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정대(antoine@unitel.co.kr)
DP에서는 <타이타닉 콜렉터스 에디션>의 국내 출시를 기념해 DVD 칼럼니스트 김정대 씨의 '제임스 카메론 특집'을 연재 중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에 대한 놀라운 열정과 애정으로 가득한 이번 특집에서는 국내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제임스 카메론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레퍼런스급 글솜씨로 만날 수 있습니다. 앞선 연재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길!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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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ever fights monsters should see to it that in the process he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look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look into you."
- Friedrich Nietzsche
"괴물과 싸우고 있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 프레드리히 니체 |
‘(심연과도 같은) 무궁무진한 호기심’은 소년 짐 카메론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최고의 유산이었다. 한 때 ‘레퍼런스급 과학자’를 꿈꾸었던 고등학생 짐은 틈이 날 때마다 과학 세미나에 참석하여 자신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곤 했다. 정기적으로 개최되던 이 세미나에서는 매번 다른 연사들이 나와 최근의 과학계의 동향과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발표를 했다. 짐에게 이 세미나는 TV에서 주말마다 틀어대는 SF 시리얼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어느 날, 세미나 장에 짐의 운명을 바꿀 연사가 등장했다. 직업 다이버였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짐은 1만 볼트짜리 전류가 온 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액체 산소 실험’에 직접 참여했다는 그 다이버는, 자신이 액체 산소를 통해 약 45분 동안이나 호흡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짐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람의 폐를 ‘아가미’처럼 만들 수 있는 물질이라!”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심연을 누비는 것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짐의 열렬한 ‘바다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곧장 스쿠버 다이버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이후 틈이 날 때마다 물 속으로 들어가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며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다.
안녕? 피쉬?
‘액체 산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짐은 언젠가 ‘다이버에 관한 걸작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게 된다. 물론 그 영화의 중심 소재는 ‘액체 산소’가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짐은 즉시 ‘다이버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를 하나 써내려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해저의 연구 시설에서 일하던 일련의 과학자들이 특수한 잠수복과 ‘액체 산소’를 이용해 누구도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이의 심연(abyss)에 도전한다. 물론 심연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해서, 한번 그 곳에 들어간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 짧은 이야기가 바로 ‘매머드급 심해 영화’ <어비스>의 출발점이었다.
<에이리언 2>의 성공 후, 짐은 명실 공히 ‘1급 상업영화 감독’이 됐다. 이미 SF 영화 팬들 사이에서 짐은 ‘영웅’으로 통했고, 각종 언론 매체들은 앞을 다투어 그의 차기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취재했다. 물론, 그의 차기작이 <터미네이터>나 <에이리언 2>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형 작품’이 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에이리언 2>를 완성한 후, 짐은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카리브해의 케이만 섬에서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며 차기작을 모색하고 있었다. 물론 (다들 짐작하시듯) 그는 이 휴가 기간을 ‘스쿠버 다이빙’으로 소일했다. 당시 짐은 10여개의 영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아내 게일과의 상의 끝에 그는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뒀던’ 심연에 관한 영화를 차기작으로 결정했다.
한편, <에이리언 2>의 완성 후 게일 역시 짐 못지않게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영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바로 <에이리언 네이션 Alien Nation>(1988)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시점에서 짐과 게일의 관계는 점차 ‘프로페셔널’한 쪽으로만 기울기 시작했다. 게일은 <에이리언 네이션>에서조차 짐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다. 로크니 오배논이 쓴 <에이리언 네이션>의 각본 초고를 탐탁치 않게 여긴 그녀는 수차례나 각본을 수정했으나 여전히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짐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짐은 <어비스>의 제작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게일의 SOS 신호를 차마 뿌리칠 수는 없었다. 짐은 잠시 시간을 내서 <에이리언 네이션>의 각본을 손질했다(짐은 ‘비공식적인’ 각본가로 <에이리언 네이션>의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에, 크레딧에는 그의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짐의 작품 치고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로크니 오베논은 그 이유를 이렇게 간단히 설명했다. “당시 짐의 관심은 온통 <어비스>에만 집중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에이리언 네이션>에 쏟아 부을 열정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평소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던 게일 역시, 이 시기에는 (짐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많은 심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짐과 게일은 사실상 별거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일은 자신이 제작하는 짐의 작품에 대해 여전히 완벽주의를 견지했다는 점이다) 1988년에 개봉한 <에이리언 네이션>은 게일의 기대에 다소 못 미치는 흥행 성적을 냈으나, 이후 TV 시리즈로 ‘부활’하면서 많은 컬트 팬들을 양산하게 된다.
<에이리언 네이션(Alien Nation)>
<어비스>는 스토리 구상 단계에서부터 짐의 속을 부단히도 썩였다. ‘해양 영화’라? 대체 <어비스>를 통해 무엇을 보여준단 말인가? 푸른 산호초의 신비? 식인 상어의 공포? 이런 젠장! 웬만한 ‘쓸만한 해양 영화 소재’들은 이미 영화로 제작되지 않았는가?! 뭔가 ‘혁명적인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짐은 <어비스>를 통해, 이전에 관객들이 ‘꿈도 꾸지 못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컨셉을 염두에 두고 짐은 고등학생 때 작성했던 짤막한 이야기를 ‘매머드 급의 스케일’로 확장시켜 나갔다. 우선, 그는 주인공을 ‘과학자들’에서 수중석유시추 작업을 하는 ‘블루 컬러 노동자’들로 교체했다. 이야기에 좀 더 ‘상업성’을 부여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가 개작한 이야기는 미국의 핵잠수함이 침몰하면서 시작된다. 핵잠수함의 생존자와 잔해의 상태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네이비 실의 대원들이 민간 수중 석유시추선인 딥코어 II(Deepcore II)에 투입된다. 버드(Bud)를 비롯한 딥 코어의 노동자들은 네이비 실의 대원들과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 와중에 그들은 바다 속에 사는 외계인들과 조우하게 된다. 이 때부터 이야기는 - 버드와 린지(Lindsey) 사이의 - 사랑, 그리고 궁극적인 인류의 ‘구원(Redemption)'에 관한 것이 된다.
“해양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어비스>의 테마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게일의 표현을 빌자면 <어비스>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 주제였다. 짐이 일찍부터 생각한 제목 <어비스>는 제법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그것은 (문자 그대로) 영화의 배경이 되는 2만 피트 깊이의 ‘심연’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흔히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마음의 심연’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심오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기본 테마를 토대로 짐이 작성한 <어비스>의 트리트먼트(영화의 줄거리와 중요한 장면들, 등장인물 등을 압축해 적은 글)의 분량은 무려 60페이지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트리트먼트의 분량이 5~10 페이지, 길어야 20페이지 정도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다분히 짐의 ‘전략’이 깔려있었다. ‘물주’인 폭스의 간부들을 ‘한 방에’ 심연 저편으로 보내버려 돈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짐은 이 트리트먼트를 작성하기 위해 장장 4개월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 트리트먼트(그리고 이후에 이를 토대로 작성된 각본)에 포함된 요소들 중 ‘리얼리티가 확보되지 것’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짐의 이야기는 스스로 읽어보아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새롭고 세련된 것이었다. 이야기의 구성요소들 중에는 ‘SF 영화의 클리쉐’에 해당하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물론, 인간의 무모한 호전성에 대한 경고장을 던지는 외계인의 이야기는 <어비스> 이전에도 있었다. (굳이 로버트 와이즈의 <지구가 정지한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1951)같은 작품을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어비스>의 외계인은 ‘외계에서 불연 듯 날아온’ 존재가 아니라, 까마득한 과거부터 지구에 살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하늘’이 아닌 ‘바다 속’에서 나타난다. 새로운 개념의 잠수복과 다양한 잠수정들은 또 어떤가? 물론 짐의 ‘필살기’인 ‘액체 산소’는 이런 요소들 중 단연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었다.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와 긴밀히 결합된 ‘해양판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라! 폭스의 간부들은 <어비스>의 트리트먼트를 읽은 뒤 짐에게 다음과 같은 신호를 보냈다.
“좋았어! 어디 한번 해보자고!”
