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경書經]에 나타나는 동방민족의 역사
하서 夏書
우공禹貢 -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우>는 터를 나누었는데(敷土) 수산隨山의 세력부터 제압制壓하고 그들의 신목神木까지 베어버린 다음(隨山刊木) 높은 산과 큰 냇물을 경계로 삼아 그걸 정하였다...禹敷土 隨山刊木 奠高山大川...<우공禹貢> 주목되는 문구文句 가운데 [隨山刊木]를 공자孔子는 <산을 따라 나무를 베어>라고 해석한다. 큰물을 막는데 왜 산에 있는 나무를 없애는가? 요즈음도 홍수洪水를 대비하려고 오히려 나무를 심고 더 가꾼다. 또한 기록을 보면 우禹는 곤鯀이 물길을 막는데 에만 급급하여 실패를 한 걸 거울삼아 오히려 막힌 데를 트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므로 산을 따라 나무를 제거할 까닭도 없고 물막이에 필요한 많은 재목을 얻을 필요가 없으니 조금 달리 이해해야 한다. 필자筆者가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우禹]는 치수治水를 빌미로 삼아 중앙의 압박에서 벗어났으며 지방에서부터 세력을 키우면서 소호계少皥系의 모계혈통母系血統과 요堯가 바탕으로 삼았던 제곡계帝嚳系를 규합糾合하는 가운데 권력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므로 [수隨 suí]는 마땅히 이러한 배경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산해경山海經]과 다른 여러 서적書籍들을 살펴보면 동방계는 산을 중심으로 근거를 마련하며 성수聖樹와 신목神木 사상이 매우 짙다. [우禹]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계지역에서 근거하면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던 [수산隨山]의 세력부터 제압制壓하고 그들의 신목神木까지 베어버린 것이다.
① [산해경山海經 중차오경中次五經]의 [수산首山 shŏu]은 부근에 박산薄山* 등 적지 않은 동방계열을 끌어 안고 있다. 그래서 이름조차 <우두머리라는 마리산首山>이다. 박산薄山에 살고 있는 신조神鳥는 대조(鳥+大)鳥라 하는데 신농神農의 셋째 아들인 희熙와 소호少皥의 딸이 결합해 낳은 계鷄*雞 세력을 말한다. <계鷄>는 곧 [삼병명三兵銘]의 첫 번째 창날 가장 위에 새겨진 <대조일기大祖日己 대계大鷄>인데 그래서 그를 형상화形象化한 신수神獸가 <새>이며 그의 맏아들이 바로 중여衆艅 곤鯀이다. 그렇지만 곤鯀은 전욱顓頊의 맏이와 둘째가 일찍 죽자 집안을 이끌라는 전욱顓頊의 의지(대계大鷄는 형님뻘이다)에 의하여 셋째 아들로 들어가면서 상징인 삼목三目을 이어받는데 이를 비유比喩하여 대조(鳥+大)鳥가 <눈이 셋이다. 其狀如梟而三目>라 했고 전욱顓頊 집안의 얼을 이었다하여 <귀耳 ěr 즉 얼이 있다. 有耳>라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산을 천신天神이 깃드는 곳으로 숭배崇拜한다. 이들은 모두 여씨 계열로 합쳐졌다. <중차십경중次十經> 수양산首陽山의 첫머리인 수산首山도 이들의 세력권과 관련하여 유의할만하다.
② 이 집단의 실체實體는 <서산경西山經>의 사람 다리를 지닌 솔개와 같은 신조神鳥인 <수사數斯 shu-sī> 와 <해내동경海內東經>에 수사豎沙 shú-shã가 나타나는데 모두 <수씨>라는 순 우리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뒷날 한족漢族들에게 하나의 동방계 세력집단으로 완성된 [숙신肅愼 sù-shèn]과 매우 깊은 친연성親緣性을 보인다.
<부敷>는 땅을 분별(分別 -성질이나 종류에 따라 구별하여 나누다)하는 걸 말한다(집전集傳). 구태여 이런 말을 쓴 까닭은 <우禹>가 자신들의 터전과 동방계열의 경계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는 뜻을 함축含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완성한 [치수治水]의 근본 목적이었다. 이는 우공이나 이를 바탕으로 삼은 다른 문헌에서 [○주州 – 핵심 세력이 근거한 중심 산천山川 – 그 세력의 이름인 ○이夷]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우禹>는 부토敷土를 하기에 앞서 <수산간목隨山刊木>을 하였는데 그 까닭은 그가 요순堯舜 이래의 중심 터인 기冀의 북방에서부터 일을 벌이자니 북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근거하여 가장 걸림돌이었던 <수산隨山 세력>을 먼저 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禹가 이 일을 이루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주었을 <도산씨塗山氏 -소도蘇塗가 있는 산을 근거로 삼은 동방세력>의 딸과 결혼을 서두른 이유가 자연히 밝혀진다. 바로 이어지는 부분에 가장 먼저 기주冀州가 나오는 까닭이 그래서이다. 따라서 도산씨塗山氏는 동쪽이 아니라 서북방에 있었다.
기주는 <우>의 중심 터이다. 연하의 서쪽*옹하의 동쪽*예하의 북쪽이며 주례직방에 하내를 기주라한다는 기록이 이것이다. 여덟의 터전에서 두루 그 경계를 말하였지만 기주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나머지 터전의 어른들이 미치는 소재所在로서 능히 (우리의 터)를 변별辨別 즉 구별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可見). 조씨가 말하였다. 모두가(亦) 우리의 중심 터를(所以京師) 존귀尊貴하게 여기고(尊) 우리의 어른이(王者) 그 밖의 터에는(外) 뜻이(意) 없음을(無) 보여주려는 것이다(示)...
冀州 帝都地也 兗河之西 雍河之東 豫河之北 周禮職方 河內曰冀州是也 八州皆言疆界 而冀不言者 餘州所至 可見 鼂氏曰 亦所以尊京師 示王者無外之意...<우공禹貢>
[기冀 jì]라는 소리글자 자체가 <어른 ~지>라는 말이다. 즉 [어른의 터]이다. 그 터전을 이야기하는데 [연하兗河 서쪽-옹하雍河의 동쪽-예하豫河의 북쪽]이라고 했다. 다른 서적書籍에서 연주兗州에만 이夷의 기록이 빠진 것이 바로 그곳에 감히 말할 수 없는 예羿의 유궁국有窮國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는데...
그 지역의 중심 하천河川인 연하(兗河 yăn -언니 물)의 서쪽이 경계였다는 말로서 그 동편에 있던 유궁국有窮國이 하夏의 태강太康을 쳐서 멸망시킨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되어진다. 서쪽의 경계인 [옹하雍河 yōng]는 신농계神農系의 물길이다. [산해경山海經 해내동경海內東經] 말미末尾를 보면 <소실산이 옹씨의 남쪽에 있다. 少室山在雍氏南>하였으며 <중차칠경中次七經>에서 서편인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수계水系에 있는 <소실산少室山>이 나온다. 이들의 동쪽 한계는 <중차십일경中次十一經>의 풍산豊山에 근거하며 나타나면 나라에 큰 두려움이 생기는 <옹화雍和 yōng-hë>라는 신수神獸로서 알려주는데(曰豊山 有獸焉...名曰雍和 見則國有大恐) 어른 씨의 이름은 나타나면 그 나라가 망한다는 경부(耕父 -아비 계系인 신농씨神農氏 묘예苗裔)라고 불린 듯하다.
