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욱(安秉煜·숭전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장) : 김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오래간만입니다. 같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저희 집에 이렇게 찾아오시긴 참 드문 일인데.
김형석(金亨錫·연세대 인문과학연구소장) : 네, 처음이지요. 그런데 우리 같이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시간을 가지기 어려운 이들은 적을 거요.
안병욱 : 독일의 문학자 한스 카로사는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 그랬는데, 나는 김 선생님하고의 만남을 생각하면요, 어떤 운명이 맺어 준 형제 같은 만남이에요. 늘 다섯 가지를 생각해요. 우선 고향이 같아요. 다 평양에서 공부했고, 학교는 달랐지만 평양에서 자란 것이 같고, 또 일제시대에 동경 유학했던 것도 같고, 그 다음에 공부한 것도 같은 철학이라, 철학도 현대철학, 그것 셋째 번이 같고, 넷째 번은 같이 나와서 활동한 영역이 말하고 글 쓰는 것, 둘이가 비슷해요. 강의하는 것도….
김형석 : 한 30년 됐죠.
안병욱 : 어떤 이들은 둘이 라이벌이 아닌가 그럽디다. 굉장히 친한 사이인데도 남들은 라이벌이 아닐까 하고 신경을 쓰는데, 우린 형제처럼 지내는데, 대학교수란 직책도 같고, 또 나이가 같지 않소? 둘 다 원숭이띠인데, 어느 원숭이죠?
김형석 : 저, 봄이죠. 하하….
안병욱 : 난, 여름 원숭이이고. 하하, 여름 원숭이가 바쁜가요. 범 원숭이가… 어쨌든 원숭이는 바쁩니다. 한 여섯 자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고,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김 선생님은 기독교 신앙 쪽에 깊이 들어가 있고, 난 좀 유교 사이드랄까요? 그저 운명과 인연이 맺어준 형제 아닌 형제, 그런 생각을 느껴요. 그렇게 느끼시죠?
김형석 : 네. 그런데, 요 얼마 전 어떤 이를 기차 안에서 만났는데, 나하고 안 선생하고를 착각해요. 허허….
안병욱 : 허허, 나도. 가끔 김 선생한테 가는 편지가 나한테 오고….
김형석 : 네, 그분 표현이 뭔고 하니, 두 분을 생각해 보면, 새의 두 날개 같다고… 얘길 들어 보니까, 참 그런 과거를 걸어온 것 같은, 한쪽이 떨어질 수 없는 일을 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맞봤습니다.
안병욱 : 네, 그렇죠. 정년퇴직도 같이 했고, 저는 8월인데….
김형석 : 저도 8월이지요.
안병욱 : 또 같이 대학에 남아서 명예교수로 일하게 됐고….
김형석 : 그런데 우리들이 30년 전 사회 일을 시작할 때부터는 서로를 잘 알고, 그 전까지의 우리에 대해선 좀 잘 모르지요. 안 선생, 어릴 때는 대체로 어떻게 지내셨어요?
안병욱 : 나는 평안남도 용강(龍崗), 대동강변이지요. 용강에서 자랐고, 그리고 평양에 와서 한 5, 6년 공부했고, 대동강 물을 먹으면서 자란 건 같고요. 그때 나는 문학소년이었어요. 김 선생도 아마 그랬을 거야. 나는 그 춘원 이광수 선생 책을 무척 좋아했고, 문학을 하다보니까 또 철학을 하게 됩디다. 왜 사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일제시대는 어렵지 않았어요? 요새 난 학생들에게 늘 그러는데 너희는 불행하다고 생각지 마라. 우리 학생 때는 나라가 없는 망국시대야. 그때 애국가도 못 불러 봤고, 태극기도 못 봤고, 우리말도 배우지 못했고, 일본말을 국어라 해서 사용해야 됐고, 일본말 안 쓰고 한국말 쓰다가 선생한테 매맞은 일도 있고, 그리고 자유가 있었나, 권리가 있었나, 무슨 기회가 있었나… 참 불행했단 말이야. 너희들은 지금 독립된 나라의 시대로서 능력과 의욕만 있으면 마음대로 펼 수 있고, 그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냐? 자꾸 불행하다고 생각지 말라… 그런데 김 선생임은 김일성이 하고 같은 마을에서 자랐다지요?
김형석 : 네, 바로 뒷마을….
안병욱 : 그때 김성주인가 김일성인가 하고 같이 놀고 그랬나요?
김형석 : 같이 놀진 않았어요. 국민학교도 그 김성주가 나보다 한 3년 먼저 했을 거요.
안병욱 : 아, 그랬군요. 그때 어땠어요?
김형석 : 그땐 못 만났지요. 내가 만난 것은, 해방 직후에 그이가 고향에 왔을 때지요. 고향에 돌아오니까 환영회 비슷한 걸 가볍게 했어요. 김일성 할아버지 집에서… 조반을 먹고, 앞으로 해방이 됐는데,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야겠느냐? 그런 얘기들이 났어요. 그때 그이가 하나하나 짚으면서 친일(親日)과 숙청(肅淸), 토지개혁(土地改革), 뭐 여섯 가진가 얘기하데요. 그때 내 그 얘길 쓱 듣고서 솔직히 말해 저이가 배후가 있구나, 공산당이 무리로구나, 그렇지 않고선 그런 얘기를 할 게재도 못되고, 또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도 아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걸 눈치 채니까, 서로 떨어지게 되데요. 서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 다음엔 만나 일도 없죠.
안병욱 : 그리고 동경 가서 같이 철학을 하게 됐고, 김 선생 그때 고생 많이 하셨죠? 나는 그런 것 없이 그저 유복하게 잘 지냈어요.
김형석 : 내가 고생한 것은 중·고등학교 때지요. 왜냐하면 난 어릴 때 건강이 아주 좋지 않었어요.
안병욱 : 지금, 건강하세요?
