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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린왕자의 들꽃사랑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그린리버
제주의 목관아는 2002년 12월까지는 관덕정이란 누각하나만 덩그러이 앉아있는 곳이었다.
어렸을 적 부터 이곳을 오고가며 저 누각은 무엇이었을까? 건물형태를 보면 무슨 조선시대 관리들이 있었던 곳 같은데 어떻게 다른 누각들은 없고 제주시 한복판에 저런 옛날 누각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한적이 있었다.
사실 이 관덕정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년)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 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손과 철거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기에 60년 70년대를 제주에 살아온 본인으로썬 이 건물의 용도를 모를수밖엔....
제주시 삼도1동, 제주시의 중심가에 자리한 관덕정(觀德亭)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중 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에 측면 4칸인 단층의 팔작지붕 이다. 세종 30년인 1448년에 제주목사인 신숙청(辛淑晴)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지은 관덕정은 성종 11년인 1480년에 중수 되어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 것이다)에서 지은 이름이다. 내가 어렸을 적 관덕정의 용도가 무엇이냐 선생님께 물었더니 옛날 관리들이 이곳에서 활을 쏘았다고 함에 그 흔적을 찾아보면 과녘이 놓여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이곳은 제주 사람들이 모이는 회합의 장소였으며 관덕정 앞 광장에 큰 시장이 서기도 했었고, 1947년 3.1절 기념행사 시 그 이듬해 제주4.3이 일어나게 하는 기폭제를 제공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제주를 방문하여 이 관덕정 관람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관덕정 정 중앙 처마 밑에 걸린 편액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 관덕정의 편액은 안평대군이 썼으나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덕형의 장인이기도 한 이산해가 쓴 현판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덕정은 창건 이후 제주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1901년에 일어났던 신축교난 당시 지도자였던 이재수가 관덕정 광장에서 효수되었다. 1947년 2월 10일에는 제주 시내의 중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외쳤다. 그리고 근세의 역사에서는 4ㆍ3항쟁 당시 무장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이 며칠이나 내걸려 있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내가 이 관덕정에 대한 기억은 우리형제는 여섯남매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해마다 여섯 자식들이 생일이 돌아오면 그날 생일상을 차려주고선 꼭 형제들이 사진찍으러 보내셨다.
큰누이 생일이건 막내 생일이거 우리는 아침 미역국을 나눠먹곤 자신이 최고로 치는 옷을 갈아입고는 광양로터리가있는 집에서 걸어서 어린애들 걸음으로 30여분이나 걸려가는 이 관덕정길가에있는 사진관을 꼭 들리곤 했었다. 그러면 우리 형제들은 사진사를 동반하여 이 관덕정앞에서 사진 촬영을 찰카다했었다.
그날의 주인공은 독사진 한장더 찍히는 사치를 부렸었고. 올망졸망 단발머리를 한 누이들과 사내아이둘이 이 관덕정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몇십장씩 있을텐데 세월이 흘러 하나 둘 독립들하며 자기사진들 자기가 찾아가며 이리저리 흩뿌려져 그 사진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때에는 이 관덕정 앞에 종려나무와 분수대가 있었는데....
관덕정 대문인 진해루를 들어서면 펼쳐지는 전경이다.바로 앞 연못이 있고 각 누각들이 펼쳐져 있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제주시 이정표엔 새로운 관광지 지명이 나타나있더라고요. 관덕정 대신에 제주목관아라고 씌어있는데 제주목관아? 그게 어디지? 라는 의구심 속에 그냥 지나쳤던 곳이 바로 관덕정 이름이 없어지고 제주목관아라고 새로운 지명을 적어놓았던 것이다.
군뢰청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회랑처럼 지어진 건물 첫번째에 이 군뢰청이 들어서 있었다. 죄수를 관리하는 군졸이 대기하면서 업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이형상의 [남환박물]에는 총 네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옛날 제주는 도둑이 없었다는 三無의 고장인데 이 군뢰청이 필요가 있었을까? 역시 죄수를 담당하던 군졸이라서 얼굴부터가 험악하게 생겼다.
호적방
이 호적방은 호적대장을 보관하는 장소인 호적고(庫)와는 달리 관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서원이 민원인들에게 준호구등의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던 곳이다.사실 호적하면 나도 할말이 많다.
몇년 전 국가에서 '조상 땅 찾아주기 운동'이 활발하던 때가 있었다. 나의 증조부께서 구한말 ,'이재수 민란'이 한창이었을 적에 지방관아의 병방으로 계시면서 이 난을 일으켰던 난민꾼들을 당신의 마당에서 식사대접을 시키셨다는 얘기를 나의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어서 "예전 나의 조상이 행새깨나 하셨겠구나"하여 조부,증조부, 고조부의 행적을 찾으려 지방면사무소에 호적을 열람을 해보니 나의 증조부가 1891년도에 출생하시고 언제 卒하셨다는 일제강점기 때 적어놓은 히라가나만 남아있는 서류를 FAX로 보내옴에 당시의 기록도 허술했었고, 조선시대 때 기록한 호적들이 하나도 안 남아있다고 지방공무원이 얘기를 함에 허탈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아마도 제주4.3에 그 기록들이 다 불타 없어졌다고 하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접어야했었던 때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제주시 성안 풍경이다.