(神耕父處之 常遊淸泠之淵 出入有光 見則其國有敗).
[예하豫河]는 동방족의 대표적인 지표지명指標地名이니 남쪽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우禹의 영역은 황하黃河가 几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동쪽 줄기 안팎의 남부 지역 일대一帶임을 밝혀준다. 본문本文에서도 [周禮職方]을 인용하여 <河內曰冀州>라고 분명히 해주고 있다. 여기서의 하河는 황하黃河로서 그 줄기가 几 로 이루어진 상류上流 줄기를 하내河內라고 일컬었다. 덧붙인다면 [餘州所至]를 우리말로 이해할 때 [여餘 yú]는 <여씨 즉 동방 세력>이며 [지至 zhì]는 <어른 ~지>이니 <동방의 터전을 가꾸는 어른들의 소재所在를 분명히 함으로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夏]에 이르도록 서북면은 태행太行을 넘지 못하였다. 그 동쪽엔 이미 동방족들이 제각기 근거를 잡고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하나로 뭉친 상商이 거대한 실체實體로 나타나면서 경계를 맞댄 하夏의 세력들이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으며 결국 상商이 서편으로 육박하여 하夏를 제압하자 동쪽과 서방을 갈라놓았던 빗장이 풀렸다. 그 뒤 서부에서 세력을 키운 주周가 상商을 극克하는 가운데 한족漢族의 인식이 동방으로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처음엔(旣) 호구산을(壺口) 다스리는 것부터 시작하였다(載). 旣載壺口...<우공禹貢> [요堯-순舜-우禹]에 이르기까지에도 동북방에 관한 인식은 분수汾水를 넘지 못하였으니(그 북쪽을 유도幽都*삭방朔方이라 불렀다) 도산씨塗山氏의 덕분에 우禹가 발걸음을 딛기 시작한 지역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산해경山海經 북차이경北次二經]을 보면 분수汾水 서남에 <호기산狐岐山 hú-qí>이 보인다. <중차십일경> 호수산虎首山과 영역적으로 이어지는 <중차십경中次十經>의 <호미산虎尾山 hū-yĭ>도 수산隨山과 관련이 깊은 수양산首陽山 옆에 있다. <중차이경中次二經>의 이수伊水 부근에 호산豪山 háo과 <중차육경中次六經> 낙수洛水 지역인 호저산縞羝山이 있는데 모두 [호구산壺口山 hú-kōu]과 일정하게 지역적인 친밀함을 보여준다.
이들을 묶어 주는 가로로 연결된 거점지대據點地帶를 형성시키고 있는 지표지명指標地名들이 <중산경中山經> 탈호산脫扈山 - <중차이경中次二經> 호산豪山 - <중차삼경中次三經> 화산華山 - <중차오경中次五經> 수산首山 - <중차육경中次六經> 호저산縞羝山 - <중차십경中次十經> 수양산首陽山과 호미산虎尾山 - <중차십일경中次十一經> 호수산虎首山의 커다란 띠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위쪽으로 만들어진 벨트로 <북산경北山經> 단호산單狐山 - <북차이경北次二經> 호기산狐岐山을 동쪽 한계로 하여 서편으로 <서차이경西次二經> 수력산數歷山 - <서차사경西次四經> 호산號山이 겹쳐져 있다. [우공禹貢]에서 <수산隨山과 호구산壺口山>으로 표기表記된 동방족의 협력 벨트를 우禹가 처음으로 건드린 것이다(집전集傳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하동군河東郡 북굴현北屈縣 동남에 있다는 기록을 채용採用하여 습주隰州 길향현吉鄕縣으로 보는데 습주隰州는 분습汾隰 즉 분수汾水 수계水系의 지역이며 지금까지 산해경山海經의 기록 분석과 지역이 거의 일치한다다). 양산과 기산을 바로잡았다. 治梁及岐...<우공禹貢>
앞서 이야기한 모든 정황情況과 배경으로 보아 이 대목의 [치治]는 <다스린다 보다는 바로잡다>의 뜻이 더 강하다. 기산岐山은 낙수(洛水 –낙하洛河를 말한다)와 하수河水가 几로 흐르다가 ㄴ 으로 구부러져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잇는 띠의 위쪽을 넘지 못한 위수渭水와 경수涇水 사이에 있으며 양산梁山은 분수汾水가 하수河水에 흘러드는 지역인 하서(河西 –황하黃河가 几 로 흐르는 동쪽 줄기의 서편이다)에 있다. 수산(隨山 -숫산*사내산)으로 불렸을 수양산首陽山과 수산首山이 바로 이 지역에 있고 분수를 첫 머리로 하는 <북차이경北次二經>에 호구산壺口山과 친밀한 호기산狐岐山이 나타나며 위수渭水 수계水系와 이어진 지역인 <서차이경西次二經>에서 수력산數歷山이 보인다. 즉 <우禹>는 맨 처음 요堯의 강역疆域 동남쪽과 서부 주변경계지역인 [수산隨山-호구산壺口山-양산梁山-기산岐山] 일대의 동방 세력들을 제어制御하면서 움직였는데 이들 지역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지명고地名考를 통해 알려준다. 특별히 주목할 시사점示唆點은 <양산梁山과 기산岐山 지역을 바로잡았다>하여 그 앞서 까지는 아직 이 일대에 완전한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음을 밝혀준다. 이는 주周의 선조先祖인 불굴不窋 무렵에도 이 지역을 <戎狄之間>이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문왕文王 때엔 서쪽의 융戎을 혼이混夷로 동북의 적狄을 험윤玁狁으로 달리 표기表記한다). [집전集傳]에서도 <기산은 지금 분주 개휴현에 있고 승수가 나와 분수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호기산이다. 岐山在今汾州介休縣 狐岐之山勝水所出東北流注于汾>라 하여 필자筆者의 지명地名 추정이 옳았음을 알려준다. 이윽고(旣) 태원을 새로 고치고 닦아 악양에 이르렀다. 旣修太原 至于岳陽 <우공禹貢>[양산梁山 – 기산岐山 – 위수渭水]에 이르는 북에서 남으로 이어진 서편의 경계지역을 손질한 우禹가 이윽고 태원太原을 건드리고 있다(이 무렵 서쪽 변경邊境이다). 그렇다면 기주冀州를 중심 터로 삼은 순舜 무렵의 태원太原은 어디였을까? 물론 이 시기의 태원太原을 짐작할만한 마땅한 사료史料는 흔치않다. 따라서 뒷날의 기록을 더듬어야만 한다. 그럼 [죽서기년竹書紀年]을 살펴보자.
