 뇌물질을 잘하였으므로 정사(政事)를 하는 자들이 괴롭게 여겼다. 그런데도 공은 이를 잘 다스려 쌓인 문건을 물로 씻은 듯이 말끔히 처리하였으므로, 양쪽이 서로 다투는 사이에 추잡한 말이 없었다.
한가한 틈에는 유학을 일으키고 무예를 익히고 저축을 늘리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두루 물으면서 험요(險要)한 곳을 직접 돌아다니고, 빙성(氷城)을 쌓아 겨울철의 방어에 대비하였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 거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쉽사리 거행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손님을 초대하여 술자리를 베풀어 풍류(風流)를 간간이 발하였으며, 친족들을 어루만져 주었는데, 친소(親疏)에 따른 대우가 적절했으므로 인정에 잘 화합하였다. 또 강포한 아전으로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내쫓았으며, 채수(債帥)로서 탐학을 부린 자의 정상을 적발해 내어 금지시켰는데, 채수는 능히 권세를 잡고 있던 정승의 희로를 조종할 수 있는 자였고, 강포한 아전은 바로 공의 조카뻘로서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임씨 부인(林氏夫人)이 장수하고 강녕하여 먼저 막내아들이 있는 신천(信川)의 치소(治所)로부터 둘째 아들이 있는 황주(黃州)로 옮겨 왔는데, 왕래함에 있어서 빛이 났다. 공이 또 평양으로 맞이해 와 아침저녁으로 잘 봉양하면서 강호의 누관(樓觀) 가운데 경치가 좋은 곳을 가려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그리고 여러 자손 형제들이 좌우에서 모시고 즐겁게 해 주니, 원근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칭찬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원래의 봉호를 지닌 채 집으로 돌아갔다.
선조(宣祖)의 상을 당하여 공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에 임씨 부인이 졸하였다. 공은 부음을 받고 밖으로 나가 호곡(號哭)하면서 조정에서 조처가 있기를 기다렸으며, 체차의 명을 듣자마자 그 즉시 상차(喪次)로 달려갔다. 그러나 곧 조지(朝旨)를 받들고 서둘러 돌아와 장사 지내는 곳으로 가서 참여하였다. 선조께서는 파천하는 중에 공을 보기를 한집안의 부자 간과 같이 보았으며, 공 역시 은혜에 감격하여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에 스스로 방상(方喪)으로 자처하면서 마치 아버지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그런 데다가 또 늙은 모친을 생각하여 걱정이 가슴속에 맺혀졌다. 두 상을 한꺼번에 당함에 미쳐서는 말투와 용모가 참혹하고 초췌해져 좌우 사람들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은혜를 베푸는 예에 따라 세 품계가 뛰어올랐다. 국상을 마치고는 집에 있는 상차로 돌아갔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외제(外除)를 하고는 다시 원래의 봉호를 지닌 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이첨(李爾瞻) 등과 더불어 은밀히 서로 창화(唱和)하면서 스스로 협일(夾日)의 공(功)이 있다고 여겨 기세를 떨치면서 방자하게 굴었다. 정인홍은 심지어 어지러운 말로 어진 이들을 비방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말투가 마치 욕설을 하는 것과 같았다. 이에 공은 상소를 올려 정인홍을 극력 배척하였으므로, 간당(奸黨)들이 몹시 한스럽게 여겨 앞 다투어 공을 해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봉산(鳳山)의 수령으로 있는 신률(申慄)이 급변을 올렸다. 신률은 본디 간사한 사람으로서 여러 간흉들의 뜻이 화(禍)를 얽어내어 권병(權柄)을 도둑질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떠돌아다니는 거지 가운데 형편없는 자를 체포한 다음, 독한 형벌을 가해 억지로 승복시켜 역모를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친히 국청(鞫廳)에 나와 안문(按問)하였는데, 공이 추관(推官)으로서 들어와 앉아 있다가 그의 공사(供辭) 중에 어긋나는 것을 가끔 대신(大臣)의 물음을 인하여 낱낱이 말하니, 이이첨 등이 곁에 있다가 눈을 흘겼다. 그다음 날 광해군이 하교를 내리기를, “박동량(朴東亮)은 역적을 비호하면서 구해 주려고 하였으니, 판의금부사의 직을 체차하라.” 하였다. 그러자 언관(言官)으로 있던 자들이 간흉들의 뜻에 따라 공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광해군이 단지 삭탈관작하라고만 명하였다. 