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큰오빠 / 이현민
'이게 뭐꼬' '태극기다, 봄이 되는기다'
덕이는 큰오빠 말이 알듯말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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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살얼음이 낀 도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사람 칠성이,한 번만 봐도고. 반빙신인 우리 아가 뭘 알겄나?'
도랑 너머 큰길에서,잡화상을 하는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덕이는 물 위로 솟은 돌을 딛고 도랑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습니다. 그의 바보 아들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내 옛정도 있고 허니 오늘은 이만 돌아갑죠. 대신 사흘 안에 쌀 서 말을 가져오소.'
팔에 완장을 찬 칠성이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는 걸어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치로 형사를 따라다니던 그는,이제 앞장서서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칠성이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내주었고,또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몰라 슬슬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덕이 앞을 지나가던 칠성이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게 누꼬? 감나무집 막내 아이가?'
그가 미소 짓자,덕이는 움찔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래,느그 큰오빤 요즘 무지 바쁘다제? 내가 관심이 차암 많다고 전하그라.'
칠성이는 꼭 기억했다 전하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사람들 속을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간 길에 침을 뱉고 욕지거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덕이는 칠성이가 한 말만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내가 관심이 차암 많다고 전하그라.'
두 해 전 주재소로 끌려갔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는 사흘 뒤 주재소 문 앞에 버려졌는데 그때,아버지를 내동댕이친 사람이 바로 칠성이였습니다.
큰오빠는 축 늘어진 아버지를 등에 업고,십 리나 되는 눈길을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습니다. 줄줄이 딸린 동생들처럼 울지도 않았고,어머니처럼 정신을 놓지도 않았습니다. 힘이 부칠 만하면 입술을 꾹 깨물고 아버지를 다시 업을 뿐이었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며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는 결국 거적때기에 말려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지자,큰오빠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결국 큰오빠는 큰길에 있는 목재소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고,두 오빠들은 군산에 사는 큰아버지 댁에 가야 했습니다. 열 살 넘게 터울인 큰오빠는 덕이에게 아버지나 다름없었습니다.
덕이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저 멀리 집이 보이고 담 밖으로 삐쭉빼쭉 팔을 뻗은 감나무가 보였습니다. 감이 여물 때마다 따주는 것은 큰오빠 몫이었습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지를 보니,큰오빠가 '덕아!'하며 손짓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빠야! 큰오빠!'
덕이가 막 마을 어귀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허리를 확 낚아챘습니다.
'넘어지면 우짤라꼬?'
큰오빠였습니다. 큰오빠를 보니 덕이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곧 목 안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나오려 했습니다.
'오빠야 사실은…….'
큰오빠가 허리를 굽혀 덕이를 바라보았습니다. 큰오빠의 까만 눈동자 안에 덕이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와? 학교에서 뭔 일 있었나?'
'아이다. 그게 아이고.'
칠성이가 한 말은 입에서만 뱅뱅 맴돌 뿐 좀체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큰오빠가 덕이를 번쩍 들어올려 어깨에 앉혔습니다. 큰오빠 어깨는 여전히 단단하고 편안했습니다.
'요래 붙들고 있는데,누가 우리 큰오빠를…….'
덕이는 큰오빠 손을 꼭 부여잡았습니다.
'오빠야,내 만날 요래 목말 태워 주면 안 되나?'
덕이가 고개를 숙여 큰오빠를 바라보았습니다. 갸름한 얼굴에 짙은 눈썹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습니다.
'우리 덕이가 그러자는데,오빠도 좋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그들을 따랐습니다.
그날 밤 막 잠이 들 무렵,방문이 열렸습니다. 찬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오자,덕이는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모로 누웠습니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 아래로 큰오빠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큰오빠는 요즘 늦게 들어오는 날이 부쩍 잦았습니다.
'오빠야 어델 그리 다니노…….'
덕이는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녘 책보를 짊어진 덕이가 큰오빠 옆에 삐딱하게 섰습니다.
'큰오빠,내 짝 옥분이 알제? 갸 오빠야는 이 달 엿새에 장가든다카드라.'
덕이가 감장 고무신 코로 흙을 툭툭 파헤쳤습니다.