김형석 : 지금은 괜찮지요. 근데 어느 정도 좋지 않았나 하면 내 모친이 하도 내가 앓고,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그러니까… 쓰러졌다고 그러면, 어머님이 들에 나가 일하시다가도 땀을 뻘뻘 흘리시며 들어오시거든요. 그래서 날 품 안에 안으면, 난 한참 의식을 잃고 있다가 눈을 떠 보면, 어머님이 많이 우셨으니까, 내 얼굴이 전부 눈물이에요. 어머님이 하도 마음이 아프니까, 아무래도 오래 못 살 테니까 가슴 아파도 일찍 중어야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하겠다, 그랬을 정도로 좋질 않았어요.
안병욱 : 예….
김형석 : 그런데, 아까 우리 종교 얘기가 났는데, 14살 나면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갈 때에 건강에 대한 것도 달라졌고, 또 그걸 계기로 해서 종교적 관심도 가지고… 난 숭실학교를 입학해서 제3중으로 졸업했거든요. 남쪽 사람들은 보리밥 먹어도 거기 가난한 사람들은 조밥을 먹지 않았어요? 도시락에 조밥을 싸주는 때가 있거든요. 가령, 비가 오든지 눈이 오든지 추운 날이면, 도시락 뚜껑 쓱 열어보면 조밥이거든, 그러면 옆의 친구들이 보면 창피하지 않아요? 그래서 난 밖에 나가서 먹는다고 말이죠. 나무 그늘에 가 먹고, 그런 생각이 지금 나지요.
안병욱 : 네, 그런 시련 속에서 의지력이 굳어지고 역경 속에서 꿋꿋해지는 그런 생리, 그런 환경 속에서 죽 자라셨군요.
김형석 : 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그렇진 않았어요.
안병욱 : 그, 성품 탓이에요.
김형석 : 자신도 있었어요.
안병욱 : 그런데 김 선생, 어떠시오? 나는 길 가다가 할아버지 소리를 많이 듣는데, 할아버지 소리는 아직 안 듣지요?
김형석 : 네, 허허….
안병욱 : 우리 여행 같이 하지 않았어요? 미국유학 갔다가, 그 다음엔 구라파를 한 달 동안 죽 같이 돌면서도, 제일 젊게 봤고… 난 좀 그렇게 안 봤고, 난 일찍 늙어 버렸어요.
김형석 : 그게 아니지요. 치아를 바꾸니까 주름살이 좀 많아졌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 요새 젊은 사람들이 자기 역경을 호소하고, 부모의 혜택을 못 받는다, 사회가 불안정하다,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아까 안 선생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살아온 때에 비하게 되면, 지금이야 말로 불평할 여건은 없는 것 같아요.
안병욱 : 그렇지요, 없어요. 괜히들 남하고 비교해 생각하고… 나는 인생을 농사에 비유해요. 일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사람, 연극에 비유하는 사람, 또 바다의 항해에 비유하는 사람, 또 전쟁에 비유하는 사람 여러 가지 비유법이 있을 게요. 그런데 나는 인생은 농사다 그렇게 봐요. 아들을 잘 두면 아들 농사를 잘 한 것이고, 며느리를 잘 얻으면 며느리 농사를 잘 한 것이고… 아내 농사, 다 농사. 인생은 농사다 그러는데, 제일 농사 중에 어려운 게 자식 농사예요. 뜻대로 안 되거든, 그것만큼은, 내 자식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되지요.
김형석 : 허허… 또 그래야 되고.
안병욱 : 네 그래야 되지요. 그런데 나는 3남 1녀를 두고, 다 장성해서 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 하나 섭섭한 것은, 철학을 했는데, 내 대를 이을 자식이 하나만 있었으면… 저 책을 누구한테 물려줄까 생각할 때마다 느껴요. 또 같은 전공을 했으면 주고받는 대화에 깊이, 넓이, 폭, 높이, 이런 것도 다 일치하거든요. 난 그래서 김 선생이 인생농사는 잘 지었다, 아버지 대를 이어서 독일 가서 철학….
김형석 : 네. 철학하고 있지요.
안병욱 : 또 한 분은 연세대학교 교수를 하게 됐고, 그래서 인생농사는 김 선생님이 이겼습니다. 허허….
김형석 : 그런데 사람이 일생(一生)을 사는 동안에 언젠가 한 번은 고생을 해 봐야겠어요. 그런데 언제 고생을 하느냐 하는 것인데, 늙어서 고생을 하게 되면 인생이 초라하고 실패하게 되지요.
안병욱 : 네, 참 초라하지.
김형석 : 늙어서 고생한다는 건 실패했다는 것 같아요. 또 장년기에 고생을 하게 되면 일을 못해요. 고생에 지쳐 일을 못 하거든요. 한 번은 고생해야 인간이 된다 하면 역시 젊어서 고생해야지요.
안병욱 : 초년 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는 말이 참 옳은 말이야.
김형석 : 네, 내가 40이 거의 될 때까지는 좀 가난하게 살았어요. 안 선생하고는 좀 달랐어요. 대학 다닐 때도 가난하게 살고, 고생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 와서 이렇게 과거를 회상해 보면 그때 고생한 것이 그래도 제일 귀했지, 요새 와서 고생하게 된다 하면, 인생이 참 허전했을 것 같아요.
안병욱 : 역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약(藥)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광명(光明)의 계기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암흑(暗黑)의 계기가 되고… 그 역경을 잘 활용해야 하는데, 김 선생님은 역경을 잘 활용하신 것 같아요. 난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는 늘 그런 얘기를 해요. 제일 중요한 게 뭐냐? 그것은 인생관을 옳게 잡는 문제다. 한 번뿐인 생애인데, 이 유일의 생명을 가지고, 일회성의 생, 딱 한 번, 원 라운드로 끝나는 사람 아니다. 그 한 번 주어진 생애를 어떻게 살겠다 해서, 자기 뜻을 세우는 것, 목표설정을 하는 것, 어떤 태도로 일하겠다고 하는 것, 또 무엇이 삶의 의미를 찾는 거냐? 결국 산다는 것은 무엇을 구한다는 건데요, 돈을 구하는 자, 향략을 구하는 자, 여자를 구하는 자, 권력을 구하는 자, 지위를 구하는 자, 진리를 구하는 자, 학문을 구하는 자, 뭣인가 인생은 구하는 거요. 뭘 구하며 살아가겠나? 그게 아마 인생관(人生觀)과 가치관(價値觀)의 핵싱문제라 생각하는데, 요즘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 안 해요.
