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집 평설]
박헌오
(시조시인, 초대대전문학관장)
105
[시조집 평설]
- 野城이도현 시조집「당신의 가을」초고를 읽고 -
박헌오 (시조시인, 초대대전문학관장)
Ⅰ. 이도현 시인의 이력서
삶의 길이 저기라고 검지로 가리킨다. 살아온 길은 저기였
다고 뒤돌아보며 가리킨다. 손가락 세 마디로 가리키는 거기
가 어디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하늘 높이 날아올라 적도를 넘어오는 도요새나, 작은 벌레
한 마리를 낚아채는 멧새의 시력은 신기하듯이 그 손끝이 보
이지 않는 것들까지 감지한다.
시인의 길은 남다른 데가 있는 것만 같고, 시인의 직감은
따를 수 없는 데가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시인임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 시인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시의 향기가
알 수 없는 곳까지 퍼져나가고, 시의 생명력이 무궁한 훗날까
지 생생하게 피어나는 시인이 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올해 팔순을 맞이하는 야성野城이도현 시인의 시조집「당
신의 가을」초고를 읽고‘이런 시조를 어떻게 쓸 수 있단 말
바람은 숲에서 외출하고, 숲으로 돌아온다
인가? ’하는 깨우침이 앞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연전에 대전문화재단에서 원로예술인 구술채록 대상자로
이도현 시인이 지명되고 필자가 채록연구원으로 종사하게
되어 평소에도 가까이서 본보기로 삼았지만 구술채록 과정
에서 시인의 상세한 삶의 역정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바, 일반적인 시론이나 추상적 담론 보다는 이 시인의 생생한
삶과 시조에 대한 소감을 담담하게 써보고자 한다.
이 시인을 일컬어‘바람의 시인’이라고 한다. 그동안 시인
은 여덟 권의 시조집과 한 권의 시선집을 간행하였던 바, 그
시조집 제목을 보면 모두‘바람’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이 추구하는 바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
까? 이 시인의‘바람’은 스스로 한 점 바람이 되기도 하고, 때
로는 장자의 바람, 서산까지 따라 오는 바람, 저녁놀 곱게 물들
이는 바람, 푯대 하나를 세우는 바람으로 새롭게 변용變容한다.
이번 열 번째 시조집『당신의 가을』에선 산수령傘壽嶺에 오
르는 바람이 되어 어떤 모습으로 지향할지 궁금하다.
이제 향기롭게 그리고 넉넉하게 익은 시의 과수원으로 우
리를 초대한다. 시조집 맨 끝의 장편「바람 불어 한 평생 - 나
의 이력서 -」12수에는 이 시인의 이력을 축약해 놓고 있다.
그 가운데 몇 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106
107
무인년戊寅年8월 25일 세상문을 열었다.
용봉산 아래 야성野城, 수덕사 가는 길목
유년을 깨운 까치소리, 꿈의 요람 성재야.
- <나의 이력서> 첫수
이 시인은 1938년 8월 25일(음), 예산군 삽교면 상성리에서
태어났다. 일명 삽다리라고 부르며, 덕숭산 수덕사와 예산 수
암산 주변으로 일찍이 만해 한용운 선생의 고향이요, 1930년
예산에서 문예지『문예광』이 발간되고, 1937년『시인춘추』가
발간되는 등 문학 활동이 활발했던 고장이었으므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났을 것이다. 여기서 이 시인은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일찍 4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장형의 보살핌과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같이 슬픔을 머금고 성장하면서 각별한 사랑으로 감성
적 정서를 가지고 문학적 재능을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어머
니는 이 시인의 상장, 통지표 하나하나를 반듯하게 다리고 펴
서 정성스럽게 간직해왔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바로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
는 불경이고, 성경이고, 신앙서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체온과
사랑이 밴 그 쪽지들을 성장 후에 물려받은 이 시인은 무시로
볼 때마다 눈물을 적셨을 것이다. 장형께서는 자주 이 시인의
사주팔자가‘천문성天文星을 타고 났으니 장차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고 믿고 있었다. 어머니는 6.25 사변이 일어나기 전
해에 이 시인이 초등학교 교장으로부터 받은 문예부 임원 임
명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이 시인이 문인이 되리라고 일찍부
터 믿었던 것 같다. 이 시인의 아호 야성野城은 고향 상성리를
둘러싼 구릉에 있는 토성土城이기도 하다. 시인의 운명이 신
의 섭리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 시인의 환경과 성장과정은
거역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 하늘은 무너지고
만혼의 기쁨으로 한 가닥 희망을 키워
아이들 눈빛 모두어 한밭에 둥지 틀었네.
