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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예수신화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필자는 책 한권을 소개할까 한다.
"예수는 신화다 /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지음 / 동아일보사
'예수이야기는 실제 역사가 아니다. 고대세계의 심오한 철학과 유일신앙을 접목한 지적 유산
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신화를 유대인식으로 각색한 신화에 불과하다.'
인간복제가 창세신앙을 위협하는 종교 위기의 시대에 2000여년을 지탱해온 기독교의 심장부
를 향해 2명의 '고대 이교신앙 연구가'가 비수처럼 들이민 21세기 화두다. 저자 티모시 프리크
와 피터 갠디의 신랄한 문제제기는 전세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 이 책이 출간된 1999년 영국에서는 학계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이 일기
도 했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라프'지가 1999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문제작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예수의 실제 역사에 이전의 이집트나 그리스·로마 신화를 덧칠했다는
식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저자는 기독교의 교리와 의식이, 고대 지중해 세계의 철학자
, 지식인, 일반시민을 중심으로 1000년 넘게 광범위하게 퍼진 신비한 의식인 이교도 미스터리
아(Mysteria, 신비의식) 신앙에 절대적인 빚을 지고 있다고 정리한다.
기독교에 의해 원시적이고 악마적 이단으로 못박힌 미스터리아 신앙의 핵심에는 죽어서 부활한
신인(神人)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신인은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로
불렸다.
이집트 '오시리스 미스터리아'에 기원을 두고 지중해 전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 나라
고유 문화(신앙)와 결합하면서 각기 다른 버전으로 변형됐고 저자는 이를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로 통칭했다. 이교도 신인인 디오니소스 미스터리아 신화는 유대인 메시아와 결합해
'유대인 미스터리아 신화'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예수이야기가 신화에서 역사로 바뀌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미스터리아 신인은 인류의 구원자이자 인간이 된 신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아버지와 동격이
다. 또 인간 처녀에게서 태어났고 생일이 12월25일 또는 1월6일(아르메니아교회의 성탄절)이
다. 미스터리아 신앙은 수세기동안 세례와 고해성사를 하는 의식을 천주교에 앞서 했고,
신인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매달렸다. 여기까지만 봐도 예수상과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그러면 저자가 주장하는 신인과 예수의 차이는 뭘까. 둘 다 유일신인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기독교가 예수를 역사적 인물인 인격신으로 대하는 데 비해 미스터리아 신앙은 신인을 상징과
비유로 바라본 데서 결정적 차이가 난다. 미스터리아 현자들은 오시리스, 디오니소스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여기지 않고 다른 신화와 얼마든지 합성하고 고쳐 쓸수 있는 비유와 상징으로
간주했다. 미스터리아 신앙에서 하나님을 '보편정신'으로 이해하는 대목에서는 신을 부정하는
불교사상과의 유사점도 드러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1970년대 이후 활성화된 고대 신비주의 문헌연구를 토대로
기존 복음서를 정밀 비교분석한다. 플라톤의 '대화'와 피타고라스의 수학체계 등 그리스와 로마제국
학자들의 저술과 루터이후 독일 신학자들의 복음서 분석자료 등을 근거로 논리정연하게 문자주의(Literalism)
기독교의 역사왜곡을 비판한다. 저자가 '예수 미스터리아 명제'로 이름붙인 이 화두를 제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100년전까지만 해도 가장 사색적인 사람들까지도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고
다윈의 생각을 우스꽝스럽고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스도교가 이교신앙에서 진화했으며
예수 이야기도 창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비유적 신화라고 주장하는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
내일이면 너무나 명백해 논쟁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기독교가 잃어버린 것(앎의 비밀
을 밝혀주는 은밀한 미스터리아)을 회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인 고대 예수 이야기의
장엄함을 밝혀주기 위한 것이란 변론을 편다. 이 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곱지않은
시선을 보인 곽노순(후기기독교 신학연구실)목사의 추천사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다.
'불가(佛家)에 손에 박힌 가시를 다른 가시로 뽑아낸다는 말이 있다. 맹신주의로 치닫고 있는
기독교의 풍토는 또 다른 쪽의 치우침인 이 책으로 서늘한 평형에 이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
다.' " [문화일보 / 정충신기자 csjung@munhwa.co.kr]
티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라는 사람이 쓴 'The Jesus Mysteri
es'라는 책은 2002년 무렵에 '예수는 신화다'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번역 출판 되었다.