김형석 : 예….
안병욱 : 내 인생의 나갈 방향, 설 자리, 삶의 의미, 이걸 딱 잡으러. 율곡(栗谷)도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우라 했는데, 그런 점에서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올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현대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것 같은데, 너무 그러질 못하고 그저 지식교육, 기술교육, 기능교육만 하다 보니까, 이 지식(知識)과 기술(技術)과 기능(技能)과 재능(才能)과 건강(健康) 가지고 뭘 어떻게 할 거냐? 이게 그만, 방향 없는 교육….
김형석 : 옛날에는 중학교가 5년이었는데 그 과정을 생각할 때, 몇 가지 남는 게 있어요. 제일 처음에, 내가 숭실학교를 4년까지 다닐 때에는 완전히 민족주의 학교였지요. 일본선생이 가르치러 들어오지 않아요? 들어오면 그때 우리는 일본선생을, 선생이니까 항거를 하거나 싫은 말은 못 하고, 중학교 2학년 때도, 지금 기억이 나는데, 일본선생이 들어오면 그저 엎드려서 가만히 있거든, 공부를 안 하고 말이에요. 일본선생도 그걸 아니까 오늘은 재미있는 소설을 하나 읽어 주겠다고, 일본작가가 쓴 소설을 읽어 주고 나면, 거저 차렷 경례도 안 하고 나가는… 그런 걸 경험했기 때문에, 중학교 다닐 때에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부족은 하지만 그래도 하여튼 그 생각은 지금까지 오고 있지요. 그 다음에 마지막 1년은 숭실학교가 폐교되고, 제3중 일본학교로 갔는데, 하여튼 그 1년 동안 일본학교에서 교육받는 건 내 인생에서 제일 잊을 수 없는 어두운 기간이었어요. 한번은 일본인 담임선생이 날 오라고 해요. 그래 교무실에 끌려갔더니 무조건 때리는 거예요. 한참 얻어맞았지요. 이유고 뭐고 없지, 그러더니 한참을 때리고 나서 나보고 얘기하는 게 무언고 하니, 너 이놈, 왜 학교에 오면 말을 안 하냐? 그러는 거요. 그런데 우리 말을 한 번 하면 일주일 정학을 받고, 두 번 하면 퇴학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일본말을 하고 싶진 않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그게 뭔고 하니, 숭실학교 때부터 있었던 일본선생이 뒤로 고자질하는 거죠. 누구는 민족주의자다 말이죠. 그러니까 항상 언제 퇴학 맞느냐? 그걸 계산하면서 1년을 살았거든요. 그 두 가지 사건 때문에 민족의식이라든지 이게 이제 강해졌구요. 그 다음에 둘째는, D나 선생하고 나하고 비슷했을 거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책을 너무 많이 읽었어요. 그러니까 하여튼 우리 담임선생은 학교에서 날 만나게 되면, 가방을 보여 줘, 하고 쓱 열어보고는, 무슨 책을 보나 보고선 이거 이해해? 하곤 또 넣곤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많이 읽으니까 공부가 시원치 않았어요.
안병욱 : 공부가 시원치 않아지지요. 네, 그래요.
김형석 : 왜냐 하면 거기에 취하니까. 톨스토이니 레미제라블이니 이런 책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니 이런 책들을 읽고 나니까요. 공부하는 게 당최 싱겁데요. 허허… 그러는 동안 생의 방향 같은 게 된 것 같아요.
안병욱 : 난 아까도 얘기했지만 감격성과 성장이 가장 강한 시절에 좋은 문학작품들을 읽는 것, 가슴에 제일 강하게 와 닿아요. 그 춘원의 문학작품들을 죽 읽으면서, 그걸 통해서 이상주의 정신, 민족주의 또 휴머니즘, 이런 것이 내 어린 시절의 마음속에 심어졌어요. 그래 가지고 그게 나로 하여금 철학의 길을 걷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동경 가서 공부한 시절에는 시인 윤동주(尹東柱)를 만나곤 했어요. 윤동주가 북간도 출신 아닙니까?
김형석 : 그렇지요. 우리 1년인가 2연, 중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안병욱 : 아, 그래요? 음 그랬구만, 그래 가지고 연대(延大)에 와서 졸업맡고, 그 다음에 동경 릿교(立敎)대학에 잠깐 다니다가 경조로 갔어요. 그런데 겨울방학에는 윤동주가 동경에 놀러왔어요. 그래서 어두운 하숙방에서 만나 가지고, 요전에 그 북한예술단장으로 왔던 백인준, 나, 윤동주, 굉장히 친했어요. 만나 가지고, 자! 우리 힘도 없어져, 말도 없어져, 자유는 박탈당해, 민족의 앞날은 캄캄해… 이 암흑의 어두운 시절에 어떻게 한국 젊은이로서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굉장히 우울하면서도 뜻이 맞는 동지가 있고 그래서 기뻤고, 그때 벌써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거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그 유명한 서시(序詩), 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많이 읽는다면서요?
김형석 : 그렇죠.
안병욱 : 그때부터 시를 썼어요. 나보다 3년 위 거든요. 나중에 스물아홉 살에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고문받아 가지고 죽는데, 그때 친척이 윤동주의 시체를 찾으러 갔어요. 갔더니, 일본 간수(看守) 얘기가, 이 청년이 매일 아침 일어나서 그 야윈 손으로 감옥의 철창을 잡고 ‘한국아! 한국아!’하고 외치는데, 그 ‘한국아’가 무슨 말이오? 하고 묻더래요. 동경서 늘 만나면 자연 어두운 것만 자꾸 얘기하게 됩디다. 그래서 음악도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나 헝가리안 랩소디, 또 그루미 선데이, 베토벤의 운명… 이런 걸 들으면서 20대 초반의 그 다정하던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동경서 우리가 한 번 만날 기회가 없었죠?
김형석 : 없었죠. 나는 그때 오전엔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일을 했고.
안병욱 : 아, 고학했고….