① 穆王 17년 秋 8월 遷戎于太原
② 夷王 7년 虢公帥師伐太原之戎至于兪泉獲馬千匹
③ 厲王 12년 玁狁浸宗周西鄙
④ 宣王 5년 夏 6월 尹吉甫帥師伐玁狁至于太原
⑤ 宣王 33년 王師伐太原之戎不克
[戎*玁狁*太原之戎]이 다르지 않음을 밝혀주는데 이 무렵 험윤玁狁은 태원太原 부근에 근거한 적인狄人으로 표현되었다(여씨춘추呂氏春秋 심위瀋爲 –大王亶父邠狄人攻之 의 주석註釋에 적인狄人을 험이獫夷 즉 험윤玁狁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文王立西距混夷北備玁狁 –급총주서汲冢周書 서문序文>에서 문왕文王은 도읍都邑을 정程 그리고 풍豐으로 옮겼으므로 그가 즉위卽位할 때에는 기산岐山 아래 주원周原에서 살았다. 기산岐山을 가운데로 서쪽에 혼이混夷가 북부에 험윤玁狁이 있으니 여기가 경수涇水와 낙수洛水 사이이다.
태원太原은 주周 목왕穆王 때 처음 등장한다. 주周 여왕厲王이 체疐로 도망한 것이나 주왕실周王室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으며 어떠한 조치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주周 땅으로 달아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태원太原과 함께 늘 나타나면서 주周를 괴롭힌 세력이 <융戎*강융姜戎*험윤玁狁>인데 주周의 서편에 있었던 대표적인 집단이 융戎*강융姜戎이었다. 이들이 아무런 까닭 없이 물러나 주周 목왕穆王 때 무려 2000리나 떨어진 지금의 태원太原으로 옮겼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끈질기게 공격을 일삼던 험윤도 그곳에 있을 수가 없다. 선왕宣王 40년에 태원太原의 인구조사를 하는데 도읍都邑인 호鎬에서 천오백여리나 떨어진 지금의 태원太原에서 인구조사를 했겠는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그러므로 태원太原은 반드시 기岐 부근이나 호鎬 근처에 있어야 한다. 즉 주周의 근방이며 <융戎*강융姜戎*험윤玁狁>이 나타나는 인근隣近에 자리 잡아야 한다.
따라서 의 험윤玁狁도 태원太原과 같은 지역에 있어야 하므로 적어도 기읍岐邑에서 경수涇水와 낙수洛水의 상류上流 어디엔가 있어야 하며 바로 이곳에 험윤玁狁이 있었다. 그래서 선왕宣王 33년 <太原之戎不克>의 주注에 <爾計周人之禦玁狁必在涇原之門>이라 하여 [경원涇原=경량涇涼=경수涇水 상류上流=원주原州=태원太原=태원융太原戎=험윤玁狁]임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모전毛傳]에서도 주周 문왕文王 당시 강역疆域을 <南仲文王之屬 朔方玁狁之國>이라는 같은 입장을 보여주는데 기읍岐邑 북쪽을 경계로 하여 동방족의 터인 삭방朔方으로 보아 그곳에 험윤玁狁이 있음을 알려주며 바로 경수涇水와 낙수洛水지역이고 태원太原이 있는 곳이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우禹>가 기冀를 가운데로 한 <서쪽에서 동편으로>의 움직임은 <태원太原에서 장수漳水>로 밝혀지는데 이로 보아 태원太原은 분명히 장수漳水에서 서쪽으로 있었다.
선왕宣王 33년 <王師伐太原之戎不克>의 주注에서도 <安定郡 在原州 郡縣志 原州平涼縣本漢涇涼縣也 然則太原當卽今之平涼而後魏立爲原州亦 是取古太原地名>이라 밝혀 경수원涇水原 부근의 평량平涼이 고태원古太原임을 알려준다. 이래야만이 선왕宣王 40년 동방계에게 포逋와 분습(汾濕 -강絳의 바로 위쪽과 임분臨汾 사이이다)꺄지 밀리고 있었음에도 <태원의 인구조사를 하다. 料民于太原>라고 할 수 있으며 [우공禹貢]의 기록과도 들어맞게 된다. 이로서 <우禹>가 힘의 우위優位에 올라선 서부 변경지역은 거의 밝혀졌다. 그는 여기에서부터 동쪽으로 움직이는데 악양岳陽은 같은 지역에 있으나 언급한 순서로 보아 태원太原이 더 서쪽에 있었다.
[집전集傳]에서 <악은 태악이다. 주례 직방에 기주는 산진山鎭이 곽산이다. 지리지에 곽태산은 곧 태악이니 하동군 체현의 동쪽에 있다. 산의 남쪽을 양이라 하니 곧 지금 악양현 지역이다. 제요가 도읍한 곳이다. 양자운의 기주잠에 악양이 도읍이다 하였으니 이것이다. 분수는 태원에서 나와 태악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황하에 들어가니 이는 분수를 인도한 것이다.
岳 太岳也 周職方 冀州其山鎭曰霍山 志志爲霍太山卽太岳在河東郡疐縣東 今晉州霍邑也 山南曰陽卽今岳陽縣地也 堯之所都 揚子雲冀州箴曰 岳陽是都 是也 蓋汾水出於太原 經於太岳 東入于河 此則導汾水也>라 하였다.
그러나 [우순虞舜] 때 하우夏禹가 영수潁水 양적陽翟 즉 하읍夏邑에 근거지를 마련했던 점을 놓쳐서는 결코 [집전集傳]의 해석을 제대로 밝혀낼 수 없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한자漢字로 표현된 [작雀 quë 鵲 què*적翟 dí 狄 dí*곽霍 huò]은 모두 우리말소리글자를 달리 표기表記한 것임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집전集傳]의 해석대로 우禹의 주요 근거지인 <양적陽翟>이 곽산(霍山 -곽태산霍太山이며 태악太岳)일까? [산해경山海經 해내동경海內東經] 말미末尾에는 강물의 흐름에 따라 그 위치를 순차적順次的으로 기록했는데 [平陽 즉 임분臨汾의 남쪽을 흐르는 온수溫水 - 소실산少室山에서 나와 회수淮水 서쪽으로 들어가는 영수潁水 - 그 다음에 위수渭水로 들어가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를 같이 말한다. 즉 서부지역을 흐르는 강물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영수潁水]가 위수渭水와 경수涇水가 있는 지대地帶에 나란히 등장하고 있음을 밝혀준다. 곽산霍山과는 너무나 먼 거리이다. 이를 바탕으로 소리 값으로는 [여씨 마을의 남쪽이라는 악양岳陽 yuè]의 지명을 찾아보기로 한다.
