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나라의 역사와 내전에 대해서
유럽 여행은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해서 기본적인 상식과 기독교위 역사를 모르면 반쯤은 눈
을 감고 여행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슬람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의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면 그 나머지의 반도 눈
을 감은 것이나 같으며, 로마의 역사와 유럽왕족의 역사 특히 왕가의 혈통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아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스페인 여행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스페인은 이슬람이 자그마치 700년이나 지배를 했었 때문이고 스페인 왕가의 혈통이 유럽의 여러나
라 왕들과 혈통적으로 얽여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경치를 보기 위해서 간다면 모르겠거니와, 유럽을 알아보기 위해서 유럽을 간다면 기독교를
모르고 가는 유럽 여행에서의 의미는 까막눈으로 글씨는 읽지 못하고 책에 있는 그림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기독교 계통도...상식적으로 알아두면 많이 좋다.
특히 종교와 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역이나 민족과 민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역인 이곳 같
은 경우도 그런 셈이다.
이곳은 기독교 안에서도 가톨릭과 정교회의 갈등이 있는 곳이고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500여 년
동안 오스만 터키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데브쉬르메(Devsirme:12~20세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이슬람으로 개종을 시켜서 이슬람화를 시키는 제도)등을 통해서 이슬람교를 정착시킨 곳이기도 하
기 때문에 유고연방이 분해되면서 인종청소 같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빨간 옷을 입은 아이들이 데브쉐르메들로 기독교인들의 자녀를 데리고 가서 이슬람인들로 키운다.
(터키에서)
모스타르를 떠나 메주고리예로 가는 길가에 새로 생긴 묘지들을 보이는데 대부분이 보스니아 내전
에 희생된 사람들로 우리가 있는 곳은 로만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십자가들이 보인다.
모스타르를 떠나며...
메주고리에로 가는 길의 네레트바 강....
길가에 보이는 묘지...기독교인들의 묘지인데 그 때 희생된 사람들일까....
달리는 차에서 찍어서 흐릿하다.
반도라는 지형은 지리적으로 길목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세력과 세력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곳이니
그 땅의 역사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곳 보스니아도 반도 가운데 있는 지역으로 기독교의 세력과
이슬람의 세력이 직접 부딪힌 지역에 속하다가 보니 이 땅의 지배세력들이었던 동방정교회와 로만
가톨릭, 그리고 이슬람교가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보스니아 지역은 당초에 가톨릭교가 먼저 자리를 잡았으나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들
어가면서 동방정교회(이곳에서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스니아를 경
계로 하여 동쪽은 정교회가 서쪽은 가톨릭으로 분할되어 잘 지내오다가, 15세기부터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받으면서 국민들이 이슬람화가 되고 이슬람교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가 물러가면서 가운데의 기독교가 세력을 회복하면서 보스니아쪽은 슬라브계의
이슬람교가 자리를 잡았고 옛날처럼 동쪽은 세르비아계의 정교회가, 서쪽은 크로아티아계의 가톨
릭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 나라 안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던 종교가 민족의 독립이라는 변수를 만나면서 내전이라고 불리게
되는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보스니아의 역사는 사전에서 발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초기 거주자들은 발칸 반도 북서부를 침략한 인도유럽어족의 일리리아인
들이었다.
그러나 구석기시대의 자취가 우소라 강 어귀에서 발견되었고 상당량의 신석기시대 유물이 부트미르
·도냐마할라·클라카르도니이·카카니·노비셰헤르에서 발굴되었다. 헤르체고비나의 주요 신석기시대
유적지는 코니츠 근처의 리시치치이다. 청동기·철기 시대의 자취도 볼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철기
시대 유적지는 도냐돌리나·글라시나츠·리파치이다.
로마에 정복당한 후 이 지역 대부분이 로마 제국의 달마치야 속주에 포함되었고 6세기 후반에는 슬
라브인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0세기에 보스니아는 차슬라브 공이 다스리는 세르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960년경 그가 죽은
후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넘어갔고 1018년 이후 비잔틴의 지배하에 놓였다. 12세기 헝가리 왕국은
일련의 도독(都督) 또는 총독을 통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동안 보스니아는 국력
이 커지고 독립국의 지위를 누렸다. 1322년 보스니아인 스테판 코트로마니치가 도독으로 선출되었
고 14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코트로마니치 왕조, 특히 스테판의 조카인 트브르트코 1세의 지배하에
서 세르비아 왕국의 훔 속주와 아드리아 해안의 많은 지역까지 보스니아의 영토를 넓혔다.
1386년 오스만 제국인(투르크)이 보스니아를 침략했으며 수차례의 전투 후 1463년 투르크령으로
만들었다.
보스니아는 투르크의 지배하에서 경제적으로 쇠퇴해갔다. 훔 속주는 세인트 사바의 '헤르체그'(공
작)라고 스스로 명명한 지배자들하에서 속주를 오랫동안 유지하였는데, 헤르체고비나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16∼17세기 투르크와 합스부르크왕가·베네치아의 끊임없는 전쟁에서 보스니아
는 투르크의 중요 전초기지였다. 이 시기에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오스만터키의 영토..발칸반도의 아드리아 북부 해안의 일부를 제외하고 오스만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877∼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 회의에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명목상으로는 여
전히 투르크령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복지로 인정되었고 1908년 10월 7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합병되었다.