김형석 : 그러니까 거의 친구들을 못 만났어요. 밤에는 또 공부해야 하고…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 때 같이 다니고는…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젝 생기니까,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지요. 그때 나하고 윤동주는 다 흩어졌고, 그는 일본 교토에서 잡혔거든요. 그때에 내가 교토에 있었어요. 학도병을 피해서 도망갔거든요.
안병욱 : 아, 그때 용케 피하셨네.
김형석 : 거기서도 일본경찰들이 자꾸 찾아오데요. 한 형사가 오더니 마지막 왔다 가면서 솔직히 얘기해 주데요. 너 조심하라고, 예비구속들 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누구누구가 구속됐다고 얘길 하데요. 그때 그만 윤동주가 그렇게 됐어요. 듣고 보면,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선택(選擇) 아닌 운명(運命) 비슷한 게 찾아오지요?
안병욱 : 난 졸업 맡고서 가 있다가 학병에 걸렸거든요. 학병에 붙잡혀서, 일본군대 옷을 입고서 강제 당해 가지고 중국에 가서 2년 동안 고생하다 왔는데, 그때 장준하(張俊河) 씨를 만났어요. 또 고려대학교 총장하다가 그만둔 김준엽(金俊燁) 씨… 다 서주(徐州)로 같이 갔지요. 그때 장도영 씨도 같이 갔었다구요. 더러는 북경으로 뛰고, 연안(延安)정부로 뛰고, 모택동(毛澤東)…, 더러는 중경(重慶)으로… 장준하 씨는 그때 7개월 걸려서, 걸어서 중경까지 6천 리 길을 가 가지고, 거기서 김구 선생을 만났어요. 그래 나중에 김구 선생 비서가 돼서… 그게 계기가 돼서 서울에 와서 장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됐고, <사상계(思想界)> 사의 주간을 해 가지고… 내가 김 선생을 만난 것이 그때지요? 그때 나도 연대(延大)에 3년 있었거든, 그러면서 사상계 사를 죽 키우면서 한 10년 동안 미쳤었어요. 사상계에 온 정열을 쏟고 꾸준히 키웠고, 한국 자유언론의 기수로서 활동을 많이 했는데.
김형석 : 네, 사상계, 의미가 컸지요.
안병욱 : 컸어요. 그, 어떻게 없어지고 나니, 애지중지하던 자식이 죽는 슬픔을 보는 것 같았어요. 굉장히 가슴이 아파요, 지금도.
김형석 : 그냥 자랐어야 하는 건데… 그전에는 서울중·고등에?
안병욱 : 경기고등학교에 있었고, 서울고등학교에 있었고. 경기고등학교 때는 함병춘(咸秉春) 군을 그때 키웠고, 백남준(白南準) 군도 키웠어요. 머리 좋았어요, 백남준이… 중학교 3학년 때인데 내가 국어를 가르쳤거든요. 작문을 써 냈는데, 너무 작문이 비상하고 좋아요. 이건 가짜다 베낀 거다, 그래서 한 번 불러서 네가 이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없어, 한번 네가 글 쓴 것을 얘기해 봐 그랬더니 얘기하는 데 아주 비상해요, 독창적인 머리예요. 그때 피아노 곡도 작곡하고 그랬어요. 그러더니 나중에 백남준이가 저렇게 됐는데, 우연이 아니라고요. 요전에도 만나 사진을 보내 줬는데, 제가 제일 영향 받은 세 사람의 선생님이 있는 데, 경기 때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선생님 그때 중앙에 계셨지요? 뭘 가르쳤어요?
김형석 : 뭐 여러 가지 가르쳤어요. 허허….
안병욱 : 전 국어를 가르쳤거든요.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다정다감한 때 아닙니까? 그래 국어교과서를 일찍 끝내 놓고, 그 다음에 학생들에게 춘원의 ‘유정’을 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열 번을 읽어줬어요. 다섯 클라스지요, 다 읽는 데 열 번 걸립니다. 내 애들 보고 교과서를 가져오지도 말고 가만히… 문학감상 시간이다 그래 가지고, 그걸 전부 죽 읽어 줬다우, 그런데 애들이 아주 느낌이 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일어서서 나가는데도 안 일어나, 죽 앉아 있어요. 그러니까 10대 후반의 감격성이 강한 시절에 그런 충격적인 영향을 받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김형석 : 그 얘기 하니까… 나는 사실 해방되고서 1년 반 동안, 김일성이와 같은 고향 아니예요? 거기서 농촌교육을 했어요. 공산주의자들이 모든 걸 장악하니까, 좀 눈에 띄지 않게 농촌교육을 좀 해주자… 그때 꿈은 우리 다섯 마을의 청소년들은 중·고등학교 교육을 목 받는 이가 없도록 좀 봉사를 해 주자, 그러고서 시작을 했는데 한 1년 반 동안은 잘 됐어요. 그런데 ‘47년 여름이 되니까, 공산주의자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설립자를 잡아가데요, 우리 선배죠. 그 다음에 안 나타나셨으니까, 세상 떠난 거죠. 그리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거든요. 내가 교장이니까… 그래서 ’47년에 38선을 넘어온 거죠. 와서 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봤는데, 안 선생하고는 좀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일제 말에 일본서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사실 공부를 못 하지 않았어요? 군수공장(軍需工場)에 끌려 다니고, 또 숨어 다니고, 사실 공부를 못했지요. 해방되고 또 2년 동안 공부를 못 했지요. 그러니 38선을 넘어와 한 두어 달 동안 내 생을 정리하다가 교육자가 되기로 결정했어요. 그래 내 꿈은 무엇이었냐 하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모범적인 사립 중·고등학교를 한 번 해보자, 그것을 꿈으로 키웠어요. 그래서 가게 된 데가 중앙학교지요.
안병욱 : 네, 중앙고등학교, 오죽 좋은 학교입니까?
김형석 : 네, 좋았어요. 그때 이광수 님의 아들 이영근 박사를 내가 담임 맡았거든요.
안병욱 : 아, 이영근이가 거기 다녔지. 난 영근이를 미국에서 만났고, 여기서 몇 번… 자기 아버질 닮아서 잘 생겼고 재주가 있었어요.
