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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좌우합작회담 시작
← 서재필 귀국 환영식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왼쪽부터)
1946년 7월 25일 오후 2시 반 서울 덕수궁 석조전 2층 대형홀에서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과 국민당 당수 안재홍, 한민당 총무 원세훈 등 우익측의 유력인사 5명과 인민당 당수 여운형, 민족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 등 좌익 측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좌우합작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좌우합작은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대립이 심화되고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시작됐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자 우익은 민주의원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을 벌였고, 좌익은 민족주의민족전선을 만들어 찬탁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국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좌익과 우익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같은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여론 또한 그 같은 방향으로 형성됐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맞춰 활기를 띠는 듯 하던 좌우합작위원회는 1개월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면서 미국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침을 전환하자 큰 타격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마저 암살되자 12월 들어 위원회는 해체를 결의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민족의 단결을 통해 정치적 난관을 넘어서려 했다는 점에서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진행되어 온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파가 존재할 수 없는 첨예한 좌우대립 속에서 민족의 일부 단결에 그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74년] 우리나라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 사망
← 생전의 김환기 화백의 모습
우리나라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서양화가 김환기 선생이 1974년 7월 25일 뉴욕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달, 조선백자 등과 같은 민족적 소재를 이용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발표하다가, 1963년 도미(度美) 이후에는 화면에 무수한 점과 선을 배열하는 독특한 회화세계를 개척한 화가이다.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現 안좌도)에서 태어난 그는 1936년 일본 행 유학길에 올랐고 광복 후 국내 화단이 활기를 되찾자 1948년부터 ‘新사실파’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국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그의 작품은 도쿄시대와 서울시대, 파리시대, 뉴욕시대로 나누어 지는데 도쿄시대는 주로 습작 시기에 해당한다. ‘종달새 노래할 때’라는 작품이 그 대표작으로 자연을 서정적으로 표현, 이후의 김환기 작품과도 일맥상통한다. 파리시대(1956∼1959)의 김환기 작품에는 여전히 달과 구름, 산과 나무, 새와 항아리가 등장하지만 색채는 푸른색이 바탕을 이루고, 구도는 이전보다 더 단순화되었으며, 서정적 느낌이 많이 억제된 특징을 나타낸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간 그는 1970년대에 들어와 점묘 그림에 몰두했고 말년에 이르러는 동양적 수묵화에 가까운 추상화에 도달한다. 김환기가 평생을 동양적(한국적)인 서정을 표현해 온 화가라는 것을 볼 때, 말년의 점과 선으로 된 그림도 이전의 그의 작품과 동일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점묘 시리즈 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은 1970년 ‘제1회 한국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탔다. 이 작품은 김광섭의 詩를 읽고 그린 것으로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김환기의 변모된 작품세계에 대해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다.
[1917년] 마타 하리, 사형 선고
1917년 7월 25일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로 유명한 마타 하리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네덜란드의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캠벨 매클라우드 대위와 결혼했지만 곧 이혼하고, 1905년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으로 직업 무희 활동을 시작했다. 낮의 눈동자 곧 태양을 뜻하는 마타 하리라는 말레이어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파리 등 대도시에서 명성을 날렸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각국 고위급 인사들과 교류하다가 헤이그에서 독일 장교와 접촉한 사실이 알려져 이중첩자일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결국 첩보활동 혐의로 파리에서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1917년 10월 파리 근처 뱅센에서 총살당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 청일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1894. 6. 12)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1890년대 일본은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세력으로 받아들여, 청일전쟁 2주 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함으로써 침략전쟁을 승인했다. 한편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해 친일 정권을 내세운 일본은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평양전투에서 청군에 승리한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진저우 성[錦州城]과 뤼순[旅順]을 점령했다.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는 불평등 강화초안을 받아들여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맺었다.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했고,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가 열렸다.