폭스는 ‘각본 초고’를 읽어보기도 전에 (트리트먼트만으로) ‘5천 만 불의 제작비’를 선뜻 지원하기로 잠정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짐 카메론 자신도 일이 이렇게까지 순조롭게 풀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는 ‘5천 만 불의 제작비’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실감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어비스>가 나올 당시만 해도 할리우드에는 ‘제작비 1억 불짜리 영화’는 없었다. (‘제작비 1억 불’이라는 마의 벽은 1991년에야 ‘어떤 영화’에 의해 허물어졌다. 물론 이 ‘어떤 영화’ 역시 짐의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제작비가 3천 만 불만 넘어가도 ‘대작’ 축에 속했다. 제작비 5천 만 불은 당시로서는 ‘스튜디오가 배팅할 수 있는 최고액’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일화는, 당시 폭스가 짐의 능력을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폭스는 짐에게 아무리 많은 돈을 쥐어줘도 ‘절대로 실패작이 나오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폭스의 간부들에게 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비스>의 초기 제작 단계에서 가장 중요시 된 것은 바로 ‘보안’이었다. 짐의 구상한 이야기 자체가 워낙 흥미롭고 독창적인 것이었기에, 자칫 그것이 밖으로 새 나갈 시에는 그것을 모방한 ‘싸구려 영화’들이 졸속 제작되어 <어비스>보다 먼저 극장에 걸릴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짐과 폭스 사는 제작 초기부터 전례 없는 ‘스포일러 봉쇄 작전’을 전개했다. 당장 짐이 쓴 트리트먼트에서부터 이 ‘작전’이 적용됐다. 트리트먼트의 카피본에는 각각 일련번호가 매겨졌으며, 폭스의 간부들은 짐의 사무실로 찾아와 ‘발설 금지 서약서’에 사인을 한 뒤에야 트리트먼트를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 폭스 사의 회장이었던 레오나드 골드버그조차 이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이것은 후에 짐이 쓴 각본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짐은 1988년 2월 5일에 <어비스>의 각본 초고를 완성했는데, 이 초고의 카피본에는 각각 일련번호가 부여됐으며 각 페이지에도 고유번호가 매겨졌다. 한마디로,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폭스의 간부들과 짐이 이끄는 스텝들 외에는 누구도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도록 철저한 통제가 행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철두철미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고춧가루 부대 등장! - 좌: <레비아탄 Leviathan>(1989), 우: <딥 식스 Deepstar Six>(1989)
폭스가 ‘초대형 해양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이 떠돈 직후, 두 편의 저예산 해양 영화가 곧장 제작에 돌입한 것이다. 물론 짐 입장에서는 ‘<어비스>가 <레비아탄>이나 <딥 식스>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비스>는 <레이아탄>, <딥 식스>와는 ‘급이 다른’ 영화였기 때문이다. 폭스 사의 간부들은 이 소식을 접한 뒤 크게 당황했다. 짐의 완벽주의를 감안했을 때, <어비스>가 두 저예산 영화보다 빨리 극장에 걸릴 확률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두 저예산 영화가 만일 흥행에 성공한다면 <어비스>는 (어처구니없게도) ‘아류 해양 영화’라는 멍에를 쓰게 될 것이고, 두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후에 개봉할 <어비스>의 흥행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짐은 이 소식에 크게 동요되지는 않았다. 아류작들이야 어찌됐건, 영화만 제대로 만들면 흥행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짐은 <어비스>를 ‘제대로 만든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것이 대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는 알지 못했다!) 짐에게 <어비스>는 자신의 영화인생 자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차대한 프로젝트였다. 5천 만 불이나 투입된 영화가 만일 ‘쫄딱’ 망한다면 감독으로서 그의 인생은 사실상 종말을 고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폭스도 마찬가지였다. 폭스는 일찌감치 <어비스>를 ‘사운을 건’ 특급 프로젝트로 예우했다. 만일 <어비스>가 흥행에서 재난을 맞이한다면 폭스 사도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터였다. <어비스>의 성공 여부에 따라 짐 자신과 폭스의 운명, 나아가 <어비스>에 참여하는 모든 스텝들의 향후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대의 손에 모든 이들의 운명이 달렸소!”
폭스는 짐이 영화를 완성하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지원해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간부들은 서서히 짐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된다. 짐이 쓴 <어비스> 이야기는 분명히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에 포함된 모든 것을 영상화하려면,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하게!) 제작비가 5천 만 불을 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폭스는 초기부터 짐에게 여러 가지 ‘근심어린’ 제안을 해왔다. 예컨대, 폭스는 제작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영화 시작 부분의 ‘핵잠수함 몬타나 호의 침몰 장면’ 전체를 삭제해 버리자고 짐에게 제안했다. 물론 짐은 이 제안을 딱 잘라서 거절했다. 하지만 짐의 입장에서도, 자신에게 ‘무한한 특혜’를 부여하고 있는 폭스의 간부들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수차례나 폭스의 간부들에게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주어진 예산으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폭스는 그에게 장장 140일이라는 긴 촬영 기간을 허락했다. 그러나 짐에게는 이 140일이라는 촬영 기간도 <어비스>를 위해서는 턱없이 짧은 것으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가 구상한 <어비스>의 제작 방식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향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다) 또, 그는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것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비스>는 1980년대의 영화 제작 기술로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Mission: Impossible’을 ‘Mission: Possible'로 만드는 것이야 말로 짐의 최대 장기가 아닌가? 짐은 (약간 ‘변태’같이 들리겠지만) <어비스>가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라는 점 때문에 더욱 스릴감과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전통적으로 ‘해양영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돼 왔다. 첫 번째는 물이 없는 공간에서 스모그와 조명을 적절히 이용해 ‘가상적으로’ 물 속에 있는 듯한 효과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흔히 ‘드라이 포 웻 Dry for wet'이라 불리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보통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되곤 한다. 실제로 물 속에서 촬영하는 방식에 비해 촬영이 훨씬 수월하고 장애요소가 적다는 장점이 있으나, ‘리얼리티’를 살리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대단히 치밀한 계획과 조작이 없으면, 이 방식으로 찍힌 신은 ‘현실감 떨어지는 가짜 장면’으로 보이기가 십상이다. 1966년 작인 <판타스틱 보이지(마이크로 결사대) Fantastic Voyage>(물론 이 영화는 ‘해양영화’가 아니라 ‘인체 내부를 탐험하는’ 영화다)에서 쓰인 후 특히 유명해진 이 방식은 이후 <붉은 10월> 등 많은 해양영화에서 활용됐다. 국산 잠수함 영화인 <유령>(1999)과 <어비스>의 경쟁작(?)인 <레비아탄>에서도 이 방식이 쓰인 바 있다.
<어비스>에서 ‘드라이 포 웻’ 방식으로 촬영된 몇 안 되는 쇼트 중 하나
두 번째는 실제로 물 속에서 촬영하는 방식으로, ‘웻 포 웻 Wet for wet'이라 불린다. 이 방식은 ‘드라이 포 웻’에 비해 리얼리티를 구현하기가 용이하나, 배우와 스텝들의 안전문제 등 장애요소가 엄청나게 많다는 문제점이 있다. 흔히 이 방식이 활용된 영화에서는 ‘스턴트 다이버’들이 배우들을 대신해 연기를 하곤 한다. 보통 수중 장면에서는 출연자들이 다이빙 장비로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관객들이 ‘지금 물 속에서 수영하는 다이버가 배우가 아닌 대역 스턴트맨임’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예컨대,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 Jaws>(1975)의 유명한 수중 신 - 후퍼(리차드 드레이퓨스)가 쇠창살 우리에서 백상어의 공격을 받는 신 -에서 쇠창살 우리에 있는 사람이 리차드 드레이퓨스가 아닌 스턴트맨(딕 워락)이라는 사실은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시퀀스에서는 용감하게도 ‘클로즈업’ 장면까지 등장하는데, 이 클로즈업 장면에서 ‘비명을 지르는 후퍼’의 얼굴 역시 대역인 프랭크 제임스 스파크스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관객은 그것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물론 실제로 이것을 문제 삼은 관객도 거의 없었다!)
<죠스>(1975)의 한 장면. “리차드 드레이퓨스를 전혀 닮지 않았다고요? 용서해주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간 만들어진 해양 영화의 제작 방식은 대부분 이 두 가지 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중 ‘소름끼치는 리얼리티’를 창출하는 데 성공한 작품도 많지 않았다. 이보다 ‘진보된’ 수중 촬영 방식을 선보인 영화는 <디프 The Deep>(1977) 정도밖에 없었다. 짐은 <어비스>를 이전에 활용된 모든 촬영방식의 관행을 훌쩍 뛰어넘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촬영하기로 했다. 첫째, (여러분이 예상하는 대로) 짐은 미니어쳐 모델이 쓰인 몇몇 장면(이 장면들은 ‘드라이 포 웻’으로 촬영됐다)을 뺀 대부분의 장면을 ‘웻 포 웻’ 방식으로 촬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웻 포 웻’의 방식과는 달리, 대부분의 수중 장면에서 ‘대역이 아닌 실제 배우들’을 기용하기로 했다. 관객들이 ‘지금 물 속에 있는 사람이 대역이 아닌 실제 배우’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짐은 ‘배우들의 얼굴이 훤히 드러나는 특수한 잠수용 헬멧’을 주문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둘째,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장비들은 ‘실제로 작동하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배우들이 입는 특수한 잠수복에서부터 레귤레이터, 심지어 심해 촬영용 로봇(ROV)까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들은 ‘눈속임용 장난감’이 아닌 실제로 작동하는 것들이었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짐은 수 개 월에 걸쳐 철저한 조사와 과학적 검증을 거쳐야 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해양영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짐은 극단적인 기준을 적용해 ‘솔저’들을 모집했다. 영화 촬영에 참여하는 모든 스텝들은 ‘다이빙’과 ‘수영’ 전문가여야 했다. 다이빙과 수영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예외 없이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하기에 앞서 ‘집단 훈련’을 통해 다이버 자격증을 획득해야 했다. 짐이 제일 먼저 ‘스카웃’한 인물은 할리우드 제 1의 수중 촬영 전문가이자 탐험가인 알 기딩스(Al Giddings)였다. 기딩스는 앞서 언급한 <디프>의 유명한 수중 신을 촬영한 인물로, <007 유어 아이스 온리 For Your Eyes Only>(1981) 등 몇 편의 상업영화와 다수의 해양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명성을 쌓은 바 있다.
