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승 (朴準承, 1865~1927)】 "나도 날 때는 독립국민이었다"
자암(泚菴) 박준승(朴準承)은 1866년 11월 24일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박호진(朴昊鎭)의 셋째 아들이다. 박호진은 대농가로서 집안이 여유로웠다. 덕분에 박준승은 6세 때 독선생을 들여 한문을 배웠다. 15세 때 사서삼경을 암송하였고, 성격은 쾌활하고 강직했다고 한다.
박준승은 16세 때인 1882년부터 농업에 종사하면서 가사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장환기의 둘째딸 장승화와 결혼하였다. 1886년 부친이 사망하자 호주가 되어 집안을 이끌었다.
박준승은 24세 되던 1890년 4월 스승 김영원을 통하여 동학에 입교하였다. 당시 임실에는 이미 천도교가 포교돼 있었는데 그는 임실 천도교 교당에 가서 입교했다. 조선후기 조정의 부패상을 지켜보면서 동학의 '광제창생 보국안민(廣濟蒼生 輔國安民)' 이념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92년 교조(敎祖) 최제우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어난 '교조신원(敎祖伸寃)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여기에도 동참하였다. 1896년 3월 박준승은 동학 접주(接主)로 임명돼 포교 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7년에는 수접주(首接主)로 임명되었다.
민회의 첫 명칭은 대동회였는데 중도에 중립회(中立會)로 바꾸었다가 다시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했다. 1904년 9월 '진보회'라는 이름의 민회를 조직한 후 천도교인들에게 단발과 함께 흑의(黑衣·개화복)를 입도록 권장하였다. 이것이 소위 천도교의 '갑진(甲辰)개화운동'이다. 당시 박준승은 전라도 접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1905년 12월 1일 동학은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듬해 초에 귀국한 손병희는 교제(敎制)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1906년 2월 서울에는 천도교 중앙총부를, 지방에는 74개 교구를 설치하였다. 박준승은 1907년 6월 천도교 임실교구 창립교구장으로 임명돼 활동하였다.(단, 3.1혁명 후 취조과정에서는 임실교구장 역임 사실을 부인하였음) 그해 말 의암 손병희로부터 자암(泚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받았다. 1909년 1월에는 의사원(議事員)으로, 1910년 4월에는 500호의 교인을 지도하는 도훈(道訓)이 되었다.
이무렵 날로 교세가 확장되자 손병희는 1912년 6월 19일 서울 우이동 자락에 봉황각을 건립했다. 천도교 간부들의 회의장소 겸 전국 신도들의 수련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봉황각 준공과 함께 손병희는 전국 각지의 지도급 간부들을 불러 49일 특별기도회를 열고 국권회복과 천도교 발전을 기원했다. 이때 박준승은 제1차 수련생 21명 중 한 명으로 뽑혀 봉황각에서 연성(鍊成)공부를 하였다.
1914년 7월 그는 전남 장성 대교구장 겸 순유(巡諭)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천도교의 원로인 경도사(敬道師)에 추대되었고, 이듬해에는 도사실(道師室)의 도사(道師)로 추대되었다. 이 무렵 그는 천도교 내의 중요정책을 심의·결정하는 중진의 위치에 있었다.
권동진의 권유로 33인 합류
1918년은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해였다. 그해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그 무렵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미국 의회에서 14개조 원칙을 발표하였다. 모든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타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조선처럼 강대국의 식민지로 있던 여러 약소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약소국이 강대국의 부당한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이론적 근거로 인식되기도 했다.
천도교는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시하였다. 교주 손병희는 측근 3인방으로 불리는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을 통해 모종의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자율적 행정', 즉 자치를 청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만주와 상해, 연해주 등에서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방침을 수정하였다.
천도교는 1919년 1월경부터 외부세력 규합에 나섰다. 우선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1차로 윤치호·김윤식·한규설 등 당대의 명망가들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차로는 기독교·불교 등 타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공동전선을 모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의 천도교인들에게 1919년 1월 5일부터 49일간 특별기도회를 갖도록 함으로써 모종의 운동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때 박준승은 전주교구에서 49일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2월 24일 박준승은 서울로 올라왔다. 교주 손병희에게 49일 기도회 보고를 겸해 고종 황제 국장도 참배할 계획이었다. 송현동 청송여관에서 하루 저녁을 보낸 그는 이튿날 25일 손병희를 만나려고 천도교 중앙총부로 오는 길에 총독부 문 앞에서 권동진을 만났다. 권동진은 그에게 "지금 정부에 조선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처에 배포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한다"며 그에게 동참을 권하였다. 그는 "청원해서 독립이 된다면 참가하겠다"며 참여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이틀 뒤 27일 권동진이 재동 김상규 집으로 오라고 통지하였다. 그는 오후 3시경 김상규 집에 가서 일본 정부에 제출할 청원서 초안 등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하였다. 다시 28일 밤에는 손병희 집에 모여 최종 점검회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선언서 발표장소를 당초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다수의 군중이 모일 경우 소요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손병희, 박준승 등을 포함해 참석자는 총 29명이었다. 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제 관헌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일경의 조사는 연행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첫날 일경은 그에게 상경 목적, 권동진과의 회합 내용,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 이유, 모임 참석자 명단 등을 따져 물었다. 박준승은 일경의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조선독립의 필요성 등에 대해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선생은 1920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에도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다 1927년 3월23일 조국광복을 보지못한 채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