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 기원후
崇禎 紀元後
2012. 11. 23. 금
전화가 왔다. 작년 서오릉에 역사 소모임이 왔을 때 설명을 드렸던 지킴이 선생님의 전화였다.
질문이 있단다. 숙종 임금의 명릉 조성 때 중국 사신이 조문 차 현장을 방문하려 했는데 왜 오지
못하게 했냐는 것이다. 내가 했던 이야기를 확인하시는 것이다.
숙종 임금 비문 뒷면 음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숭정 기원후 삼십사년 신축 8월 15일
태어나셨고 언제 승하 하셨는데 어디에 묻었다. 등이다. 숭정 기원 후 라고 쓴 비문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 이다 재위 1628-1644. 조선은 아직도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뜻이 숨어있다. 그때는 바야흐로 명을 완전히 평정한 청나라의
전성기였다. 어쩌랴 청 사신의 현장 방문을 극구 막을 수밖에 없다.
조선에 오는 중국 사신들은 측사 대접을 받는다. 시 詩 또는 술 여자 은전 돈 이었다. 유람으로는 해어화 解語花 관기를 배에 싣고 둑도 뚝섬을 떠나 밤섬 여의도를 돌아오는 코스다. 여흥이
돋우어지면 행주 성까지 돌아오기도 했다. 올 곧던 청나라 사신도 방문을 생략하고 해어화의
박하분에 코를 묻었고 은전을 잔뜩 실은 우마차와 함께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임금은 접대 임무를 맡았던 조선의 신하를 귀양 보냈다. 몸통과 깃털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소중화 小中華 사상의 몸통 주체가 충신만 나무란 것이다. 무마한 공로는 어디가고 국고를 낭비했다는 죄목이었다.
명릉 정자각 뒤에는 신교 神橋가 있다 가지런한 장대석 두 편이 한 쪽은 넓고 다른 쪽은 좁다.
시치미를 뚝 떼고 좁은 길은 조상께서 어신위 禦神位에 오실 때 맑은 정신으로 걸으시는 길이며
넓은 길은 후손에게 복을 주는 음복을 마친 후 술에 취해서 걷는 음주보행로로 넓은 길은 낙상을 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후손들의 자상한 배려가 이 돌에도 들어있음을 강조한다. 평생 술을
즐기는 내 친구는 지금도 이 말만 기억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지어낸 믿거나 말거나 이다.
숭정 崇禎을 확인하신 지킴이 선생님은 귀양 간 신하들의 이름을 물으신다. 서투른 기록이
총명한 기억보다 낫다고 정약용 선생님은 말씀 하셨건만 어쩌면 좋을까 자료가 없다. 그렇지만
책에서 읽은 조선왕조실록 숨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숭정은 숙종 명릉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왕릉 비문에는 시대에 맞는 명나라 황제의 년 호가 쓰여 있다. 장희빈 대빈 묘에는 유명 조선국
有明朝鮮國 이라는 글씨가 있다.
시대와 다르게 숭정기원후 崇禎 紀元後 라고 쓴 이유는 청나라는 오랑캐 나라라는 비아냥이 숨어 있고 유명 有明은 명은 영원한 주군 主君이라는 문화 맹종 盲從의 속뜻이 스며있는 것은 아닐까 ?
1721 년
1701 년
1457 년
2012 년
첫댓글 선생님 글은 항상 재미있게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유익한 정보 늘 감사드립니다. 사진은 퍼갑니다.
궁금증 해결해주신 선생님!!!감사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