제주읍성은 고려 1105년(숙종) 때 행정적, 군사적 기능을 목적으로 축조한 성으로 이곳에는 지방민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관아시설 및 민가등이 형성되어있었다.구한말까지 유지되었던 제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내려진 1910년 읍성철폐령으로 차례로 헐리기 시작하였다.
1920년 후반에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공사가 이루어져 바다매립을 위한 골재로 사용되면서 제주읍성은 대부분 헐리고 말았는데 현재 오현단 위쪽에 일부 잔해를 간직하고 있는 성벽을 제주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 관리해 오고있다. 나의 어렸을 적 이 성밖에 위치한 지금의 제주시청이 있는 광양벌에 살적에는 이곳을 성안, 무근성(옛날 성)이라 부른 이유를 이제야 알수 있을것 같다. 지금의 서울 四大門안을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예전 이곳 관덕정 앞 마당은 각종행사를 치뤘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이어지는 제주의 축제 '한라문화제'일환으로 미인선발을 위한 장소가 되었었고, 유명한 제주의 5일장도 여기에서 열렸었다한다. 당시에 이 관덕정 마당앞은 제주 최고의 중심지 이었으니까....
또한 19001년 이재수 민란 때 대정현에서 밀고들어온 민란꾼들이 이곳에서 제압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이곳 관덕정 마당에서 참수되었던 곳이다.참고로 '이재수 민란'은 작가 현기영의 원작'변방에 우짖는 새야'를 원작으로 이 민란을 그린 영화가 제작된적이 있다.
심은아,이정재 주연으로 당시의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저항하여 일으킨 민란으로써 그때에 희생된 천주교인들의 묘소가 제주시 황사평에 안장되어 성지로 지정되있고, 제주는 천주교인들이 찾는 성지들이 많다.
우련당에서의 연회모습
이 우련당 앞에 연못이 하나있는데 1526년 이수동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안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하여 연곷을 심은뒤 그곳에 세웠던 정자이다.
그 뒤 양대수 목사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는데 제주사람들이 남을 미워할 때 빗대어 말하는 "양대수 개구리미워 하듯 한다"라는 제주의 속담이 유래되었다 한다.지금 1년째 서울의 돌담길 옆 정동극장에서 '배비장전'이 공연되고 있다.
이 '배비장전'은 배비장과 애랑의 사랑얘기를 옮긴 판소리로써 당시의 제주 기생 애랑은 인물이 여러 모로 빼어난데비해, 배비장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金卿)을 따라온 평범한 인물로서 애랑이의 미모에 반해 구애를 하는 배비장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이때의 배비장은 아마도 이곳 제주목관아 우련당에서 만난 애랑이를 사랑하지는 안했을까?
무기 보관고
무기보관고는 원래 영주협당 부근에 있었으며,여기에는 제주방어에 필요한 무기류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전시되어있는 무기들이 다소 허접하게 보인다. 활과 화살통,검과 창, 군졸들을 독려하는 징, 그리고 군화등 몇점이 없었다. 그래서 1900년대 당시의 천주교 박해로 쳐들어 온 프랑스군함을 물리칠 힘이 없었던 걸까?
제주목에 부임해 온 제주목사
제주 목사는 육군과 수군의 대장인 방어사와 절제사를 겸했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는 총 286명에 달한다.제주목사의 임기는 2년 반(30개월)이나 일신상의 이유나 문책등의 사유로 인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이가 허다하였고,부임을 명 받았으나 오지못했던 이도 12명이 된다.
한편,조선시대의 관리임용에 상피제가 적용되었기에 제주출신이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없었으며,평균 재임기간은 대략 1년 10개월 정도였다.이와 같은 연유로 인하여 제주에 파견된 목사들은 바람많고 살기힘든 제주에서 어서 임기만 마치면 떠나기를 기다렸고 제주민들을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여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웠으나 일부 목사중에는 선정을 베풀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자라던 어린시절엔 이곳 제주목관아터에는 제주경찰서,지방법원,검찰청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제주지방검찰청과 법원은 5.16도로가는 고산동산을 지난 2도2동으로 이전을 하였고, 제주경찰서는 경찰국과 함께 신제주로 이전한것으로 안다.이번 목관아 방문시 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었던 이곳에 일반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던 장소로 이용되던곳이다. 원래는 5칸 건물이었는데, 입추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귤 알맹이가 누렇게 익어 공무를 보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을 산책하노라면 맑은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가득한 나무를 쳐다보느라면 심신이 상쾌해진다. 옛날 목사들은 이렇게 관아안에 풍류를 즐길 수있는 전각들을 지어놓고 공무를 수행했었나 보다.