- <나의 이력서> 다섯째 수
어머니는 집안의 자랑스러운 기둥으로 삼으리라고 키워낸
막내아들이 서울로 유학하고 선생님이 되어 돌아왔으니 생
전에 장가들여서 며느리를 보고 싶어 채근했을 것이지만 이
시인은 어머니가 언제까지나 살아계실 줄 알고 있다가 막상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죄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좋은 아내를 만나 어머니가 보내주신 운명
의 배필로 알고, 어머니처럼 투정을 다 받아주고, 무한히 사
랑해주는 존재로 의지하고 살았을 것이다.
시우詩友만나 시를 쓰고 잔 기울여 다시 쓰고
자정을 넘기면서 고뇌한 원고지 행간
현암교玄岩橋불빛을 불러 대전천을 노래했지
- <나의 이력서> 여섯째 수
108
109
이 시인은 1969년 서울 성균관에서 열린 전국 시조백일장
에서 입상한 후 대전에 와서 본격적으로 많은 시인 선후배들
을 만나 창작활동에 재미를 붙였다. 일찍이‘차령’시조동인
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이후‘가람문학회’편집간사를 맡아
소정素汀정훈 선생을 모시고 동인지를 발간하느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스폰서를 구하고 책을 돌리면서 헌신적으로 봉
사하였다. 이 시인이 시작활동을 했던 시절의 단면을 볼 수
있는 한 작품을 보자.
읽고, 쓰고, 가르치고 바람 불어 한 평생
육필로 써 내린 장편의 서사시敍事詩를
어느새 흰 카락을 슬어 허공에 띄우는가
- <나의 이력서> 열한째 수
이 시인은 교단에서 국어과목이 중심교과이므로 국어를 잘
해야 영어나 수학도 잘할 수 있다고 가르쳐 왔다. 학생들에게
이해력과 표현력을 동시에 길러주기 위해 구양수의 좋은 글
쓰기 지침을 거울삼아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想量의 방법
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읽고, 쓰고, 가르치고, 강의하고, 어
느덧 세월은 흘러 지나온 장편의 서사시를 마무리하면서 흰
머리칼을 허공에 날리는 연치에 오른다.
Ⅱ. 산수령傘壽嶺의 숲에 안긴 가을바람
이 시조집의 제목은『당신의 가을』이다. 이 시인은 머리글
에서“아직은 심심하지 않은 바람! 크신 은총 속에 열사흘 달
빛 같은, 잘 구워진 달항아리 같은, 시조 한 수 짓고 싶다. 하
늘이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을 감사하며, 열 번째 시조집‘당
신의 가을’을 간행한다.”고 맺고 있다.
이 시조집은 부인께 드리고자 정성을 다한 일생의 고백서
가 아닐까?
지금까지 시인이 일궈낸‘바람’은 늘 새로운 바람으로 변
용變容하더니, 이젠 산수령傘壽嶺의 숲에 안겨 감사하며 더 깊고
곡진한 사랑으로 불고 있음을 본다.
그때가 가을이었지
능금빛 익어가던
예산읍내 향천리
과수원 그늘 사이
두 손을 꼭 잡은 햇살
수줍은 시월이었지.
설흔 한 살 노총각
가슴에 불을 지핀
110
111
불현듯 다가선
지순至純한 당신 눈빛
지금껏 내 동공에 찍힌
당신의 가을이어.
- <당신의 가을 1> 전문
작품「당신의 가을 1」전문이다. 능금빛 익어가던 가을, 예
산 읍내 향천리 어느 과수원에서 만난 첫사랑, 그래서 두 손을
꼭잡은 수줍은 정경을 그리고 있다. 설흔 한 살 노총각 가슴
에 불을 지핀 지순한 눈빛에 반해 인연이 된 사연을 읽는다.