한참이 지난 뒤에 다시 원봉(原封)으로 서용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 여름에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의 공사(供辭)에서 서양갑(徐羊甲)과 정협(鄭浹) 등을 끌어들였는데, 전후가 한 맥락으로, 모든 것이 이이첨의 무리가 위협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을 화란(禍亂)의 괴수로 지목하면서 칠신(七臣)을 끌어들였는데, 그 귀결점은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에게 있었다. 영창대군 이의는 당시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처음에 선조께서 병이 깊어졌을 때 영창대군 이의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어서 뒷날에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이에 유교(遺敎)를 직접 써서 광해군에게 동기간을 사랑하라고 부탁하고, 또 공경(公卿) 가운데 일곱 사람을 뽑아 영창대군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공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이첨 등이 그것을 가리켜 조작된 전지(傳旨)라고 하면서 그의 당파 사람들로 하여금 칠신이 곧바로 밝히지 않았다고 논하게 하면서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다. 정협이 무고한 바가 또 아주 광범위하여 선조(先朝) 때의 재신(宰臣)과 명사(名士)들이 대부분 벗어날 수 없었다. 공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일이 밝혀져서 즉시 풀려났다.
처음에 공이 옥사(獄辭)를 공술(供述)하면서 힐문하는 데 따라 변명하였는데, 국구와 말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자취가 있어 스스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다른 일은 연관이 없었다. 그 뒤에 궁중에서 무고(巫蠱)하는 일이 발각되었는데, 간신(奸臣)이 그중에 한 부분을 끄집어내어 증거로 삼았다. 그러자 평소에 공을 해치고자 하던 자들이 또다시 때를 타고 아첨함에 따라 드디어 견강부회하여 옥안(獄案)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위로 장추궁(長秋宮)에까지 침해되어 그 화가 점점 뻗어나가자, 뭇사람들이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서 공을 심하게 욕하였다. 오직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현헌(玄軒) 신흠(申欽) 두 분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후 10여 년 사이에는 그 사실을 밝게 아는 자가 없었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이이첨 등이 폐모(廢母)할 것을 의논해 정하고는 다시 칠신(七臣)을 화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라고 하면서 먼 외방으로 쫓아내기를 청하였는데, 중도(中道)에 유배 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뒤에 석방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금상께서 반정을 한 뒤에는 의논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지난 일을 뒤늦게 허물 삼으면서 더 이상 사실을 자세하게 캐 보지도 않은 채 흉흉하게 부화뇌동하여 반드시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의금부에 있는 옛 문서를 가져다가 공이 진술한 원서(爰書)를 보고는 서로 “참으로 이와 같다면 이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였다. 이때 수상(首相)으로 있던 이원익(李元翼) 및 정엽(鄭曄), 이귀(李貴) 등이 공을 위하여 그 일에 대해 해명한 것이 모두 아뢰어졌다. 그러자 혹자가 이르기를, “기왕의 일이 이와 같은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이 드물었으므로 전해지지 않았다. 공은 편안한 기색으로 길에 오르면서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의 일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있는 5년 동안에는 발걸음이 집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부안(扶安)으로 양이(量移)되고, 6년 만에 다시 내지(內地)로 옮겨져 충원(忠原)으로 유배되었으며, 또 2년이 지난 뒤에는 스스로 편한 대로 처신하라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이에 공은 서호(西湖) 가에 집을 사서 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공은 평소에 건강하여 질병이 없었으므로 날마다 친척들과 더불어 화락하게 지내면서 서로 즐기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담증(痰症)에 걸려 하룻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눈을 감고 말았다. 춘추는 67세였다.
