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망전후
김정일은 공식 후계자가 되고 나서 ‘당중앙’이란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노동당의 전권을 장악했고 김일성은 외국의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정도의 업무에서만 표면에 등장했다. 이때 이후부터 호위사령부가 개편되고 제1총국은 김일성 담당 호위업무를, 제2총국은 김정일 담당 호위업무를 취급했다.
제2총국 대원들은 복장과 급식 등 모든 대우가 제1총국 대원들보다 월등하게 좋았다. 밖에 나가서는 제1총국 대원들이 제2총국 대원들에게 얻어맞고 다녔다 한다. 그 후로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의 집무실이나 私邸(사저)를 전화 도청하고 김일성의 동정을 일일이 파악하고 간섭했다. 그 도가 지나쳐서 한때는 김일성이 아들에게 권력세습을 하게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94년 7월25일 평양에서 열기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정일과 군부는 반대했다. 이들은 남북통일이 오로지 전쟁이나 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일성은 북한의 어려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남한과의 경제교류를 역점으로 하는 협상전략을 짜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자신이 평소 인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1995년에는 최소한 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해로 정하고 서울을 답방해 ‘남조선 인민들이 위대한 김일성 동지를 환영하는 환상’ 속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협상전략을 김정일과 군부에 설득하고 김영삼 대통령과의 대담을 성공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향산(묘향산) 휴양소에서 당과 국가 주요간부들과 여러 날 동안 밤낮으로 토의하다 과로에 지쳐 1994년 7월8일 목욕탕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평양에 즉시 연락해 헬리콥터 두 대로 의료진이 출동했으나 바람이 세게 불고 기상이 험악해 향산 도착이 상당히 지연됐다. 김일성은 의료진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일부 전문가들이 그 당시 상황을 분석해 부자간에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합의가 없이 김일성이 일방적으로 강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들이 기술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근거가 없는 소리다. 당시 휴양소에 같이 있던 후처 김성애와 비엔나에 있는 딸 김경진과의 국제전화를 모 기관이 포착했는데, 평양과 유럽 각지와의 국제전화는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의 통신위성으로 중계가 되고, 모스크바로부터 다른 나라까지는 유선으로 중계가 된다. 통화 내용을 분석하면 위에서 언급한 사실 외에 다른 의혹은 없었다.
권력투쟁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평소에 예견했던 것처럼 이복동생 김평일이 ‘넘어야 할 산’으로 접근했다. 1954년생의 김평일은 아버지를 닮아 미남이고 준수하며 성품도 원만했다. 숙부인 김영주를 비롯해 소위 혁명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권력후계자로 거론됐다. 그들은 김평일을 보면 김일성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면서 매우 좋아했다.
김평일이 평양 남산 고급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성적은 같은 학교 출신인 김정일보다 도덕, 일반 학과, 예술, 체육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높았다. 그래서 그 학교 졸업생들과 교사들은 언제나 김평일을 김정일보다 높이 평가하고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믿었다. 이 사실을 감지한 김정일은 참을 수가 없어 남산학교의 모든 학사기록을 소멸하기 위해 하수인을 시켜서 그 학교를 폭파한 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얘기다.