이 시인은 예산 신양중학교에 근무할 때에 담임반 학생이
아침밥을 먹지 못하고 왔다고 정성껏 도시락을 싸가지고 온
학생의 언니를 보고 그만 한눈에 빠져 그날 퇴근길에 그 학생
의 집에 가정방문을 가서 다시 언니를 만나 결혼을 결심하였
다고 한다. 그 가을의 지순한 눈빛이 지워지지 않고 지금껏
동공에 찍혀 싱그럽고 향기롭게 곁에 있어 주는 분위기를 그
리고 있다. 그 지순한 눈빛을 어찌 지울 수 있을까?
스물 넷 꽃다운 나이 / 그로부터 오십년을
주님 섬기면서 / 삼남매 키우면서
부족한 남편 뒷바라지에 / 가을도 저물었다.
- <당신의 가을 2> 첫수
마치 한편의 세레나데를 감상하는 것 같다. 이제 결혼 50
년을 맞이하면서 그 고움과 깊음과 고마움을 지금 더 절실하
게 느끼면서 시조로 빚어 올리는 시인의 심정을 알 듯싶다.
주님을 섬기면서, 삼남매를 키우면서, 남편 뒷바라지에 반백
년을 희생하고 봉사한 지극정성을 기리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월급쟁이 집장만 / 바람도 휘청였다
셋방살이 몇 번인가 / 진정, 미안 했소
삼성동 내 집 마련에 / 까치란 놈 짖어대고
도마동 높은 다락 / 그도 잠시 머물다가
내동, 복수동 집 / 둥지를 갈아들며
여기는 쟁기봉 초당草堂/ 조그만 궁, 당신 쉼터.
- <당신의 가을 3> 전문
평생 교직에 봉직하는 동안 시골에서 대전에 들어와 셋방
살이 하면서 박봉에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절약하고
저축해서 퇴직 후에 아담한 집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 모두 부
인의 공이요, 작은 집이지만 궁전이나 다름이 없으니 당신의
아늑한 쉼터로 삼아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남편의
사랑과 기원이 담겨 있다. 이 시인이 사는 초록마을 아파트는
쟁기봉을 배경으로 앉아 앞으로는 멀리서 유등천 상류가 달
려와 살짝 부채로 가리고 돌아서듯 버드내로 흘러가는 배산
임수背山臨水의 터에 당신 쉼터를 마련했으니 얼마나 좋은 안
112
113
식처일까? 틀림없이 명당이요 멋진 궁일 게다.
연중 꽃이 피는 / 창안 가득 웃음 만평
지윤, 정윤, 은채 / 그만그만한 꽃송이들
그러다 한 십년쯤 뒤면 / 손주사위 보겠네.
- <당신의 가을 4> 둘째 수
부인의 사랑으로 가꾸어놓은 꽃들이 베란다에서 철따라
피어나고, 그보다 더 짜릿한 사랑덩어리 손자 손녀들이 헤아
릴 수 없는 웃음을 선사하는 단란함을 당신이 가꾸어 냈으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손주사위 보면서 살자는 기약이
담겨 있다. 이 절절한 감정을 다른 말로 돌려댈 수 없으니 뜨
거운 숨결에 담아 퍼내고 있음이다. 부인의 정숙하고 정성스
러우며 사려 깊음을 말하고 싶어 숨 고르고 시조에 담아낸 것
이 아니랴.
대전에 들어와서 / 인연이 된 현암교회
새벽을 열어가며 / 달빛을 밟아가며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당신 / 가을도 익어갔다.
- <당신의 가을 5> 첫수
대전으로 전입한 기쁨도 컸겠지만 셋방살이 고단함을 겪
으면서 부인은 달빛을 밟고 새벽기도를 다녀와서 아침밥을
지어 올리고, 출근하는 남편의 헤진 옷깃을 손질해 드리면서
기도로 따뜻이 데운 도시락을 드렸을 것이다. 웃음으로 보내
고 돌아서서 눈가에 이슬도 맺혔을 것이다. 이 시인은 교회
에 가서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깊은 신앙이야 알았으랴. 지금
에 와서‘당신은/ 사랑을 키우는/ 감람나무 정원사’라고 부
인께 감사하면서 진정한 신앙생활에 접어든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Ⅲ. 시조의 중후한 무게와 밀고 당기는 가락
이 시인은 옅은 기교로 시조를 쓰기보다는 탄탄한 저력과
오랜 경륜의 깊이로 작품을 쓴다. 한 편 한 편이 궁색하거나
불완전함이 없는 묘사와 시적 진술로 경을 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은 더 새로워지고, 시어는 여물어만 가는가 보다.
