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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달마란 무엇인가
인간은 가장 진화된 존재다.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것은 '선명하게 반영된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처럼 뚜렷하게 반영된 의식을 가진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다. 인간은 의식이 있으므로 선악을 구별하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고통고 불행을 겪고 싶어하는 존재는 없다. 하물며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찻을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삶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삶이며, 바로 인간이 바라는 삶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하며 실제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제 인간이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방법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먼저 물질적 즐거움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부를 쌓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한다. 백만원을 가진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천만원을 얻으려 애쓴다. 그러나 수천만원을 갖게 된다고 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원하게 된다. 군수는 도지사가 되고 싶고, 도지사는 대통령이 되길 원하며, 대통령이 되면 세계적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한다.
부, 권력, 지위를 얻어도 인간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유한한 것은 더 많은 갈망을 일으킬 뿐, 행복을 찾는 끝없는 욕망을 채울 수 없다. 소유에 대한 갈망은 끝없고 무한하다.
인간은 아무리 고귀한 업적을 이루어도 행복을 찾아 끝없이 헤맨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세상살이가 주는 한때의 영화일 뿐임에도 그것들을 무한히 얻을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 이 세상 자체는 유한하여 무한한 대상을 제공해 줄 수 없다. 따라서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는다고 해도, 설령 그것이 이 세상 전부라해도 무한하고 영원한 행복을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고 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주적 존재만이 무한하고 영원하다.
우주적 존재만이 한계가 없다.
그래서 행복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갈망은 오직 그 무한한 존재를 깨달을 때 만족할 수 있다. 재산, 권력, 지위는 일시적이거나 순간적으로 누리는 덧없는 것이다. 유한한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없다. 유한한 대상들을 얻는 것은 더 많은 갈증을 일으킬 뿐이다. 무한한 것에 대한 깨달음만이 영원한 행복을 향한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무한한 것은 오직 하나이며, 바로 우주적 존재(브러머)다. 따라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우주적 존재가 유일하다. 실제로 이러한 인간의 갈망 이면에는 우주적 존재에 닿고자 하는 욕구, 열망이 숨어 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이다. 이것만이 모든 인간의 달마다.
달마는 본성을 뜻한다. 달마에 부합하는 영어단어는 NAture본성, Characteristic특성, Property속성 이 있다.
불의 본성은 태우거나 열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불의 특성 혹은 본성이다. 인간의 달마, 즉 인간의 본성은 우주적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신성의 깊이는 명료하게 반영된 의식으로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했으므로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 동물적 측면과 의식적 측면으로, 의식적 측면이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다. 동물은 주로 동물성을 보이지만, 인간은 뚜렷이 반영된 의식 덕분에 이성이 있다. 인간 내면의 동물성은 인간을 동물적 삶이나 물질적 즐거움으로 향하게 한다. 동물성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여러 물질적 욕구들을 충족시키는데 열중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행복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욕구는 유한하므로 제한된 즐거움에도 만족한다. 아무리 많은 양을 줘도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섭취하고 나머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인간들은 분명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있어 즐거움을 향한 욕구는 동물적 측면에 의해 일어나고 지배되지만, 동물들은 유한한 것에 만족하는 반면, 인간들의 욕망은 무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만이 가진 '명료하게 반영된 의식'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의 절대적 행복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의식 때문이다. 인간이 재산, 권력, 지위 등의 물질적 즐거움에 만족하지 않는것도 의식 때문이다. 그것들은 분명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본래 일시적이다. 인간에게 우주적 존재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세속적 대상들, 물질적 즐거움들은 인간이 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세속적인 대상과 물질에 끌린다. 인간 내면의 동물성은 동물적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인간을 이끌지만, 인간 의식의 이성은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물질적 즐거움에 만족하지 않는다. 물질적 즐거움은 인간 의식이 가진 끝없고 무한한 갈망을 잠재우기에 부족하다. 그로 인해 동물성과 이성은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동물적 측면은 인간을 즉각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으로 끌어당기지만, 그런 즐거움에 만족한 수 없는 인간의 의식은 인간을 후한한 것, 우주적 존재(브러머)에게로 끌어당긴다. 이것이 동물성과 의식간의 갈등을 만든다.
