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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러시로 정보의 생산자가 되자
‘리터러시(literacy)’는 읽고 이해하고 쓰는 능력을 말합니다. 읽기력(이해력 포함)과 쓰기력을 합쳐서 ‘리터러시’라고 합니다. 요즘 어른, 아이 할 것이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을 느끼는 스마트폰 강박 시대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우리를 편리한 삶을 살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모르면 불편하고 알면 편리한 문명의 이기(실용에 편리한 기계나 기구),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친구가 되기도 가족이 되기도 심지어 신체의 일부도 되어가는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SNS의 사용일 것입니다. SNS란, 잘 아는 것처럼 Social Network Service(사회 관계망 서비스)의 줄임말로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입니다.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등은 대표적인 SNS입니다. 우리는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SNS를 활용하여 서로 간에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SNS상에서 오가는 정보의 대부분은 영상과 이미지, 글입니다. 그러한 정보에는 본인이 직접 생산한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생산한 것을 퍼 오거나 퍼 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가는 정보에는 가치 있고 심금(외부의 자극에 따라 미묘하게 움직이는 마음)을 울리는 것들도 있지만, 때때로 쓰레기에 가까운 정보들도 있습니다. SNS상에서 오가는 정보가 영상이든 이미지든 글이든 가치가 있든 없든 심금을 울리든 그렇지 않든 보물이든 쓰레기든, 전달의 목적은 ‘소통’일 것입니다. 그 소통이 일방이든 쌍방이든 전달의 목적은 소통일 것입니다.
뭐든 막힌 것은, 즉 불통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소통(疏通)이 필요한 것입니다. 소통이란 막히지 않고 트여 잘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글을 읽고 글을 짓고 쓰는 것은 소통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함이 목적입니다. 메시지란 전하는 말, 전갈, 의도, 교훈, 전보 내용 등을 의미합니다. 미디어의 핵심은 메시지 전달입니다. “메시지가 미디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상이든 소리든 말이든 글이든 매체(매개체)는 메시지의 전달이 핵심입니다.
글을 읽고 글을 짓고(꾸미고, 기획하고)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은 다양하겠지만, 그 핵심은 소통입니다. 불통인 나와 나, 불통인 나와 너, 불통인 사회, 불통인 세상, 불통인 사람, 불통인 가정, 불통인 삶과 인생, 불통인 인간과 자연 등과 막힌 것을 틔우고 열어 교통이 되도록 하는, 소통의 조력자, 주재자, 해결자, 중재자의 역할을 글이 하는 것입니다.
미디어는 인간과 세상을 연결하는 도구이면서,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도구입니다. 말과 글처럼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 수단을 ‘미디어’라고 합니다. 미디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입니다. 미디어가 바뀌면 의사소통 방식이 달라지고, 이를 통해 문화가 달라집니다. 신문, 잡지,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 전통적 대중매체는 소수의 전문 제작자가 만든 정보를 다수의 대중에게 전달했습니다.
전통 미디어에서는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명확히 구분되고, 의사소통의 흐름이 일방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스마트폰, 쌍방향 텔레비전 등의 뉴미디어는 불특정 다수가 정보의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리터러시를 통해서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리터러시를 통해 정보의 생산자가 되고, 소통의 조력자, 주재자가 되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리터러시는 배움과 공부를 주체적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리터러시란 문자화된 정보(글)를 읽고 쓰는 능력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영상이든, 이미지든, 글이든 주어진 정보를 읽고(습득하여 이해하고)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리터러시입니다. 리터러시의 종류도 많습니다. 디지털 리터러시, 게임 리터러시, 미디어 리터러시, 소셜미디어 리터러시 등등 참 많습니다.
