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진의 소설과 꿈[처용단장(處容斷章)] : 새로 꾸는 옛 꿈
[처용단장(處容斷章)]은 타락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의 위선과 느슨한 삶의 양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운동권 출신의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였다. 그의 사고와 행위는 처용설화에서 환기되는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와 원리에 의해 수정과 반성의 계기를 얻는다. 설화는 그 민족의 집단의식의 집적물이기 때문에 설화를 통하여 환기되는 판단과 규범은 현실적 삶의 성찰에도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겉 구성은 액자형이다. 주인공 영태가 지하철에서 소매치기인 '거적눈'이란 인물과 조우하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라면, '거적눈'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전철로 귀가하면서 아내와의 관계를 회상하는 부분이 사건의 중심내용이고, 소매치기가 건네준 복돈가방을 들고 영태가 집으로 들어서는 부분이 결말이 된다.
서사진행을 통해 보면 영태와 아내는 불화관계에 있다. 두 사람은 함께 운동권 출신이지만 영태는 아내의 도움 속에 고시공부를 하는 처지이다. 영태는 고시에 2차까지 합격하지만 아내는 영태가 마침내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삐조새로 상징되는 그녀 자신은 기껏 열심히 물고기를 잡아도 마침내 모두 뺏기고 헌신만 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 속에 있다. 그런 피해의식은 그녀의 탈선을 가져오게 되는데 그 상대가 바로 희조인 셈이다.
희조는 향가문학을 전공하는 시간강사이다. 희조는 처용을 소재로 하는 희곡을 구상중인데 영태를 만날 때마다 사건의 줄거리를 조금씩 들려준다. 그리고 그 내용은 결과적으로 영태의 삶에 대한 풍자의 속성을 띠고 있다. 희조가 쓰고자 하는 처용의 설화는 처용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된다. 처용은 귀족 출신 지식인으로서 가난과 고통 속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살고자 하여 스스로 거세까지 단행하지만 끝내는 왕의 회유에 넘어가서 권력의 곁불을 쬐는 일에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민중을 회유하려는 왕의 의도가 달성되고 처용의 효용가치가 사라지자 처용은 그 자신의 아내까지 왕에게 빼앗기고 쫓기는 몸이 되고 만다.
이 작품은 운동권 출신인 영태가 고시에 합격한 것은 권력의 곁불을 쬐려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처용설화를 통하여 풍자한 것이다. 이러한 풍자는 작품 중에 전개되는 처용설화의 재구성을 통하여 상징화되고 있다. 이는 망해거사(望海居士)의 처가 읊고 있는 다음 노래에 집약된다.
배고픈 중생의 밥마저/빼앗거늘/무슨 나라가 이런고/지혜로운 자들이 많이 떠나 도성이 깨지더니/아아 낭이시여 아직껏 모르는가/달 밝은 깊은 밤에/서러운 접동새/떠난 님을 좇아 울며 다니는구료.
이 노래는 작가의 현실인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배고픈 중생의 밥마저 빼앗는 나라, 지혜로운 자들이 모두 떠나가 버린 사회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다. 그런 시대상을 알지 못하고 권력의 곁불이나 쬐려는 지식인의 모습을 슬퍼하는 민중들은 곧 접동새로 은유된다.
영태의 개인적 내면의식은 주로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서 표출된다. 영태는 아내의 불륜을 확신하게 되자 심한 갈등에 빠진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이 고요해진 생활을 계속 그대로 수용할 참인가. 내가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데도 말인가." 영태는 아내의 불륜을 모른 척하고 우물쭈물 그냥 지나치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풍자냐, 해탈이냐. 나는 그 숨막히는 길목에 오늘도 우두커니 서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영태의 선택은 끝내 처용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해탈이란 말로 변명되는 종류의 그것이다. 그들의 밥상에는 금슬 좋은 부부가 마신다는 청실홍실이란 이름의 매실주가 오를 것이다. "그래, 나는 서른살의 처용이다. 하루에 한번쯤은 해탈을 할 나이다. (……) 라 윤 미, 나오라! 서 영 태 왔다!
<짧은 작가소개>
김소진은 1997년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복부에 가득찬 암으로 죽었다. 그는 누구보다 삶을 진득하게, 그리고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젊은 소설가이며 문학의 위기가 예견된 90년대에 흔들림 없이 리얼리즘 문학을 지킨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