알 기딩스
영화의 촬영 감독으로 영입된 미카엘 살로몬 역시 촬영에 앞서 혹독한 다이빙 강습을 받아야 했다. 스텝과 배우들의 다이빙 지도를 위해 다수의 다이빙 전문가들이 초빙되기도 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수중 촬영 중 배우와 스텝들을 보좌하는 안전요원(세이프티 다이버 Safety Diver)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물 속에서 촬영을 진행할 때, 배우와 스텝에게는 각각 전담 안전요원들이 배정되어, 위급 상황을 대비하도록 했다.
모든 배우와 스텝에게는 전담 안전요원들이 배정됐다
<어비스>의 캐스팅 기준은 한 마디로 ‘유별났다’.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기본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는 배우여야 한다. 다이빙 자격증이 있는 배우면 금상첨화지만, 그렇지 않은 배우들은 촬영에 앞서 다이빙 자격증을 획득해야 한다.
2. 최소 6개월 이상 촬영장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3. (이 조항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스턴트를 스스로 소화해 낼 ‘마음의 준비’가 된 배우여야 한다. 하루에 몇 시간 씩 물 속에서 지낼 각오를 해야 하며, 위험한 장면도 (목숨을 걸고!) 소화해 내야 한다. |
짐은 실제로, 영화에 캐스팅되기를 희망하는 배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일일이 전달했다. “경고합니다. 만일 당신이 폐소공포증이 있으며, 물을 좋아하지 않고 당신의 연기 경험에서 겪어보지 못한 고된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영화에 출연하지 마세요!”
짐은 처음부터 <어비스>의 출연진을 모두 ‘비(非) 스타급 배우’로 할 생각이었다. 폭스와 짐의 첫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폭스의 간부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영화의 주연배우만큼은 초대형 스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짐이 다음과 같이 외치자, 폭스의 간부들은 꼬리를 내렸다. “이봐요! 지금 책정된 제작비도 엄청난데, 여기서 돈을 더 쓰고 싶다고요? 당신들이 원하는 배우를 쓰려면 최소한 6~8백만 불은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용의가 있으신가요?” 짐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폭스의 ‘자린고비 근성’을 적절히 이용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캐스팅 단계에서 짐이 가장 고심한 부분은 바로 ‘버드 역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였다. 폭스와 짐이 ‘후보자’로 지목한 인물들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데니스 퀘이드, 해리슨 포드, 윌리엄 허트, 톰 베린저, 커트 러셀, 패트릭 스웨이즈 등. (물론 이 중에는 폭스가 원한 ‘스타급’ 배우도 있고 짐이 원한 ‘비 스타급 배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여러 이유로 ‘예선 탈락’ 됐다. 한 때, 멜 깁슨이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버드 역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비 스타급 연기파 배우들 중에서는 샘 셰퍼드, 샘 닐 등이 거론됐으나, 이들은 다른 영화의 촬영 스케줄과 겹치는 관계로 <어비스>에 출연할 수가 없었다. 영화의 촬영 장소가 정해진 1988년 6월까지도 버드의 역을 맡을 배우는 확정되지 않았다. 초조해하던 짐의 눈앞에 드디어 ‘적격인 배우’가 나타났다.
에드 해리스
에드 해리스. 1950년 생. 그는 지금도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연기파 배우다. 짐은 그를 보는 순간, ‘고민은 끝났다’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에드 해리스는 짐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탁월한 연기력에 불타는 근성, 캐릭터를 읽는 안목까지 말이다. 유일하게 짐의 기대에서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그가 ‘스펙터클한 이마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짐은 버드를 ‘준 대머리’형 캐릭터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버드는 ‘꽃미남형’ 캐릭터나 ‘근육질의 마초형’ 캐릭터가 아닌, 평범한 블루컬러 노동자형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해리스는 ‘스타급 배우’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출연료를 지급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폭스의 간부들은 바로 이 점 때문에 해리스의 캐스팅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해리스가 도무지 관객의 시선을 끌만한 배우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해리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들의 판단은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해리스는 출중한 연기력을 지녔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관객에게 어필이 되지 않는, ‘스타성’이 결여된 배우였다. 이런 묘한(?) 포스 때문인지 <어비스> 이전에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물론 이것을 해리스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말이다) 특히, 그가 출연한 1983년 작인 <필사의 도전 The Right Stuff>의 경우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제작비를 밑도는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이 영화에서 해리스는 유명한 우주비행사 존 글렌의 역을 맡았는데, 관객으로부터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을 괴팍한 인물로 그렸다”는 핀잔마저 들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너무 연기를 진지하게 잘해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짐에게는 해리스의 이런 ‘과거사’ 따위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적역을 찾았다’고 생각한 짐은 해리스의 스크린 테스트를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폭스 사의 간부들에게 보여주며 ‘설득작전’을 전개했다. (이 스크린 테스트에서 해리스는 다이버용 헬멧 대신 오토바이용 헬멧을 쓰고 연기했다). 해리스의 연기력에 감탄한 폭스의 간부들은 (마지못해) 그를 버드 역에 캐스팅하는 데 동의했다.
출중한 연기력과 레퍼런스급 근성의 소유자 에드 해리스
한편, 버드의 상대역인 린지 역을 맡을 여배우를 찾는 일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짐의 영화 속의 여성 캐릭터가 늘 그랬듯) 린지는 강인하면서도 지적이고, 섬세한 캐릭터여야 했다. 이를 위해 짐은 린지 역을 맡을 배우 역시 (해리스처럼) ‘연기파 배우’로 하려 했다. 당시 후보로 거론된 여배우들은 다음과 같다: 제시카 랭, 메들린 스토우, 캐서린 퀸란, 캐시 베이커, 바바라 허쉬, 그리고 제이미 리 커티스까지. 물론 이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짐이 각본에서 묘사한 ‘린지의 성향’을 갖춘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은 여러 이유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결국 린지의 역은 <컬러 오브 머니 The Color of Money>(1986)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란토니오가 맡게 됐다.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란토니오
에드 해리스와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란토니오는 자신들이 ‘초대형 상업영화’에 캐스팅 됐다는 사실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향후 자신들이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짐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아무리 그래도, 진짜 위험한 장면에서는 스턴트 다이버가 나의 대역을 하지 않겠느냐’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것은 실로 중대한 ‘판단미스’였다. (이들이 어떤 ‘생지옥’을 경험했는지는 5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겠다). 한편, 짐의 오랜 파트너였던 마이클 빈 역시 <어비스>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됐다. 영화의 실질적인(어찌 보면 ‘유일한’) 악역인 ‘커피 중위’ 역이었다. 이전까지 주로 섬세하고 곱상(?)한 캐릭터를 맡아왔던 빈은 이 역이 자신의 커리어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전의 보이쉬한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콧수염’을 기르기까지 했다.
‘미스터 빈! 많이 터프해지셨네요?!’
출연진 중에는 아예 ‘전문 다이버’인 인물도 있었다. 바로 ‘루 핀러’ 역을 맡은 키드 브루어였다. 다이버 지도 강사로 활동하기도 한 브루어는 짐의 오랜 친구이자 다이빙 파트너였다. (그는 짐의 감독 데뷔작인 <피라냐 2>에도 출연한 바 있다). 짐 이상으로 ‘바다를 사랑한’ 이 사나이는 (안타깝게도) <어비스>가 개봉한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인은 (물론) 다이빙 사고였다. 짐은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1993년에 발표한 <어비스> 스페셜 에디션의 엔딩 크레딧에 다음과 같은 자막을 넣었다.
“키드 브루어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키드 브루어
짐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비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용감한’ 배우들은 예외 없이 1988년 7월에 케이만 섬에서 잠수 및 다이버 장비 적응 훈련을 받아야 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에 앞서 이들을 모두 ‘다이빙 전문가’로 만드는 것이 짐의 목표였다. 향후의 험난한 제작 일정을 감안할 때, 배우들이 제대로 된 다이빙 교육을 이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들의 ‘생명’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기에 짐은 이 부분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다이빙 집중 훈련 프로그램’에서 유일하게 ‘열외’였던 이는 에드 해리스였다. 해리스는 배우들 중 가장 늦게 캐스팅 된 관계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그에게 ‘예외’가 적용될 수는 없었다. 짐은 해리스에게 <어비스> 직전에 찍고 있던 영화의 촬영 장소 인근의 호수에서 홀로 다이빙 연습을 하도록 지시했고, 결국 해리스는 그 곳에서 다이버 자격증을 획득했다. 1988년 8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개프니(Gaffney)에서 촬영이 시작됐을 때, 배우들은 짐의 ‘엄포’가 결코 허풍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됐다. 잠수복을 입은 짐은 마치 배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속으로 낄낄거리고 있는 듯했다.
"Welcome to my nightmare!"