다음은 네이버 카페의 ‘자그니’라는 네임을 가진 분이 쓴 글입니다. “20세기 들어와 텔레비전 시대가 되면서 새로운 능력이 필요해졌다. 바로 ‘미디어 리터러시’다. 영상을 제대로 읽는 기술과 전자 기기를 다룰 줄 아는 능력. 영상이나 사진 같은 시각 이미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진의 진위, 영상의 진실을 두고 그동안 수많은 논쟁이 펼쳐졌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영상과 이미지는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결과물이다. 그래서 세심하게 읽고,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조작하는 방법을 알아야 조작된 결과물을 간파할 수 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에 속는다. 이제 우리는 누가 글과 이미지로 우리를 속이려는지 안다. 최소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가 들이대는 글과 이미지를 의심하는 버릇이 들었다. 21세기 들어와 널리 보급된 인터넷이 낳은 문화다. 여기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글과 이미지를 이해하는 시대를 지나, 인터넷과 스마트폰, 컴퓨터가 가득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디지털 리터러시’를. 글도 읽고, 이미지도 읽고, 이제 디지털이 개입된 세상을 이해해야만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우리가 인터넷에 남긴 여러 흔적이 언제든지 우리를 먹잇감으로 만들 수 있는 시대, 개인적인 것이 쉽게 온 세상에 까발려지는 시대, 누군가가 이익을 위해 퍼뜨리는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차지하고 싶은 것들이 계속 우리를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남을 욕하는 일에 너무 쉽게 동참하고, 쉽게 난도질하고 싶어 하며,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위험한 부분이며, 디지털 리터러시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디지털 문화는 너무 쉽게 우리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들며, 너무 쉽게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앗아간다.” 먼저, 좋은 글에 감사드리며, 이 글의 요지는 디지털 시대에서 주요 생존 방법이 ‘디지털 리터러시’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건강하게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읽고 생각하고 쓰다』에서 송숙희는 ‘리터러시 지능(Literacy intelligence Quotient)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보의 과다 시대에 리터러시 지능을 키우는 것이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OECD는 “리터러시는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자식과 잠재력을 발휘하며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해·활용·성찰하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읽고 쓰는 능력인 리터러시 지능은 이처럼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내 삶에 날개를 달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잘 읽어야 잘 쓸 수 있습니다.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독서가들은 다독보다 정독을 권합니다. 지독(遲讀)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지독은 곱씹으며 읽는 것입니다. 읽기의 기본은 이해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은 정보는 내 것이 아닙니다. 막연히 읽기보다 정보를 생산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읽는 것은 다릅니다. 나를 나답게 살 수 있는 비법 가운데 하나가 정보의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읽고 쓰기에서 어휘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단어가 모여서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서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여서 글이 됩니다. 이처럼 글의 출발점은 단어, 즉 어휘입니다. 어휘력 향상을 위한 쉼 없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사람은 아는 어휘만큼 사고(생각하고 궁리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합니다. 따라서 사유는 언어로 구조화(부분적 요소나 내용이 서로 관련되어 통일된 조직으로 만들어짐)됩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세계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라고 했습니다. 어휘가 빈약하면 아무리 문장 공부를 해도 읽기와 쓰기가 늘지 않습니다. 사용하는 어휘의 양을 늘리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입니다. 글 이해의 최소 단위는 어휘입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어휘를 늘려야 합니다. “어휘를 레고처럼 갖고 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구사(말이나 수사법, 기교, 수단 따위를 능숙하게 마음대로 부려 씀)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생각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저의 핸드폰에는 속뜻사전, 역순사전, 우리말사전 세 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궁금하면, 즉시 찾아봅니다. 내가 말하고 쓸 수 없는 정보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정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은 문법도 중요하지만, 그 문장에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글의 신뢰가 상실됩니다. 읽고 읽다가 모르면 찾고, 쓰다가 모르면 찾고, 찾고 또 찾습니다.
어휘(語彙)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사용되는 낱말의 수효나 낱말의 전체, 즉 낱말을 순서에 따라서 모아놓은 것입니다. 어휘력이란, 낱말을 활용하는 능력, 낱말을 마음대로 부리어 쓸 수 있는 능력입니다. 어휘가 부족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휘가 부족하면, “그것은 이렇게 돼서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적인 사고도 하기 어렵고, 감정 표현도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학교에 있으면서 느끼는 가장 큰 안타까움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의 어휘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국어는 도구 교과라고 합니다. 모든 과목 공부의 도구가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국어는 모든 교과목의 어머니입니다. 국어를 못하면 영어도 수학도 사회도 역사도 과학도 어렵습니다. 특히 역사, 사회, 과학 과목은 용어가 많기로 유명한 교과입니다. 당연히 어휘력이 떨어지면 학습에 흥미를 잃기 쉽고, 학습량만큼 성적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쓰기력이 창의력을 만듭니다. 써야 정보의 생산자가 됩니다. “질문이 좋아야 글도 좋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해답을 찾는 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에서 ‘생각’은 질문에서 나옵니다. 사소한 물음이 세상을 흔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 그것은 질문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내가 나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들의 수많은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어 면을 이루고 모양(體)을 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점선면체(點線面體)’를 이루어 갈 때 우리는 성취감과 함께 자존감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본은 본뜨기입니다. 모방입니다. 본뜨기란 “무엇을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아하다. 이미 있는 대상을 본으로 삼아 그대로 좇아 만들다.”는 뜻입니다. 좋은 본뜨기는 좋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연의 모든 동물은 본뜨기 모방을 통해서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습득합니다. 물론 유전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유전자 정보를 갖고 태어나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동물들은 어미나 동료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습득합니다. 그 방법이 본뜨기 모방입니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필사’입니다. 즉, 베껴 쓰기입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은 잘 쓴 글을 보고 베껴 쓰는 연습을 하면 좋습니다.
