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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책 속표지에서 1.
나는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항해중인 선원이
자신이 방금 떠나 온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바라보듯이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의 재가 되어 버린다.
책 속표지에서 2.
테오필과 셀레스트에게
나비가 많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클로드 망디빌에게 감사드린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이 씌어지기까지 그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역자후기
“나는 이 책을 나의 두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쓸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은, 아이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었습니다.”
1997년 3월 첫째주, <잠수복과 나비)는 프랑스 전 서점에 일제히 깔렸다. 저자는 자기만의 필법으로 쓴 자신의 책을 그의 소중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1997년 3월 9일, 장 도미니크 보비는 옥죄던 잠수복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자유로운 그만의 세계로,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고…….
프랑스 전 국민들은 이 젊은 지식인의 죽음 앞에 최대한의 존경과 애도를 보냈으며, 3월 14일 프랑스TV는 그의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마지막 삶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하였다.
이 글을 읽은 모든 이들에게도 따뜻한 사랑과 행복을 속삭여 주는 나비가 많이 찾아오기를…….
차례 (총 29편)
책머리에 // 바퀴 의자 // 기도 // 목욕 // 알파벳 // 황후 // 치네치타 // 뜨내기 관광객 // 소시지 // 수호천사 // 사진 // 또 다른 우연 // 꿈 // 내면 독백 // 운수 좋은 날 // 뱀의 자취 // 커튼 // 파리 // 식물인간 // 산책 // 20 대 1 // 오리 사냥 // 일요일 // 홍콩의 아가씨들 // 메시지 // 그레뱅 박물관 // 허풍선이 // ‘내 삶 속의 어느 하루’ // 휴가 끝
책머리에
군데군데 벌레먹은 커튼이 우유빛으로 뿌옇게 밝아오는 걸 보니 새벽이 오는 모양이다. 발뒤꿈치가 아프다. 머리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하고 온 몸은 잠수복이라도 입은 듯 갑갑하게 조여 온다. 내 방에서 어둠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사진과 아이들이 보내 온 그림, 포스터,그리고 친구 녀석이 파리와 루베팀의 경주 바로 전날 보내 온 양철로 된 자전거 선수 조각을 차근차근 살펴본다. 내가 6개월째 바위에 붙어 사는 소라게처럼 몸을 붙이고 있는 침대 위로 솟아오른 막대기도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지난해 12월 8일부터 나의 삶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뇌간(腦幹)이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날 심장 순환기 계통의 갑작스런 이상으로 이 기관이 고장나자, 비로소 나는 뇌간이라는 것이 우리 몸을 이루는 컴퓨터 장치의 핵이며, 뇌와 말단신경을 이어 주는 통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처럼 급작스런 사고를 ‘뇌일혈’ 이라 불렀으며, 한번 걸렸다 하면 백발백중 죽는 병이었다. 그러다가 요즘에 와서는 소생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상황이 좀더 복잡해졌다. 죽지는 않지만,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상태에서 의식은 정상적으로 유지됨으로써 마치 환자가 내부로부터 감금당한 상태, 즉 영미 계통의 의사들이 ‘로크드 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이라고 표현한 상태가 지속된다. 왼쪽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만이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일 뿐이다.
이런 소상한 내용은 언제나 당사자가 가장 늦게서야 알게 되는 법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20일 동안의 혼수 상태에서 벗어난 후에도 몇 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정확한 병명과 증세를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베르크 해양병원 119호 병실에서, 나 자신을 새로이 발견한 것은 1월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아침이다. 7시가 되자, 예배당의 종소리가 15분마다 한 번씩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확인시켜 주기 시작한다. 밤새 잠잠했던 기관지가 고인 가래를 뱉아내려는 듯 갑자기 그렁대기 시작한다. 노란색 시트 위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손 때문에 고통스럽다. 손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지, 혹은 반대로 너무 차가워서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근육이 경직되지 않도록 반사적으로 기지개를 켜보려 하지만, 내 팔다리는 겨우 몇 밀리미터 정도만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사지의 통증을 더는 데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잠수복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시간 속으로, 혹은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닐 수도 있다. 불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다스 왕의 황금 궁전을 거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로 달려가 그 곁에 누워, 그녀의 잠든 얼굴을 어루만질 수도 있다. 공중누각을 지을 수도 있고 황금 양털을 찾아나설 수도 있다.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를 향한 모험길에 오를 수도 있고, 유년 시절의 꿈이나 성인이 된 후의 소망을 실현에 옮길 수도 있다.