김형석 : 우수했어요. 오웰의 <1984년>이란 책 있잖아요.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번역된 것이 이영민 군이 번역 했는데요, 그 애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걸 번역했어요. 지금 한국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캐나다에서 정교수가 된 이가 윤택순 교수예요. 터론토대학인데, 그 애들이 다 같은 클래스들이었거든요. 서울대학의 이기문 씨, 고려대학의 한병오 씨도 그랬고, 아주 우수한 학생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교육에 빠지데요. 그래서 하여튼 대한민국에서 제일 훌륭한 사립 중·고등학교를 한 번 해본다 하고, 또 다행히 인촌(仁村) 선생 계통 아니에요? 인촌 선생도 몇 번 뵈옵는 동안에 그런 생각이 좀 굳어졌어요.
안병욱 : 인촌 선생은 여러 번 뵈었겠어요.
김형석 : 아, 물론 자주 뵈었지요.
안병욱 : 나는 와세다대학 동창회 회장이고 그래서 한 번 인촌 선생을 뵈었지요. 그러구는 자주 난 뵈었어요.
김형석 : 안 선생이 흥사단(興士團) 일을 제일 많이 하시지만 도산(島山) 선생을 직접 뵙지는 못 했지요?
안병욱 : 못 했지요.
김형석 : 나는 이틀 뵈었거든요. 왜냐 하면 우리 고향에 오셨어요. 도산 선생이….
안병욱 : 그게 어느 해였지요?
김형석 : 갓 출옥해 가지고 돌아가시기 2년 전이에요.
안병욱 : 아, 그러면 ‘38년에 돌아가셨으니까 ‘35·6년 그 무렵이군. 그때 전국일부한 기회가 있었지요.
김형석 : 그렇지요, 오셔서 내 삼촌 댁에 머무셨어요. 그래서 그 이틀 뵈었지요.
안병욱 : 그때 도산의 인상이 어땠어요?
김형석 : 좋았어요. 네, 아주 좋았어요.
안병욱 : 사진보다 실물이 월등히 낫다고 그러데요.
김형석 : 아, 낫지요.
안병욱 : 요전에 송정스님을 뵈었더니 자기가 본 한국사람 얼굴 중에 제일 좋았다고 그래요, 사진에는 입체감이 없어서….
김형석 : 그때 받은 인상은 그저 애국심의 덩어리였어요. 제일 받은 인상이 깨끗한 분이고, 애국심이 강한 분이고, 그렇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아마 내가 인상 깊은 분이 인촌 선생이야. 중앙에 있으면서 제일 큰 소득이 인촌 선생을 자주 뵈온 것이고요, 또 그 분은 도산 선생하고 성격이 달라요.
안병욱 : 다르지요. 난 그저 한국의 2대 인물에 드는데, 돈을 가지고 사업으로 자기 주위에 사람을 제일 많이 모았던 이가 인촌이고, 인격과 정신과 말씀을 가지고 인재를 가장 많이 규합했던 분이 도산이에요. <사상계>에 10년 이상 미쳐 뛰다가 그만 두게 되고, 흥사단에서 날 불러서 도산의 사상을 전국에 펴 보라고, 그래 아카데미 운동을 일으켜 가지고, 지금까지 한 20년 가까이 죽 돌아다니면서, 도산의 사상… 뭐니 뭐니 해도, 최근 백 년 동안에 우리나라에 나온 인재 중에서 도산을 당할 분이 없는 것 같아요. 인격, 사상, 정신, 생활태도… 참 민족의 본보기가 되는 분이에요.
김형석 : 그 두 분의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이 나는데, 도산 선생이 병원에 계실 때 재정이 딸렸지요. 그래서 그때 누구를 보낼까 하다가, 어떤 여자 분을 인촌 선생에게 보냈어요. 돈 좀 얻으러 가보라고. 그래 인촌 선생이 그 여자 분이 오니까 지금 어느 때라고 그런 걸 구하러 다니느냐고, 바쁜 데 돌아가라고 냉대를 했거든요. 그래, 부인이 도산 선생한테 가서 몇 번 찾아갔는데 인촌 선생까지도 냉대했다고 그러니까, 도산 선생이 그러냐고, 아무 말씀도 안 하시거든. 다음날 그 부인이 도산 선생한테 갔더니 인촌 선생한테서 돈이 왔다고, 그런데 당신에게 잘못 줬다가는 일본경찰에게 뒤가 잡힐까봐 걱정스러우니까, 믿을 사람을 시켜서 보냈다고… 하여간 인촌과 도산 사이에 뭐 통하는 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안병욱 : 춘원(春園)도 어느 글에서 한국에 지금 살아있는 두 사람을 고르라면, 인촌과 도산을 고르겠다고 얘길 했는데, 젊은 시절에 참 책과의 만남, 그 소중한 만남들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까, 그저 책을 총해 위대한 사람을 자꾸 만나야 되는데, 요즘 대학교육, 고등학교교육이 책과의 만남의 시간이 머누 벅은 것 같아서… 난 그래요. 우리 아까 교육을 얘기했지만, 우리 남자가 일생동안 최대의 정열을 가지고 해 볼 만한 사업은 교육 같아요. 교육밖에 없다. 난 앞으로 몇 번 태어나도 또 선생이 되겠어요.
김형석 : 교육자가 된다고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자의(自意), 타의(他意)에 의해 안 되데요. 누군가가 외국에 가는 기회를 더 늦기 전에 가져 보라고, 그래서 그 길을 열기 위해 중앙학교의 교감보다도 보다가, 그걸 쉬게 됐어요.
안병욱 : 예….
김형석 : 그런데 그때 백낙준(白樂濬) 박사님이 연대(延大) 총장으로 계실 때인데, 갑자기 사람을 보냈어요. 오라고… 그래 찾아갔지요. 두 말할 여지가 없어요. 정석희 교수님이 미국 가서 1년 됐는데, 철학과로 오라고… 그래 연대로 정착이 됐어요. 요새 내가, 안 선생도 그렇지만, 고등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우리가 많이 쓰지 않아요?
안병욱 : 많이 썼지요.