권력과 지위에서 얻는 세속적 즐거움이 끝없이 무한했다면, 의식의 행복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즐거움은 무한하지 않고, 아무리 빛나고 아름다운 즐거움이라 해도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즐거움은 인간 마음을 평화롭게 하거나 끝없이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주는 것은 오직 뚜력이 반영된 의식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반드시 의식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인간의 의식이 동물성에 가려 발현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동물처럼 행동할 것이다. 실제로 뚜렷이 반영된 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은 동물보다도 못하다. 그런 인간들은 마땅히 인간이라 할 수 없으며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일 뿐이다.
의식의 본성은 무한한 것을 추구하는 것, 즉 우주적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의식을 사용하고 의식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인간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따라서 인간다워지려면 자신의 의식을 최대한 사용해야 하며, 인간의 본성(달마)은 우주적 존재를 추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무한한 것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달마)이며,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껴진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오히려 슬프고 비참해진다. 동물과 달리 명확하게 반영된 인간의 의식은 무한한 것, 즉 우주적 존재를 찾아다닌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우주적 존재에 이르거나 그에게 이르는 과정에 있을 때만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의식은 세속적 즐거움을 원하지 않는다. 한정된 것은 의식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달마는 무한한 것, 즉 우주적 존재를 깨닫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직 이 달마에 의해서만 인간은 영원한 행복과 더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의 본성, 달마는 브러머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러머가 존재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브러머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인드리여에 의해 이뤄지는 듯 보인다.
인드리여는 10개으 신체기관을 말하는데, 이 10개의 인드리여가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를 하는 것 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일 마음이 인드리여(신체기관)뒤에서 작용하지 않는다면, 인드리여 혼자서는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다. 행위하는 것은 마음이며 10개의 신체기관은 도구일 뿐이다. 마음에서 시작된 행위가 신체 기관의 도움을 받아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책을 보고 있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눈을 통해 책을 보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만약 마음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눈은 책을 볼 수 없다. 마취나 그 밖의 이유로 무의식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설사 눈을 뜨고 있더라도 책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무의식 상태에서 눈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마음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본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마취상태에서는 인드리여, 즉 신체 기관이 정상이어도 기능할 수 없다. 어떤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우리는 종종 바로 앞에 있는 친구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의 눈이 정상이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인드리여(여기서는 눈)를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행위를 수행하는 것은 마음이며, 신체 기관은 마음이 한 일을 외부로 드러나게 도울 뿐이다.
21쪽 중간---------행위를 하는 것이 마음이라면,
“인간의 마음은 전념하는 대상처럼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빠르게 우주의식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개체의식은 우주의식에 몰두해야 하며, 이것이 헌신(bhakti)이다.
언젠가 그 존재(that)처럼 되기 위해서 개체의식은 ‘나는 그 존재다’라는 관념에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 따라서 벅띠, 헌신, 즉 우주의식을 부르는 것은 인간을 ‘그’처럼 되도록 이끈다. 벅띠, 헌신은 기도나 찬양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헌신을 통해 우주의식과 합일되거나 해방되길 원하는 것 역시 은혜를 구하는 것이므로 헌신 또한 기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면 인간을 창조한 신의 목적이 바로 개체의식을 자신처럼 해방시켜 지고의 단계로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바람이며, 이 우주의 모든 것이 그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향하고 있다. 헌신을 통해 신의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즉, 인간의 존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어떤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노력하지 않고 그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머지않아 다시 그 길을 따라가게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벅띠, 헌신은 기도나 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와 찬양은 보람 있는 결과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다. 헌신은 우주의식에게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며, 지고의 단계로 가장 빨리 되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난다마르가 기본철학p1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