공이 졸한 뒤에 여러 아들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 상께서 여러 대신들에게 묻자,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등 네 사람이 의논을 올리기를 모두 “실상은 그 글과 같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께서 관작을 지난날과 같이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은 중간쯤 되는 키에 낯빛이 검었으며, 수염이 양쪽 뺨을 뒤덮었고, 눈빛이 형형하여 20리 바깥의 사람과 물건을 판별하였다. 성품은 진솔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때때로 유학(儒學)에 속박되지 않았다. 집안에 거처하면서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곡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형제간에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냈으며, 말을 하면 거스르지 않았다. 어버이가 죽은 뒤에 분가(分家)를 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맏형수와 큰누이의 말에 따랐다. 벼슬길에 나가서는 훈귀(勳貴)로 있었는데도 자산이 불어나지 않았다. 이에 향리 사람들과 친척들이 칭찬하면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다른 사람과 처함에 있어서는 피차간의 간격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흉중에 감추고서 쌓아 두는 것이 없었다. 누가 지나치게 속생각을 쉽사리 드러낸다고 말해 주면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먼저 의심하거나 어렵게 여기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는 내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곤궁한 자를 애처롭게 여기고 어려운 자를 도와줌에 있어서는 귀천에 따라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마치 자신의 집인 양 몰려들어 담소하는 소리가 자리에 넘쳐흘렀다. 상대와 마주해서는 형신을 잊어 공이 귀한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관직에 임하여 공무를 봉행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사적인 일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일을 당해서는 강개한 마음으로 곧장 행해 나가면서 회피하지 않았다. 비록 유배지에 있을 때라도 조정에서 한 가지 선정(善政)을 시행하였다고 들으면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으며, 시의(時宜)에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하였다고 들으면 하루 종일 걱정하면서 탄식하였다. 평소에 특별히 좋아하는 기호가 없었는데, 오직 술만은 좋아하였으나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용만(龍灣)에 머물러 있을 적에는 곱게 단장한 기생들이 즐비하였으나,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스스로를 지키기를 처녀와 같이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절조를 중히 여기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적에 몇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며, 또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자신의 장점을 자부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었다. 한가롭게 살게 된 이후로는 자못 서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흥이 오르면 붓을 들어 글을 썼는데, 뛰어난 솜씨가 당시의 대가들 못지 않았다. 산수(算數)와 녹명(祿命)과 사어(射御) 등의 여러 기예에도 두루 통하여 묘한 조예가 있었는데, 이 역시 익히지 않고서도 능하였던 것들이다. 저술한 《방일유고(放逸遺稿)》 두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묘령의 나이 때부터 이름을 드날려 재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었는데, 위태로움에 임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져서는 충성심이 더욱더 드러났다. 국가가 중흥되고서 공은 공신이 되어 초상이 기린각(麒麟閣)에 걸렸는데, 숯 많고 검은 머리카락이 변하지 않았으니, 아, 성대하기도 하다. 화(禍)가 하늘로부터 내려져서 몸에 백 가지 재앙이 가해져 요추(撓椎)가 그치지 않은 탓에 투저(投杼)가 이루어졌다. 세상의 운세가 다시 형통해져서도 가는 길은 더욱더 궁해져서 대궐문을 지척에 두고 원통함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은 승지 민선(閔善)의 따님이고 우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외손녀인데, 공보다 한 살이 아래였다. 시집을 오기 전에는 여사(女士)라고 칭해졌으며, 시집을 옴에 미쳐서는 며느리로서는 며느리답고 어머니로서는 어머니다웠다. 도위(都尉)가 일찍이 병이 나 가 보았을 적에는 병 문안을 온 붕우가 많은 것을 보고는 문득 언짢아하는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의빈(儀賓)의 도는 마땅히 숨어 살기를 처녀와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렇지 않으니, 내가 들어온 바와는 다르다.” 하였는바, 그 식견이 높고 사려가 깊기가 이와 같았다. 을축년(1625, 인조3) 5월에 공을 따라 강진(康津)의 적소(謫所)에 가 있다가 병으로 인해 졸하였다. 묘소는 파주(坡州) 아무 리(里)의 아무 산(山) 아무 등성이에 있었는데, 뒤에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공과 합장하였다.
공은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도위인 미(瀰)로, 선조(宣祖)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도위(錦陽都尉)에 봉해졌다. 차남은 의(漪)로,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이 되었다. 삼남은 유(濰)로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사남은 자(澬)이다. 사위는 대사성 이명한(李明漢), 참봉 홍처심(洪處深), 진사 유성오(柳誠吾)이다.