[1844년]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이킨스 Thomas Eakins 출생
← The Gross Clinic
1844년 7월 25일 태어남 / 1916년 6월 25일 죽음
에이킨스는 19세기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일찍부터 수학·과학에 뛰어난 동시에 미술에 재능을 보여,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를 다니는 한편 제퍼슨의과대학의 해부학 강의를 들었다. 이 두 가지 성향의 결합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1866년부터 3년간 파리의 에콜데보자르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 회화에 영향받지 않고, 소묘를 강조하는 확고한 아카데미적 전통을 받아들였다. 특히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리베라 등 17세기의 거장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귀국 후 주로 가족과 친구들, 일상 생활의 모습 등을 그렸으며, 움직이는 인체와 동물의 정확한 형상 포착에 몰두했다. 1870년대말에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미술 및 미술교육에 대한 혁신적 태도로 인해 물의를 빚은 끝에 1886년 강제 해직당했다. 외과수술 장면을 그대로 묘사한 <그로스 클리닉 The Gross Clinic>(1875)에서 보여지듯 과학적 관찰에 근거한 그의 사실주의는 아름다운 풍경화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의 관중들에게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는 화가로서의 역량은 인정받으면서도 평생 국외자 취급을 당했고, 그림도 거의 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20세기초 미국 사실주의 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15년] 법학자 이항녕(李恒寧) 출생
1915. 7. 25 충남 아산~.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1970년 부산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49년 청룡국민학교·양산중학교 교장, 1949년 동아대학교 교수, 1954년 고려대학교 법대 교수, 1959년 법대 학장 등을 역임했고, 1960년부터 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1960년 5~8월에는 문교부 차관을 지냈으며, 1964년 고려대학교 교양학부장, 1966년 변호사 개업 및 〈경향신문〉 논설위원, 1972~80년 홍익대학교 총장, 1973년부터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이사장, 1975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 1980년 다시 변호사를 개업했고, 같은 해부터 홍익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법철학개론〉·〈민법학개론〉·〈법철학적 인간학〉 등의 법률 관계 저술과, 소설 〈교육가족〉·〈청산곡〉·〈사직이유서〉, 수필집 〈객설록 客說錄〉·〈낙엽의 자화상〉·〈깨어진 그릇〉 등이 있다.
적극적인 친일행위는 하지 않았으나, 일제 말에 고등문관 시험을 통해 고등관(하동,창녕군수)으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경력에 대해 반성하거나 글을 여러 차례 남겻다.
[1903] 한글학자 정태진(丁泰鎭) 출생
1903. 7. 25 경기 파주~1952. 11. 2.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석인(石人). 아버지는 규원(圭元)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그해 4월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27년 5월 미국으로 유학하여 우스터대학교 철학과,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9월 귀국하여 다시 영생고등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 〈큰사전〉 편찬전임위원으로 일하다가 1942년 9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해방 후 〈큰사전〉 편찬에 종사하면서 연희대학교·중앙대학교·동국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국어학 강의를 담당하며 후진 양성에 노력했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했다. 〈큰사전〉 속간사업에 힘쓰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저서로는 〈조선고어방언사전〉·〈고어독본〉·〈국어학개론〉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0년] 프랑스 콩코드기 추락, 승객 등 112명 사망
세계최초로 초음속 항공여행의 장을 열었던 콩코드기가 2000년 7월 25일 이륙직후 추락, 승객 승무원 109명과 추락현장에 있던 주민 3명 등 112명이 사망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콩코드기가 여객수송 중 추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날 오후 4시45분쯤 파리발 뉴욕행 에어프랑스가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 이륙 2분만에 왼쪽날개에 불이 붙은 뒤 화염에 휩싸였으며, 공항 부근 호텔로 추락했다고 전했다.
민간여객기 사상최초로 음속의 벽을 뚫었던 콩코드기가 첫 선을 보인 것은 1969년이었다. 속도 마하2(시속 1370마일)에, 난기류보다 높은 고도 6만피트 상공을 비행, 빠르면서도 쾌적한 여행을 제공해 왔다. 콩코드기는 상업용 여객기로서는 세계신기록을 두번 경신했다. 1992년 지구를 32시간 49분 만에 일주했고, 3년 뒤엔 그 기록을 31시간 27분으로 줄였다. 운항을 시작한지 31년이 지났음에도 1979년 착륙때 조종실수로 타이어가 펑크난 것이 유일한 사고였다.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46년간 적대관계 청산을 선언하는 공동선언에 서명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1994년 7월 25일 워싱턴에서 양국 정상간 사상 첫 공식회담을 갖고 지난 46년간 지속된 해묵은 적대관계의 청산을 선언하는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함께 서명한 공동선언은 수 세대 동안의 반목 투쟁을 뒤로 하고 후세인 국왕과 라빈 총리는 "두 국가 사이의 전투상태를 끝낼 것을 전 세계에 엄숙히 선언한다"면서 양국간은 물론 역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아울러 천명했다.
양국 정상은 선언문에서 이 문서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평화협상을 위한 결의에서 벗어난 여하한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과 아랍국가 및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의 공정하고 지속적이며 폭넓은 평화를 위해 매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두 사람을 선견지명을 가진 정치인들이라고 치켜세우며 정상회담 성사에 기쁨과 만족을 표시했다.