'덕이 니도 오빠야가 빨리 장가 가믄 좋겄나?'
큰오빠가 고개를 갸웃하며 덕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게 아이라…… 갸 오빠야는 몇 번 늦게 들어오더니만 밥 묵다 말고 장가보내 달라 했다안하나.'
'요거요거 내가 만날 늦게 들어온다고 짐 혼내는기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퍼뜩 핵교나 가그라.'
큰오빠가 덕이의 코를 세게 비틀었습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코가 아픈 건지,아무 말 없는 오빠가 미운 건지,덕이는 찔끔 눈물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덕아!'
교문을 나서는데 큰오빠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서 있었습니다. 덕이는 큰오빠에게 달려갔습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불쑥 떠오르자,덕이는 턱을 추켜들고 다른 곳을 쳐다보았습니다.
'목재소는 어쩌고 왔나? 오늘은 한가한가 보제?'
'사장님이 일도 별로 없다꼬 퍼뜩 들어가라캤다. 집에 가다보니까네 우리 덕이가 보고 싶어,이리로 달려 왔제.'
곁눈으로 보니 큰오빠의 콧등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습니다. 덕이의 입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보여줄게 있다. 퍼뜩 가자.'
큰오빠가 덕이 손을 덥석 잡아끌었습니다.
큰오빠가 향한 곳은 마을 뒷산에 있는 오두막이었습니다. 예전에 문둥이들이 살던 집이었는데 그들이 모두 죽자,귀신 씐 집이라며 아이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집이었습니다. 집 주위로 무성하게 자란 덤불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러나 집 안은 구멍 난 지붕에서 새어 들어온 빛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환했습니다. 큰오빠가 바닥에 깔린 검불들을 걷어내자 푹 꺼진 바닥 아래 커다란 나무 상자가 보였습니다. 상자 안에는 나무 막대에 둘둘 말린 하얀 천과 종이들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큰오빠는 그중 천 하나를 꺼내 쫙 펼쳤습니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선명하게 새겨진 태극 무늬가 햇빛에 드러났습니다.
'와아! 이게 뭐꼬?'
덕이의 눈이 퉁방울만 해졌습니다.
'태극기다! 우리 나라 국기!'
'국기?'
'하모. 이제 닷새 후면 이 태극기를 손에 쥔 사람들이 파도처럼 거리로 몰려들기다. 그라면 죽어라 일하고 쌀을 빼앗겼던 농부도,늘 허기진 아이도 어마어마한 파도가 되는기라.'
덕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람 어찌 되는데?'
'그래되면 일본 놈의 목검은 썩고,눈 깜짝할 새 코 베어 간다는 신식무기도 녹이 슬고 뭉그러지는기라.'
'아따 무섭네. 그래 여서 몰래 만드는기가?'
큰오빠가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이 많은 걸 큰오빠 혼자 다 만들었나?'
'아이다. 대부분 몇몇 사람들이 이 집에 모여 만들고,이불잇을 뜯어 그려 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걸 요래 갖고 있으면 한겨울 거적때기 하나 걸치지 않아도 춥지 않고,몇 날 며칠 풀뿌리만 먹어도 배부른 기라. 이제 따땃한 봄,봄이 되는기다.'
'보옴? 참 요상하네……! 요 천 조각 하나가 그래 하는 일도 많고…….'
'덕아! 우리 덕이 이제 어린애 아이제? 니도 꼭 알아야 한다 싶어 오빠가 데려온기라. 하지만서도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얘기하면 안 된데이.'
'옥분이한테도?'
'옥분이한테도!'
'와? 갸랑 내는 비밀 하나 없는 동문데?'
'그래도 안 된다! 니 옥분이 깜짝 놀래 주고 싶제? 닷새 후에 우리가 파도가 되어 깜짝 놀래 주자. 그게 더 좋제?'
덕이가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날 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습니다. 담 위로 뻗은 감나무 가지가 바람에 툭 꺾였습니다.
'야야 느그들 거 아나?'
옥분이가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왔습니다.
'와? 뭔 일인데?'