공상은 이제 그만. 나는 출판사에서 나의 떠나지 않는 여행의 기록을 한 자 한 자 받아 적을 사람을 보내기 전에, 미리 이 여행담의 도입부를 완결지어야 한다. 나는 머릿속에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열 번씩이나 되뇌어 보면서 단어를 빼기도 하고, 군데군데 형용사를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원고를 한 문장 한 문장 완전히 암기하게 된다.
7시 30분. 당직 간호사가 나타나자, 내 생각의 흐름은 중단된다. 간호사는 익숙한 몸짓으로 커튼을 젖히고 나서 절개 부위와 점적(點滴) 주입장치를 살핀 다음, TV를 켜고 뉴스를 기다린다. 화면에서는 서부에서 가장 재빠른 두꺼비 이야기를 담은 만화 영화가 한창이다. 나도 차라리 두꺼비가 되게 해달라고 빌어 볼까?
알파벳
나는 내 알파벳표에 적힌 글자들을 좋아한다. 밤이 되어 사방이 캄캄해지고 TV의 빨간 표시등만이 유일한 표의 흔적처럼 느껴질 때. 알파벳표의 자음과 모음 들은 샤를 트레네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 나는 그리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네…….” 글자들은 손에 손을 잡고 방 안을 가로지른 후 침대 주위를 빙빙 돌고 창가로 다가가서는 꾸불꾸불 벽을 타올라 문까지 갔다가 다시 방 안을 돈다.
E S A R I N T U L O M D P C F B V H G J Q Z Y X K W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해 보이는 이 글자행렬은, 하지만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치밀하고 복잡한 계산의 결과이다, 따라서 단순한 알파벳이라고 하기보다는, 프랑스어에서 사용되는 빈도에 따라 철자를 배치한, 이를테면 글자들의 빌보드 차트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자주 쓰이는 E가 제일 앞에 나오고, W는 꼴찌 자리라도 감지덕지. B는 발음이 혼동되기 쉬운 V와 하필이면 이웃하게 되어 뾰로통. 하고많은 문장에서 제일 앞에 나와 거만해진 J는,뒤쪽으로 밀린 자기 위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H보다 한 자리 뒤로 밀린 뚱뚱보 G는 심술을 부리고, T와 U는 둘이 붙어 있게 되어 기쁜 듯. 나와 직접적으로 의사 소통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천만다행.
방법은 이주 간단하다. ESA…로 된 알파벳표를 내게 펼쳐 보이면, 나는 내가 원하는 글자에서 눈을 깜박인다. 상대방은 그 글자를 받아 적으면 된다. 똑같은 과정을 그 다음 글자에서도 계속 반복한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한 단어를 완성할 수 있고,뜻이 통하는 문장도 토막토막 이어 맞출 수 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겁을 먹는 사람들도 있고, 눈치가 굉장히 빠른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을 옮겨 적는 이 기호 체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크로스워드나 스크래블 애호가들은 적응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쉽게 익숙해지는 편이다. 자주 사용하다 보면 어떤 여자들은 아예 알파벳표를 외어 버려서, 알파벳 순서와 내가 자주 쓰는 말을 적어 놓은 공책 없이도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서기 3천년쯤 되었을 때, 당시의 인류학자가 만일 “물리치료사는 임신했다” “특히 다리가” “아르튀르 랭보였지” “프랑스팀은 완전히 더티 플레이를 했지” 등등의 문장이 두서 없이 같은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공책을 들여다본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더구나 필적도 알아보기 힘든 난필인데다가, 단어가 잘못 이어지기도 하고, 빠진 철자도 많은가 하면, 미완성인 음절투성이니…….