❶ 뚜렷하게 나타나는 기록들이 거의 없어 예로부터의 지명地名이나 영역領域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주周 시대의 한족漢族 활동을 견주어 볼 수밖에 없는데
❷ [시경詩經]의 당唐은 [시당풍보詩唐風譜]에서 <요堯가 처음 도읍한 곳이며 태원太原 혹은 진양晉陽이다>라 하였다(晉陽本唐國 (毛詩譜曰 堯始都於此後遷河東平陽) 有龍刪晉水所出 -군국지君國志). 즉 [집전集傳]에서 <요堯가 도읍한 곳이며 지금의 악양현岳陽縣이다>라는 기록과 대조對照해 볼 때 [악양岳陽=진양晉陽]이라는 연결이 가능해진다(요堯를 도당씨陶唐氏라 부르는 까닭은 그가 도陶와 당唐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경詩經]이 [군국지君國志]의 입장과 같이 뚜렷하게 <당唐 즉 진양晉陽이 태원太原이며 경수원涇水原 부근이다>라고 했음에도 [집전集傳]은 <분수汾水는 태원太原에서 나와 태악太岳을 경유하여...>라 하여 어떻게든지 지금의 태원太原과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요堯와 관련이 있는 [당唐]의 위치를 그만큼 북방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태원太原과 태악太岳 즉 악양岳陽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진양晉陽에 근거하여 진晉이 된 게 아니라 진晉이 악양岳陽에서 고을 나라를 만들면서 악양岳陽이 진양晉陽으로 달라진 것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진晉은 나라를 만들 초기에 지금의 태원太原까지 올라온 적도 없다.
[십통분류총찬十通分類總篡]에 <唐 今定州唐縣 猶有唐城存焉 或云唐城在絳州翼城西二里及徙晋陽則以晋陽位唐 今平定軍(郡)有古晋陽城 是其地及天子都平陽 則又以平陽唐平陽 今晋州> <所都爲平陽 成王封母弟叔虞於此初渭之唐 其子燮立始改晉以晋水出焉 其地正名翼亦名絳 而平陽者是其總名>으로 보아 결국 [당唐=진양晉陽=평양平陽=임분臨汾=기冀(본문本文은 익翼으로 착각했다)=강絳=진수晋水가 나오는 곳]이라고 밝혀준다.
더욱이 [사기史記 진세가晋世家]에 <於是遂封叔虞於唐 唐在河汾之東方百里 故曰唐叔虞>하여 [당唐]이 하수河水와 분수汾水가 만나는 곳으로서 여기에 <기冀>가 있다. 주注에서도 <括地志云 故鄂城在慈州昌寧縣東二里 按與 絳州夏縣相近禹都安邑 古云大夏也>라고 기록하여 지금의 태원太原이 아닌 하동河東 지역에 [당唐]이 있음을 알려준다. <기冀> 부근이다. 이를 지리적으로 배열配列하면 [지금의 태원太原 – 그 아래로 여씨들의 고장인 요遼와 여黎 - 남쪽으로 소여기昭余祁 - 곽산霍山 - 그 아래로 주周 목왕穆王 때 조보趙父에게 주었으나 그 후 동방계에게 다시 뺏긴 조성趙城 – 남쪽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헌공獻公이 제압하여 조숙趙夙에게 준 경耿 ]이 우禹에 이르기까지 동방계의 안마당이었고 [분수汾水 하류下流가 하수河水와 만나는 지점의 기冀와 당唐과 강絳 그리고 악양(岳陽 -진양晉陽*평양平陽) – 그 서남쪽으로 고태원古太原]이 우禹가 이 무렵 손을 댄 지역이 된다. [집전集傳]에서 집요하게 분수汾水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밝혀진다. 어떻게든 악양岳陽을 남부의 진양晉陽이 아닌 북방의 곽산霍山까지 확장하려는 가여운 욕망이다. 단씨들이 사는 <회>까지 공적功績이 미치어 <형장>에 이르렀다. 覃懷底績 至于衡漳...<우공禹貢>
① [담覃 tán]은 여러 기록에서 <담이儋耳*膽耳*淡夷*담郯>로 나타나는 <단檀 세력>이다.
이 부분은 <우禹>의 발걸음에 대한 동쪽 한계를 규정짓는 대목으로 특별히 중요하다. 하나 하나 살펴보자. 먼저 [회懷]를 보면 [산해경山海經 해내동경海內東經] 말미末尾에서 강물의 위치를 이야기하는데 <낙수洛水와 분수汾水 다음으로 심수沁水가 정경산의 동쪽에서 나와 동남으로 흘러 회의 동남쪽에서 황하黃河에 들어간다. 沁水出井陘山東 東南注河 入懷東南>이라고 하였다. [회懷]가 지명地名이며 심수沁水 하류下流의 황하黃河로 들어가는 부근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형장衡漳]은 [상서정의尙書正義]에 대한 주석註釋에서 <형은 곧 옛날의 횡이란 글자이다. 장수가 동서로 가로지르며 흘러 황하에 들어감을 말한 것이다. 衡卽古橫字漳水橫流入河>라 하였다. [형衡]이 지명地名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울대*소뿔의 가름대 형衡]을 구태여 골라서 쓴 까닭이 밝혀진다. 따라서 <우禹>의 움직임은 서편으로 장수漳水에서 끝났으며 그 지점은 장수漳水가 회懷에 가까운 장수漳水 아래쪽의 하내군河內郡 회현懷縣 지역이다. 그래서 [회懷와 형장衡漳]을 나란히 기록한 것이다. 신농神農과 전욱顓頊의 밝은 터전으로 생각되어졌던(有白壤) 그 터 가운데(厥土) 그 아비들의 터는(厥賦) 높게 헤아려(惟上) 크게 우러르면서(上錯 즉 건드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음에 담은(惟中) 터를 중심中心으로 하여(中) 그러는 동안에(旣) 그를 따른 곳은(從) 언제나 변함없이 지키니(恒衛) 큼지막한 (우禹의) 터전이 이윽고 일어섰다. 厥土 惟白壤 厥賦 惟上 上錯 厥田 惟中 中 恒衛旣從 大陸旣作...<우공禹貢>
① [토土 tŭ]는 소리 값으로 우리말 <터*터전>이다.
② [양壤 răng]은 <양羊 yáng*陽 yáng>과 소리가 닮았다.
③ [부賦 fù]는 우리말소리로 <아비 계열인 부父 fù>와 같다.
④ [착錯 cuò]은 소리글자로서 <커*큰>으로 본다.
이 부분은 공자孔子가 우禹를 성인聖人으로 만들려고 치수治水를 높이 띄우기 위해 원문原文의 뜻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러므로 <토질土質이 하얗고 고운 흙이라느니*밭에 따라 내는 공물貢物이 최고이며 중질中質로 섞어서 내기도 한다느니*우禹의 치수治水로 말미암아 멀어도 한참 먼 상산常山의 항수恒水에서 황하黃河 부근의 위수衛水까지 모든 강물이 하나의 물길을 따르게 되어 온 대륙이 이미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정말로 허무맹랑한 과장誇張을 서슴지 않는다.