일생동안 시조를 쓰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고 청복淸福을 누리
며 살아왔으니 그 얼마나 장하고 아름다운가.
아침햇살 한 접시
식탁에서 웃어주면
온종일 기가 살아
까치도 펑펑 짖고
저녁엔
달빛 한 자락
처마 끝에 복을 짓네.
- <아침햇살> 전문
114
115
진정 시인의 삶을 노래한 명징한 한 편의 단수이다. 아침
식탁에 이것저것 차릴 까닭이 없다. 하얀 접시에 담긴 햇살
한 줌이면 족한 것이지. 시인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안빈
낙도安貧樂道이다. 왕성한 기운으로 반가운 이들을 다 불러대
는 까치소리가‘펑펑’넘치는 것이다. 하루해를 좋은 사람들
과 어울려 시원하게 할 말 다하고 즐겁게 지내고 나서 시인의
하늘에 달이 뜨면 처마 끝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시를 써서 글
발을 매달아 놓는다. 천성으로 닦아온 시조의 복이기도 하
다.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삶의 자세를 엿
본다.
시조는 흐름이 있고 /굽이가 있나니
초장은 한번 뽑고 / 중장은 두 번 뽑고
종장은 어깨 너머로/ 휘끈 돌려 감는다.
이렇듯 멋진 것이 / 돌돌돌 감는 것이
한 번 읊어 맛을 알고 / 두 번 읊어 격格을 세워
합죽선合竹扇한여름 밤을 /접었다가 펴는 율律.
- <물레질 - 시조작법> 전문
이 시인은 평생 시조를 가르치고 보급하며 살아왔다. 사람
들이 모두 어렵고 낯설다고 하는 시조를 명쾌하고 재미있게
가르쳤다. 대전에서는 30여년 동안 전국한밭시조백일장을
창설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시조에 대한 연구와 학교 순
회강의, 시조교실 개강, 시조홍보 등에 혼신의 노력을 다해가
며 시조를 흥미롭게 가르쳐 왔다. 이 작품은 시조짓는 요령을
첫 수에서는 물레질에 둘째 수에선 합죽선에 비유하면서 쉽
게 가르친 교범敎範이 아닐까.
1. 큰 글 성경
한눈을 팔지 말고 / 정도正道로만 가라신다
살아서 역동하는 / 신령한 구원의 말씀
오늘도 머리맡을 지켜 / 이 아침을 깨운다.
2. 국어사전
세상일 알 듯 싶지만 / 얼마나 다 알랴
일석一石선생 편찬하신 /무진장한 어휘語彙의 바다
언제든 날 찾아보라고 / 손짓하는 스승님.
3. 만년필
널 보면 상想이 솟고/ 널 쥐면 글이 되는
필생을 함께 해야 할 / 나의 손끝 반려자
반백년 바래지 않은 / 잉크빛이 곱구나.
4. 안경
호주머니엔 언제나 / 눈 하나를 챙겨야 한다
네가 없으면, 진정 / 보고도 못보는 눈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 / 손때 묻은 돋보기.
- <사우가四友歌> 전문
116
117
옛부터 많은 문인들이 벗 삼아 사는 네 가지를 가리키면서
사우가四友歌를 지어 노래했다. 이는 지은이의 삶을 꿰뚫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인의 사우가 속에서
삶의 면면을 알 수 있다. 첫 자리에 큰글성경을 놓은 것은 삶
의 기반이기 때문일 것이다. 뒤늦게 신앙생활에 맛을 들여 깊
은 신앙심을 깨우치고자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
인다.
두 번째로 국어사전을 들었다. 특히 스승님이 언제든 찾아
와 물어보라고 손짓을 하신다고 소개할 정도로 정들이며 살
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인은 대학 재학중 이희승, 최현배, 이두
현, 양명문, 박창배, 김성배 교수 등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
었던 것이 너무나 큰 복이요 영광이었다고 자랑한다. 곁에 스
승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곧 책의 중요성
이다.
세 번째로 만년필을 들었다. 글쓰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가
장 애지중지하는 것이 무엇이랴. 바로 문방사우文房四友일 것이
며 붓으로 쓰지 않는 지금은 만년필이나 볼펜이 아니겠는가.