기분파일수록 쉽게 냉정함을 잃는다. 이들은 억양도 없는 목소리로 쉴새없이 알파벳을 불러대며, 어쩌다가 운좋게 몇몇 단어를 맞추고 나서는 보잘것 없는 결과에 대해 뻔뻔스럽게도 “나는 정말 재주가 없다니까”라고 한탄을 연발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기분파들과의 대화는 수월한 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하는 식으로 대화 전체를 독점하는 수가 많아서, 구태여 거기 끼어들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말수가 적으면서 얼버무리기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내가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물으면, “잘 지냅니다”라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나에게로 다시 발언권을 넘긴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알파벳판은 어느새 속사포가 되어 버리는 듯하다. 당황하지 않으려면 두세 가지 질문 정도는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소심한 사람들은 절대로 허튼 짓은 하지 않는다. 철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적어 가기만 할 뿐, 문장이 미처 완성되기 전에는 절대로 미리 넘겨짚어 볼 시도를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미완성 단어를 완성시키려는 수고도 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송이’에 ‘버섯’을, ‘핵발’에 ‘전소’ 혹은 ‘참을 수’ ‘견딜 수’ 에 뒤따라 나오는 ‘없는’ 이라는 부분을 스스로 알아서 완성시킨다면 내 손에 장을 지져도 좋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절차가 길어져서 짜증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들과는 직관에만 의존하는 충동파들과의 대화에서 자주 당면하게 되는 오해만큼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내가 ‘안경’을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상대방이 성급하게 ‘안개’ 속에서 무얼 하려느냐고 호기심 가득 담긴 투로 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충동파와의 대화가 지닌 시적(詩的)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내면 독백
어떤 때에는 기분 좋게 깨어날 경우도 있다. 1월말 내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어떤 남자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서 바늘과 실로 마치 구멍난 양말을 깁듯이 나의 오른쪽 눈꺼풀을 꿰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혹시 이 안과 의사가 내친 김에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지하 감옥의 유일한 창문, 잠수복에 뚫린 유일한 현창인 왼쪽 눈마저 꿰매 버린다면? 다행스럽게도 나는 창 없는 캄캄한 밤의 세계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의사는 솜이 깔린 양철상자 속에 자기의 도구를 조심스럽게 챙긴 후, 재범자에 대한 본보기로 무거운 형을 요구하는 검사 같은 목소리로 “6개월” 하고 말했을 뿐이다. 성한 눈으로 나는 질문이 있다는 신호를 거듭 보냈으나, 그는 허구한 날 남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지는 몰라도, 남의 시선에 담긴 메시지를 읽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무관심하고 건방지며 퉁명스럽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의사의 전형이었다. 말하자면 환자들에게 아침 8시에 오라고 해놓고선, 자기는 9시에나 나타나서 환자들에게 45초라는 귀중한 시간을 할애한 후, 9시 5분이면 진료실을 나가는 그런 의사였다. 겉모습만으로는 작달막하고 고르지 못한 체격에, 가분수처럼 머리통만 커다란 공포의 막스를 닮았다. 다른 환자와도 별로 대화가 없는 그 의사는, 나 같은 유령과 만나면 설명하는 데 드는 침삼키기도 아까운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나는 왜 의사가 6개월 동안 내 눈을 봉해 놓았는지를 겨우 알게 되었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보호막으로서의 구실을 못하는 상태에서는 각막 궤양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는, 병원측에서 장기 입원 환자들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병원측에 대한 불신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무뚝뚝한 의사를 고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일종의 희생양인 셈이었다. 만일 소문대로 그가 병원을 떠난다면, 나는 누구를 도마 위에 올려 놓을 것인가? 그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두 겹으로 보이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혼잣말로 “그렇소. 머저리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요”라고 대답하는 쾌감을 더 이상 맛보지 못할 것이다.