목관아를 둘러보는 내내 제주의 하늘엔 5분간격으로 이륙하는 비행기들을 볼 수가 있었다. 예전 제주공항에는 한시간, 아니 몇시간에 한두대 이.착륙이 이루어 졌었는데 참으로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오늘 이시간에도 관광제주를 방문하고 있었음에 버림받았었던 제주땅이 이제는 세계속의 제주가 되어 일취월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방(敎坊)은 관기와 악공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곳이다.원래 장춘원이었던것이 1689년(숙종15년) 이우항목사에 의해 교방으로 그 이름이 바뀐듯하다. 악공은 관노 중 에서 선발하였고, 기생은 관비중에서 재주와 용모가 있는 자를 택하였다.
이 교방에는 본기와 요녀기,및 다모등이 있었던 것으로 [탐라방영총람]에는 적혀있는데, 한때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했던드라마'대장금'에서 김영애가 이곳 관노로 있으면서 그 미모에 어찌하여 기생으로 발탁되지않고 의녀로 다시 한양으로 착출되어갔는지 의문이 간다. 그때 지방관이었던 지진희의 보호에의해서 가능했었을까?(ㅎㅎㅎ 우수갯 소리)
예외없이 이곳 제주 목관아 대문앞에는 이런 비석이 씌어 있었다."수령이하인 자는 말에서 내려라"
이러한 하마비는 조선왕조의 본산지 전주 경기전 앞에서도 써있었고, 서울의 궁궐 어느곳에서도 가마나 말에서 들어오라는 비석이 서 있었다. 역시 제주의 목민관도 제주에선 왕이였던가 보다."나를 만나러 오려면 대문 밖 말에서 내려 들어오라고" 말하는걸 보면....
제주 최초의 백화점이 서있었던 건물
이곳은 한 때 제주의 최고 번화가였던 중앙로이다.그러나 제주는 백화점영업이 안되는가보다.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제주는 백화점이 없으니까. 언젠가 제주를 방문했었을 때 친구에게 이러한 연유를 물었던 적이 있다. 그 이유는 과도한 백화점의 수수료는 입점 상인들에게 부담이 되어 아예 브랜드 상품을 취급하려면 대리점이나 아울렛 매장을 운영하는게 낫다고 한다.
그렇다 지금도 모든 백화점에서의 수수료체제는 수수료가 상품의 30~40%를 육박한다. 특히 의류매장에서는... 그래서 제주에는 이러한 유명브랜드 매장이 인구에비해 엄청 많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장사도 잘된다하니 굳이 비싼 백화점 이용을 할 필요가 없을것이리라.
사진 정면을 걸어들어가면 바로 산지 방파제가 있는 바닷가이다. 이곳 중앙로에서 5,6분 정도 걸어내려가면...
나는 한 때젊었던 시절 이곳 중앙로 거리를 걷노라면 5분을 멀다하고 아는 지인들을 만나곤 했었다. 그러면 그들을 다방으로 이끌고, 인근 막걸리집으로 옮겨가고, 그리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술을 깬다하며 이곳 산지 방파제길을 걷곤 하였다.
지금의 이곳 산지방파제에는 공연장이 들어 서있고,넓은 광장을 갖추어 놓아 여름날이면 수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 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연인들이 방파제에 앉아 사랑의 밀어를 나누곤 한다.
또한 방파제 안쪽으론 많은 횟집들이 즐비해 있어서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서쪽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노라면 지상천국이 따로 없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중앙로 지하상가!
제주최초의 지하상가이다. 아직도 제주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 중앙로 상가에서 쇼핑을 하고 인근 동문시장으로 농.수산물을 사러간다. 맨처음 이 지하상가가 생길 적 우리 모두는 신기해 했었고 좋아했었다.
제주의 겨울바람은 차고 매섭다. 인근 산지포구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손과발을 얼얼하게 만들고 얼굴을 붉으스레 만든다.
제주사람들은 겨울날에는 지상으로 거리를 활보하기엔 너무 추위를 느낀다. 그래서 모든 제주시의 사람들은 지하로 지하로 몰려드는게 아닐까?
중앙로 부근의 상가의 모습이다. 이근 칠성통이란 번화가가 있지만 이 일대가 그곳과 연계된 곳이라 보면 된다.
제주는 자연환경그대로를 보존하고있는 청정도시이다. 그래서 제주는 공장의 굴뚝이 없다. 그리고 2020년이후부터 제주의 거리를 오가는 모든 자동차는 석유를 이용해 움직이는 차량이 없을거라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친구가 말을한다.
그래서그런지 제주는 소비의 도시이다. 서비스업으로 살아가는 관광도시. 그러다 보니 제주는 각종 고급브랜드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많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는 다 잘살아가고있을까?
그러지는 않을것이다. 사람살아가는곳 어디나 마찬가지로 부익부 빈익빈, 있는 사람들은 사는것처럼 자신이 갖고싶은것, 먹고싶은것, 가고싶은 곳 마음대로 구입하고, 먹고, 가고 하겠지만 그 속엔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이니까.(계속)
*참고로 제주목관아 코스는 황금버스를 타고 돌아봤던 코스는 아니다. 제주를 도착했던 오후에 잠시 시간이 있어 동생집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들렸던 코스였음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