‘웻 포 웻’ 방식으로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한 이상, <어비스>의 촬영지를 선정하는 것은 짐에게 또 다른 중차대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짐은 실제로 바다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어려움도 감내하겠다”는 ‘충성서약’을 한 배우와 스텝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영화의 촬영지 중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가장 많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다였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숙련된 전문 다이버라고 하더라도 바다에서는 어떤 일이 생길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우와 스텝들의 안전을 100%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런 제약조건들 때문에, 실제 바다를 배경으로 촬영을 ‘강행’한 영화는 제작 기간이 무한정 길어지고 제작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기가 일쑤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죠스>다. (<죠스>의 촬영 기간은 자그마치 159일에 달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 <죠스>는 주로 ‘물 위’에서 촬영을 진행한 영화다. 그런데도 배우와 스텝들은 ‘죽을 고생’을 해야 했다. 하물며, ‘바다 속’에서 대부분의 촬영을 진행해야 하는 <어비스>는 어떻겠는가?! 결국 짐은 이 계획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차선책’을 모색해야 했다.
그럼 ‘차선책’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거대한 수중 세트’에서 영화를 찍는 것이다. 뭐 여기까진 좋다. 문제는 “<어비스> 정도의 초대형 영화를 찍을 만한 거대한 수중 세트가 과연 지구상에 존재하느냐”였다. 정답은 (물론) “NO" 였다. 한때, 말타에 있는 유명한 수중 촬영 전용 세트에서 영화를 찍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말타에 가 본 스텝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규모 자체도 <어비스>를 찍기에는 부적절했지만, 무엇보다 엄청난 양의 촬영 장비를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짐은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상에 <어비스>를 찍을만한 대규모 수중 세트가 없다고? 그럼 하나 만들면 되지!” (짐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타이타닉>을 제작할 때는 “멕시코에 내 전용 스튜디오를 하나 지어주시오!”라고 외쳐 폭스 사의 간부들을 아연실색케 한 인물이다!)
“영화를 찍을 만한 세트가 없다고? 그럼 하나 만들면 되지!”
<어비스>의 촬영지를 물색하던 짐은 저예산 영화 전문 제작자인 얼 오웬스비의 초청을 받게 된다. 오웬스비는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개프니에 위치한 ‘짓다가 만’ 원자력 발전소 시설을 막 인수한 바 있다. 짐은 이 시설을 둘러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그곳은 <어비스>를 찍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짐은 즉각 스텝들을 불러 모아 ‘발전소를 수중 촬영 세트로 바꾸는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할리우드 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공사였다. 발전소 내에는 두 개의 커다란 세트가 들어섰다. 첫 번째 것은 거대한 터빈 구덩이를 개조한 것으로, "B-탱크”라고 명명됐다. 약 2백 2십만 갤런의 물이 채워질 B-탱크에서는 핵잠수함 몬타나 호의 실내 장면 촬영과 각종 미니어처를 이용한 특수 촬영 등이 행해질 예정이었다. 한편, B-탱크보다 훨씬 거대한 원자로격납용기에는 무려 7백 5십만 갤런의 물이 채워질 예정이었는데, 이것은 “A-탱크”라고 명명됐다. A-탱크 내에는 1:1 비율의 딥코어(거대한 수중 석유시추선) 모형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물론 ‘거대한 규모의 촬영’은 주로 이곳에서 진행될 계획이었다.
개프니에 들어선 거대한 수중촬영용 세트
제작 과정에서 <어비스>는 여러 가지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우선, 전술한 A-탱크와 B-탱크는 영화사상 최대 규모의 ‘수중 전용 촬영 세트’였다. 또한, <어비스>는 ‘수중 블루 스크린’을 활용한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중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동시 녹음한 작품도 <어비스>가 최초였다. (이 외에 <어비스>는 특수효과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기록’을 여럿 수립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에필로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짐은 처음부터 ‘기존의 방식으로는 <어비스>의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없을 것’임을 직감하고, 여러 가지 ‘혁신적인 촬영 방식’들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짐은 동생인 마이크 카메론을 제작 현장으로 불렀다. 유능한 엔지니어인 동시에 발명가였던 마이크는 (누가 짐의 동생이 아니랄까봐) 다이빙 전문가이기도 했다. 영화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수중 장면을 창조하기 위해 ‘카메론 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지 촬영 보조 도구들을 제작, 아니 ‘발명’ 했다. 그 중 첫 번째 것은 ‘시 와습 The Sea Wasp'이라 불리는 수중 촬영 도구였다.
‘시 와습 The Sea Wasp'
지상과는 달리 물 속에서는 안정된 구도의 장면을 찍기가 쉽지 않다. 알 기딩스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 핸드 헬드 카메라로도 스테디 캠 쇼트에 버금가는 안정된 장면을 찍는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액션 신에서는 기딩스조차 ‘스무스한 장면’을 찍어 낼 뾰족한 묘안이 없었다. ‘시 와습’은 바로 이를 위해 고안된 장비였다. (이 장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위의 사진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짐이 고심한 부분은 바로 ‘공기 공급’ 이었다. 전통적 방식으로 촬영을 진행하자면, 배우와 스텝들은 물 속에서 영화를 찍다가 공기탱크의 공기가 바닥나면 물 위로 올라와 다시 공기탱크를 채워야 했다. 매일 이런 일을 반복하다가는, 정해진 촬영기간 내에 영화의 촬영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짐은 특수한 ‘수중 공기 공급 시스템’을 고안해 냈다. 배우와 스텝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실로 ‘잔인한’ 발명이 아닐 수 없었다. “촬영을 끝마칠 때까지 물 밖으로는 나올 생각도 마시오!”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물 밖으로 나와서 쉰다고? 어림없는 소리! 촬영 끝나기 전까지는 꿈도 꾸지 마셔!”
그러나 짐이 고안해 낸 최고의 발명품은 역시 ‘특수 헬멧’이었다. 전술한 대로, 짐은 배우들의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얼굴 전체가 훤히 드러나는’ 잠수용 헬멧을 특별히 디자인하여 주문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이 헬멧 내에 ‘고성능 통신 장치’가 장착돼 있었다는 것이다. 뭐 여기까지는 이미 예상하신 분들도 있을테니, 특별히 놀라운 일은 아닐 듯하다. 정작 ‘기막힌’ 것은, 이 통신 장치가 ‘쌍방향 Two-way’이 아닌 ‘단방향 One-way’ 시스템으로 고안됐다는 사실이다. 즉, 짐은 이 장치를 통해 배우와 스텝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나, 배우와 스텝들은 짐에게 답변(혹은 ‘대꾸’)을 할 수가 없었다! (한 인터뷰에서 짐은 이 장치를 가리켜 “영화감독의 꿈(Director's Dream)”이라며 킥킥거렸다) 따라서, <어비스>의 촬영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짐: 무슨 말인지 알죠? (You know what I mean?)
배우: #$&*^%@%$@! (물론 짐 귀에는 안 들림)
짐: 아, 알았다고요? 좋습니다. 그럼 촬영 진행합니다! 액션!!!
배우: (......OTL.....) |
“You know what I mean?!" - 심연의 독재자, 그 이름은 짐 카메론!
짐은 영화 제작에 혁혁한 공헌을 한 동생 마이크에게 작은 역을 하나 제안했다. 핵잠수함 몬타나 호의 승무원 역이었다. 물론 마이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이 역을 맡기로 했다. (이 역 덕분에 <어비스>는 마이크의 공식적인 ‘장편영화 데뷔작’이 됐다). 그런데, 마이크가 이 역을 수락하자 짐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영문을 모르던 마이크는 얼마 후, 그 미소의 의미를 알고 경악하게 된다. 영화의 초반부, 몬타나 호의 침몰 신에서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는 승무원이 바로 마이크다. 뭐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마이크는 한 번 더 모습을 드러내야 했는데, 이 때 그는 ‘물 속에서’ 시체 역할을 해야 했다! (참고로, 침몰한 몬타나 호 내에서 둥둥 떠다니는 시체들은 마네킹이 아니라 모두 ‘진짜 배우들’이다. 이 장면이 촬영되는 동안 배우들은 숨을 꾹 참고 눈을 부릅뜬 채 인형처럼 떠 있어야 했다).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짐은 마이크에게 ‘부담스러운 연기’를 하나 주문했다. “입에서 게가 기어 나오는 장면”을 부탁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는 살아있는 게를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형이 ‘액션’을 외칠 때 그것을 입 밖으로 토해내야 했다. 마이크에게 이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마이크, 아카데미 까메오상 감 연기를 하다!”