정상적으로 호흡하는 것만큼이나 가슴 뭉클하게 감동하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 엽서에 그려진 발튀스의 그림, 생 시몽이 쓴 한 편의 글이 흘러가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미적지근한 체념 속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적당한 양의 분노와 증오심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압력솥의 폭발을 막기 위해 안전밸브가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젠가 내 경험을 토대로 써보려고 하는 희곡의 제목으로 ‘압력솔’ 이 나쁘지 않을 성싶다. 한때는 ‘눈’ 이라고 하려다가 ‘잠수복’ 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보기도 했다. 독자들도 벌써 내용과 무대 배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의 가장인 L 씨가 심장 순환기 계통의 갑작스런 질환으로 ‘로크드 인 신드롬’ 환자가 되어, 병상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이야기이다. 희곡에서는 병원이라는 세계에서 L씨가 겪는 일상 생활과 병으로 인해 L씨의 인간 관계, 즉 부인과 아이들, 친구, 그리고 그가 창립 멤버로 몸담고 있던 광고 회사 동업자들과의 관계가 변해 가는 과정이 주로 다루어진다. 야심 많으면서 냉소적이지만 실패라고는 모르고 살아왔던 L씨는 병마와 싸우는 과정에서 절망감을 배우고 자기가 여태까지 확신하고 있던 가치들이 여지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목격하며, 자기가 친지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기에게 타인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같은 상황의 전과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같은 상황의 전개 추이는, L씨의 내면 독백을 관중들에게 들려 주는 극중 나레이션을 통해 잘 관찰할 수 있다. 이제 작품을 쓰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마지막 장면을 완성시켜 두었다. 무대에는 전체적으로 어둠이 깔렸고, 한 가운데 침대가 놓인 부분에만 후광이 비친다. 한밤중이라 모두들 잠이 들었다. 막이 올랐을 때부터 줄곧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던 L씨가, 갑자기 이불을 걷어 젖히고 침대 아래로 뛰어내려 아주 비현실적인 조명이 비추는 무대를 한 바퀴 돈다. 곧이어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기고, 마지막으로 L씨의 내면 독백이 들린다. “제길할,꿈이었군.”
일요일 (부분발췌)
[전략]
오늘은 일요일이다. 병문안 오는 방문객이 불행히 한 명도 없어서, 따분하고 느릿느릿한 시간의 흐름을 깨뜨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두렵기만 한 일요일. 물리치료사도, 언어장애치료사도1 심리학자도 오지 않는 일요일. 평일보다 훨씬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몸단장만이 유일한 오아시스일 뿐, 일요일은 지루한 사막과 다름없다. 이런 날에는 의료 보조인들이 토요일 저녁에 마신 술 때문에 늦게들 근무를 시작할 뿐 아니라 일요일 당직 때문에 가족 나들이, 혹은 친구들과의 참새 사냥이나 새우 낚시를 못 갔다는 억울함이 겹쳐 얼굴을 씻겨 주는 둥 마는 둥하고. 면도도 살을 베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넋이 빠진 채 기계적으로 손만 왔다갔다 할 뿐이다. 아무리 좋은 향수를 듬뿍 뿌려 주어도 불결한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감출 수는 없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TV를 켜는 경우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건 고도의 전략 문제이다. 까딱하면 서너 시간 동안 이무도 오지 않아 채널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흥미 있는 프로가 있더라도 그 프로 다음에 눈물을 짜는 연속극이나 바보 같은 오락 프로, 혹은 소리만 질러대는 토크쇼가 예정되어 있을 때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기로 단념해 버리는 편이 낫다. 걸핏하면 쳐대는 박수 소리를 듣노라면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나는 예술이나 역사, 아니면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차분한 기록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 나는 나무가 타는 광경을 응시하듯, 논평 없이 눈으로만 이런 프로그램을 지켜본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시간을 알리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진다. 