[1978년] 시험관 아기 탄생
1978년 7월 25일, 영국 올드햄 병원에서 2.6kg의 건강한 여아가 태어났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지와 이브닝 뉴스지는 1면에 각각 ‘IT’S A GIRL(그것은 여자다)’ ‘SUPER BEBE’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달아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신의 고유영역으로 여겨온 ‘인간 탄생’의 일부 비밀을 인간이 훔쳐봤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체외수정아(시험관 아기)가 탄생한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루이스 브라운.
1년 전, 나팔관이 막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아기 엄마 레슬리 브라운이 상담차 찾은 사람은 올드햄 병원 산부인과 의사 패트릭 스텝토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리학자 로버트 에드워즈였다. 두 사람은 12년 동안 시험관 아기 실험에 매달려 최소한 100번 이상의 실패를 맛봤지만 이 분야에서만은 베테랑이었다. 연구팀이 레슬리의 난자와 남편 존 브라운의 정자를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수정란을 48시간 후 레슬리 자궁에 착상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루이스는 예정보다 3주 빨리 제왕절개수술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인륜을 거스른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바티칸은 ‘자연의 섭리에 반한 근원적 악’이라며 강력한 어조로 비판했다. 일부 과학자들도 위험성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실험을 멈춰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시험관 아기’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1985년 10월 12일 서울대병원 장윤석 교수팀에 의해 이뤄진 쌍둥이가 첫 시험관 아기였다.
[1970년] 남산 어린이회관 개관
1969년 4월 14일 당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육영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해 4월 24일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0년 7월 25일 재단의 설립정신에 의거, 서울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건립·개관함과 동시에 《어깨동무》를 인수하여 발간하였다. 1975년 10월, 보다 넓고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남산의 회관 건물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이양하고, 서울 광진구 능동의 3만여 평(10만 3267㎡)의 대지 위에 연건평 5,200평(1만 7176㎡)의 새 회관을 지어 이전하였다.
[1969년] ‘닉슨독트린’ 발표
←닉슨(1970)
아시아-유럽 7개국 순방을 위해 괌에 도착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전 이후의 아시아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1969년 7월 25일 발표했다.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맡아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독트린’을 발표한 것이다.
닉슨이 이날 발표한 ‘아시아 외교 기본전략’은 ‘▲조약상의 책무을 지키고 ▲동맹국의 자유 또는 미국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면 핵우산을 제공하며 ▲기타의 침략에는 각국의 자유노력에 의거한다’ 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닉슨의 이날 발표는 베트남전에서 입은 심각한 피해를 반영한 것으로 아시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닉슨은 1970년 2월18일 ‘197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나타내는 외교특별교서를 발표함으로써 닉슨독트린을 확정했다. 닉슨독트린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주국방` 의지를 다지게 하여 국군현대화계획(율곡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1957년] 튀니지, 공화제 선언, 초대 대통령에 부르기바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이탈리아와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그들 양국군이 패퇴한 1943년 5월까지 전쟁터가 되었다. 튀니지인의 민족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청년 튀니지’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한 저항이 계속되다가 1944년 이후에는 더욱 격화하여 마침내는 독립투쟁이 전국적인 반(反)프랑스 테러로 발전하였다.
1954년 7월 프랑스 총리 망데스프랑스의 용단으로 튀니지의 자치정부 수립이 약속되고, 1956년 3월 20일 독립하였다. 총선거를 거쳐, 1957년 하비브 부르기바가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이 됨으로써 계속되어온 입헌군주제는 폐지되었으며, 1975년부터는 부르기바가 종신대통령에 피선되었으나 1987년 11월 총리 Z.E.A.벤 알리가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여 부르기바를 해임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6년]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호 침몰
1956년 7월 25일 스웨덴의 대양 정기선 스톡홀름호가 난터키트 앞바다 안개속을 항해하던 중 이탈리아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호와 충돌했다. 충돌당한 2천9백만 달러의 이탈리아 호화선 도리아호는 충돌 12시간 후 수심 2백25피트의 대서양에 침몰했다. 침몰하기 전 부근을 항해중이던 다른 선박들에 의해 1천6백35명의 승객 및 승무원들이 구조되어 인명피해는 줄일 수 있었다. 충돌 당시 안드레아 도리아호의 선객들은 선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파티를 열고 있었다. 도리아호는 26일 뉴욕에 입항할 예정이었다. 스톡홀름호는 선수가 찌그러진 채로 해안경비정의 인도를 받아서 항구로 이동했다. 조사 관계자들은 사고가 난 두 선박 모두 레이다를 장착하고 있었음에도 52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은 사고원인에 대해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1943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실각
1939년 5월 독일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나치스 독일 ·일본과 함께 국제파시즘 진영을 구성하였다. 1940년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나 각지의 전투에서 패전하고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상륙과 함께 실각하여 체포, 감금되었다. 그 해 9월 독일군에 의하여 구출되어 북부 이탈리아에 나치스 괴뢰정권을 조직하였으나,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의 반(反)파쇼 의용군에게 코모 호반에서 체포되어, 28일 정부(情婦)와 함께 사살되었다.