그 시절에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현대적 기술력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도 중국中國의 물길은 다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백양白壤]은 우禹가 자신의 자리를 굳히려고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주珠 고양高陽과 (珠高陽鼎 서청고감 권3-68*군고록 권1-2-49*금문총집 권1-240) 양羊을 부호符號로 삼은 신농神農 계열>의 터전들이다. 따라서 [부賦는 부父]로도 읽혀져 신농계神農系나 전욱顓頊의 상징부호象徵符號인 <부父*부알父珠●>이다. (그러자) 조이鳥夷 세력이 발걸음을 하였다. 島夷皮服 협우갈석입우하...<우공禹貢> [사기史記]를 보면 기주冀州에 조이鳥夷가 있는 걸로 기록했다. 상고금문上古金文을 통한 계보系譜를 보면 요堯와 우禹의 아비인 제곡帝嚳은 소호少皥의 맏이인 교극蟜極의 아들이다. 그가 족표族表를 소호少皥의 조왕鳥王에서 발전시킨 <수리 새인 응왕鷹王>으로 썼으며 자식의 상징을 모두 <새>로 부호화符號化한 까닭이 밝혀진다(새매 지摯*부엉이 요堯*참새 후직后稷*새그물 필畢로 해석한 우禹). 그러므로 [사기史記]의 기록이 더 설득력이 있는데 우禹가 기주冀州 일대一帶를 개척하면서 일정한 위상位相을 세우자 부근에서 동쪽에 걸쳐 세력을 이루고 있던 조이鳥夷가 방문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때는 아직 그가 본색本色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우禹가 손을 댄 지역을 흐르고 있는 장수漳水가) 갈석산碣石山의 오른쪽을 끼고 돌아 황하에 들어간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제수와 하수가 흐르는 곳에 연주가 있고 구하가 이윽고 (황하를 이어서) 물길을 순조롭게 받아 흐른다(旣道). 뇌택雷澤은 원래부터 큰 연못이며 옹수와 저수는 모여서 하나가 된다고 하였다.
夾右碣石 入于河 濟河 惟兗州 九河旣道 雷夏旣澤 灉沮會同...<우공禹貢>
그런데 이 기록부터 갑자기 잘 이어지던 글의 내용이 달라진다. 마치 문맥文脈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조이鳥夷의 방문에 있었다. [鳥夷皮服]이 이 모든 상황을 리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이렇다. 우禹는 기주冀州의 동쪽 경계의 개척을 회懷와 형장衡漳에서 마쳤다. 그 다음 우禹는 바로 조이鳥夷 세력과 상견례相見禮를 하고 있는데 형장衡漳 바깥쪽의 동방은 그들의 활동 영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禹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었으며 이를 [鳥夷皮服 -이런 형태의 기록들은 肅愼來朝 *韓侯來朝 등과 같은 표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의 결과로서 기록한 듯하다. 그래서 기록 내용이 앞 부분과 약간의 단절성斷切性을 보여주는 것이다.
[집전集傳]의 말도 되지 않는 억지 해석은 갈석산碣石山이 우禹의 무렵에도 여전히 난하灤河 부근의 바닷가에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북방의 공물貢物을 북해北海 ⇨ 황하黃河로 운반할 때*사방의 공물이 모조리 기주冀州로 오는데 우禹의 북쪽 경계는 발해渤海의 요동군遼東郡에 이르므로*전국책戰國策의 상산군常山郡 구문현九門縣에 갈석碣石이 있다는 기록은 다만 이름이 우연히 같을 뿐이다>라는 헛기침만 나오는 코메디이다.
결국 조이鳥夷의 어른이 설명한 내용은 <그 무렵 하수河水가 끝나는 곳이 우禹가 처음 본 장수漳水와 만나는 지점이며 그 앞쪽은 역하易河*구하九河가 된다는 귀띔이다(역사적 기록 분석으로 볼 때 황하黃河는 물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아울러 하수河水와 구하九河가 만나는 데에서 물길이 갈석산碣石山의 오른쪽을 끼고 흐른다는 덧붙임 말이다. 이러한 조이鳥夷의 증언證言으로 <상산 구문현에 갈석이 있다>는 [전국책戰國策]의 기록이 정확성을 찾는다. 이는 다른 문헌文獻에서도(史記) <태행산과 항산 줄기가 이르는 갈석산 어림(하수河水와 제수濟水가 나누어지는 지점이다)에서 하수에 들어간다...太行恒山至于碣石入于河>란 기록을 하여 다시 한번 손을 들어준다. 이런 까닭으로 곧바로 다음 구절句節에서 [제수濟水와 황하黃河]가 언급되는 것이다. 조이鳥夷의 어른은 지리적 순서에 따라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즉 제수濟水와 황하黃河가 나누어지는 그리고 황하가 끝나고 구하九河가 시작되는 지역에 후예后羿의 유궁국有窮國이 근거한 연주兗州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어서 분명하게 황하黃河가 끝나고 구하九河가 이 물길을 순조롭게 받아 흐른다고 이야기해주는데 참으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고 간결한 설명이다. 이 지역에 <뇌택雷澤*옹수灉水*저수沮水> 등이 있다고 일러주는데 <옹수灉水>는 산동성山東省에서 발원發源해 저수沮水와 합쳐 황하黃河에 들어간다. 모두 하수河水와 제수濟水 수계水系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벌써부터 누에를 치기 위해 뽕나무밭을 만들었는데 그 때문에 이곳의 씨(是 shì)들은 언덕에서 내려와 집터를 만들었다. 그 터전은 우뚝 솟은 어르신의 근거지이니 그 세력은(厥草) 무성하고(惟繇)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는다. 桑土旣蠶 是降丘宅土 厥土黑墳 厥草惟繇 厥木惟條...<우공禹貢>
① [토土 tŭ]는 모두 우리말 소리글자인 <터>로 본다.
② [흑黑 hēi]은 <검다는 거무*까마인 가마>로서 우리말로는 <어르신인 검*감>을 뜻하는 모범적인 동방계 소리글자를 표기表記한 것이다. 한자漢字의 소리 값도 <해님인 해>인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③ 필자筆者가 [풀 초草]를 어떤 세력으로 볼수도 있다고 여긴 까닭은 우리말소리인 <불-부리>를 흔히 <풀 훼卉*부리 훼喙*풀 초草*풀을 해解*불 화火>로 표기表記하기 때문이다.
연주兗州 지역은 소호少皥 무렵부터 비단의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때문에 마땅히 언덕과 산등성이에 뽕나무가 많았을 것이다. 이때의 누에치기는 야잠野蠶이라하여 언덕이나 산에서 자라는 산뽕나무를 넓게 번식繁殖시켜 이를 이용해 누에를 산에 풀어서 길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언덕에서 살던 오랜 관습을 버리고 들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특별하게 주목할 것은 동방계에서 인식한 [연주兗州]의 위상位相을 조이鳥夷 세력들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우禹에게 충고忠告해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여기에서도 재를 뿌렸다. 그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말 원문原文을 옮긴 [상서尙書]에서도 연주兗州에 근거한 동방 세력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아무튼 그런 배경에서 [黑墳]은 우뚝 솟은 어르신(검님*대감大監)을 그렇게 표기表記하였을 듯하다. [집전集傳]에서도 [분墳 fén]을 <땅 줄기가 우뚝 부풀어 솟아 오른 걸 말한다. 墳 土脈墳起也>라고 하였으며 소리도 <환한 사람이라는 훤>이다. 덧붙인다면 [厥草]를 [厥土]에 대응對應하는 설명구조로 볼 수도 있는데 지금도 <땅을 어버이의 품으로 풀을 일반 사람들이라는 민초民草로> 자주 인용되는 걸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그렇게 볼 때 <요繇 yáo는 여씨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밭들은 경작耕作을 꾀하려는 생각이 별로 없으므로(惟中下) 그 어르신도(厥賦) 이를 인정하여(貞) 그대의 생각(그 땅을 농경지農耕地로 만든다는)과 같아지려면(乃同) 13년 정도 걸려야 이루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특산물特産物은 옻칠한 명주실과 광주리에 담은 무늬있게 짠 옷감이다. 제수와 탑수에 배를 띄우면 하수에 이를 수 있다.