이미 이 책은 해외에서 상당히 이슈를 불러일으켰고, 국내에 출판 되었을때도 상당히 많이 팔
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절판되어 현재 한국판을 구입할수가 없다. 한기총을 비롯한 기독교 단체들이
이 책을 출판한 동아일보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려고 하자 결국 신문사는 두 손을 들고 말았
던 것이다.
"예수는 신화다 절판 결정 / 동아일보사, 한기총에 절판사실 공지
최근 동아일보사가 출판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의 반기독교적인 내용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동아일보사가 '문제의 책을 절판하고 배포된 책을 회수 또는
시정하겠다'는 방침을 한기총에 전달해 왔다.
한기총 박영률 총무는 최근 열린 임원회에서 업무 및 사업보고를 통해 '동아일보사가 출판한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절판하겠다'는 전화통지를 받았다고 밝히고, 정식 공문을 통한 공식
적인 절판을 확인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박 총무의 보고에 따르면 이날 박총무는 동아일보측의 통보에 배포된 책의 회수와 시정을 약
속하는 공문을 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며 동아일보사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해당책임자가 출장
중이어서 돌아오면 추가 조치가 있을 것을 보인다'라고 보고 했다.
한기총은 지난 9월30일 예수님을 역사 속의 실존자가 아닌 신화로 간주하는 내용을 담은 예수
는 신화다라는 책을 출판한 동아일보사에 대하여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10월 7일에 공문을
통해 출판과 보급 중지를 요청했었다.
한기총은 성명에서 책의 반기독교적 내용에 대해, '예수님을 신화라고 우기는데서 나아가 예
수님과 바울을 영지주의자로 몰고 있으며 골로새서 1장 17절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며 '이같
은 번역자의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인식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한기총은 그러나 책절판과는 별도로 동아일보사에 '점술,미신 행위를 조장하는 각종 출판, 광
고 등의 행위를 중단하라'며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이 시정되지 않을 경우 소비자 운동을 펼쳐
대응할 것'이라며 무속점술 광고에 대해서 지속적인 경계자세를 취했다." [ 크리스챤투데이 /
김대원 기자 dwkim@chtoday.co.kr]
군사독재시절도 지나간 지금 이 시점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수 있을까?
외국에서는 누구나 구입해서 볼수 있는 책이 한국에서는 금서가 되어버린 어처구니 없는 사태
에 대해 필자는 개탄을 금하지 않을수 없다.
비록 이 책이 현재 절판상태 이기는 하지만 인터넷의 반기독교 사이트등에서 쉽게 구할수 있다.
어떤 고마우신분이 책의 내용을 컴퓨터 문서파일 형태로 전부 옮겨 놓은것이다. 출판된 책을
공짜로 읽는것은 도리가 아닌듯 하지만, 돈이 있어도 구입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니
만큼 꼭 찾아서 읽어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한국의 기독교가 그토록 두려워 했던 공포의
책이다. 꼭 읽어 보시기를......
사실 한국에서 번역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라는 책은 주석이 몽땅 잘려 나간
채 출판되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이 책이 한국에 번역출판 되기전에 원서를 구입했던
적이 있다. 총343페이지 중에서 깨알같은 글씨로 적힌 주석이 무려 257~321페이지 달하는
이책은 풍부한 문헌자료의 보고(寶庫)이다. 작가의 설명 또한 정말 훌륭하다.
필자는 이제부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신화를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신화
다'라는 책과 접근방식이나 원천적인 자료는 거의 다르다. 필자는 이책이 등장하기 전부터
예수의 일대기가 신화임을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의
내용을 거의 쓰지 않았다. 따라서 필자의 글을 읽고 좀더 깊은 자료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은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구해서 읽기 바란다.
사실, 예수가 신화라는 결론을 내린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이 왜
이렇게 늦게 등장했는냐 하는 의문이 남을수 밖에 없다.