'아이고 길에 난리가 났다. 칼 찬 순사들이 벌 떼맹키로 몰려다니면서 집집마다 들쑤시고 사람들을 마구 잡아간다카드라. 이젠 집도 모자라 뒷산으로 몰려갔다아이가.'
'뭐? 뒷산?'
덕이는 머릿속이 텅 빈 듯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덕이는 큰오빠가 일 하는 목재소로 달려갔습니다.
도랑을 건너던 덕이의 발이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위 틈에 고무신 한 짝이 걸렸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덕이는 뒤돌아 목재소가 있는 큰길로 향했습니다. 보나마나 어머니한테 혼쭐날 겁니다. 발도 시렸습니다. 그러나 덕이는 더 힘껏 달렸습니다.
아직 대낮인데 목재소는 덧문을 내걸고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흔들고 두드려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덕이는 뒷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지난번 일을 얘길 못한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큰오빠를 만나면 그만 둬라 할기다! 집으로 데려갈기야! 안 가겠다면 울며불며 떼를 써야제! 내가 울면, 큰오빠는 꼭 들어줬잖아! 이번에도 들어줄기다!'
덕이는 목이 꽉 메였습니다.
어느새 덕이는 산자락에 닿아 있었습니다. 덕이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큰오빠가 빙그레 웃으며 나타날 것만 같았습니다. 고무신 한 짝 잃어버린 걸 알면 넓은 등을 들이대며 업히라 하겠지요. 그럼 덕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큰오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이었습니다.
덕이가 막 오두막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안에서 누군가가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바로 칠성이였습니다.
'감나무집 막내 아이가?'
이가 덕이를 보며 미소 지었습니다. 그는 곧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더니 큰오빠를 내동댕이쳤습니다.
'헉!'
큰오빠가 덕이 앞에 나동그라졌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큰오빠 얼굴 위로 아버지 얼굴이 스쳤습니다. 덕이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습니다.
'여긴 뭐 하러 왔노?'
큰오빠가 덕이의 얼굴을 매만지며 살포시 웃었습니다. 큰오빠 손을 동여맨 밧줄 위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아직도 큰오빠 두 눈에는 덕이가 가득한데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칠성이가 태극기가 담긴 상자를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펼쳐 보지도 못한 태극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칠성이가 상자에 불을 지르자,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확 솟구쳤습니다.
'으아악!'
큰오빠가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를 묻을 때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큰오빠가,닷새만 지나면 파도 한 자락이 되리라 했던 큰오빠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순사 두 명이 큰오빠의 양팔을 잡고는 질질 끌고 갔습니다.
'오,오빠야! 오빠야!'
덕이가 울며불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칠성이가 덕이를 꽉 끌어안고는 귓가에 대고 낮게 말했습니다.
'잘 보그라. 느그 큰오빠가 어떤 꼴로 가는지…… 이제 못 볼텐데 두고두고 잊지 않게 똑똑히 봐 두기라.'
덕이가 큰오빠에게 가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악을 써도 칠성이의 팔은 더 조여질 뿐이었습니다.
'큰오빠를 데리러 온 긴데…… 오빠를 두고 왔다면 어메가 화내실 텐데……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아직 못 들었는데…….'
눈물에 가려진 큰오빠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며칠째 비가 퍼부었습니다. 살얼음이 끼었던 도랑은 다시금 콸콸거리며 흘렀습니다. 덕이네 감나무 가지에도 드문드문 새순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덕이의 눈에 무언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밀려나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총총히 박힌 집들을 빙 돌아 너른 들녘으로 몰아치는 사람들의 손에는,큰오빠가 보여줬던 바로 그 태극기가 들려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레 같은 함성으로 만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목에서 하나로 뭉쳐 파도처럼 넘실거렸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몰려든 물결 속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도 있었고,물건 파는 족족 빼앗겨야 했던 김씨 아저씨,그리고 그의 바보 아들도 있었습니다. 햇살 속에 들녘으로 광장으로 몰아치는 그들을 보던 덕이는,저도 모르게 파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목놓아 만세를 외쳤습니다. 하루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몇 번이고 되뇌던 큰오빠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습니다.
입력시간: 2005. 01.0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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