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 인간을 잡아 먹는다."
토마스 모어는 그의 책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 이제는 한 사람의 양치기와 그의 개가 있을 뿐이다." 당대의 학자 휴 라티머가 한 말이다.
이는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고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내몬 인클로저 운동에 대한 비난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에서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농경지를 목장으로 만들기'라고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목장이 된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쳐서 타인의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인클로저(encloser:둘러싸기)란 이름이 붙여졌다.
인클로저 운동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이는 중세 장원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주역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영국 사회는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주된 원인은 해외 식민지무역의 확대와 그로 인한 상공업의 발달이었다. 도시는 더욱 번창했고 인구가 증가했다. 1540년 6만 명에 불과했던 런던 인구는 1640년에 30만 명, 1750년에는 70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편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물가가 폭등하고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은 모직물 공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모직물 공업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초기에는 양모를 그대로 수출했으나 14세기 중엽부터는 양모를 가공하여 모직물을 짜서 이것을 유럽 각지에 수출하여 수입을 올렸다.
모직물 공업이 특히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왕조 시기다. 왕은 모직물 공업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산업'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치있는 제조업'이라면서 각별히 보호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자 토지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농사를 그만두고 목장을 만들어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목장은 농사보다 노동력이 덜 들고 이익도 많이 훨씬 유리한 산업이었다. 토지소유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양업에 뛰어들었고 농경지는 물론 황무지, 공동경작지까지 울타리가 둘러처졌다.
그런데 인클로저는 그 땅을 경작하던 농민과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들을 강제로 또는 폭력으로 내몰면서 이루어졌다. 비록 자기 소유의 땅은 아닐지라도, 오랜 관습에 의해 대대로 농사짓고 살아오던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농민의 생활터전이던 땅은 양들이 뛰노는 푸른 목초지로 변해갔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들은 갈 곳 없이 떠돌고 촌락이 파괴되는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왕은 인클로저 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렇지만 법을 집행하는 행정담당자가 바로 인클로저에 열심인 토지소유자인 경우가 다반사였으므로 1622년에 인클로저 금지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농민들은 반발했다. 1536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 '은총의 순례'나 '케트의 반란' 같은 농민운동은 인클로저를 막아보려는 농민들의 몸부림이었다.
인클로저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들은 젠트리(gentry)라 불리는 소지주들과 요면(yeoman)이라 불리는 자영농, 그 중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봉건귀족처럼 봉건적 신분관계나 농경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토지를 과감히 개종하여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새로운 실력자로 성장하여 나중에는 의회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한편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임노동자가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바로 이 광범한 임노동자층의 값싼 노동력 덕택에 가능했다.
참고문헌: 셰계사 100장면, 박은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