"Real for Real! 화면에 비치는 모든 것은 ‘실제’여야 하며, 관객이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짐이 <어비스> 제작기간 내내 견지했던 모토였다. 배우와 스텝들이 죽도록 고생을 한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장비들은 실제로 작동하는 것들이었다. 자, 그럼 이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실) ‘액체 산소의 비밀’에 대해 설명할 차례다. 아마도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이 다음 장면을 ‘가짜’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흰쥐 살려!” 본래 액체 산소는 물보다도 투명한 물질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핑크 색의 무독성 염료를 첨가한 액체 산소를 사용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장면은 ‘진짜’다. 이 장면에서 흰쥐 ‘비니’는 실제로 액체 산소 - 정확히는 ‘산소가 농축된 액체 플루오르화탄소 (Liquid fluorocarbon)’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액체 산소’라고 부르기로 한다 - 를 통해 호흡하고 있다. 이 장면의 촬영을 위해 총 여섯 마리의 흰 쥐가 동원됐는데, (물론) 촬영이 끝난 후 이 쥐들은 모두 ‘무사’했다. 영화에서 맹활약한 ‘비니’는 1989년에 죽었는데, 사인은 물론 ‘자연사’였다.
“비니는 용감했다!”
자, 그럼 ‘액체 산소의 원리’에 대한 짐 카메론과 반 링(Van Ling, 짐의 친구이며 <어비스> 스페셜 에디션 LD의 프로듀서)의 설명을 들어보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물의 성분에는 산소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물 속의 산소량이 대기 중의 산소량에 비해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대기 중의 산소량이 21%인 데 비해, 평균 압력 상태에서 물 속의 산소량은 3%에 불과하다). 고압력 상태에서는 산소 농도가 약간 짙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독특한 점성 때문에 인간의 폐는 물에서 효과적으로 산소를 뽑아내기가 힘들다. 물고기의 경우는 인간에 비해 생존에 필요한 산소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데다가, 물과 접촉하는 표면적이 대단히 넓은 호흡 기관(아가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 속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을 활발하게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사람이 물 속에서 충분한 양의 산소를 얻기 위해서는, 물과 접촉하는 호흡 기관의 표면적이 최소한 6평방미터 이상은 돼야 한다. 하지만 액체 산소의 경우는 산소의 농도가 무려 65%나 되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자유롭다. 물론 일반적인 물과 비교했을 때 액체 산소는 점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호흡하는 자가 심한 불편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워낙 산소의 농도가 높기 때문에 이것은 극복될 수 있다. 액체 산소 연구는 1960년대부터 활발하게 진행돼 왔는데, 1962년에 쥐를 대상으로 한 액체 산소 실험(영화에서처럼)에 성공했던 듀크 대학의 요하네스 카일스트라 교수는 <어비스>에서 비공식적인 조언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흰 쥐 비니가 액체 산소로 호흡하는 신은 이 양반의 조언이 전폭적으로 수용된 장면이다.
“아..,이게 무슨 고생이람!”
그러나 액체 산소를 인간에게 직접 적용(그것도 ‘영화 촬영용’으로!)하는 것은 여전히 무모한 짓이었다. 짐이 아무리 ‘못 말리는 리얼리티의 신봉자’라고 하더라도 배우를 모르모트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버드가 액체 산소로 호흡하는’ 위의 장면에서는 액체 산소 대신 ‘착색한 물’이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해리스는 ‘실제로 액체 산소를 쓰는 것’ 이상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 위 장면을 찍는 내내 해리스는 숨을 참아야 했고, 나아가 ‘액체 산소로 숨을 쉬는 듯한’ 표정연기마저 해야 했다. 이 장면은 여러 번의 촬영을 거듭한 뒤에야 완성됐는데, 그 동안 해리스는 거의 ‘질식사’ 할 뻔 했다. 한편, 해리스가 ‘핑크빛 물이 가득 찬’ 헬멧을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역시 대단히 찍기 어려운 신이었다. 그나마 위의 장면에서는 해리스가 ‘도저히 못 참겠다’라고 신호를 보내면 스텝들이 재빨리 헬멧에서 물을 빼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그가 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아예 헬멧을 ‘밀봉’해야 했기 때문에 해리스는 물 바닥에 내려갈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수면 위로 올라온 뒤에야 헬멧에서 물을 빼고 숨을 쉴 수 있었다.
에드 해리스는 촬영에 앞서 다이빙 하는 법 외에 ‘숨 참는 법’도 배워야 했다.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이었다!
<어비스>의 촬영은 1988년 8월 8일에 A-탱크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A-탱크 내의 딥코어 세트가 미완성되는 바람에 촬영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8월 중순, 무작정 촬영을 연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짐은 B-탱크에서 ‘당장 가능한’ 촬영을 먼저 시작했다. A-탱크의 세트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완성되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세트는 도저히 단시간 내에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짐은 어쩔 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A-탱크에 물을 먼저 채우는 것. 탱크의 크기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었기 때문에, 물을 가득 채우는 데는 무려 5일이 걸렸다. 한편으로, 이것은 딥코어 세트를 짓는 스텝들을 ‘채찍질’하는 지능적인(?) 계략이기도 했다. 스텝들은 물이 가득 차오르기 전에 어떻게든 세트를 완성해야 했기에, 휴식조차 반납하고 미친 듯이 작업에 매달려야 해야 했다. 9월 초, 결국 A-탱크에는 7백 7십만 갤런의 물이 채워졌는데, 이 때까지도 세트는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스텝들은 ‘수중작업’으로 세트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야 했다.
그러나 탱크에 물이 채워지고 세트가 완성됐다고 해서 곧장 촬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두 탱크 모두에 해당한다) 탱크의 물은 근처의 호수에서 끌어온 것이었기 때문에, 촬영에 적합하도록 ‘정화 및 소독’를 해야 했다. 이 작업 또한 며칠이나 걸렸다. 그럼 정화 작업이 끝나면 곧장 촬영을 할 수 있느냐? 물론 그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정화된 물’이 너무 깨끗하다는 데 있었다. 이 때문에 물에는 탱크의 벽과 바닥이 훤히 비쳤다. 이 상태로는 도무지 ‘심연’의 느낌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한 짐은, ‘효과적으로 물을 더럽히는’ 방책을 생각해 내야 했다. 고민 끝에 그는 물 속에 수 만개의 흑색 폴리프로필렌 구슬을 띄워 탱크의 바닥이 ‘반사’ 되는 것을 막았다.
빛의 반사를 막기 위해 뿌려진 흑색 구슬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 표면을 통해 스며드는 햇빛이 또 걸림돌이었다. 짐의 계산에 의하면, 물탱크 속의 조명은 오직 탱크 내의 발광체에 의해 형성돼야 했다. 만일 물 표면을 통해 햇빛이 스며든다면 ‘자연스러운 심연의 느낌’은 사라지고 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짐은 거대한 방수 덮개를 만들어서 탱크의 윗부분을 덮어버렸다. 이 덮개는 크기가 워낙 거대했기에, 그것으로 탱크를 덮는 광경은 영화 자체만큼이나 ‘장관(?)’이었다. 몬타나 호 세트 신의 촬영이 끝난 후, 효과적인 모델 및 세트 교체작업을 위해 B-탱크의 덮개는 제거돼야 했다. 이 시점부터 (어쩔 수 없이) B-탱크의 촬영팀은 밤에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덮개를 덮고 낮에 촬영을 진행하는 A-탱크의 촬영팀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소한 문제는 아주 ‘우연하게’ 해결됐다. 어느 날, 개프니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그 결과 A-탱크를 덮고 있던 덮개가 손상돼버린 것이다. 결국 두 탱크의 촬영팀은 모두 ‘야간작업’을 하게 됐다.
탱크 덮개
한편, A-탱크 세트가 완성된 직후에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또 한 차례 발생했다. 탱크에 연결된 거대한 파이프가 높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만일 촬영 중 이런 불상사가 계속 생긴다면 스텝들의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짐은 ‘땜빵 전문가’들까지 세트로 불러들여야 했다. 초빙된 이들은 유명한 댐 수선 전문가들로, 이들은 짐의 지령에 따라 탱크의 상태를 수시로 살펴보며 ‘물이 새지 않도록’ 문제시 되는 부분들을 완벽하게 보완했다. 이 외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돌발사태로 인해 스텝들이 ‘어이를 상실’하는 경우도 있었다. 근처에서 방목되던 ‘호기심 많은’ 염소들이 줄기차게 세트장을 ‘방문’한 것이다. 염소들은 세트장의 잡동사니들을 마구 씹어 먹기도 하고 탱크를 둘러싼 벽 위에서 ‘신나게’ 놀다가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스텝들은 틈이 날 때 마다 작업을 중단하고 ‘염소 사냥’을 해야 했다.
“메헤헤헤헤헤~~~”(음..멋진 광경이군!)
하지만 이 모든 해프닝들은 촬영 기간 중 배우들이 겪은 ‘살인적인’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배우들이 이토록 죽을 고생을 한 근본적 이유는 바로 짐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짐의 오랜 친구인 마이클 빈의 회고에 따르면, <어비스>를 찍을 당시 짐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발생하는 ‘돌발상황’으로 인해 스케줄은 계속 지연을 거듭하고 있었고, 영화의 제작비 역시 일찌감치 ‘한도’를 초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짐을 ‘미치게’ 만든 것은 이런 갑갑한 상황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바로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 <어비스>의 촬영장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짐의 ‘에고’가 완연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배우와 스텝들의 의견이야 어떻든, 짐은 자신이 만족할만한 장면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재촬영을 요구하곤 했다. 배우와 스텝들은 촬영이 시작된 지 한 달 여 만에 완전히 녹초가 됐고, 몇 분 안 되는 휴식 시간에는 어김없이 짐에 대한 욕설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물론 짐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용감한(?) 인물은 어김없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 실제로 짐은 촬영이 시작 된지 며칠 되지 않아, 두 명의 조감독을 차례로 ‘집으로...’ 보냈다. 이 순간부터 스텝들에게 짐은 단순히 ‘히스테리컬한’ 감독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었다.