보스니아 지역의 역사도표
새로운 헌법에 따라 유권자를 3개의 선거인단으로 나누고 각 선거인단 내에 일정한 비율로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 이슬람교의 의석을 할당했다. 이러한 결정은 증폭되고 있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잠
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계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
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으
로 제1차 세계대전이 야기되었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1918년 10월 26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부로서
세르비아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계 공산정권
의 인종학살정책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었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두 지역은 1946년 유고슬라
비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89∼90년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유고슬라비아를 휩쓴 민족주의 물
결에 휘말렸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연방을 탈퇴한 후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계는 다민족 공화국 수
립을 요구하는 국민투표 실시에 찬성했으나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는 실직적으로 세르비아가 주도
해온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을 반대했다. 1992년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내전으로 인해
황폐화되었고, 이 기간동안 각 민족들이 자신들이 차지한 지역에서 타인종을 일소하는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세르비아계는 북쪽과 동쪽의 대부분을, 크로아티아계는 서부를, 이슬람계는 중부 및
북서부의 도시를 차지했다.
1995년 12월 평화협정 조인으로 내전이 끝나고 이 협정에 따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계
-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세르비아계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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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 관련 일지
1992년 2월29일=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인 지도부가 세르비아인이 불참한 국민투표
에서 독립을 결정하고 선포함.
1992년 4월6일=유럽연합이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지휘하에 세르비아인
들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공격하기 시작, 보스니아는 본격적인 내전에 휩싸임.
1992년 5월=유엔(UN)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을 지지한 세르비아에 제재를 가
함.
1993년 1월=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던 협상이 실패하고 그전까지 세르비아계에 맞서 협력하
여 싸우던 이슬람들과 크로아티아 세력은 갈라져 서로 싸우게 됨.
1993년 4월=UN은 스레브레니차, 고라즈데, 제파 세 도시를 '안전지역'으로 선언 유엔보호군(UNPR
OFOR)을 급파,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군 (VSR)의 공격이 중단됨. 이로부터 2년간 '안전지역'들은 고
립되며 턱없이 부족한 양의 구호물자만이 도달.
1994년 3월=미국이 주재한 협상으로 이슬람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전쟁이 종결되고 이슬람-크로아
티아인 동맹이 체결됨.
1995년 3월=라도반 카라지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대통령은 UN이 지정한 안전지역인 스레브레니
차와 제파를 완전히 차단시키고 구호물자가 마을까지 도달하는 것을 막도록 명령함
1995년 7월9일=카라지치 대통령은 안전지역 스레브레니차를 공격할 것을 새로 명령함.
1995년 7월11일=라트코 믈라디치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군은 안전지역 스레브
니차를 점령하고 8000명에 달하는 이슬람 남성들을 처형함. 학살을 지휘한 믈라디치 사령관과 카라
지치 대통령은 인종학살죄로 헤이그 전쟁범죄재판소에 기소됨.
1995년 8월=NATO군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
1995년 11월=알리야 이제뜨베고비치 보스니아 이슬람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계 대통령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NATO군의 공습을 따라 미국이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중재하는 평화협상에 합의함.
1995년 12월14일=세 대통령은 파리에서 데이튼 합의안에 서명해 6만6000명 나토 평화군 병력의
보스니아 배치를 가능케 함.
1996년 7월=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카라지치 대통령이 외압에 밀려남
1996년 9월=분쟁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당들이 약진해 보스니아의 민족적 분할
가속화.
1997년 1월=처음으로 보스니아에서는 세 민족으로 이루어진 의회가 구성되고, 거기에 따른 내각이
구성됨. 권력을 잃은 카라지치는 자취를 감춤.
2002년 2월12일=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사태 등 66건의 학살 및 반인류 범죄 혐의로 기소된 슬로
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재판이 시작됨.
2003년=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이 1995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이슬람 학살 계획을 인지하
고 있었다고 전 나토 사령관이 증언.
2004년 6월11일=세계사회의 압력 아래 끊임 없는 부인을 포기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카라지치
의 지휘 하에 세르비아인들이 몇 천에 달하는 이슬람인들을 학살했다고 시인.
2006년 3월11일=재판 중이던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 감옥에서 숨진 채 발견됨.
2008년 7월21일=인종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한 혐의로 수배중이던 카라지치가 세르비아 보안요원들
에 의해 체포돼 베오그라드 전범재판소로 이송됨.
내전으로 인한 인명피해
보스니아계
31,270명의 병사 사망
33,071명의 민간인 사망
크로아티아계
5,439명의 병사 사망
2,163명의 민간인 사망
세르비아계
20,649명의 병사 사망
4,075명의 민간인 사망
전쟁 이재민 230만
전쟁의 결과인 유산으로 만들어진 공동묘지
모스타르의 공동묘지...흰 색 지역은 이슬람이고 검은색은 정교회쪽이다
살라예보의 공동묘지..구글사진
사라예보의 또 하나의 공동묘지
사라예보의 공동묘지...구글에서 흰 부분은 이슬람교인들의 무덤이고 검은색은 기독교(정교회)인들
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