김형석 : 난 왜 쓰게 됐냐 하면 연세대학교로 갔는데, 한번은 내 고등학교 제자들이 논산훈련소에서 만났는가 봐요. 편지가 온 거죠. 만나 자기들끼리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야, 너 가만히 얘기하는 것 보면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했던 김형석 선생님 그대로 닮았다’ 그러니까, 그 얘기를 들은 친구가 ‘내가 닮았냐? 사실은 네가 더 닮았지’ 그렇게 얘길 했다는 거예요. 그 편지를 받고 나니까 내가 교육자가 되지 않고 대학에 왔다 하는데 대해 무슨 죄책감 비슷한 것이 느껴져요. 대학이라는 게 결국은 그렇지 않아요? 대학은 학문을 하지 교육은 안 되지요. 그래서 며칠 동안 고민했어요. 고민하다가 저 어린애들을 위해 내가 좀 써야겠다, 그게 동기가 됐어요. 그래서 자꾸 쉽게 풀어쓰기 시작하고, 또 한 10여 년은 항상 글 쓸 때 고등학교 2·3학년 학생들, 내가 사랑했던 제자들… 이번 여름에 미국에 갔어요. 그때 제자들을 만났는데, 이건 아버지보다도 더 반기는 거야, 부인들까지도 서로 우리집에 오라 그러고….
안병욱 : 네, ‘61년에 미국 갈 때, 그때 미국 가기 어려웠지요. 우리 같이 떠나지 않었어요? 하와이서도 참 재미있게 지내고 그랬는데, 그때 느낀 인상이 김포비행장에 나갔는데, 나를 배웅하러 나온 이들이 남자학생들이 많고, 김 선생님은 여학생들이 많았고, 그래 집사람도 그랬지만, 야! 김 선생 참 여학생 사회에서 대단한 존재로구나 하고, 우리 웃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의 결정적 시기는 나도 동감인데, 고등학교인 것 같아요. 10대 후반, 그때가 제일 강하거든요.
김형석 : 그때는 그저 선생을 닮지요.
안병욱 : 닮고, 배우고, 깨닫고, 느끼고, 흡수력이 제일 강해요. 대학이 되면 자기 나름의 주관, 가치관, 인생관이 다 서가지고요. 받기 전에 비판적으로 보려고 그러고요. 교육의 결정적 시기는 10대 후반기인 것 같아요. 그때가 진짜 뭘 심어줄 때라고요. 그때를 놓치면 교육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고요. 아무리 좋은 씨앗도 좋은 밭에 떨어져야지, 자갈밭에 떨어져서는 씨앗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글을 쓰는 것은 <사상계>에서 편집위원 하는데, 장준하 선생이 왜 글을 안 쓰냐고, 글을 쓰라고, 그래서 동아일보에도 글을 쓰고 그랬는데, 그래도 그게 계기가 되어가지고 자꾸 쓰게 되고….
김형석 : 그때 많이 쓰셨지요?
안병욱 : 많이 썼지요. 아마 제일 많이 썼던 축의 하나일 거요. 그래서 뭐 참 열심히 일했는데, 책은 아마 나하고 선생님이 거의 비슷하게 나왔지요. 그래 나는 늘 애들한테 격려 삼아 얘긴데, 내 목표이기도 하지만, 내 키만큼 책을 쓰고 죽겠다. 내가 민족 앞에 남겨 놓을 수 있는 유산이 뭐겠는가, 책밖에 없다. 그래 나는 명예도, 돈도, 권력도 다 소용없고 그저 좋은 책만 키만큼 써놓고 죽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자꾸 그 얘길 강조합니다. 계속 책 씁시다.
김형석 : 네, 대부분의 생각은 내가 중·고등학교에 있다가 대학에 갔으니까 조금 올라간 것은, 영전한 것 같은가 봐요. 그런데 난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뵙게 되면 아, 저분들이 얼마나 귀한 일을 하시는지 몰라 그렇지, 대학보다 귀한 일을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번 여름에 한 두어 달 미국·캐나다 여행을 했는데요, 어디 가든지 제자의 집에 가서 자는 건 다 고등학교 때 제자예요. 대학 때 제자는 그렇게 정이… 고등학교 때 제자는 요렇게 내게 매달려 있는 것 같고, 대학 때 제자들은 옆에 서있는 것 같고 말이죠.
안병욱 : 그 재미있는 비유로군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인생관(人生觀), 가치관(價値觀)을 심어 주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인데, 뭘 강조하시죠? 난 한 서너 가지를 강조해요. 애들한테 청년들한테 자신감(自信感)을 가져라, 힘은 자신감의 산물이다. 사람이 자신감을 가질 때 뭘 하려고 하는 의욕도 생기고 희망도 생기는 거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하는 축에 속하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엔, 분수 철학… 분수에 맞게 살자, 너무 허영되지 말고, 사치하지 말고, 낭비하지 말고, 제 분수가 있다. 학생은 학생의 분수, 어머니는 어머니의 분수, 분수 지키기… 분수를 지켜라. 세 번째는 사명감(使命感), 사람이 뭔가 자기 일생을 여기 다 바쳐야지 하는 사명감이 있어야지, 그거 없으면 따분해져요. 허무주의(虛無主義)에 걸리거나, 냉소주의(冷笑主義)에 걸리거나, 회의주의(懷疑主義)에 빠지거나, 인생에 방관적(傍觀的)인 태도를 갖거나….
김형석 : 그렇지요….
안병욱 : 키에르케고르가 스물두 살 났을 때입니까? 코펜하겐신학교 1학년 시절에 쓴 일기 가운데 온 천하가 다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가 없다. 그걸 위해서 살고 그걸 위해 죽을 수 있는 인생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 그걸 위해서 살고 그걸 위해 죽을 수 있는 인생의 목표, 그것을 찾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을 찾을 때에, 그 다음에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거든요. 그래서 자신감, 분수 그리고 사명감, 요 세 가지만 딱 확립되고 나면 여타의 문제는 저절로 풀리는 것이다….
김형석 : 나는 역시 대학 제자들이니까, 문제의식(問題意識)을 좀 가져라. 대학에 와서 강의나 듣고, 책 읽고, 어린애들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어른이 되면 다 버리는 것 같은 공부를 하지 말고, 네 문제를 가지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교수들 강의나 책을 대하라, 그 점을 제일 많이 얘기했던 것 같아요.
안병욱 : 예….