세계대백과사전을 검색해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이교도의 종교행사에서 비롯되었다고 나
온다. 예수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도 대백과들은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에세네파를 찾
아보면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유대교 영지주의가 등장했다는것을 확인시켜준다. 조로
아스터교의 종말론과 구세주론이 후대종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기독
교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유대인들은 종말론과 메시아 사상이 담겨진 묵시문학을 무수히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한 학자라면 누구나 감(感)을 잡을수
밖에 없다. 160년 전에 알버트 처치워드 목사나 100년 전의 유명한 신화 연구가인 제럴드 매
시 같은 사람도 이런점을 발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애매모호한 여운을 남기는데서
그치고 말았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이런 현상에 대해 "금기(禁忌) 였기에 함부로 말
할수 없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가 태어났다는 그 무렵 로마지배하의 국가에서는, 이미 예수와 흡사한 인물들이 역사적
실체이건 신화적 인물이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가까이는 가나안의 탐무즈, 그리스 로
마의 헤라클레스, 아도니스, 미트라, 아폴로, 바카스, 프로메테우스, 힌두의 크리슈나등이다.
특히 그중에서 태양신 숭배사상이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가장 유명한 태양신 종교
는 미트라교이다. 그 무렵의 태양신 숭배종교에는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는데 예수도 예외
일수가 없다. 그럼 이제부터 금기를 깨고 진실을 파헤쳐 보도록 하자.
▶ 유대사회에 뿌리내린 이방사상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큰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어 준것은 바로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군사에게 패망하여 바빌론 유수를 맞게 되는 시점부터이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배화교(拜火敎)로도 불리우는 조로아스터교를 만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한마디로 이원론적인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이 세계는 선신(善神)
과 악신(惡神)의 전투장이며 악신과 더불어 이세계가 종말을 맞은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이라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심판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 부활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구세주
에 대한 신앙도 포함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여호와 신앙은 철저하게 부족신관에 지나지 않았다. 여호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마다하지 않는 민족의 신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모든 인류에게 공의로운 신 아후라 마즈다를 접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악신도 여호와의 명령에 따르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가 앞서서 소개한
구약의 욥기등에서 여호와와 사탄의 관계를 통해 이것을 확인한바 있다.
그러나 바빌론 유수 이후의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교의 강력한 이원론을 자신들의 유대교에
융합 시키게 된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희미했었던 사탄의 이미지가 서서히 힘이 증대되어 결
국 여호와에 버금가는 존재로 부각된다. 다시 말해서 사탄이나 악신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재앙이나 벌을 내리는 천사에 지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 천사는 여호와에게
대항하는 타락한 천사가 되어 버렸다. 신학적으로 이 것을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辯
神論)이라 부른다.
한편 천사론(Angelology) 역시 위계질서를 만들면서 발전되기 시작했다. 구약 시대에는 신의
말씀이나 계시를 예언자들이 받고 이를 전했다. 예를 들어 모세에게 여호와가 나타나 십계명과
율법을 직접 전해준다. 그러나 이런 역활은 서서히 천사에게로 넘어 오게 되었다. 인간의 미래
나 세상의 종말에 관한 것은 천사를 통해 전달 되어진다.
예수가 탄생했을때 예수의 부모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계시를 내려준다. 기독교 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의 존재는 구약의 모세와 그가 남긴 율법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구약에서 유대인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선지자 앞에서 직접 계시를 내리는 여호와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천사에게 그 모든일을 떠 넘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천사에 관한 개념은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
온 혼합주의 사상의 영향에 의해 형성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빙혼>
구약에서는 항상 여호와가 직접 나타나 인간들을 이끌어 왔는데
신약에서는 여호와 대신 천사들이 인간을 상대하고 있다.
왜? 여호와가 늙고 지쳐서? 아님 여호와를 직접 똑똑해진 민중들에게 팔아먹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세상에 대한 종말과 심판, 메시아 사상 역시 유대인들에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여호와 신앙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구약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말라기와 신약이 시작되는 마태복음사이에는 적어도 수 백년의 시
간간격이 있다. 수세기에 걸친 시간의 공백상태를 넘어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시대를 보통 '중간시대'(Intertestamenta Period)라고 부른다.
이 '중간시대'에 특기할 일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과 여러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이에서 엄청난 분량의 종교적인 문헌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부분 악의
기원과 세상의 종말, 최후의 심판 등 상당히 외래 종교적인 모습을 띤 유대교의 이단들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에녹서도 바로 그러한 문서중 하나이다.
"그 무렵에, 땅은 자기가 맡았던 것을 되돌려 주고, 하계(쉐올)는 받았던 것을 내놓고 지옥은
가지고 있는것을 돌려 줄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받은 그분이 그 무렵에 일어나서 죽은자 가운
데서 선한자와 거룩한자를 가려 낼것이기 때문이다. 선한자, 거룩한 자가 구원받을 날이 왔다.