금양도위는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세교(世橋)이다. 이명한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찬 이일상(李一相)과 진사 이가상(李嘉相)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의(漪)는 2남 1녀를 두었고, 홍처심은 2남 2녀를 두었고, 유성오는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고(貳高)로 1남이 있는데, 이름은 아무개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아, 내 맘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 嗚呼
근세 이래로 사림에서 의지하는 사람은 / 自近世士林所倚
오리 이공과 백사 이공과 현헌 신공과 추탄 오공과 수몽 정공뿐인데 / 有若梧里李公白沙李公玄軒申公楸灘吳公守夢鄭公而已
이들 몇 분은 모두 / 玆數公者
사사로이 아부하여 공론을 폐하지 않을 분들임이 분명하도다 / 不阿私以廢公論也明矣
공에 대해 헐뜯으며 하는 말들이 / 訾公之口
남기같이 꾸며 대어 부풀렸다네 / 哆若南箕
공 스스로 밝히지를 않으셨으나 / 公不自白
이들 몇몇 분들이 다 밝혀 주었네 / 數公者白之
사람들이 헐뜯어서 욕했던 바를 / 衆人所毁
군자들이 완전히 다 회복시켰네 / 君子所完
이분들의 말씀은 다 믿을 만하니 / 其言足徵
후세에서 영원토록 보게 되리라 / 來世永觀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동지경연사 지춘추관 성균관 세자좌빈객 김상헌은 찬함
대광보국숭록대부 행중추부사 겸영경연사 세자부 송시열 씀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우빈객 민유중 전자를 씀
行右參贊錦溪君贈領議政謚忠翼朴公神道碑銘
有明朝鮮忠勤貞亮效節恊策扈 聖功臣崇祿大夫行議政府右叅賛兼判議禁府事知春秋館事同知 經筵事五衛都摠府都摠管溪君贈忠勤貞亮效節恊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錦溪府院君諡忠翼梧窓朴公神道碑銘并序」
崇禎八年乙亥二月五日。故判府事梧窓朴公卒。余伏田間。病未能走哭。以詩送哀。旣靷。其子都尉君瀰以東陽申君奭之狀。問銘於余。以余辱在先友之列也。公之在謫。嘗貽書相識。自敍其事。且謂一二公及余兄弟能知其意。余讀之。心竊愍然。而未有以復也。公今亡矣。不昧之託。又安可辭乎。按公諱東亮。字子龍。自號梧窓。晩寓汾津之鳳城。又號鳳洲。朴氏實新羅國祖。後世子孫分派。徙羅州之潘南者爲公之先。高麗時判典校寺事尙衷。直言死。史有傳。生訔。佐我太宗。位左議政錦川府院君。再傳而有尙州牧使林宗。牧使生吏曹正郞兆年。正郞生司諫紹。司諫生大司憲應福。公卽大憲公之第四子。朴氏本貴族。而至公之叔父潘城府院君應順。以褒紀恩。贈司諫領議政。正郞左贊成。