厥田惟中下 厥賦貞 作十有三載乃同 厥貢漆絲 厥篚織文 浮于濟漯達于河...<우공禹貢>
이 부분은 동방계의 생활방식(유목목축遊牧牧畜)과 한족漢族의 생존양식(영농경작營農耕作)과의 차별성에서 오는 토지土地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떠올리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연주兗州는 분명히 동방계의 관리 아래에 있었으므로 논과 밭이 아니라 초지草地로 탈바꿈되어 있을 터이니 조이鳥夷 세력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구文句에 거기에서 나는 것들이 [옻 즉 검은 칠을 한 명주실과 무늬있는 비단]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연주兗州에서 배를 띄우면 제수濟水와 탑수漯水를 거쳐 하수河水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바다에 임臨하면서 대산(岱山 –태산泰山)에 이르는 지역을 <청주>라 하는데 처음부터 <우이>가 다스렸다. 유수와 치수가 그 물길이다. 밝으신 어르신이(白墳) 그 터전에 있는데 바닷가는 갯벌이 넓다(廣斥). 텃밭은 그리 좋게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 어른은 버금가는 세력 가운데에서는 매우 뛰어나다. 특산물特産物로서...대산에 있는 <견이>의 명주실과 모시와 납과 소나무와 괴상한 돌 그리고 <래이>가 목축을 일으키면서 산뽕나무에서 나오는 비단실을 광주리에 담은 것들이다. 문수에 배를 띄우면 제수에 다다른다.
海岱惟靑州 嵎夷旣略 濰淄其道 厥土白墳 海濱廣斥 厥田惟上下 厥賦中上 厥貢...岱畎絲枲鉛松怪石 萊夷作牧 厥篚檿絲 浮于汶達于濟...<우공禹貢>
①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갯벌을 동방에서는 척이라 하고 서방에서는 로라 한다. 東方謂之斥 西方謂之鹵>라 했다.
② [집전集傳]에 <소씨가 말하기를 오직 동래만이 이 생사가 있어 비단을 만들면 견고하고 질겨서 보통 것보다 달라 래인들은 산누에고치라 한다. 蘇氏曰 惟東萊爲有此絲 以之爲繒 其堅靭異常 萊人謂之山繭>라 기록했다.
이 부분부터의 설명구조는 [○州 - ○夷]라는 대응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따라서 공자孔子가 견강부회牽强附會한 <우禹가 ○夷를 경략經略하여 ○州를 만들었다>가 아니라 <○州로서 ○夷가 벌써부터 다스리고 있다>라고 해야 옳다. 물론 이 무렵에 벌써 <주州>가 만들어질 리는 없으니 ○○지역이라고 보는 게 더 알맞다. 우이嵎夷는 [산해경山海經]에 많이 등장하는 동방의 신인神人으로서 [우강禺彊 계열] 다시 말해 여씨 세력을 말한다. 이 지역은 또한 <밝은 어른>이라고 불리는 백이(白夷*伯夷) 계열의 영역이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박이猼訑 -南山經*백고柏高 -해내경海內經*백복伯服 -대황남경大荒南經>등으로 표현되었다. 바다에 임臨한 대산岱山과 회수淮水 지역에 [서주]가 있는데 <회이>가 원래부터 다스렸다. 몽산과 우산도 그 <~이>들이다. 너른 들에는 처음부터 온통 저씨들이었으므로 동쪽의 벌판을 모두 다스리기에 이르렀다. 海岱及淮惟徐州 淮沂其乂 蒙羽其藝 大野旣豬 東原底平 <우공宇貢>
① [기沂 yí]는 소리가 <이夷 yí>와 같다.
② [예藝 yì]는 소리가 <이夷 yí>와 같다.
③ [저豬 zhŭ]는 순 우리말로 <~저>이다.
기록의 설명구조에 맞추면 [淮沂其乂]는 원래 <회이가 처음부터 다스렸다. 淮夷旣乂>였을 것이다. [其乂]라고 해도 <그곳을 다스렸다>이니 마찬가지이다. 공자孔子는 이런 사실을 비틀고 싶었던 모양이다. <회수淮水와 기수沂水>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소리로 보아 몽산蒙山의 동방계는 <모씨>이고 우산羽山 yŭ의 동방족은 <여씨>이다. 이 지역을 전욱계顓頊系인 <여씨와 저씨>들이 오래 앞서부터 갈무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 실마리는 맏이인 성축成祝 즉 축융祝融이 아비의 말씀에 따라 이곳으로 내려온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터에는 우뚝 솟은 밝으신 어르신이 있었는데...厥土赤埴墳...<우공禹貢>
① [식埴 zhí]은 소리로 <어르신 ~지>이다.
이 지역은 [발發 계열]의 동방족들이 근거하였다. 대표적으로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해외남경海外南經]의 <환두씨驩頭氏>를 비롯하여 <환羊+患 -남차이경南次二經*지표지명指標地名인 발상산發爽山 -남차이경南次二經*발제산勃齊山 -동산경東山經*불강산不姜山과 불사국不死國 –대황남경大荒南經*불사민不死民 -해외남경海外南經>이 기록되었으며
[붉다 즉 밝다]라는 뜻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적赤*단丹 계系 물명物名>으로 표기表記된 [중토中土로 확장된 동방족의 핵심 거점據點인 아홉 개 언덕九丘 가운데 보이는 적망구赤望丘 –해내경海內經*지표지명指標地名으로서 赤의 다른 표현인 적산狄山 -해외남경海外南經*단양丹陽의 남쪽에 있는 단산丹山 -해외남경海外南經*단원산亶爰山 -남산경南山經*봉황鳳凰이 사는 단혈산丹穴山 -남차삼경南次三經]이 보인다. [사기史記]에서도 순舜 무렵 남쪽 방면에 있던 세력을 <북발北發>이라고 기록하였다.
회수淮水에서 바닷가에 걸치는 곳에 [양주]가 있는데 팽과 여에는 처음부터 저씨들이 근거하였으며 세발 까마귀가(陽鳥 -양오陽烏*금오金烏*삼족오三足烏) 사는 곳이다. 세 줄기 강물이 이윽고 바다에 흘러든다.