“Abuse(학대)” <어비스> 제작 당시 스텝들은 자신들을 끊임없이 ‘학대’(?)하는 짐 카메론과 관련된 많은 ‘은어/속어’들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그 중 하나다.
배우들 중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한 이는 (물론) 에드 해리스였다. <어비스>를 찍으며, 해리스는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해리스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마음만 먹으면’ 그런 한계쯤은 수시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잠수복을 입고 각종 ‘스턴트급’ 연기를 하는 것도 모자라, 해리스는 스쿠버 장비를 전혀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영을 하는 장면도 직접 연기해야 했다.
이 장면은 배우들이 직접 연기한 것이다
위의 장면에서, 해리스와 레오 버미스터(‘캣피쉬’ 역)는 일체의 스쿠버 장비 없이 40피트 이상을 헤엄쳐야 했다. 물론 카메라 뒤에는 안전요원들이 공기통을 들고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배우들이 공기가 필요하다며 허우적(?)대면 안전요원들은 즉시 그들에게 다가가 공기를 공급하곤 했다. 이 장면의 촬영은 배우들이 완전히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수차례나 반복됐는데, 그럼에도 짐은 ‘만족할만한 장면을 찍지 못했다’며 계속 촬영을 강행했다. 지루한(?) 촬영이 끝없이 계속되자, 안전요원들의 주의력도 점차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 해리스는 ‘아! 이제 난 죽었다!’라고 생각하여 공포에 질리기도 했다. 몇 번째 테이크인가, 열심히 헤엄을 치던 해리스는 ‘공기가 필요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막상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는 필사적으로 온 몸을 휘저으며 ‘SOS’ 신호를 보냈고 안전요원은 뒤늦게 신호를 알아채고 그에게 레귤레이터를 물려주었다. 이 때, 해리스는 ‘심연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온 몸으로 체감했다.
딥 수트를 입고 열연하는 에드 해리스
한편, 해리스는 영화의 유명한 ‘심연’ 신을 찍을 때도 이와 유사한(아니, 이보다 더한!) 경험을 했다. 이 장면에서 해리스는 영화를 위해 특수하게 고안된 심해 잠수복(‘딥 수트 Deep Suit'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 해군에서 실제로 쓰던 심해 잠수복을 응용해 만든 것이다)을 입고 연기를 했는데, 문제는 딥 수트용 헬멧에는 레귤레이터가 연결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 버드는 공기탱크가 아닌 ‘액체 산소’를 통해 호흡을 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었다). 따라서 해리스는 이 장면을 연기하는 내내 숨을 참아야 했다. 물론 그가 ‘도저히 못 참겠다’고 SOS 신호를 보내면, 대기하고 있던 안전요원이 쏜살같이 헤엄쳐 와서 그에게 레귤레이터를 물려줬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런 ‘생고생’으로 인해, 해리스는 매일같이 ‘탈진’ 상태로 숙소에 돌아와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숙소에 돌아온 해리스는 ‘심적 고통’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해리스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 그가 운 이유는 단지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 사소한(?) 고통도 못 견뎌 하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실망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는 해리스의 프로페셔널 근성을 엿볼 수 있는 감동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연기자, 그의 이름은 에드 해리스
버드의 아내 린지 역을 맡은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란토니오 역시 해리스 못지않게 ‘생고생’을 해야 했다. 그녀가 겪은 고초 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익사(Drowning)' 신이었다. 이 장면에서, 버드는 차가운 물에 의해 ‘일시적인 익사 상태’에 빠진 린지를 데리고 딥코어로 헤엄쳐 와서는 그녀를 ‘소생’ 시킨다. 매스트란토니오는 군말 없이 ‘익사 상태에 빠진 린지’ 역을 수차례나 소화해 냈다.
이 장면에서 ‘익사 상태의 린지’ 역은 매스트란토니오가 직접 소화했다
그러나 버드가 린지를 소생시키는 장면(이 장면에서 매스트란토니오는 가슴을 드러낸 채 눈을 멀뚱멀뚱 뜨고 ‘산 송장’ 연기를 해야 했다)에서 급기야 그녀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짐은 완전히 녹초가 된 배우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끊임없이 ‘재촬영’을 요구해댔다. 결국 매스트란토니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울먹이면서 “우리는 짐승이 아니에요! (We are not animals!)”라고 외치고는 세트를 떠나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세트로 복귀했으나, 짐의 태도(?)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혹사’에도 불구하고 스텝과 배우들은 짐에게 함부로 항의를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촬영장에서 누구보다 물 속에 오래 있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짐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목숨을 건’ 연기를 하는 순간마다 짐은 물 속에서 그들과 고통을 함께 했고, 심지어 다른 이들이 물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때에도 그는 물 속에 남아 묵묵히 다음 신을 구상하곤 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에요!
한편, 특수효과를 맡은 스티브 존슨의 일화는 당시 스텝들이 짐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공포감(?)을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스티브 존슨 팀이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심해의 외계인 - 'NTI'(Non-Terrestrial Intelligence)라고 부른다. 짐은 'ET' 혹은 'ETI(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와의 심리적 연관성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명칭을 택했다 - 의 모형을 만드는 것이었다. 짐이 요구한 NTI의 외양은 ‘우아하고 지적인 동시에 아름답고 신비로운(!)’ 느낌의 것이었다. (‘레퍼런스급 상상력’의 소유자인 짐조차도 이 NTI의 모습만큼은 구체적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뫼비우스(장 지로)에게 NTI의 디자인을 의뢰하기도 했다. 뫼비우스가 디자인한 NTI는 비록 짐의 구상보다는 ‘우아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향후의 NTI 디자인 작업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존슨 팀은 디자인 팀의 디자인을 기초로, 각종 발광장비를 갖춘 NTI 인형들을 만들었다.
뫼비우스가 디자인 한 NTI
NTI 모형 (“앗싸, 가오리!”)
존슨은 애써 만든 인형들이 손상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촬영 리허설 기간 동안 최대한 인형을 ‘혹사’시키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리허설이 시작된 후, 존슨은 모든 인형들이 물탱크 내에서 돌아다니는 광경을 목격했다. 존슨은 기겁하여 스텝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젠장! 리허설 기간에는 인형들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했잖아!” 스텝들은 존슨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카메론 씨가 인형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고 싶다고 하셨는걸요?” 존슨은 다시 이렇게 외쳤다. “그 인간이 뭐라고 말했든, 난 관심 없거든?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인형은 혹사시키지 마!” 순간, 존슨은 스텝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것을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니 바로 ‘그 인간’ 짐이 서 있었다! 세트의 온도는 순식간에 영하 50도로 내려갔다. 모든 스텝들이 ‘이제 존슨은 죽었다’라고 생각하던 찰나, 존슨은 능청스럽게 짐에게 미소를 지었다. 짐은 ‘작금의 상황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고, 존슨은 그에게 자신의 ‘우려’를 상세히 설명해줬다. 잠시 생각에 잠긴 짐은 (스텝들의 예상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 말이 옳은 것 같소!” 존슨은 이 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짐이 나를 이해해준 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쉰 것은 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완벽주의자인) 그의 ‘승인’을 얻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세트 장의 모든 이들은 그의 승인을 얻기를 원했다”
촬영 일정이 계속 지연되자, 폭스는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폭스는 수시로 짐에게 영화의 진행상태를 물어왔고, 짐은 틈이 날 때마다 그 때까지의 작업분을 폭스사로 보내서 간부들을 달래야 했다. 폭스는 짐이 찍은 기막힌 장면들을 본 뒤 ‘일단’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폭스는 영화 제작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결국 간부들은 개프니로 ‘조사 위원’을 파견해야 했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폭스에서 조사 위원을 보내는 횟수는 잦아졌다. 짐은 조사 위원들에게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했다. 한 조사 위원은 ‘때를 잘못 골라’ 짐에게 호되게 당하기도 했다. 이 위원은 탱크 위에서 잠수 준비를 하고 있는 짐에게 다가가 제작이 너무 지연되고 있다는 둥, 예산이 벌써 바닥났다는 둥 다양한 핀잔을 늘어놓았다. 묵묵히 이를 듣고 있던 짐은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더니 그 위원의 멱살을 잡고는 그를 탱크 가장자리로 내몰았다. 순간, 스텝들은 짐이 그 사람을 물 속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짐은 새파랗게 질린 위원을 향해 ‘씨익’ 웃어보이고는 그를 놔줬다. 부들부들 떨던 그 위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몰고 세트를 떠났다!