살면서,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의 집합이, 현재의 저나 여러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질문도 좋다』는 책도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잘 쓴 글은 생각이 99%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다른 생각이 남다른 글을 만듭니다. 글쓰기의 기본은 낯섦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리터러시는 읽기력와 쓰기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 인간과 자연의 소통, 나와 나의 소통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미로 찾듯 찾고, 그 찾은 답을 나만의 스타일로 표현하는 것, 쓰는 것이 나를 나되게, 나를 나답게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없으면 생각도 없습니다. 생각이 없는 말하기와 글쓰기는 없습니다. 글쓰기는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느끼려면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배우고 정보를 얻는 것만이 공부가 아닙니다.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는 것도 공부입니다. 글쓴이가 글 속에서 담으려고 했던 감정을 읽어야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때로는 분노가 글쓰기의 원동력이 됩니다. 읽지 않으면 쓰기가 어렵습니다. 읽어야 쓸 수 있습니다. 공부는 인간으로서 최대한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정보, 옳다고 믿는 생각,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공부한 것을 표현하는 행위인 동시에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어휘가 빈약하면 아무리 문장 공부를 해도 글 읽기와 글쓰기가 늘지 않습니다. 사용하는 어휘의 양을 늘리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입니다. 조금만 궁금하면 즉시 찾아봅니다. 내가 말하고 쓸 수 없는 정보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정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읽고 읽다가 모르면 찾고, 쓰다가 모르면 찾고, 찾은 것을 메모하는 것이 습관화될 때 더 나은 글쓰기가 될 것입니다.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제가 있는 곳에는 집이든 직장이든 책과 펜과 노트가 있습니다. 하루의 일상 가운데 한 소절의 생각과 느낌과 감정과 정보와 지식을 기록합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기록에 미친 자들이었습니다. 메모광, 기록광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이 그 증거입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은 좀체 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록을 이기는 기억은 없습니다. 핸드폰에 기록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작은 수첩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수단이 어떻든 중요한 것은 메모하고 기록하고 쓰는 것입니다. 쉬지 않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내공을 키웁니다. 꾸준히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개그맨 김병만은 그의 책에서 ‘적자생존’, 즉 “적는 자가 생존한다.”고 기록과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언어는 주로 말과 글로 구성됩니다. 말에 가까운 글, 이야기하듯 쓴 글, 쉬운 글이 좋은 글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글쓰기를 통해서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 솜씨가 없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일단 쓸 만한 게 생기면 절대로 그냥 흘려보내지 마세요. 한두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메모하세요.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기 시작하면 머릿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글감은 숨어 버립니다. 글을 쓸 때는 충분한 정보를 모으면서 글을 써야 합니다. 나비에 대해서 쓰려면 나비에 대해서 알아야겠지요. 세상의 모든 일에 감각을 열어 두세요. 모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온갖 잡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질문은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꿉니다. 사소한 것에 물음을 갖고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해법이나 답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잘 읽는 사람이 쓰기도 잘한다.”는 말은 이미 확인된 명제입니다. 쓰기를 함으로써 쓰기를 배운다고 합니다. 쓰기는 문제 해결력을 키워줍니다. 리터러시, 읽기와 쓰기는 모든 배움의 기본입니다. 배워야 산다는 명제가 있다면, 잘 배우고 잘 살려면, 여기서 ‘잘’은 ‘제대로’라는 의미입니다. 제대로 배워야 제대로 삽니다. 리터러시를 키우는 것은 제대로 사는 데 필요한 큰 도구가 됩니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에서 이시형 박사는 “공부의 기본은 언어력이다. 뇌력은 곧 언어력이다. 그리고 모든 창조도 공부도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며 공부의 중요성과 공부의 기본은 언어력, 어휘력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읽고 쓰는 과정에서 언어력과 어휘력은 향상됩니다. 잘 읽고 잘 쓰고 잘 행동하면 잘살 수 있습니다.
글 읽기와 글쓰기의 핵심은 메타포(은유)입니다. 『생각의 시대』에서 김용규는 “이제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식은 교육과 전수의 내용이 아니라, 검색과 전송의 내용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지식의 빅뱅 시대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지식의 발달 수준과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만이 그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물은 생존방식으로 진화를 선택했고, 인간은 지식(지식의 학습)을 선택했습니다. 지식의 근간은 은유입니다. 메타포입니다. 은유는 우리의 사고와 언어의 근간입니다. 읽기와 쓰기의 가장 쉬운 접근법은 메타포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이 되는 일상적 개념체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은유적입니다.”라고 하여 은유적 사고를 강조하였습니다.