약속을 하지 않아도 평생을 같이하는 것이 자신의 필기구이
고, 글을 열심히 쓰는 사람일수록 펜을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것이니 그 예를 갖춰 사우가에 등장시킨 것이다. 살아있는 벗
이요 언제나 생각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앞장서서 글을 만
들어주는 충실한 반려임을 칭찬하고 곱다고 말해주고 있다.
네 번째로 안경을 등장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시력이 약해
지면 작은 글씨를 못 보기 때문에 시인이 안경이 없으면 봉사
나 다름이 없다. 비록 얼마 안 주고 산 안경이라 할지라도 몸
에 익어 좋은 관계가 되면 그처럼 소중한 필수품이 어디 있겠
는가? 이 시조에서 보여주는 이 시인의 생활상은 신앙생활과
창작생활이 핵심임을 알 수 있다.
Ⅳ. 초록마을 둥지에 꿈과 시심을 물들이고
일생에 있어 노년을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갖고 있
고, 부부가 건강하게 그 집에 들 수 있으며, 자녀들의 웃음소
리와 책 읽는 소리를 그 집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게다가 가족들이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없고,
서로 이해하고 위해주며, 함께 즐길 수 있는 생활가운데 정신
이나 영성으로도 한 뜻을 찾아갈 수 있다면 가히 황제가 부럽
지 않은 천복을 누리는 삶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여생을 가
지런히 정리하며 살 수 있는 문필까지 갖추고 묵향 속에 살
수 있다면 신선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명당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였지
유등천 피라미떼
쟁기봉엔 까투리야
무심코
118
119
창문을 열면
산청山靑뚝뚝
새소리.
- <초록마을> 전문
여생의 안식처로 삼을 훌륭한 집이라 할지라도 그 것을 알
고, 누리며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소
용이 없을 것이다. 이 시인은 아마도 이 보금자리를 능히 건
사하고 여기서 아름다운 여생을 꿈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작
품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시인이기 때문에 피라미 떼와 대화
하고, 까투리와 함께 노래하며, 뚝뚝 떨어지는 산청山靑에 담
뿍 젖어 살 수 있음을 실감하는 함축된 한 편의 시조이다.
시조는 단수에 묘미가 있다. 짧은 작품 속에‘초록마을’의
전경이 압축되고 있다. 중장에서 유등천과 쟁기봉을 대조시
켜 흥미 있게 구성하고, 종장에서「무심코/창문을 열면/ 산청
山靑뚝뚝/새소리」곧 명사로 종결시켜 감동적인 여운을 남긴
다. 특히‘산청 뚝뚝/새소리’는 시각과 청각을 융합시킨 절
묘한 기법으로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준다. 고도의 절
제미節制美가 함축된 가작을 만난다.
그리운 사람은 곁에 있어도 그립다
얼마나 그리우면 곁에서도 태울까
그 눈빛 노을 강처럼
젖어서도 타고 있다.
그리움이 물들면 무순 빛깔일까
태워도 태워도 지워지지 않는 당신
여기 좀, 여기 좀 봐요
벌겋게 뛰는 가슴 놀.
- <그리움이 타는 노을> 전문
노부부의 숯불같이 활활 타는 아름다운 사랑을 저녁노을
로 환치한 작품이다. 부러움을 감출 수 없는 여러 편의 시조
를 감상할 수 있지만 그중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뽑고 싶다.
얼마나 애틋한 그리움이면 곁에서도 그립고, 젖어서도 타고
있다고 노래하는가? 그리움의 빛깔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
도이고, 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되 사위지 않는
불길이라니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경지이
다. 특히 그리움을‘벌겋게 뛰는 가슴 놀’이라 은유한 대목은
동영상을 보는 듯 참으로 놀랄 만하지 않은가. 시를 예술로
빚어내는 노련한 장인匠人의 솜씨를 여기서 본다.
Ⅴ. 멍에를 메고 찾아가는 기도의 길
이 시인은 교직에서 은퇴하면서 바로 교회에 나간 듯싶다.
부인의 간곡한 권유로 교회에 나가면서 신앙에 대한 신뢰
를 쌓고 그 후 주일을 빠짐없이 성수하며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서 독실한 크리스천이 된 듯하다.