牧使吏曹判書。由是門益大。自議政公重己卯士林。子五人皆用才行顯。及公之兄弟群從。靡不歷敭華貫。世皆稱某公之子若孫。其人材宜居此。而未有以后戚爲嫌。人知朴氏之多賢也。公旣進一品。累贈大憲公領議政潘川府院君。母林氏貞敬夫人。夫人之父。贈左承旨九齡。石川先生億齡之弟也。隆慶己巳七月二十四日生公。爲人如出冶釰。少卽露其鋒鍔。數歲。受書便透悟。九歲侍王母所。夜暴雨震雷。公整衣起坐。王母怪問兒何爲獨坐敬。應曰聞迅雷必變。王母大異之。稍長聲華藹蔚。赫赫出曹偶上。十七。委禽驪興閔氏之門。處甥館。日必往省父母。退與諸所好者游戲。雜劇竝陳。歸則讀書至丙夜不輟。以爲恒。所好者實未之知。凡有文事。見公藻思溢發。咸謂公得神助。己丑中司馬。明年擢文科丙科。選補承文院權知副正字。薦入史館爲檢閱。序陞待敎奉敎。講筵記注。敏捷過人。一時稱之。會當新薦。公盡斥權貴家躁競子弟。而薦素門負士望能任是職者。大忤權貴論罷。壬辰。例遷戶曹佐郞。地部號簿書叢。練事吏或多不勝劇。吏見除目。竊少之。公手閱朱墨。一過無遺漏。老胥大驚吐舌。改兵曹主馬政。治事未久。倭報猝急。將士戰用騎載。取給於公者日無算。裕如也。至西幸日。馬尙有四千餘匹。公從駕夜到臨津。衛卒盡走。上獨坐舟中。公與都承旨李公恒福親自招呼。得六十餘人。駕始成行。次松都。與長官同直門下。軍人夜驚。長官倉卒不省。亦欲排門出。公覺其故。挽止勿動。頃之乃定。長官素才公。至是益稱其膽勇。遇事必曰朴郞朴郞。又兼備邊司郞。預聞機密事。駕駐平壤逾月。民恃以按堵。外居者亦移帑入城。及臨津師潰。賊逼浿江。庭議移蹕。群臣多主咸興。獨右相尹公斗壽,公曁李公幼澄計守平壤。力爭不得。百姓猝聞嚴駕。攔路大噪。言不擇聲。衆恐其爲變。不知所出。公急以計白行之。民始退。至寧邊。命世子監撫。而上欲渡遼內附。朝臣接踵遁去。從上者十餘人。而在郞署厪公一人而止。於是六曹備局春秋內乘諸務。悉以委之。公犇走殫力。備盡勞瘁。每當危疑艱險之際。輒自當前茅。以身衛駕。上心重之。大憲公以老病屬分朝。於路病。公陳情留救已得旨。大憲公上疏。臣旣不能從。不忍又使臣之子先父而後君。聞者惻然。公遂從駕至義州。拜吏曹佐郞知製敎。已陞正郞。時機務益殷。上下遑遑。公周旋其間。英發痛快。宰相善其計。多所施行。亡何朝士稍稍來集。向時醜正者未革。自見不靖之端。於是分別之議大行。公一意調劑。注擬無偏。諸老成爭勉以世道之責。公善華語。前後接遇中朝官。必在上前。每被顧問。進對詳雅。華人無不目屬。唯上亦以爲才。癸巳十月。上回駐海州。超拜同副承旨。公恐懼不敢當。再辭不許。轉至左承旨。病遞。明年進陟都承旨。是時公年始二十六。公益恐懼。屢疏獲辭。公騎省時長官居相位。引爲備邊司副提調。蓋刱設以待公。公有所不可。力辭之。冬至朝京賀節。丁酉倭警復急。奉王妃後宮出次遂安。州縣殘破。事多未集。賴公以濟。亡何以都承旨召還。經理楊公鎬要上駐堤川應援。堤去倭營固不遠。而或云因擁南下以臨賊。從臣預選者皆逡巡內懼。公前在外。不置選中。上疏請從。會上不果行。解職歸覲。特命增秩。以寵其行。爲養得延安府使。數月遭大憲公憂。懿仁王后喪。赴臨反次。服闋授護軍。山陵久未定。上疏論破妖說。遂得吉卜。拜京畿觀察使。病免。病在沈滯。上念之。醫問藥物。視大臣禮數。而它恩賜又加渥焉。公上箋陳謝。因乞補外。調病養母。詞理懇到。上覽之嗟賞。手札優答。不許外補。明年詔使顧天埈,崔廷健來。接待至難。所在力屈。上以畿甸尤羸薄。卽用公再授觀察使。