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97) 야합(野合)
입력2022-03-18 00:00 수정2022-03-17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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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아들 하나 원한 공흘
북촌 무녀집에 찾아가는데…
성은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노나라 노양공 10년, 진나라가 제후의 군사를 동원해 노나라로 쳐들어와 핍양성을 공격하자 노나라 군사들은 가을바람에 낙엽이 쓸리듯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출입문이 내려앉았다.
노나라 군사들의 퇴로가 막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됐을 때 기골이 장대한 노군 한 사람이 혼자서 문을 들어 올렸다. 노나라 군사들이 물밀듯이 성을 빠져나갔다. 키가 팔척에 어깨가 태산처럼 벌어진 대부 공흘(孔紇)은 노나라의 구국 영웅이 됐다. 그의 무공(武功)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하급 무관 공흘은 백성으로부터 추앙받는 대부였지만 그 자신은 개인적으로 한평생 번민에 휩싸여 웃음을 잃고 살았다. 첫 부인 시(施)씨가 딸을 낳았다. “그래, 첫 딸은 부자라더라” 했지만 둘째도 딸, 셋째도 딸, 넷째·다섯째도 딸딸. 그는 딸을 줄줄이 아홉이나 낳았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공흘은 첩을 얻었다. 마침내 득남을 하고선 그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아들 바지를 내려 고추를 확인하고 하늘 높이 치켜들어 ‘껄껄’ 웃었다. “이놈은 장군감이야, 장군.”
공흘이 아들을 안고 마실을 나오면 동네 사람들은 그의 어린 아들을 ‘공 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장군감인 그 녀석은 네살이 돼도, 다섯살이 돼도 스스로 걷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반듯한 아들 하나 낳지 못해 이렇게 대가 끊어지는가.” 그는 주막 술독에 빠져 살았다.
동네 노인 한 사람이 주막에 들렀다가 술 취한 공흘을 만났다. 공흘은 회갑을 넘긴 나이에도 덩치는 태산이요, 완력은 황우 같았다.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술을 마시다 말고 흐느껴 울었다. 노인이 합석을 하고 “여보게 공흘, 아직 늦지 않았네” 하자 공흘의 귀가 번쩍 열렸다. “산 너머 북촌에 무녀가 딸 셋을 데리고 있는데 무슨 연유인지 시집을 보내지 않아 셋 모두 혼기를 넘기고 이제야 부랴부랴 신랑감을 찾는다네. 한번 가보게.” 노인네가 일러줬다. 무녀 딸이면 어떻고 기녀 딸이면 어떤가. 어디 찬밥, 더운밥 가릴 때인가.
이튿날, 젊은 시절에 입던 대부 군복을 차려입고 뒷산을 넘고 들판을 지나 강을 건너 북촌으로 갔다. 무녀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잡고 앉자 첫째 딸이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한 공흘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둘째 딸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푹 숙인 공흘이 일어서려는데 셋째가 들어왔다. 첫째·둘째도 고개를 저었는데 가장 어린 셋째야 어련하랴. 그런데 마주친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제 어미와 소곤거리더니 셋째가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공흘을 따라나서는게 아닌가. 꽃 피고 새 지저귀는 춘삼월, 온 산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었고 만화방창(萬化方暢·만물이 봄기운을 받아 힘차게 자람)으로 벌·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들었다. 종달새는 남풍을 타고 하늘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강을 건널 때 공흘은 새색시를 등에 업었다. 두 손으로 새색시 엉덩이를 떠받쳤다. “네 이름이 뭐냐?” “안징재(顔徵在)라 하옵니다.” “몇 살이냐?” “열여섯살이옵니다.”
엉덩이를 받친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배꼽 아래에 피가 쏠렸다. 강을 건너자 둑 옆 새파란 잔디밭이 마치 비단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공흘이 안징재를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이어 새색시를 잔디밭에 눕히고 품에 안았다. 타고난 장골이라 환갑을 넘겼어도 아직도 뜨거운 피가 끓었다.
열여섯살 새색시 안징재도 첫날밤 화촉을 밝힌 금침 속은 아니었지만 늙은 새신랑의 포옹에 중천의 해를 바라보며 그의 품에 안겼다. 들판에서 야합(野合)을 치른 것이다. 잔디밭에 깔아놓았던 공흘 군복에 새빨간 핏자국이 선명했다. 공흘의 피가 또 쏠려 야합을 삼합이나 치르고서야 일어나 차림새를 추스르고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봄을 밟고 들판을 가로질렀다.
새 신부 안징재는 무녀의 딸에 나이도 어렸지만 얌전한 공흘의 처로 가정을 꾸려갔다. 안징재가 헛구역질을 하더니 배가 불러왔다. 열달 만에 공흘은 그렇게도 바라던 옥동자를 낳았다. 공흘은 야합으로 얻은 아들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 구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영리했다. 구가 세살 때 아버지 공흘은 이승을 하직하고 열일곱살 때 어머니 안징재를 여의었다. 공구는 창고지기로, 가축 사육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구가 바로 대학자요, 사상가요, <논어(論語)>의 주인공, 유학의 아버지, ‘공자(孔子)’다!
세상이 갈기갈기 찢어져 어지럽던 춘추전국시대, 공자는 30여년 동안 이 나라, 저 나라를 유랑하며 왕 72명을 만나 인(仁)과 덕(德)의 통치를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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