120
121
시조 속에 녹아 있는 이 시인의 신앙고백은 진정성을 의심
할 도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은 여생을 신앙에 귀
의하여 살겠노라는 약속 또한 굳건해 보인다.
높지도 않은 자리 / 내려오라 / 이르신다.
귀 높으면 귀가 멀고 / 눈 높으면 눈이 멀고
솟으면 / 정을 맞는 법/ 나지막하게 살라신다.
- <낮은 바람> 전문
신앙을 받아들이는 첫 단계는 비움이다. 이 작품은 시인이
자신을 비우고 숲으로 돌아온 바람이 되어 숲속의 낮고 맑은
바람으로 살겠다는 뜻을 함의한다.
이제 시인은 신앙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고 집안을 함께 꾸
려가는 반려로만 생각했던 부인을 신앙의 인도자라는 또 다
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이 시인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음에 아마도 부인이 가장 행복해 할 것이다.
무너져 가는 허리를 주님이 세우셨습니다.
80이 넘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일어나 글을 쓰라고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 <주님이 주신 지팡이> 첫수
나이는 못 속인다는 것을 이 시인은 체험한 것 같다. 올해
팔순을 맞이하면서 허리병으로 고생을 하면서 더욱 깊은 신
앙심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병세를 이기고 일
어설 수 있음이 주님이 지팡이를 주신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은 아픔이나 고난을 겪으면서 철이 더 깊어진다고 하
는데 이 시인이 크게 깨우침을 얻어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신체적으로나 영성으로 흔들리지 않
는 건강을 찾아가는 것이 분명하다. 더 지혜롭고 완전한 분에
게 순명하며 갈 길을 묻는다면 그릇됨이 없을 것이니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을 볼 수 있음이다.
성스러운 이 아침을
누가 주셨나요
오욕칠정五慾七情물든 세상
누가 지워 주셨나요
밤사이
몰래 다녀가신
하나님의
발자국.
- <설국雪國> 전문
122
123
따사롭고 평화로운 설국이 있을까? 누군가 참으로 은혜롭
게 날마다 성스러운 아침을 눈을 뜨고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심
에 감사하는 마음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물음으로 말하고 있
다. 자신이 가졌던 욕심도 다 비워주고, 온 세상에 얽히고설킨
욕정의 흔적들을 다 지워주신 것은‘밤사이/몰래 다녀가신/
하나님의/ 발자국’이라 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성결하
고 하얀 아름다움의 나라‘설국’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Ⅵ. 모국 강산의 기행
제4부에선 모국강산을 노래한 기행시조들을 만난다.
창공에 매달린
저 푸른
노송老松의 단심丹心
절벽인가
단풍인가
하늘을 기어오르네
단원檀園도
붓을 잡았다 놓친
기암절벽
사인암舍人巖.
- <매달린 가을> 전문
시인이 작품의 말미에 주석을 달았듯이 단원 김홍도의 그
림 속에 나오는 단양 팔경 가운데 제 5경 사인암을 찾아가서
쓴 시조이다. 사인암은 고려 말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작품을
쓴 성리학자 우탁禹倬이 사인舍人벼슬을 할 때 가끔 찾아와 휴
식했다 해서‘사인암’이라 하였다는 유서 깊은 바위절벽이
다. 단양팔경은 빼어난 명승지인데 충주호에 묻히고 그나마
일부가 남아 다행이다. 얼마나 황홀했으면 단원 김홍도가 붓
을 잡았다 놓쳤을까? 시인은 단풍으로 물든 기암절벽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면서 단원이 그리려다 놓친 아찔한 절경을
한 폭 그림처럼 읊고 있다.
고산孤山선생 뵙는 길 / 멀고도 아득하다
해남 땅끝을 지나 / 쪽빛바다, 바다를 가르면
뱃길도 잔잔하여라 / 그림처럼 떠있는 섬.
“하늘이 날 기다리니 /이 섬에 머물리라“
고산선생 물외가경物外佳境) / 이곳 외 또 있을까
산, 바다 마실 다니며 / 풍류 띄워 시 쓰던 섬.