‘씨익’ (짐 카메론의 분신 ‘터미네이터’)
영화의 제작비가 최초 책정된 5천 만 불을 초과할 것이 확실해지자, 폭스는 짐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 짐은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만일 제작비가 책정된 금액을 넘는다면 자신의 개런티를 절반으로 깎겠다’는 옵션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물론 이 옵션 계약은 얼마 안 가 효력을 발휘하게 됐다. 하지만 짐에게 ‘반값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 정도는 문젯거리가 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는 <어비스>를 완성시키면 그만이었다. 짐은 질질 끌었던 ‘개인문제’를 해결한 뒤(짐은 1989년 2월에 게일 앤 허드와 정식으로 이혼했다) 곧장 <어비스>의 후반 제작 과정에 돌입했다.
<어비스>의 특수효과 작업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전문성’에 따라 여러 회사에 나눠서 할당됐다. 예컨대, CG 작업이 요구되는 ‘물기둥 신’과 ‘해일 신’은 ILM에게, NTI와 잠수정 등의 모션 콘트롤 쇼트는 드림퀘스트 이미지(Dreamquest Images)에, 각종 미니어처 작업은 판타지 II(Fantasy II)에 각각 맡겨졌다. 짐이 ‘완벽한’ 신을 원한 만큼, 이들 회사의 작업 속도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각 회사들은 자신들의 최종 작업분을 개봉일에 임박해서야 전달할 수 있었다.
한편, 짐은 영화의 최종 편집본을 놓고도 (여지없이) 폭스와 한 바탕 ‘전투’를 치러야 했다. 짐이 편집한 <어비스>의 러프 컷은 러닝타임이 무려 세 시간에 달했다. 폭스는 ‘러닝타임 두 시간 이상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짐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작 짐이 고민한 것은 이 부분이 아니었다. (짐은 <어비스>의 러닝타임을 두 시간 이내로 줄이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짐은 ‘무대뽀 정신’으로 맞설 생각이었다). 짐이 고민한 부분은 바로 ‘두 개의 엔딩 버전 중 어떤 것을 택하느냐’였다.
하나는 NTI가 버드와 딥 코어의 승무원들을 구해주며 끝나는 버전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훨씬 길고 많은 돈이 투입된 버전이었다. 이 버전에서는, NTI가 ‘바닷물을 조종하는 능력’을 이용해 거대한 해일을 일으켜 인류를 위협하는 신이 포함돼 있었다. NTI는 버드가 보여준 숭고한 희생정신과 사랑에 감명을 받고 ‘인류에게 아직도 희망은 있다’고 판단하여 해일을 다시 잠재운다. 이 엔딩은 짐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버전이었으나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길이가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이 엔딩 버전을 선택할 경우, 짐은 이와 관련된 모든 엑스포지션 부분들(‘제 3차 세계대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각종 뉴스 릴 등)도 영화에 포함시켜야 했는데, 이렇게 되면 (엔딩 신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의 러닝타임이 턱없이 길어져야 했다. 둘째, 특수효과가 짐의 기대에 못 미쳤다. 해일의 특수효과는 ILM이 맡았는데, 당시의 CG 기술로는 ‘해일이 멈추는 장면’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기에 러프 컷에는 ‘어정쩡한 완성분’이 들어가야 했다. (ILM은 1992년에야 이 장면의 ‘만족스러운 버전’을 완성하여 이듬해 <어비스> 스페셜 에디션 LD 버전에 삽입할 수 있었다)
문제의 해일 장면
결국 짐은 ‘전례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테스트 시사회’를 하여 관객의 반응을 본 뒤 어떤 엔딩을 택할지를 결정하겠다는 것. 그런데 달라스에서 개최된 테스트 시사회의 결과는 짐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엔딩 장면 직전까지 관객들의 반응은 대단히 호의적이었으나 정작 해일 장면이 등장하자 반응이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관객들이 해일 장면이 ‘뜬금없는 신’이라고 여기며 당황했다. (물론 여기에는 이 신의 특수효과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결국 짐은 관객들의 반응을 본 뒤, ‘해일로 끝나는’ 엔딩 버전을 과감히 포기할 것을 결정했다.
폭스는 이 결정에 대해 크게 반발했고, 짐에게 (많은 물량이 투입된) ‘해일 신’ 대신 버드와 린지 간의 관계를 다룬 신들을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짐은 이 제안을 무시하고 ‘해일 장면’ 및 그와 관련된 신을 몽땅 삭제했다. 막상 이 장면들이 빠지고 나니 ‘위기에 처한 인류가 보잘 것 없는 노동자의 감동적인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는 거창한 주제의 영화는 ‘휴머니즘을 다룬 SF-로맨스물’로 돌변했다. 새로운 <어비스>의 편집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이 2시간 26분에 달했다. 폭스는 다시 짐에게 ‘영화를 두 시간 이내의 길이로 줄여달라’고 요구했고, 짐은 이를 거절했다. 폭스의 요구가 계속되자, 짐은 ‘테스트 시사회를 한 번 더 해보고 결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따라 (해일 장면이 삭제된 버전으로) 두 번째 테스트 시사회가 열렸고, 관객들은 이 버전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폭스는 ‘대세(?)를 따라’ 이 버전을 극장에 걸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런데 영화의 개봉일인 8월 9일(예정보다 거의 두 달이나 늦은!)을 앞두고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어비스>에 앞서 개봉한 저예산 해양 영화들인 <레비아탄>과 <딥 식스>가 흥행에서 참패했다. 특히 <레비아탄>의 경우는 (저예산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MGM이 공격적인 홍보 활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MGM(<레비아탄>)과 캐롤코 픽쳐스(<딥 식스>)는 폭스를 대상으로 한 ‘초 치기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폭스의 간부들은 자연히 “관객들이 이제 ‘해양영화’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나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했다. <어비스>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어비스>에 앞서 공개된 여름 블록버스터물들의 위세가 ‘기가 질릴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당장 6월에 개봉한 팀 버튼의 <배트맨>이 박스 오피스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며 거대한 흥행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배트맨>의 기세가 어찌나 살인적이었는지, 미국의 유력언론매체들은 앞을 다투어 “<배트맨>은 할리우드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수립할 것이 확실하다”라고 점쳐댔다). 이어서 <스타 트랙 V: 최후의 미개척지>, <리썰 웨폰 2> 등 그 해 최고의 기대작들이 줄지어서 개봉하며 관객들을 ‘쓸어갔다’. 폭스의 1989년 최고 야심작이었던 <어비스>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개봉했다. 그리고 짐은 ‘1급 상업영화 감독’이 된 이후 최초의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어비스> 개봉 당시의 포스터
<어비스>의 북미 최종 흥행 성적은 5천 4백만 불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스코어만 놓고 보면 적어도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참고로, <어비스>의 해외 흥행성적은 약 3천 5백만 불 수준이었다. 이를 북미 흥행수익과 합친다면, 적어도 <어비스>는 ‘본전’은 건진 셈이다). 그러나 영화의 최종 제작비가 무려 6천 9백만 불(이것은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와 더불어 당시로서는 ‘기록’이었다)이 넘었으니, 폭스와 짐의 기준으로는 이 흥행성적은 사실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종 언론 매체의 반응은 엇갈렸으나, “기대에 다소 못 미쳤다”는 평가가 약간 더 많은 편이었다. 특히 영화의 엔딩 장면(‘해일 에피소드’가 빠진!)에 대해서는 ‘유치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았다. (<어비스>의 흥행 실패 요인, 그리고 평단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 중에서 충분히 제시 - 혹은 ‘암시’ - 됐다. “과연 ‘극장판’ 어비스가 실패작인가”에 대한 최종 판단은 여러분께 맡기겠다).
할리우드에서는 제작 중인 영화의 내용을 ‘소설화’하여 개봉에 앞서 먼저 발표하는 경우가 흔하게 있다. 이것은 물론 영화의 홍보 전략의 일환이다. 서점에, 그리고 가판대에 영화의 제목을 단 소설이 진열돼 있다는 ‘전시효과’ 만으로도 사람들은 곧 개봉할 영화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또한 이것은 대중들에게 ‘이 영화는 잘 나가는(?) 어떤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것이구나!’하는 착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 책을 사서 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영화 제작사 입장에서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불순한(?) 의도’ 때문에, 영화의 ‘소설화’는 주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B급’ 소설가들에게 맡겨지곤 한다. 물론 ‘1급 작가’가 영화의 소설판을 집필하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일 뿐이다. <어비스>의 소설판의 경우는 어땠을까? 눈치 빠른 분들은 글쓴이가 이 부분을 따로 소개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셨을 것이다. <어비스>의 소설판을 집필한 작가는 (놀랍게도) 바로 이 사람이다.
올슨 스콧 카드
올슨 스콧 카드. 1951년 생. 그는 <엔더의 게임 Ender's Game>과 그 후속작인 <사자의 대변인 Speaker for the Dead>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2년 연속으로 동시에(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상한 특급 SF 작가다. (<엔더의 게임>과 <사자의 대변인>은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인기 작품들이다) 그런 그가 뭐가 아쉬워서 ‘남의 작품’의 소설판을 집필했을까? 지금부터 여기에 얽힌 사연을 간단히 소개하도록 한다.