淮海惟揚州 彭蠡旣豬 陽鳥攸居 三江旣入...島夷卉服...<우공禹貢>
[양조陽鳥[는 동방계의 성수聖獸인 <세발 까마귀 三足烏>이다. 이를 상징으로 삼은 세력인 전욱계顓頊系 <저씨>들이 이곳에서 자리 잡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지역은 지금도 삼강구(三江口 -송강松江*루강婁江*동강東江)로 불리는데(당중초唐仲初 오도부吳都賦 주註) 지형地形이 이렇게도 변화가 없는데 어찌 우禹가 이 물길을 잡았단 말인가? 이 부분에서 필자筆者가 특별히 관심을 두는 부분은 [島夷卉服]이다. 앞서 중토中土의 북부에서 동방지역을 말할 때 [島夷皮服]이라 제시提示한 것처럼 남부에서 동방지역을 설명하면서 같은 구조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선 대목에서도 똑같이 [도이島夷]라 했는데 [사기史記]에서 이를 <조이鳥夷>라고 표현한 것도 일정하게 일치한다. 따라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설명구조를 유심히 살펴볼 까닭이 있다. 그런데 문장구조는 뒤바뀌었지만 이들이 내세운 나무는(惟木) [집전集傳]에서 <녹나무(장樟)와 비슷한 편楩*가래나무 재榟 zĭ*예장나무 예장목豫章木>라 해석한다. 바로 동방족의 신수神樹를 말하는 것인데 이걸로 솟대를 세우거나 중요한 상징물象徵物을 만든다는 사실을 한족漢族들은 특별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 가지 실례實例를 든다면 <가래나무는 우리말로 가라나무>이며 소리도 그 집단의 어른을 상징하는 <~지>이다.
공자孔子의 입장이나 [집전集傳]의 태도는 [島夷卉服]을 <바다 섬의 오랑캐들이 풀로 짠 옷을 입고 와서 배알拜謁하며 공물貢物을 바쳤다. 海島之夷以喙服來貢>라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우禹>가 만들었다는 [오복제도五服制度]의 실상實相이 스스로 이 같은 해석을 부정否定해주기 때문이다. [오복제도五服制度]는 앞서부터 은연중에 머릿속에 잠재해있던 [한족漢族-동방계]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생각이 우禹에 이르러 차츰 굳어지면서 뒷날의 정형화定型化된 제도를 빌어 가공加工한 것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복甸服>은 한족漢族의 뼈대가 되는 사람들이 지은 일년 농사의 수확 가운데 일부를 거두어 왕실王室에서 소비하는 땅으로서 나중의 왕기王畿라는 관념으로 발전한다.
<후복侯服>은 왕도王都를 중심으로 컨트럴이 가능한 주변 지역을 한족漢族의 줄기로서 기능機能한 왕족王族과 제후諸侯들에게 나누어 준 땅을 말하는데 뒷날의 봉토封土가 그것이다. <수복綬服>은 후복侯服 밖의 경계와의 완충지대緩衝地帶로서 잘만 다독거려주면 한족漢族의 잎새로서 따르도록 하는 게 충분히 가능한 사람들로 변경邊境 방비防備의 역할을 맡긴 지역이다. 하지만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은 통제하기 어렵거나 할 수도 없는 경계 밖의 회색지대灰色地帶로서 타협하여 더불어 사는 게 가능한 집단을 이夷와 채蔡로 전혀 설득조차 힘든 세력을 만蠻과 유流로 인식했는데 그 뒤에 학자들이 이를 다시 비틀어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은 죄인罪人들을 벌伐하는 지역으로 가벼운 죄인은 아夷*다음으로 무거운 죄인은 채蔡*중죄인은 만蠻*그보다 더 심한 죄인을 유流라 하였다>라고 확정시켰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분석으로 미루어 볼 때 [복服]에 대한 한인漢人들의 인식과 그 표현의도는 <어떤 지역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세력이나 집단>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념이 다시 [방方 ⇨ 방邦]으로 진화한다. 따라서 [鳥夷皮服*島夷卉服]의 <皮服과 卉服>은 위와 같은 인식의 연장선에서 검토되어야 하며 그럴 때 <복服은 어떤 지역을 이야기하는 방方>과 같고 <피皮는 피발被髮을 한 동방계>란 뜻이며 <훼卉는 불*부리라는 말을 쓰는 동방 세력>이라는 이야기이다. (훼卉가 「불」이란 소리에서 나온 「풀」이라는 뜻이며 이는 우리 기록에 적지 않게 나타나는 부리 훼喙와도 서로 통하는데 상商의 명신名臣 중훼仲虺의 훼虺도 한족漢族들이 비틀어 버린 원래의 글자인 훼喙로서 다 같은 연관성을 지닌다). 형산荊山과 형산衡山의 남방을 헤아리건대 [형주]라고 한다. 강수와 한수가(江漢) 처음부터 마루를 이루며(朝宗) 바다로 들어간다. 아홉 개의 강줄기가 크게 하나의 못을 이룬다. 타수와 잠수도 처음부터 그 물길을 따른다. 운의 터는(雲土) 모씨가 일어나 다스려졌다(夢作乂).
荊及衡陽惟荊州 江漢朝宗于海 九江孔殷 沱潛旣道 雲土夢作乂 <우공禹貢>
① [운雲 yún]은 우리 말소리로 <언니>이다.
② [몽夢 mèng]은 <모씨>를 뜻하는 몽蒙mëng과 소리가 같다.
[衡山 héng]은 두 말을 할 필요조차 없이 전욱顓頊 계열인 성축成祝의 성산聖山이다(그래서 우리말로 형님 산이다). 형산荊山은 다만 표기表記만 다를 뿐이다. [산해경山海經]에서 이 세력군의 발자취를 이야기해주는데 <중차팔경中次八經>의 형산荊山 동북쪽 교산驕山의 신인神人 타위○圍*<중차십경中次十經>의 형산衡山의 서편에 있는 의제산倚帝山의 나타나면 큰 전쟁이 일어나는 저여(狙如 -모범적인 전욱계顓頊系 어군語群이다)라는 신수神獸가 보인다.
[九江孔殷]은 아마도 아홉 갈래의 강물이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드는 걸 이야기 한 듯하다(큰 구멍을 이룬다 孔殷). [산해경山海經 중차십이경中次十二經] 동정산洞庭山에도 구강九江이 이야기되고 있다. [운雲과 몽夢]은 <운몽택雲夢澤 -荊州其澤藪曰雲夢 周官職方>으로 알려진 나중에 초楚가 이를 바탕으로 삼아 강국强國으로 일어나게 된 빌미를 준 매우 풍성産物이 풍성하고 눌러 살기에 좋은 지역이다. 이곳을 한수漢水와 강수江水 수계水系를 따라 내려온 동방계 <모씨牟氏>들이 개척함으로서 이름이 [운몽택運夢澤 –모씨 언니 세력들의 터]로 알려지게 되었음을 밝혀준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산해경山海經]에 나타난다.