- <보길도甫吉島를 찾아서> 전문
조선 인조 때 고산 윤선도가 이 섬에 13년간 머물면서 시조
를쓴섬.“ 고산선생이제주도로가려다태풍을만나잠시이
섬에 머무는 중, 섬이 아름다워 정착하면서 이른 말”이란 주
석이 달렸다. 고산 윤선도가 해남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가
보니 함락되었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니 이미 때가 늦어 제주
124
125
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에 발이 묶여 지내면서 남긴 어부사시
사漁父四時詞와 세연정을 비롯한 유적들을 대하는 것은 시조시
인으로서는 선행해야 할 일이다. 이어서 해남의 녹우당을 보
고 산중신곡을 비롯한 고산의 시조 여정을 밟아보면서 얼마
나 많은 감회를 느꼈을까를 가늠해 본다.
지금 막 간월호看月湖엔 / 반란이 일고 있다.
어디서 몰려 들었나 / 광란하는 저 새떼
점점이 하늘에 꽂히는 / 어지러운 / 화살촉.
지구는 죽지 않고 / 살아서 황홀한 무대
서녘 하늘 보아라 / 천수만 물든 저쪽
기러기 줄지어 난다 / 붉은 낙조 / 홍위병.
- <군무群舞-천수만淺水灣새떼> 전문
천수만은 시인의 고향 예산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이
시인이 교장이 되어 서산 음암중학교에 근무하면서 바람의
시인답게 <서산까지 따라오는 바람>이란 시조집을 상재하였
다. 그 가운데 아마도 천수만의‘군무群舞’는 가장 인상 깊은
시상으로 남겨 두었다가 이 시조집에 발표한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에도 반란이 있고, 수난이 있고, 지켜야 할
정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인은 그 고즈넉하고 파도소리가
소라에 담기는 듯 아름다운 간월호에서 반란과 어지러운 화
살촉과 홍위병을 떠올렸을까?
시인의 상상은 자유로우면서 개성적이다. 여기서 이 시인
의 상상은 천수만 철새 떼의 군무를 아름답고 진기한 풍경으
로 보지 않고, 마치 무서운 사극을 방불케 하는 전쟁터의 화
살촉과 홍위병으로 비유하고 독자를 긴장의 도가니로 끌어
들이고 있음을 본다. 이것이 시인의 개성적인 눈이요 독특한
상상이 아닐까.
Ⅶ. 법고창신으로 한국인답게 살아가는 선비
앞에서 야성 이도현 시인의 삶과 문학을 대강 조명해 보
았다.
시인은 우리 고장 충남이 낳은 시조시인으로서 어려서부
터 사랑받는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하였기에 성품도 온유하
며, 평생을 교단과 문단에서 읽고, 쓰고, 가르치고, 지금까지
강의하는 생활 속에서 선비적인 기질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 시인은 시작詩作의 기본자세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한
다. 그의 시전詩田엔 언제나 새로운 바람이 분다. 10권의 시조
집에서 그의‘바람’은 늘 새로움을 찾아 변용한다. 일상에서
소재를 찾되 명확한 주제의식을 갖고 참신성 있는 내용을 선
정한다. 날카로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 이치를 찾고자
하며, 일물일어一物一語곧 알맞은 시어를 찾아 표현하기에 밤
을 앓는다. 언단의장言短意長, 말은 짧고 뜻은 깊어야 한다는 신
126
127
념, 그러기에 한 편의 시조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하
는 노력이 치열하다.
또한 철저하게 한글을 사랑하는 정신이 강하다. 일찍이 이
희승 선생과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우리말본을 배운 영향이
확고하다고 여겨진다. 평생을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쳐온 교
학상장敎學相長의 사도師道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시조를 쓰는
사람 가운데에서도 자유시도 쓰고, 수필도 쓰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지만 이 시인은 오직 시조쓰기에 전념하면서 시조를
연구하고 보급하는데 온힘을 기울여 온 시인이다.
시조時調는 선비의 전통이니 선비다운 삶이 곧 시조라는
소신으로 살아온 팔순! 평소‘바람은 숲에서 외출하고 숲으
로 돌아온다’는 정신으로 그동안 못 다한 사랑과 시심詩心을
새롭게 발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높은 혜안과 경륜이 존경스
럽다.
더욱 건승하시고 문운이 함께 하시기를 빌어드린다.
2017년 7월, 여름
첫댓글 감사합니다. 훌륭하신 평설 잘 읽었습니다. 자주 오셔서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세요.
선샣심 평론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 이곳에 가득히 내려주세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좋은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