어느 날, 올슨 스콧 카드는 에이전트에게 ‘영화의 소설판의 집필에 관심이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카드는 “이봐요, 난 그런 건 절대 안 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에이전트가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래요!”라고 말하자 카드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는 에이전트에게 “그래요? 그럼 각본을 한번 보내줘 봐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에이전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각본을 보시려면 먼저 ‘발설 금지 서약서’에 사인을 하셔야 한데요!” 카드는 ‘정말 까다롭게 구는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각본의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짐의 각본 초고를 받아 보았다. 침대에 누워 각본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는 어느 새 각본의 내용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순식간에 그것을 독파했다. 각본의 내용은 정말 놀라왔다.
<어비스> 소설판
카드는 <터미네이터>를 보았을 때의 ‘경이감’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영화는 ‘훌륭할 이유’가 전혀 없는 영화였다. 소재나 무뚝뚝한 악센트의 보디빌더 출신 배우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제임스 카메론은 그것들을 버무려 정말 기막힌 영화를 만들어냈다” 카드는 SF 영화광은 아니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를 본 뒤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게 됐다. 그리고 <에이리언 2>를 본 뒤,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한편, 짐이 특별히 카드를 <어비스> 소설판의 집필 작가로 ‘찍은’ 이유는 그가 ‘잘 나가는 SF 작가여서’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짐은 당시에 카드가 1986년과 1987년에 휴고상 및 네뷸러 상을 동시에 수상한 특급 작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짐은 이전에 옴니(Omni)지에 실린 카드의 단편을 본 뒤,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어비스>는 당시 짐에게는 ‘일생일대의 역작’이 될 터였는데, 영화의 ‘위상’을 빛내기 위해 그는 영화의 ‘완벽한’ 소설 버전을 영화 개봉에 앞서 출간하기를 원했다. 짐이 원한 것은 ‘영화의 소설화’가 아니라 ‘완벽한 작품성을 갖춘 한 편의 소설’이었다. 짐은 자신이 이전에 읽은 단편을 통해 카드의 재능을 엿보았고, 그야말로 <어비스>의 소설판을 써줄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카드는 짐과 전화통화를 한 직후, 짐의 열정에 완전히 매료되어 <어비스>의 소설판을 집필할 것을 결정했다. 짐은 카드가 ‘완벽한 소설’을 집필할 수 있도록 모든 ‘특혜’를 제공했다. 카드는 소설 <어비스>의 내용을 최대한 영화의 그것과 일치시키기 위해 영화의 촬영장을 몇 번이나 방문했으며, 각본이 수정될 때마다 수시로 소설의 내용도 ‘업데이트’ 했다. 한편, 짐은 카드가 쓴 소설의 첫 3장(각본에는 없는 주인공들의 과거사가 상세히 묘사된다)을 배우들에게 보여주며 향후 연기의 ‘지침’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카드에 의하면, 그와 짐은 마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제작 당시 스탠리 큐브릭과 아서 C. 클라크가 그랬던 것과 같은 긴밀한 ‘공동작업’을 했다고 한다.
카드의 <어비스> 소설판은 영화보다 약 두 달 가량 먼저 발표됐다. 이 소설은 <엔더의 게임>과 같은 선풍적 인기를 끌지는 못했으나, 스테디셀러로서 독자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소설판 <어비스>는 지금까지도 ‘영화의 소설판’ 중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카드는 극장판 <어비스>를 본 뒤 크게 실망하게 된다. 각본에서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해일 장면’ 및 그에 관련된 장면들이 모조리 삭제됐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카드는 관객들이 영화의 엔딩 장면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비스>가 개봉한 뒤, 카드는 팬들로부터 “왜 영화판 <어비스>가 당신이 쓴 소설보다 더 재미가 없죠?”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는 이 때마다 이렇게 답변했다. “원래는 (제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었어요!”
<어비스> 스페셜 에디션 LD
1993년, 짐은 ‘본래의 의도대로’ 편집된 171분짜리 스페셜 에디션 버전 <어비스>를 LD로 발표했다. (이 LD는 ‘공식적’으로 THX 인증을 받은 최초의 LD 타이틀이다. 물론 DVD로 출시된 <어비스> 스페셜 에디션은 이것과 동일한 버전이다). 짐의 열혈 팬들은 이 LD를 본 뒤 “이제야 <어비스>가 걸작인 이유를 알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 LD가 나왔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바로 카드였다!
짐은 1990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아카데미 회원들을 위해 ‘<어비스>의 메이킹 다큐’를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제출해야 했다. 영화의 특수효과가 워낙 빼어난 탓에, 회원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진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특수효과로 만들어낸 부분’ - 예컨대 물 위에 떠있는 거대한 벤틱 익스플로러 호는 놀랍게도 미니어처 모형로 촬영된 것이다 - 을 각인시키지 못한다면 <어비스>는 시각효과 부문의 상을 탈 수가 없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가 헛되지 않아, <어비스>는 1990년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어비스>가 영화사에서 ‘특수효과의 새 장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물기둥(일명 ‘Pseudopod’) 장면
아마도 극장에서 <어비스>를 본 세대는 이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의 경이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사에서 ‘현대 디지털 특수효과의 출발점’이 된 중요한 신으로 평가된다. <어비스> 이전까지만 해도 영화에서 CG가 본격적으로 활용된 예는 드물었다. <트론>(1982)이나 <라스트 스타파이터>(1984)와 같이 'CG 효과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영화 속의 CG 장면은 예외 없이 현실감이 결여된 ‘만화 같은’ 장면이었다. 심지어 <어비스> 이전까지 최고의 CG 장면이라고 평가받던 <영 셜록홈즈(피라미드의 공포)>(1985)의 ‘스테인드 글라스 기사’ 장면 역시 ‘현실감’ 면에서는 기대에 못 미쳤다. 짐은 각본 작업 당시 ‘물기둥 장면’을 일종의 ‘옵션’으로 쓴 바 있다. 만일 완성된 특수효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이 장면은 삭제될 예정이었다. 짐은 처음부터 이 장면을 제대로 구현할 방법은 ‘CG'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CG 기술 수준으로는 이 장면을 완벽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만화 같은 장면’이 아니라 ‘레퍼런스급 리얼리즘이 넘쳐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차선의 대안(CG 기법을 제외한)’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도무지 만족스러운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에게 ILM의 데니스 뮤렌이 이렇게 제안해왔다. “우리에게 맡겨 주시죠! CG를 이용해 당신이 원하는 수준의 장면을 만들어보겠습니다!” 뮤렌은 이 작업이 ILM에게도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으로 믿었다. 결국 ILM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맡게 됐다. 당시 이 물기둥 장면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이는 바로 이 사람이다.
존 놀(John Knoll)
존 놀. 1962년 생. 그는 아버지 그렌 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와 사진에 푹 빠져서 지냈다. 그는 또한 영화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는데, 이미 유년기에 지하실에 틀어박혀 여러 편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경력이 있을 정도다. 1985년에 남가주대를 졸업한 후, 그는 ILM에 입사해 CG 수퍼바이저로 활약하게 된다. <어비스>의 물기둥 장면을 맡을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연구비는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아내는 출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형 토마스 놀(Thomas Knoll)과 함께 최근에 개발한 맥킨토시용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상용화 할 계획을 세웠다. 존 놀은 1988년 9월에 이 프로그램을 어도비(Adobe) 사의 간부들에게 보여줬다. 어도비 사의 간부들은 이 프로그램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고, 즉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상용화에 앞서 존 놀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었다.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상용화에 적합하도록 다양한 기능을 부가하는 일이었다. 존 놀에게 <어비스>의 물기둥 장면은 이를 위한 최적의 ‘연구 교재’로 여겨졌다. 결국 <어비스>는 존 놀과 토마스 놀 형제가 개발한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적용한 최초의 상업영화가 됐다. 존 놀이 이 프로그램을 적용한 장면은 바로 아래 신이다.
물기둥이 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 신은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물기둥 장면’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만들기 까다로운 신 중 하나였다. CG에서 실사로 ‘매끄럽게’ 전환돼야 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짐의 완벽주의 성향을 고려할 때, 이 장면이 허술하게 만들어질 경우 물기둥 장면 전체가 ‘퇴짜’를 맞을 위험성도 있었다. 존 놀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해 한 프레임씩 CG 물기둥이 ‘진짜’ 물로 변하는 과정을 ‘그려’ 나갔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존 놀의 맹활약 덕분에 이 신은 영화사상 길이 기억될 특수효과 장면이 됐다.
존 놀은 <어비스>의 작업 경험을 토대로 형 토마스 놀와 함께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의 수정/보완 작업을 착착 진행해 갔다. 어도비 사는 1990년 2월에 놀 형제가 완성한 프로그램을 드디어 출시하게 된다. 그 프로그램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붙었다.
“포토샵 1.0”
존 놀은 이미 개발 단계부터 이 프로그램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이 프로그램이 ‘대체 얼마나 대박을 터뜨릴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처음 출시된 후 15년이 지난 지금, “포토샵”은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이 됐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그럴 리 없겠지만, 만일!) “포토샵”이 뭔지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T이거나 NTI이거나. (2006.01.06.)
- 다음에는 대망의 <터미네이터 2> 특집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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