措置有方。二使卒飽橐歸。而民不甚病。病辭。又爲江原道觀察使。道務多暇。行部所過。探歷諸名區。遇故人寒士。觴詠甚適。餘不煩一毫。詣寧越祭魯山墓。見其蕪廢。心傷之。還朝有遣近臣致祭之命。公實發之也。朝廷紀壬辰諸臣勞。公建言俱社稷役。而執干戈與執羈靮。不翅有間。宜多錄武功。以慰士心。人皆韙公。而權相格不用。勘定原從故多溢。鮮不以加衊。公以提調主其事。一切按簿据行。見詘者亦自以不冤。已策勳二等。賜扈聖功臣號。超階封錦溪君。公於兩銓度支春官秋官。爲參判參議或至再三。爲大司成大司憲政府參贊者各一。經筵館閣金吾摠管承文提調亦婁兼焉。皆未久遷。拜戶曹判書。公常慮國計出入不相侔。意欲大更宿弊。方與僚貳講究。亡何出爲平安道觀察使。孔道艫鞅交錯。所轄大饒文書地。邊胡易警。民俗喜訟善賄。爲政者病之。公能劇。積案若洗。兩競之間。無汚舌。以其暇。興儒學。課武藝。廣儲偫。詢問疾苦。躬歷險要。設氷城以弭冬防。諸難徧擧者。一運之掌。而至於賓筵酒席。風流間發。撫接親故。疏戚適宜。人情翕然。黜悍吏之不從令者。啓發債帥貪恣狀已之。債帥能使權相喜怒。悍吏卽公之族子最親者。人尤以爲難。林夫人壽考康寧。先自叔子信川治所。移從仲子于黃州。往來有煒。公又迎至平壤。朝夕備養。江湖樓觀。選勝稱壽。子姓兄弟。左右娛侍。遠近艶稱。秩滿。以原封就第。宣祖之喪。以公爲守陵官。其冬林夫人卒。公受訃出外。號哭竢處。聞許代卽犇喪次。旋奉朝旨。促還葬聽會下。宣祖於艱難中。視公如家人父子。公亦感鏤至骨。自居方喪若喪考然。又復思戀老母。憂心鬱結。及遭兩慼。言貌慘悴。左右不忍見。用恩例進三階。國喪畢。歸次於家。辛亥外除。復原封兼判義禁府事。鄭仁弘與李爾瞻等陰相唱和。自謂有夾日之功。飛楊恣睢。仁弘至乃亂道謗賢。其言類詈。公疏斥甚力。奸黨恨之。爭欲中傷。會鳳山守申慄上急變。慄本細人。通知諸奸意在構禍盜秉。捕得流丐無狀者。淫刑強服。謂爲謀逆。光海親御按問。公以推官入坐。其供辭牴牾者。時因大臣問及歷言之。爾瞻等在傍側目。明日光海下敎。朴某營護逆賊。其遞判義禁。言路承望請拿鞫。只命削爵。久之敍復原封。癸丑夏。朴應犀獄起。辭引徐羊甲,鄭浹等。前後一脈。皆從爾瞻輩訹脅中出來。指國舅金悌男爲禍首。連及七臣。歸在永昌大君㼁。㼁年甫七歲。初宣祖寢疾。念㼁無已。憂它日不全。手書遺敎。屬光海愛護同氣。又託公卿中七人。公與焉。至是爾瞻等指爲僞旨。使其黨論七臣不卽辨明。竝請削去仕版而已。鄭浹所誣又甚廣。先朝宰臣名士殆無得脫者。公與諸公俱逮。事雪卽釋。始公對獄。隨詰以辨。與國舅間隔。故有其跡自不得不及。無它連。其後宮中巫蠱事發。奸臣拗此一段。籍以爲證。素害公者又乘時從臾。遂傅會成案。上浸長秋。其禍漫漫。衆人不察。訾公已甚。獨白沙李公恒福,玄軒申公欽心知其不然。蓋十餘年間。莫有能明之者。丙辰爾瞻等定議廢母。復以七臣爲媒糱。請竄遠方。止配中道。越六年放還田里。今上反正。好議論者追咎前事。不復究實。汹汹雷同。必栫棘之乃已。諸大臣取金吾舊牘。見公爰書。相謂審如此。此何罪歟。於是首相李公元翼及鄭公曄,李公貴爲之論解。皆報聞。或謂己事不至此。然人鮮知之。故不傳。公夷然就道。戒家人備身後。在康津五年。足不闚外戶。丁卯量移扶安。又六年。內徙忠原。又二年恩宥自便。買屋西湖上。爲終老計。公素強無疾病。日與親懿衎衎相樂。一夕忽痰上。夜未竟。奄然瞑矣。春秋六十七。公旣歿。諸孤陳狀叫冤。詢諸大臣。領議政吳允謙等四人議皆曰。實如其章。