김형석 : 그 다음에 둘째로 얘기한 게 뭔고 하니, 너희들이 너무 이기주의에 치우쳐서 나와 내 가정이라는 생각만 하는 것 같다. 몇 해 전에 내 클래스의 애들 보고 내가 좀 지나친 표현이지만, 이런 표현을 썼거든요. 내가 농장을 하나 크게 가지고 있는데, 한 모퉁이에 개장을 하나 지었다. 개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 개를 보고, 야, 나와 봐라, 들도 있고, 냇물도 있고… 좀 나와 뛰어다녀 보라 그랬더니, 개가 하는 말이, 먹을 것도 여기 갔다 주고, 여기서 잠자는데, 뭣하러 나가겠느냐고, 여기가 좋지 않으냐고… 그러면 그 개가 얼마나 가엾느냐 말이죠. 너희들 그저 학점 따고, 좋은 데 취직하고,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편안히 살고, 그거면 다 되는데, 뭣 때문에 사회의식을 가지느냐,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데, 국민학교 다닐 때는 생활의 뿌리가 가정에 있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생활의 뿌리가 절반은 가정에 절반은 사회에 있지만, 대학에서는 강의 듣는 거나 모든 게 사회문제인데, 사회의식(社會意識)을 가져라, 그게 사명감과 연결되니까 사회의식을 가져라. 개가 나와 봐야 할 것이 아니냐, 꼭 거기서 안일(安逸)하게 살면 되겠느냐? 그 얘길 조금 많이 해 줬던 것 같아요.
안병욱 : 예….
김형석 : 그리고 셋째는 안 선생과 같은 사명의식(使命意識)인데요, 그런데 안 선생하고 나하고 조금 다른 점은, 안 선생은 이제 종교를 잘 이해하시는 분이고, 나는 조금 종교에 깊이 들어가 있는 면을 가지고 있는데, 열네 살 나서 내 건강문제, 인생문제… 그때의 나 자신을 표현해 보면 참, 느끼는 갈대 비슷하게 자랐어요. 병약한 애들이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요? 그때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때의 그 종교적 관심이 뭐였는가 하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내 생명보다 더 귀한 무엇이 있고, 그것을 위해 사는 거로구나 그걸 느꼈어요. 그걸 도중에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지금 나이될 때까지 변함은 없는 것 같아요.
안병욱 : 김 선생, 이제 나이가 내년으로 67세지요. ‘85년을 마지막 매듭짓는 것도 며칠 안 남았습니다만, 나이가 드니까 이제 지혜가 좀 생기는 것 같아요. 그저 지식 추구를 자꾸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지혜, 인생을 깊이 보는 것, 또 멀리 보는 것, 넓게 보는 것… 난 사람은 한 다섯 가지 눈을 가져야 한다고 늘 강조해요. 첫째는 있는 그대로 보는 과학자의 눈을 가져야 되고, 그 다음은 멀리 보는 역사적인 안목, 인생은 멀리 봐야… 지금 여기만이 아니야, 내일이 있고, 백 년이 있고, 민족이 있고, 사회가 있고… 역사적인 안목, 그 다음에 셋째 번은 철학적인 안목, 깊이 보는 것, 피상적으로 보지 말고 인생을 깊이 보는 것, 그 다음에 인생을 예술가적으로 좀 아름답게 보자. 너무 추한 것, 어두운 것, 한심한 것을 보자면 끝이 없지요.
김형석 : 그렇지요….
안병욱 : 그런데 미(美)라고 하는 것, 여유가 생기는 것이 예술이거든요. 인생이 너무 도덕의식이나 종교의식만 가지고 살아갈 땐, 마음에 그런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예술은 참 부드럽거든요. 마지막으로는 종교적인 안목, 따뜻한 눈으로 보는 것, 이런 몇 가지 눈을 가지고 인생을 봐야지, 한두 가지의 눈으로 보면 비관하기도 쉽고, 어떤 때는 아주 이기주의밖에 없다, 세상에 진리고 정의고 어디 있어, 그저 나밖에 없어, 이거 다 여러 개의 눈을 동시에 갖지 않은 데서 오는 하나의 잘못된 생각 같아요. 그래서 다섯 가지 눈을 갖고 인생을 멀리 보고, 깊이 보고, 또 바로 보자, 그래야 한 번 주어진 인생을 바로 살지, 어느 하나만 보고 살다가는 따분해진다. 그런 얘기를 자주 강조하지요.
김형석 : 나는 또 우리 학생들을 대하게 되면, 성실성(誠實性)… 하여튼 모든 일에 성실해져라,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성실한 것, 그것이 제일 귀하지 않겠느냐, 그 다음에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차원 높은 사랑이라고 할까요? 어떤 면에서는 양보(讓步)하고 희생(犧牲)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希望)과 장래(將來)를 주기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라. 그 다음 또 하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 내 경우에는 대학 예과(豫科) 때 토스트에프스키를 좋아서 읽었는데요.
안병욱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더 좋지요? ‘죄와 벌’보다는, 네 그거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김형석 : 네, 그때 내가 이를 통해 느낀 게 뭔고 하니, 휴머니즘의 뿌리, 그걸 우리한테 준 것 같은 생각예요. 몇 가지 장면들 가운데 하나가, 큰 아들이 애인을 잃어버리고 자살을 하려고 하다가, 가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 나는 죽으면 지옥으로 가도 마땅하지만, 지옥에 가서도 하나님은 내가 사랑할 거라고, 이제 그 기도 장면 같은 데 나오는 것을 보면, 참 휴머니즘이거든요.
안병욱 : 그렇죠, ‘알료사’라는 것 좋지요? 나는 대학 때 카라마조프 읽으면서요, 거기에 여러 사람이 나오지만 알료사가 제일 멋있는 것 같아요. 토스트에프스키가 그걸 완성 못하고 죽었지요. 알료사의 생활이 더 전개돼야 할 텐데… 가장 이상적인 젊은이의 상, 알료사….