김정일의 살생부 첫 페이지에는 남일과 오진우가 있었다. 남일은 김일성보다 두 살 아래인 1914년생으로 타슈켄트 사범대를 나와 소련군 장교로 임관해 1942년 육군 대위가 되었다. 그는 1945년 스탈린의 밀명을 받고 김일성을 돕기 위해 평양에 왔으며, 건국 초기 외무상을 지냈고 1953년 휴전협정에서 인민군 대장으로 북한을 대표해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남일은 이후 당정치국 위원, 부수상 등의 요직을 거쳐 1972년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도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소련의 시민권자인 남일의 이중국적 문제로 모스크바를 의식해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1976년 3월 초 남일은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석유화학공장 건설을 시찰하러 갔다. 그런데 시골 비포장 도로 좁은 길에서 공장건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대형 트럭이 갑자기 나타나 남일이 탄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남일이 즉사했다. 1976년 3월7일 <노동신문>은 ‘남일 부총리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이라는 짧은 기사를 남기고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이 사건 직후 김정일은 인민군 총정치국장 이용무 대장에게 지시해 오진우를 감시하며 비리를 적발해 ‘남일과 같은 운명’을 맞게 하자고 했다. 김정일이 오진우를 특별히 경계했던 이유는 그가 아버지 김일성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혁명1세대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자 김정일을 늘 어린애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오진우를 항상 ‘거대한 장애물’로 여겼다. 또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오진우가 김성애와 그녀의 동생 김성갑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를 김평일의 강력한 배경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존중해야 했다. 이 때문에 혁명1세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고민했다. 1976년 5월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하자 김정일은 이용무를 앞세워 오진우 압박공작을 서둘렀다. 이용무는 총정치국장의 권한으로 전군의 막사와 사무실에 김일성 초상화 바로 옆에 김정일의 초상화를 걸게 했다. 또 김정일 관계 출판물을 대대적으로 보급해 전군이 학습하도록 만들었다. 이 功(공)으로 이용무는 1974년 6월 당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기고만장한 이용무가 군부에서 월권 행동을 많이 하자 오진우의 진언으로 김일성이 그를 해직했다. 이후 김정일은 박충국을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밀어 넣었다. 박충국은 김정일과 장성택의 술친구였다. 박충국은 오진우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해직되었으며 곧바로 쿠바 특명전권대사로 나갔다. 오진우와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1976년 6월 당정치위원회에서 혁명1세대들이 김정일의 정책을 공개비판 했는데, 구체적으로 당의 질서와 규율을 파괴하고 老(노) 간부들을 일선에서 퇴진시키려는 그의 공작을 문제 삼았다.
당시 비판을 주도했던 김동규는 결국 정치범수용소에 갔고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기반 구축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젊은 세대에서 60만 명을 새로 노동당에 입당시켰다. 그는 1979년 오진우의 동의 없이 48세의 젊은 오극렬을 인민군 총참모장의 자리에 앉혔다.
오극렬은 김정일의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동기로 혁명2세대를 대표하는 군인이다. 그는 공군 출신으로 소련공군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에 능한 군사이론가였다. 그는 매사를 상관인 오진우보다 김정일에게 먼저 보고했다. 그래서 김정일과 오진우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이후 김정일은 오진우와의 싸움에서 전략을 바꿨다.
“머지않아 오극렬이 오진우를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이 될 것”이란 풍문을 군부에 유포시켜 오진우로 하여금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퇴근해 집에 와 보니 부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마당에 자동차 두 대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광택이 번쩍 번쩍 빛나는 미제 포드와 독일제 벤츠-450이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 김정일은 오진우에게 호화주택을 지어주고 기쁨조 비밀파티에 꼬박꼬박 초대했다. 이렇게 해서 오진우는 '어린 목동이 고삐를 끌고 가는 한 마리의 늙은 소'가 되었다. 기쁨조 파티에서는 오진우가 가장 나이 많은 손님이며 여러 사람이 권하는 술에 항상 만취해 집에 돌아갔다. 그런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갔다.
1987년 봄 밤 늦게까지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만취한 오진우는 직접 차를 몰고 집에 가다 가로등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새벽에 그를 발견해 병원에 옮겼으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두개골이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김일성은 자신의 전용기로 오진우를 마취상태로 모스크바에 보냈다. 모스크바에서는 그를 동독으로 보내 수개월간 치료 끝에 회복시켰다.