선택받은 그분이 그 무렵 나의 옥좌에 앉을것이며 그 입에서 지혜의 비밀들이 나올 것이다.
영혼의 주님이 그분에게 그 비밀과 의견을 주었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었다. 그 무렵에는 산들이
숫양처럼 뛰고 언덕들이 젖으로 배부른 어린양처럼 뛰어놀고 하늘의 모든 천사의 얼굴이 환희
빛날 것이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제1권/ 이동진 역 / 문학수첩 / P.195]
에녹1서에서는 위에서 인용한 구절 말고도 종말과 심판, 구세주, 독신주의, 영혼의 사후 운명
에 대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찾을수 있다.
에녹서에는 이디오피아 본(에녹1서)과 슬라브언어로 기록되어 있는 에녹서(에녹2서)등이 있
는데, 위에서 언급한 에녹1서는 적어도 마카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Qumran) 유적지에서도 에녹서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에녹서는 기독교의 신약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는데, 유다서 1장 14~15절(에녹서 1:9) , 요한
계시록 7장 9절(에녹서 40:1), 요한계시록 9장 1절(에녹서 86:1),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녹
서 90:26), 요한계시록 21장 1절 (에녹서 91:16), 요한계시록 14장 20절(에녹서 100:3), 요한
계시록 3장 5절(에녹서 108:3)등을 예로 들수 있겠다.
고린도 후서 12장 1~10절에서 바울은 14년전에 '세 번째 하늘'인 '낙원'에 올라가서 경험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 2에녹서에서는 열 번째 하늘까지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으며,
제2에녹서 8장에 의하면 낙원은 세 번째 하늘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외경인 모세 묵시록 37장 5절에서도 신이 미카엘에게 "그(죽은 아담)를 세 번째 하늘의 낙원으로
들어올리라.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심판할 그 두려운 날까지 그를 거기에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런 경전들을 모두 버렸지만, 신약성경은 외경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디오니소스 축제일이 되면 담장이풀로 엮은 관을 쓰고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행렬에 참가해
야만 했다." [마카베오 2서 6장 7절]
바빌론 유수 이후 그리스 제국과 시리아 제국의 연이은 침공으로 헬라 사상까지 침투하게 된
다. 마카베오 2서에 따르면 안티오코스4세에 침공당한 유대인들은 디오니소스 종교행사에 까
지 참석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 디오니소스 축제는 포도주를 마시는 광란의 종교 축제로도 악명이 높았다. 보수적인 유대교의
입장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방탕한 종교축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지만, 이미 유대인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헬라사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숨겨진 성서의 저자는 마케베오4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문서는 놀랄만큼 상충되는 점이 많다. 어쩌면 일부러 상충되는 점을 보이는지도 모른다.
본문내용이 정통 유대교의 독실한 신자인 유대인이 그리스의 폭군 안티오쿠스4세를 정면으로
비난한다. 그리스 사상으로 훈련된 철학자가 고급 그리스어로 서술한다. 논쟁은 소크라테스식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스토아 학파의 방법으로 전개한다. 본문의 첫구절부터 철학적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 제3권/ 이동진 역 / 문학수첩 / P.54]
이런 신학적 토양을 기반으로, 신구약 중간기에 이미 예루살렘을 정점으로 하는 정통 유대교
와는 거리가 있는 영지주의적 유대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BC 2세기 무렵에 사해 부근의 쿰란지역에 모여 종교생활을 했던 에세네(Essenes)파를 대표
적인 예로 들수 있겠다. 이들은 수도승과도 같은 금욕주의 생활을 하며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
어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는 영지주의자들의 무리들이었다. 에세네파는 유대교의 경전과 더불
어 자신들만의 독특한 경전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모습과 많이도 흡사했을 것이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경전도
상당히 묵시문학적이고 종말론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사용하던 문서가 사해 부근에
남아있던 쿰란 유적지에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이다. 총 11개의 구덩이에서 당시의 종교상황과 또 성경
문헌 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귀중한 자료들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발견된 사해문서에는 에녹서같은 문헌뿐만
아니라, 예수의 존재를 위협할 만한 에세네파의 구세주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종말론, 부활등에 대한 외래신앙에 대한 수용여부로 유대인들의 집단이 나뉘어 지게 된다.