[1909년] 프랑스 항공기 기술자 루이 블레리오, 자신이 만든 ‘블레리오11’로 도버 해협 횡단 성공
1909년 8월 랭스에서 세계 최초의 항공집회가 개최되었다. 그당시 유럽의 항공기술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2가지 기본형태의 고성능 비행기가 등장했다. 하나는 회전식 기관과 대형 보조날개를 갖춘 복엽기였고 다른 하나는 라이트식 단엽기였다. 1909년 7월 25일 L. 블레리오(Bleriot, Louis)는 소형의 블레리오 2호로 영국해협 횡단비행경기에서 우승했다. 칼레 부근에서 도버까지의 이 역사적 비행은 사람들에게 비행기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의 강력한 신형 항공기의 급속한 개발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67년]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을 런던서 완성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1814년] 영국의 스티븐슨, 증기기관차 시운전 성공
영국의 증기기관차 발명가 스티븐슨(Stephenson, George)은 탄광기관부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아버지의 조수가 되고, 이어 기관부 ·기관공이 되어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에 통달하였다. 그 후 킬링워스탄광에서 탄광주를 설득,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1814년 7월 탄광에서 시운전에 성공하였다.
1823년 뉴캐슬에 세계 최초의 기관차 공장을 설립하고, 1824년 스톡턴∼달링턴 간의 세계 최초의 여객용 철도가 부설되어, 1825년 그의 공장에서 제작한 개량형 기관차 로커모션호(號)를 달리게 함으로써 철도수송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1824년부터 리버풀~맨체스터 간의 철도를 부설하고, 1829년 그의 로켓호를 달리게 하여, 1830년에 정식 개통시켰다.
그밖에
2004 재미동포 16세 김시환 US주니어골프 우승, 타이거 우즈 이어 두 번째 최연소 정상
2004 ‘스타우트 인펀트 피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물고기로 호주박물관에 기록
2004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 발사지구서 ‘탄처(探測) 2호’ 발사
2001 수영강국 미국ㆍ호주 일본 후쿠오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서 실격 망신살
2001 프랑스 소장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국내 고문서와 맞교환하기로 합의
2000 야구선수 김기태, 국내최초로 6타수 6안타 기록
1992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개막
1984 패킷교환 공중데이터 통신망 개통
1984 미국-중국, 항공우주기술협정 체결
1983 시베리아 가스관 완공
1983 미국, 레이저무기 미사일격추실험 처음으로 성공
1983 스리랑카 인종폭동
1983 고리원자력발전 2호기 상업운전
1981 기획원, 외국기업의 대한투자 문호를 확대 427개 업종에 외국인 투자 허용
1980 미국, 군정 볼리비아에 전면 원조중단. 외교관-군요원도 철수
1975 민방위 기본법 공포
1968 KAL, 서울~동경간 취항
1968 문화공보부 발족
1964 최초의 국악관현악단 창립
1963 부분핵실험금지 조약(PTBT) 조인
1955 미국, 극동지상군사령부 및 8군사령부를 서울로 이전 결정
1954 이승만 대통령 방미
1953 베트남에 태풍, 주민 천명 사망
1950 영국, 터키, 필리핀 등 한국전에 지상군 파견 결정
1949 네덜란드,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
1939 경춘선(성동-춘천) 개통
1935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1934 돌프스 오스트리아 수상 암살
1925 해태그룹의 창업자 박병규 출생
1922 전국기자연맹 결성
1920 오상순 등 ‘폐허’ 창간
1919 소련, 중국과 제정러시아의 불평등조약 폐기 선언(카라한 선언)
1905 불가리아의 소설가 카네티 출생 - 1981년 노벨문학상 수상
1894 청일전쟁 발발
1803 독일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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