김형석 : 네, 요전에 베르다에프(Berdyaev)의 글을 보니까 그이도 그랬데요,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내면성을 가장 깊이 파헤쳐 준 처음 사람은 단테고, 그 다음 사람이 셰익스피어, 그 다음에는 토스트에프스키라고… 그런데, 그 점에 있어서는 괴테도 토스트에프스키는 못 따라갔다고 그렇게 표현했는데, 참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6·25를 바로 겪고 나서 서울에 돌아왔거든요. 돌아와서 어느 봄에, 뭔가 내 생에 대한 문제, 또 우리 민족에 대한 이런 걸 며칠 동안 계속해서 좀 축적이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인상적인 건 시험감독을 하는데 밖에 보니까 복숭아꽃이 캠퍼스 안에, 그때 중학교 있을 때입니다, 자꾸 떨어져요. 그래서 난 우리 젊은이들에게 휴머니즘의 이해라 할까요? 하여튼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목적관(人間目的觀)…, 지성인들이 휴머니즘의 뿌리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모든 새싹이 다시 돋아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안병욱 : 네, 난 말년(末年)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생명을 줄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에 제일 역점을 두는 것은, 세계 일등 국민되기 운동… 이건 내가 여러 번 부르짖고 있어요. 한국국민은 세계 일등 국민이 한번 돼보자, 그런 뜻과 목표를 세워 보자, 그래서 일등 학생, 일등 어머니, 일등 아버지, 일등 교수, 일등 청년, 일등 사업가… 누가 너희가 일등 되라고 누구에게 지시한 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건강(健康)수준, 인격(人格)수준, 도덕(道德)수준, 양심(良心)수준, 지식(知識)수준, 생활(生活)수준, 정신(精神)수준이 자꾸 올라갈 거예요. 그래서 인류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세계의 모범국민(模範國民), 최고민족(最高民族)이 될 수 있다… 난 이건 도산 선생한테 배운 최대 교훈이에요.
김형석 : 예….
안병욱 : 난 도산 선생을 뵙지는 못했지만, 꿈에 한 번 꼭 나타납니다… 안 선생,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을 죽는 날까지 하라고, 그럽디다. 고맙다고, 내 생각을 펴 줘서 고맙다고… 딱 한 번, 그 후에 좀 더 뵈었으면 하는데 나타나질 않아요. 허허… 이제 21세기가 되면 아시아의 세기(世紀), 우리가 세계사에 크게 공헌(貢獻)하고, 또 발언(發言)도 하고. 기여(寄與)도 하는, 그런 시기가 올 걸로 봅니다.
김형석 : 왜 우리가 ‘61·2년 구라파여행을 하면서, 서울대 한 교수님랑 셋이서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이 생각이 나요. 뭔고 하니, 세계 역사를 보면 이탈리아가 한 번 세계의 중심이 됐다가 스페인, 포르투갈로 옮아갔다가, 그 다음에 화란, 화란이 작은 나라지만 세계 지배도 했으니까요. 우리 전라남북도만한 나라지만… 그 다음에 불란서, 영국으로 갔는데,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도 지리교과서를 보면 영국이 최고였거든요, 그러다가 이제 미국으로 갔거든요. 그래, 내 얼마 전에 미국학생들과 작은 클래스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이젠 미국으로 왔는데, 항상 미국에 있을 것 같냐, 또 다른 데로 갈 것 같으냐 물었어요.
안병욱 : 뭐라 합디까?
김형석 : 열여덟 명이 클래스에 있었는데, 이들이 머리를 갸웃갸웃하더니 어디로 갈 것 같대요. 그래서 어디로 갈 것 같으냐 그랬더니, 일본을 거쳐 북경, 인도로 가는 것 아니냐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럼 왜 그렇게 옮겨 다니느냐 그랬더니, 이 친구들이 나한테 설명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선하고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회가 언제나 세계의 중심이 됐다고. 이탈리아가 그것을 가졌을 때 세계의 중심이 됐고, 영국이 그것을 가졌을 때 세계의 중심이 됐고, 오늘날 미국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데 잃어 가고 있다고, 이제 일본이나 다른 지역이 선하고 강한 정신력을 가지면 그리로 간다고,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그랬더니, 이 친구들이 다 공감하데요, 갈 것 같다고, 허허….
안병욱 : 토인비의 예언(豫言)이거든요. 21세기는 동북아시아의 세계가 된다. 한국, 일본, 중국, 이 세 나라에 문화의 꽃이 핀다. 그러면서 이미 세계 문명은 미국을 떠나서 태평양을 건너오고 지금 아시아를 향하고 있다. 그날의 힘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의 할 일은 도산 선생의 말씀으로 직결되는데, 힘의 준비인 것 같아요. 아무리 기회가 와도 내게 능력이 없으면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합니다.
김형석 : 임어당(林語堂)이 ‘62년에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어요? 난 그날 사람이 많아서 가진 못하고 라디오를 들었는데요, 아주 좋은 얘기를 하더군요. 서양의 젊은이들은 장관의 아들, 딸 같아서 다 올라갔다고, 이젠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내려갈 길만 남았다고,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농사꾼의 아들, 딸 같아서 이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누가 행복하냐? 올라가는 게 행복하다고… 우린 좀 나이가 든 셈입니다만, 젊은 세대들이 영구히 올라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영구히 올라갈 수 있는 역사의 창조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또 되겠지요.
안병욱 : 예….
김형석 :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를 아까 안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양반의 얘기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고 하니, 악마는 우리를 유혹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준다고,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우리 젊은이들이 지금 시련을 겪고 있는데, 난 그건 축복인 줄 압니다. 이 시련을 겪지 않으면 역사가 단축되지 못하고, 이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건설을 못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대보다는 젊은 세대들이 좀 희망과 장래를 가지고 시련을 이겨 주게 되겠지요.
안병욱 : 네, 오늘 금년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갑니다. 새해에는 또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되는데, 오늘 둘이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흉금을 터놓고 얘기했습니다만, 내년에 또, 내일엔 내일의 해가 뜹니다. 그러니까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갑시다. 건강 조심하십시오. 저도 건강 조심하겠습니다만, 건강이 인생의 기초이다 보니까….
김형석 : 네,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만큼 자신을 가지고 살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안병욱 : 민족적, 개인적 자신감의 확립, 이게 제일의 뿌리 같아요.
김형석 :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안병욱 : 네, 네.
1985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