만취한 71세의 노인에게 자신이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게 하고 밤길에 경호원도 없이 집에 보냈다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이 교통사고의 저변에는 그를 해치기 위한 고의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여부를 따질 길이 없었다. 당시의 사정을 더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986년부터 김정일은 자신의 측근들에게 별도로 벤츠-280을 한 대씩 지급했다. 차의 번호판은 일률적으로 동일했다. 김정일의 생일을 의미하는 ‘216-9999’, 그리고 이것이 후에 ‘216-5555’로 바뀌었다. 그러나 꼭 지켜야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김정일이 사적으로 모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이 자동차를 이용할 것, 그리고 이 자동차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운전할 것이며 다른 사람은 아무도 태우지 말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난잡하고 방종한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
오진우가 없는 동안 김정일은 오극렬에게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장 직무대행을 하도록 했다. 이 짧은 기간에 오극렬의 리더십이 인민군 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작전 지휘관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모두 그가 계속해서 인민무력부장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주장은 군대는 전투지휘관이 지휘해야지 정치군관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재기불능으로 믿었던 오진우가 목발을 짚고 평양에 돌아왔을 때 인민군 내부의 상황이 많이 변해있음을 발견하고 오극렬의 실책을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그는 당의 권위와 정책을 무시하고 정치군관들의 활동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의 의도와는 달리 오진우가 다시 인민무력부장의 자리에 복귀하고 오극렬은 한직인 민방위사령관으로 좌천됐다.
군부장악
1991년 12월24일 김정일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1992년 4월21일에 원수 계급을 받음으로써 그는 명실 공히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김정일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지 4개월 만인 1992년 4월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장성급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차수 오진우를 원수로, 최광을 포함한 8명이 대장에서 차수로, 상장에서 대장이 16명, 중장에서 상장이 96명, 대좌에서 소장이 524명이나 진급했다.
김정일은 만경대구역에 거대한 장성급 전용의 병원을 건설하고 국경일에는 장성들을 대동강구역 능라초대소에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군단장급 이상 간부들에게는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은색 ‘백두산 권총’과 ‘고급 혁대’ 등을 하사하고 무력통일을 위한 군의 단결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아버지를 의식해 혁명1세대 오진우는 그가 1995년 2월25일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상징적으로 인민무력부장의 직위에 두고 그 외의 군부 실세를 모두 자신의 심복으로 포진했다.
훗날 김일철은 인민무력상이 되고 조명록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총정치국장이 되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선군정치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자신과 군의 관계를 옹벽으로 둘러싼 운명 공동체로 만들었다. 김정일은 조국통일의 주력은 역시 군대라고 생각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와 병행해 對南공작을 강화해 남한 내 혁명역량(親北세력)을 구축하고 때가 오면 스스로가 ‘통일대통령’이 된다는 꿈을 軍 지휘관들 앞에서 피력했다.
對南공작 강화
김정일은 군부를 장악한 다음 對南공작을 본격적으로 강화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對南사업담당 비서에 김용순을 발탁했다. 중앙당 산하에는 네 개의 방대한 對南공작기구가 있었는데 김용순은 對南담당비서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통일전선부(통전부)를 직접 지휘했다.
김정일은 對南공작을 위해 39호실의 비자금 중에서 막대한 돈을 풀고 남한 내부와 해외교포들을 포섭해 공작금을 주고 親北활동과 反美운동을 전개하도록 통일전선부의 활동 지침을 직접 지시했다. 남한에서 소위 ‘해외 민주인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또는 평양에서 派送(파송)된 통전부 간부들과 수시로 만나 공작지령과 공작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방탕한 사생활
김정일을 용납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방종과 초호화판 사생활이었다. 인민은 굶어 죽어도 그와 그 가족은 39호실 비자금에서 돈을 물 쓰듯 사용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 용품은 거의 다 외제였으며 심지어 그들의 애완동물까지 프랑스 샴푸를 사용했다.