은유의 학습을 위해 좋은 것 가운데 하나가 ‘시 읽기’입니다. 시를 읽고 낭송하고, 외우는 것은 은유라는 생각의 도구를 익히는 지름길이 됩니다. 시인은 은유를 통해 자기가 표현하려는 내용을 이미지화하는데 뛰어납니다. 시는 은유의 보물창고입니다. 은유의 핵심은, “A는 B다.”입니다. “문경은 새재다.” 이렇게 은유로 훈련하면 좀 더 쉽게 리터러시 지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모든 지식은 관찰로부터 시작됩니다. 지식과 지혜는 관찰이 가져다줍니다. 지식과 지혜는 관찰의 결과입니다. “예술가란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라고 프랑스의 화가 세잔이 말했습니다. 유능한 선장은 쉼 없이 바람과 파도를 관찰합니다. 관찰은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보고 살피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보고 살피는 것이 관찰입니다. 관찰로 시작된 정보를 은유화하는 것이 정보를 기록하는 기본입니다. 은유는 사물을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소녀는 한 송이 코스모스다.” 이처럼 은유가 공부를 자유롭게 합니다.
관찰은 관심, 호기심에서 나옵니다. 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호기심과 관심은 관찰을 낳습니다. 주의 깊고 지속적인 관찰은 관점을 낳습니다. 관점은 나만의 생각입니다. 남다른 나만의 생각이 나를 나되게 합니다. 남다른 나만의 생각이 나를 나답게 합니다. 내 생각이 바로 나입니다. 관심과 호기심이 나를 나답게 합니다.
보편타당한 관점이 관계를 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원만한 관계가 소통입니다. 소통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침엽수인 소나무와 활엽수인 참나무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것이 자연의 소통입니다. 관심이 관찰을 낳고, 관찰은 관점을 낳고, 관점은 관계를 원만하게 합니다. 원만한 관계가 소통입니다. 삶의 핵심은 소통입니다. 소통의 한 방편이 리터러시입니다. “가수라면 음악을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말했습니다. 시인은 시각형 사고자입니다. 청각장애인이었던 베토벤은 음표를 들을 수 있었기에 유명한 작곡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것을 그렸습니다. 남다른 호기심에서 남다른 관심으로, 남다른 관심에서 남다른 관찰로, 남다른 관찰에서 남다른 관점으로, 남다른 관점에서 남다른 관계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나의 존재를 남다르게 합니다. 진심 어린 관심을 갖고 진심 어린 관찰을 하면, 명확한 관점이 생기고 모든 관계가 원만해집니다. 따라서 관심은 모든 사랑의 별명입니다. 관심은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집착과는 구별되는 관심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이정표입니다.
추상화는 곧 단순화입니다. 모든 추상화는 단순화입니다. 글쓰기의 본질은 종이 위에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골라내고 버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시는 더하기보다 빼기입니다. 언어에는 추상어와 구체어가 있습니다. 글쓰기는 추상어를 구체어(구상어)로 구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기는 구체어를 추상어로 구현하는 능력입니다. “읽기가 리터러시 지능의 시작이고, 생각하기가 리터러시 지능의 본질이라면, 쓰기는 리터러시 지능의 완성판이다.”라고 송숙희는 말했습니다. 추상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리터러시 지능의 확장 노력은 나를 더욱 나되게 합니다.
상지대 양창현 교수는 『미국의 리터러시 코칭』에서 “문자는 소통이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글을 읽고 말을 하고, 더 나아가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말은 차치하고서라도 사람들이 글을 읽고 그 본뜻을 파악해내는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은 학교 교육에서 읽고 쓰는 활동인 리터러시 코칭을 강화하고 있다. 리터러시는 단순히 읽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 읽고 쓰는 능력의 물꼬를 터주는 일이다.”라며 리터러시 능력을 강조하였습니다.
“리터러시 능력이 중요한 이유는 개개인의 리터러시 능력이 곧 한 사회를 움직이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리터러시 전문가는 그 분야의 언어에 정통한 사람이다. 운동, 예술, 영상, 몸짓 등 각 분야에는 저마다의 소통 언어가 존재한다. 따라서 리터러시 활동은 학업 성적을 올리는 것뿐 아니라 전문가가 되기 위한 소양을 갖추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하여 리터러시가 학업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문가로서 자질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로빈 위드 박사가 1997년 이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1,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재 당신의 일과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이라는 질문에 90% 이상이 ‘글을 잘 쓰는 기술’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에는 1872년에 만들어진 ‘엑스포스(Expos)’라는 글쓰기 프로그램이 있는데, 반드시 모든 학생들은 이 강좌를 수강해야 졸업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글쓰기를 세계적인 대학교에서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만큼 삶에 글쓰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평범하게 살아가는 데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또한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더욱 확장하는 데는 꼭 필요함을 자각하고 글쓰기를 배워 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최우창의 '앎엔삶'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