앞서 소개했듯이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러한 외래종교적 요소를 철저히 거부하는 보수적인 집
단이었다. 그들은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에 대한 신앙과 성전제사를 강조했다. 하지만 현
실주의자였던 그들은 로마인과의 타협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과는 달리 경건주의자들인 한 부류가 있었는데 그들을 바리새파라고 부른다. 이들 역시
사두개파처럼 토라를 신봉했지만, 토라 사상의 보완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외래사상도 어느 정
도 수용하고 있었다. 특히, 바리새파는 '죽은 사람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새로운 사상
도 옹호했으며, 성전제사 보다는 율법의 준수를 중요하게 여겼다.
앞서서 소개드린바와 같이 당시 로마가 통치하던 유대사회는 피바람이 몰아 닥치던 혼돈의 시
대였다. 수많은 유대 혁명가들은 종말론과 메시아 신앙, 그리고 부활을 외치며 동족들을 모아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다.
야만적인 동물제사를 비난한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사상이 어느덧 유대사회에 급속히
침투했다. 따라서 동물을 죽여서 제사지내는 예루살렘 성전의 샤머니즘적인 제사를 거부하는
에세네파와 나사렛파 같은 종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1차 유대 독립전쟁이 패배로 끝났을때, 나머지 종파들은 거의 소멸하고 오직 바리새파만이
남게 되었다.
AD 100년경 살아남은 바리새파들은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Jamnia)에 모여 유대교 경
전(구약)의 범위를 확정하게 되는데 사두개파들이 거부했던 오경이외의 문서들이 정경으로 확
정되기 시작했다. 사두개파들이 거부했던 문헌들이 유대교의 경전에 포함되면서 유대교 역시
소극적이나마 변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조로아스터교와 헬라사상이 유대사회에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
던 것은 결코 돌이킬수 없는 일이었다. 피바람이 몰아치던 유대땅을 피해 흩어진 디아스포라
의 유대인들은 더욱더 급속하게 헬라화 되어 갔다. 따라서 기독교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이
나 다름 없었다.
후대의 기독교가 날조한 사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것이
다. 영지주의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바로 유대교의 영지주
의가 이미 존재했다는 말이다. 좋게 말하면, 유대교의 영지주의는 종말론, 최후의 심판, 부활
신앙, 메시아론등을 외래종교로부터 수입해서 기독교가 이세상에 등장할수 있는 토양을 제공
했다. 나쁘게 말하면, 기독교는 유대교 영지주의의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는 어느날 예수라는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서 생긴 종교가 아니다!
▶ 조로아스터교에서 예언된 메시아
BC 6 세기 경에 번성하기 시작한 조로아스터교는 인류사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남긴 종교
였다. 전승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계시를 받고 종교를 창시한 것은 BC 7세기
라고도 한다. 이 종교는 유대교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탄생 시키
게된 결정적인 원류가 되었다. (조로아스터는 짜라투스트라의 그리스식 발음이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이원론을 기반으로 한 일신교(一神敎)로, 고대 아리아인(인
도-이란 또는 인도-게르만)들이 숭배했던 신들이나 제령(諸靈)을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통괄하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한다.
강력한 이원론을 갖고있던 이 종교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분명히 대비시키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필연코 종말을 맞게 될것이라는 사상을 지녔다.
그들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의 교리에 따르면, 전지전능의 창조주인 아후라 마즈다(Ahur
a Mazda)는 부족신 차원에서 탈피한 유일신이자 보편적인 빛의 신이다. 반면에 어둠의 신이
자 악신 앙그라 마인유(Angra Mainyu. 후에는 아리만으로 불림)는 인간을 타락으로 이끌려고
한다. 앙그라 마인유는 아후라 마즈다와 동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는데, 악마가 진정으로 악의
주관자라면 태초부터 신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악을 창조했
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인유는 무한신 시공(Zurvan)
이라는 하나의 통합적 우주 원칙으로부터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마즈다 예배교(Mazdayasna : 마즈다야스나)라고 불렀
는데, 마즈다는 '현명함', '빛으로 가득찬'이라는 의미이고, 아후라는 베다의 아슈라(Asura)와
같은 말로, 인도-유로피안어에서 데바나 신 가운데 특출한 존재에 부여되는 명칭이다.