벽에 걸린 보건소 일력을 보니. 어느새 8월이다. 한편으로는 이렇듯 정지한 듯한 시간이, 다른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재빨리 달음박질치는 것은 무슨 역설에서일까?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나의 보잘 것 없는 세계에서 한 시간은 한없이 늘어지지만,반대로 한 달은 마치 번개처럼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나는 벌써 8월이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남자 친구들과 여자 친구들,그리고 또 아이 녀석들은 모두 여름 휴가를 맞아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머릿속으로나마 다른 사람들이 여름을 보내는 장소에 슬쩍 한 몫 끼여 본다. 남들의 휴가 소식이 내 마음을 조금은 아프게 하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브르타뉴 지방에서는 어린아이 한 부대가 자전거를 타고 시장엘 다니러 간다. 아이들 얼굴은 한결같이 웃음으로 환하게 빛난다. 개중에는 벌써 사춘기에 들어섰을 법한 녀석들도 있지만, 유도화가 흐드러지게 핀 길가를 거니는 동안 녀석들도 잊고 있던 아이다운 천진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 이 아이들은 보트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들겠지. 배의 작은 모터는 딸딸거리며 숨가쁘게 물살을 헤쳐 가겠지. 배의 앞쪽에 누워 두 눈을 감은 채. 배 밖으로 하 필지. 배의 앞쪽에 누워 두 눈을 감은 채, 배 밖으로 한 팔을 늘어뜨려 손가락으로 차가운 물살을 가르는 녀석도 있을 테지. 남프랑스 지방에서라면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집안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수채화용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있다. 한쪽 발을 다친 새끼 고양이가 시골 신부의 사택 정원에서 그늘을 찾아 헤맨다. 좀더 멀리 카마르그 지방에서는 숫송아지들이 아니스 풀향기를 맡고 늪지대 부근으로 구름떼처럼 몰려간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 오자, 어디서나 가족들이 자기들의 모일 자리를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가정의 어머니들은 언제나 점심 준비하기가 힘든 노역으로 생각되지만, 나에게 있어서 점심 식사란 언제나 하나의 근사한 의식이었다. 지금은 비록 잊혀졌을지라도.
오늘은 일요일이다. 나는 창가에 쌓인 책들을 바라본다. 오늘은 아무도 나에게 책을 읽어줄 사람이 없으니, 그저 쓸모없는 도서관처럼 생각된다. 세네카, 졸라, 샤토 브리앙, 발레리 라르보가 겨우 1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지만 가혹하게도 나는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검은 파리 한 마리가 내 콧잔등에 와서 앉는다. 나는 파리를 쫓으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본다. 그래도 놈은 버티고 있다. 올림픽 때 구경한 그레코 로만형 레슬링 경기도 지금처럼 처절하지는 않았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첫댓글 모두 29편의 작은 수필집같은 것이었다. 그 가운데 네편을 골랐고, 주인공과 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표지글과 차례를 먼저 덧붙였다. 한 때 내가 영화[잠수종과 나비]를 보며 사무치게 부러워 했던 주인공. 그 주인공이 눈깜박임으로 전달하여 받아적게 하여 만들어낸 책인데, 전신마비로 눈꺼풀만 깜박일 줄 아는 주인공을 내가 왜 부러웠했을까? 그 마음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여 자료를 올려본다.
몇 년 전에 잠수종과 나비를 본다고 하다가 결국 놓쳤어요. 저라면 '나와 직접적으로 의사 소통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주인공이 부럽겠지만, 부러움의 대상이야 각자가 처한 상황마다 모두 다르니... 그건 그렇고 딴 소리 하나. 부럽다는 말을 그 당사자에게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합니다(하기야 부럽다고 생각은 해도 말로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게 상대방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무척 자주 들어요. 역지사지를 못해서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잠수종과 나비" 그 훌륭한 영화... 이렇게 글을 통해서 다시금 되새기네요.. 예전에 제가 잠수종과 나비를 언급했더니 어떤 분이 잠수종이 최수종과 무슨 상관 관계가 있냐고 묻더군요... 쩝.. 최수종을 별로 안 좋아해서리... 대답을 못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