乃命復爵如故。公中身容貌黯然。胡髥被頰。目光炯炯。能辨二十里外人物。性喜眞率。時時不爲儒縛。其居家事親。無不曲盡。兄弟相爲知己。言出莫逆。親歿析著。一聽丘嫂長姊。仕宦勳貴。貲產不益。鄕里親戚。稱之無二口。與人處。削去町畦。胸中無少隱蓄。或言其太露則曰。待人先設疑難。是我自不信也。哀窮卹難。無間貴賤。所至衣冠如歸。談笑溢席。相對忘形。不知其爲貴人也。至於莅職奉公。絶無私撓。當事慷慨。直前不避。雖在流離中。聞朝廷行一善政則喜形於色。有不合時宜者。憂歎終日。平生無耆好。唯好酒而不至亂。久客龍灣。佳冶比屋。閉門自守如處子。人重其操履。自少讀書。數行俱下。又能強記。然負其所長。意不屑也。閑居以來。頗近書籍。興到落筆。翩翩不讓當家。旁通算數祿命射御諸藝。得其妙詣。亦有不習而能之者。所著放逸遺稿二卷蔵于家。最公妙歲蜚英。以才自見。臨危蹈難。忠猷益著。國家中興。公爲功臣。肖像麟閣。鬒毛未變。吁盛矣哉。禍降自天。身更百罹。撓椎不止。勢成投杼。世運重亨。途轍逾窮。咫尺脩門。含用長逝。豈非命也。夫人承旨善之女。右參贊李公夢亮之外孫。少公一歲。在室有女士稱。及歸婦婦母母。都尉嘗病。往視之。見朋友問疾者多。輒不悅曰。儀賓之道。當屛居若處子。兒其不然。異乎吾所聞。其高識遠慮類此。乙丑五月。從公在康津謫所病卒。墓于坡州某里某山某原。後某年某月某日。與公合葬。生四男三女。長卽都尉。承宣祖第五女貞安翁主。錫封錦陽。次漪。文科掌令。次濰。有文行。夭歿。次澬。女壻大司成李明漢,參奉洪處深,進士柳誠吾。錦陽一男世橋。李明漢四男一女。修撰一相,進士嘉相。餘幼。漪二男一女。洪處深二男二女。柳誠吾一女俱幼。貳高一男名某。銘曰
嗚呼。自近世士林所倚。有若梧里李公,白沙李公,玄軒申公,楸灘吳公,守夢鄭公而已。茲數公者不阿私以廢公論也明矣。訾公之口。哆若南箕。公不自白。數公者白之。衆人所毀。君子所完。其言足徵。來世永觀。
崇政大夫行吏曺判書兼弘文舘大提學藝文館大提學同知 經筵事知春秋舘成均舘事 世子左賓客金尙憲撰」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 領經筵事 世子傅宋時烈書」
資憲大夫刑曺判書兼 知經筵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右賓客閔維重篆」
崇禎紀元後九十八年十月 日立」
右碑文撰於崇禎辛巳喪難因循汔今八十年適來孫師益以江華留守始鑱之墓前嗚呼詎非幸歟公官資止崇祿判義禁後依 國典贈議政孫世橋僉正仲房世采左議政季房世集判官外孫判書李一相副提學端相領議政柳尙運最貴㴲參奉生世察訪世楫直長惟癸丑一供公議定矣今無更贅矣噫大賢如沙溪元老如梧白諸公其智豈不若彼譊譊者哉而率爲公辨白甚至盖必有權度矣覽者於此旣推原公本心而又必細細參稽乎當時事實如何禍機如何設以身處合作如何置對則始信諸賢之論非於公有一毫放過而夫子所謂據紙上語指點前人甚易者爲可戒也云」
玄孫中訓大夫前司憲府掌令弼周謹記」
五世孫嘉善大夫江華府留守錦原君師益謹書」
출처 장달수 한국학 카페
[출처] 박동량 신도비(朴東亮神道碑) 김상헌(金尙憲) 찬(撰)|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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