❶ <해내남경海內南經> 파사 서북쪽 높은 산 남쪽에 근거한 모마(旄馬 其狀如馬 四節有毛 在巴蛇西北 高山南)와 <중차육경中次六經> 모씨들의 성수聖樹로서 특별히 언급된 몽목蒙木
❷ 지표지명指標地名으로서 <중차사경中次四經>의 서편 지역에 있는 모산牡山*<남차사경南次四經>의 모산지수旄山之首의 끄트머리인 모산지미旄山之尾(근처에 전욱계顓頊系 신조神鳥인 발이 셋이며 사람 얼굴을 한 구여瞿如가 있다) 그리고 규산邽山에서 나오는 몽수濛水
❸ <해내서경海內西經> 말미末尾의 강물에 대한 흐름을 기록한 부분에서 <몽수가 한양의 서쪽에서 나와 섭양의 서편으로 장강에 들어간다. 濛水出漢陽西 入江聶陽西>고 했는데 한수漢水의 다음으로 설명되었다.
❹ <해외동경海外東經> 모민국毛民國*<해내경海內經>의 묘민국苗民國*<해내서경海內西經> 羽民*<해외남경海外南經> 우민국羽民國*<대황남경大荒南經> 우민국羽民國*<동차사경東次四經>의 모산旄山
위의 기록들을 [산과 강*신수神獸와 성목聖木*고을나라]로 나누어 지명고地名考를 통해 그 흐름을 살펴보면 <모씨 세력>의 이동을 짐작해 낼 수 있다. 즉 [중토中土 서북면 ⇨ 남진南進하여 낙수(洛水 -낙하洛河)와 위수渭水를 건너 ⇨ 한수漢水 수계水系에 이르러 ⇨ 동남진東南進하여 운몽택雲夢澤에 머물다가 ⇨ 다시 동진東進하여 중토中土 동부에 이르러 ⇨ 남방으로 확장] 하는 그림이 완성된다. 이를 다시 확인해주는 문헌文獻 기록으로서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순舜 때의 유묘씨有苗氏*상商 무렵의 형荊*더벅머리 오랑캐 무髳> [급총주서汲冢周書 왕회해王會解]의 <정북正北 모호貌胡> 등이 눈에 뜨인다. 그 특산물로서...돌살촉과 그걸 연마하는 거친 숫돌과 고운 숫돌...厥貢...礪砥砮...유균로호 삼방저공궐명...<우공禹貢>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는 숙신肅愼의 대표적인 특산물特産物이라고 할만큼 위력적이고 정교한 무기武器였다. 화살촉으로 쓰였던 돌은 아무데에서나 흔히 나지 않는 흑요석(黑曜石 -화산火山으로 흘러내린 용암鎔巖이 굳어 유리처럼 단단해진 돌)을 갈아서 썼는데 매우 단단하여 좋고 견고堅固한 숫돌과 깨어 쪼개고 날카롭게 갈아대는 훌륭한 솜씨는 물론 무척 공을 들여야 만하였다. 이것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여 한족漢族에게는 오래도록 놀랍고도 신기하며 두려운 물건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아주 귀중하게 여겨(...종궁자숙신씨공호시석노지류야...-설문해자 주 인자) 순舜 무렵의 기록에도 숙신肅愼이 방문할 때 기념으로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보낸 걸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남들이 흉내 낼 수도 없는 손기술을 가진 동방세력이 형주荊州의 운몽택雲夢澤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대목인데(돌살촉과 그걸 다듬는 거칠거나 고운 숫돌 礪砥砮) 그들이 바로 <모씨>이다. 이런 사실은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구文句에서 거듭 밝혀준다. 다름 아닌 <有箘簵楛 三邦底貢厥命>이다. [균箘 과 로簵]는 모두 화살대를 만드는 대나무로서 성능을 높이려면 특별한 대나무를 고르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즉 보통 화살이 아닌 호시楛矢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걸 알아보는 눈썰미를 가진 아주 특별한 집단이 형주荊州에 살았다는 말인데 물론 동방계이다. 그들은 모씨들 말고 또 누구였을까?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에 <형산과 나란히 균산이 보이며 南海之內 有衡山有菌山有桂山...> [대황남경大荒南經]에서도 <균인이라는 작은 사람들이 있다. 有小人名曰菌人>이 나온다.
여러분들은 전욱계顓頊系가 요堯 무렵 무너지면서 작은 세력으로 갈라진 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균인(菌人 jün –저는*전이란 호칭互稱을 쓰는 씨들) 혹은 정인靖人(대황동경大荒東經) 또는 초요국焦僥國 jiāo(저는*저희란 호칭互稱을 쓰는 씨들 –해외남경海外南經)과 원가袁珂가 지적한대로 작은 사람들인 주요국周饒國 zhōu*주유국侏儒國 zhū으로 표현되었다는 설명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세력의 일부가 형주荊州의 형산衡山에 가까운 균산菌山에 근거하였다. 이런 흐름에서 이중적인 의미인 균箘과 같이 붙어 있는 로簵 luò는 여씨들의 다른 표기表記인 여융驪戎과 통하는 전욱계顓頊系 어군語群인 여旅 lŭ(쌍목雙目인 구축瞿祝의 상징이며 태행산太行山 서쪽의 로潞 lù와 같은 계보系譜이다)이다. 이런 풀이가 설득력을 갖는 까닭은 이어지는 기록이 [세 고장에서 그걸 보낸다. 三邦底貢厥命]라고 했기 때문이다. [집전集傳]은 <그 세 고을이 자세하지 않다. 三邦未詳其地>라 했는데 그들이 알 턱이 있겠나. 바로 동방계의 세 씨인 모씨와 저씨와 루씨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뒤집어진(顚覆) 나무와 같을지라도 가지(由 –고문古文은 가지에 싹이 날 유甹로 되어있다)에 싹(얼糵 -얼로 보아도 좋다)은 트게 마련이니 아비나라에서 우리의 맥脈을 길게 잇도록(永我) 어른(玆)의 새 터를 말씀하셨다.
선왕先王이 맡으셨던 큰일을 다시 잇도록 하신 곳이니 온 누리를 편안하게 하는 터전(밑바탕 저底)이 될 것이다...이에 멀고 가까움을 떠나 융戎의(서쪽의 융적戎狄을 말하는 공자적孔子的인 표현이다) 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대대로 우리 얼들의 수고로움을 가려 뽑아서 나는 그 얼들이 착하고 정당하였음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어른인 나는 선왕先王들에게 크게 제사를 드릴 때 우리 얼들의 씨 아비도 함께 배향配享
하여...
우리 얼들 모두가 그것을 알리고 바로잡아 이제부터 뒷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얼들이 해야 할 일을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이에 맡은 자리를 가지런하게 하라.
..若顚木之有由糵 天其永我命于玆新邑 紹復先王之大業 底綏四方...乃不畏戎毒于遠邇...世選爾勞 予不掩爾善 玆予大享于先王 爾祖其從與享之...凡爾衆 其惟治告 自今至于後日 各恭爾事 齊乃位...<반경盤庚 상上>
① [자玆 zī]는 소리로서 <어른 ~지>이다.
② [저底 dĭ*dė]는 소리로서는 <터전>이다.
반경盤庚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소紹]는 <그 일을 잇다*그렇게 하도록 돕다 또는 두루 힘써주었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언질言質을 받고 행동하는 듯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부터 서부지역에 대한 정돈에 힘을 쏟는 태도를 보이는데 즉 동남방과 동북방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과정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