그들이 먹는 식품과 일용품은 동남아의 열대 과일을 포함해 지중해 연안의 오렌지, 수단의 수박, 스칸디나비아의 바닷가재와 연어, 이란의 캐비어, 독일의 맥주,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지의 샴페인과 포도주, 스페인의 거위 알, 덴마크의 돼지고기,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의 소시지와 치즈, 독일과 미국의 의약품, 일본의 도자기와 의류, 프랑스산 향수와 샴푸, 日製(일제) 또는 美製 컴퓨터, 시세이도 화장품, 아랍에서 들여오는 안마기계, 남부 아프리카에서 밀수하는 코뿔소의 서각(정력제로 사용), 에티오피아의 고양이 사향 등이 있었다.
세계에서 진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사들이는데 이런 물자를 ‘1호물자’라고 해서 다엑심(Daexim), 아미산 상사, 2월 은빛달 상사등 여러 전담 상사들이 있었다. 일본, 중국, 로마,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파리, 코펜하겐, 베를린, 마카오 등지에는 상주하는 지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총지휘하는 사람은 김정일 직속 서기실의 박용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김정일을 위한 물자조달에 신명을 다 바친 인물이다. ‘1호물자’는 주로 컨테이너로 항공수송을 하는데 물자가 많을 때는 김정일의 전용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해외에 나가있는 북한의 재외공관은 ‘1호물자’ 수송을 최우선으로 협조해야 했다. 북경에 있는 고려민항총국은 ‘1호물자’를 모두 받아 평양까지 보내는데 목숨을 걸었다.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은 주로 코펜하겐과 로마에서 포르노 잡지와 남녀 성생활 보조기구, 자위기구들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이탈리아는 한때 이 문제를 신문에 보도해 말썽이 된 적도 있었다. 김정일의 기쁨조 향연에 사용되는 술과 음식 재료가 모두 ‘1호물자’였다. 기쁨조 향연에 초대되는 간부들은 10여 명 정도인데 거의 모두 김정일보다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이들이 설설 기는 것을 김정일 자신은 대단히 즐겼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난잡한 생활 외에 김정일은 영화배우나 예술단의 젊은 여성들과 밀애를 하며 후한 생활보조를 해주었다. 그들의 최대 소원은 해외여행인데 가끔 김정일의 전용기가 해외 취항을 하게 될 때 신원을 모르는 젊은 여자들이 탑승했다. 당에서도 모르고 항공사도 몰랐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지시’라고만 하면 지정된 행선지까지 말없이 그들을 태워다 주었다. 그러나 반드시 국가안전보위부 직원이 따라다녔다.
국민들은 굶고 병들어 죽어갔으며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약 27만 명의 억울한 사람들이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정일의 여자들과 자식들
끝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김정일의 여자들과 그들의 자식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김정일(1941년 2월16일 출생~2011년 12월17일 사망)
▲첫째 부인: 홍일천-1942년생, 결혼생활 5년(1966~1971년)
딸 김혜경(1968년생)
▲둘째 부인: 김영숙-1947년생, 1973년 결혼
딸 김설송(1974년생)
딸 김춘송(1975년생)
(1남 1녀 더 있음 - 미확인)
▲혼외 여인: 성혜림-1937년생, 2002년 사망
아들 김정남(1971년 5월10일생)
▲혼외 여인: 고영희(본명 고정자, 1953년 6월16일~2004년 8월13일, 1976년부터 동거)
아들 김정철(1981년 9월25일생)
아들 김정은(1983년 1월8일생)
딸 김여정(1987년 9월26일생)
▲혼외 여인: 정일선-(일명 정혜순), 출생년도 미상
아들 김의성(1985년생)
▲혼외 여인: 김옥-1964년 8월28일생, 2006년 7월부터 동거
딸: 이름 미확인(2008년생)
▲혼외 여인: 손희림-1950년생, 외교관 손성필의 여동생
두 딸이 있음(이름 미확인)
▲혼외 여인: 홍영희-영화 ‘꽃 파는 처녀’의 주연배우
자녀유무 미상
(이외에 이상진, 이형연, 고정자 등 애첩이 더 있었으나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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