사실상 불을 숭배한다는 뜻의 배화교(拜火敎)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들은 빛을 아후라 마
즈다의 상징으로 여겨 불을 자주 사용했던 것일뿐, 불 자체를 숭배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조로아스터교에 있어서 불은 정화(淨化)를 상징한다. 기독교인들은 지옥을 떠올릴때 흔히
'불지옥'을 연상할것이다. 쓰레기를 불에 태워 소각(燒却)하듯이, 더럽고 추한것을 불로써 정
화(淨化) 시키는 것이다. 불은 파괴적인 힘을 가졌으며 동시에 더러운 것을 깨끗히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데바(daeva:악령들, 원래는 유명한 고대 인도-이란의 신들)는 선한 정령의
탈을 쓴 악령이며, 기만의 명수라며 기성 종교를 비판하고, 아후라 마즈다(지혜의 주)를 제외
한 다른 신에 대한 제의를 거부했다. 특히, 그는 당시 만연했던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내는 종교
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풍습은 너무나 뿌리깊은 것이었기에 모든 동물 희생제의를 폐
지하지는 못했다고 일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첫번째 저서의 131번째 문장에 따르면, 페르시아 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어떠한 상도 없었고 신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이라고
간주했다고 한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이 세상은 3000년이 4번 반복되는 12000년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짜라투스트라의 출생은 12000년 중 마지막 3000년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아베스타(Avesta)에는 짜라투스트라가 사망한후 그의 정액이 페르시아의 한 호수 속에 기적
적으로 보존되었다가 천년의 간격으로 세 동정녀가 그곳에서 목욕하여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
다. 첫번째 구세주는 아우쉐타르(Aushetar)고, 두번째는 아우쉐타르마(Aushetarmah)이다. 그
리고 마지막으로 3천년 후에 사오샨트(Saoshant)가 최후의 구세주로 출현한 후 세계의 종말
이 시작된다.
구세주는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고, 이를 따르는 인간들이 원래의 세상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을
하는 직선적 역사가 있게 되고 어느 시점이 되면, 아후라 마즈다는 불로써 세상을 심판하게 된
다. 어둠의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구세주가 재림하며 죽은자와 산자가 모
두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
갈라짐의 다리인 신바드(Chinvat) 다리에서 선인은 노래의 집으로 건너가고 악인은 거짓말의
집에 떨어진다. 천국에 해당되는 곳이 노래의 집이라는 교리는 흥미를 끈다. 천국에서 영원토
록 신을 찬양한다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또 모든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투쟁의 참가자이며 그러한 투쟁이 벌어
지는 장은 지상과 개개의 인간 육체라고 주장했다.(이러한 관념은 귀신들림에 대한 믿음에도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다.)
BC 6세기의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당시 바빌론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
교에 접하게 되면서 유대교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여호와에게 선택
된 선지자까지도 지하세계인 쉐올에 간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관념체제는 바빌론 유수를
거쳐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앙은 동물희생 제사라는 샤머니즘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사회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서서히 스며들어가는 것은 거역할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예수시대 훨씬 이전부터 동물제사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영지주의자들이었던 에세네파와 나사렛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동물제사를 거부했다.
모세오경과 동물희생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던 보수적 성향의 사두개파는 유대인들 사이에 서
서히 퍼져나가던 이런 새로운 종교관을 거부했다. 마태복음 22장 23절의 일화를 예로 들수 있
듯이, 보수적인 사두개파는 영혼의 세계를 부인한 반면 바리새파는 그것을 인정했던것 처럼
신약의 시대에 까지에도 그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부활과 심판의 교리와 메시아사상을 유대인에 맞게 변형시켜서 도입했다.
다니엘서에서도 알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적 메시아 개념을 외국의 압제로부터 유
대를 구원할 다윗과 같은 왕에 대한 기대로 변형시켜서 도입했던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가 스스로 광야로 가서 기도할때 앙그라 마인유가 나타나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고 말하지만 짜라투스트라
는 강력하게 거부한다. 이것은 예수가 사탄에게 시험당하는 대목과 거의 같다. 그가 30세 무렵
에 신의 계시를 받아 새종교를 전파했다는 부분도 예수와 유사점을 보인다.
또,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전 무덤가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다고 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믿음은
미트라와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구세주들이 3일만에 부활하는 신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
된다.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사오샨트(Saoshyant)와, 성령 천사장(Spenta Mainyu)의 삼위
일체와 구세주의 동정녀탄생 역시 나중에 등장하는 메시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마태복음 2장 1절에 예수 탄생시 찾아왔다고 하는 세 사람의 동방 박사들의 헬라어는 '마고
이'(magoi)이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로 여겨지고 있다.
"조라다슈트(조로아스터)의 예언대로 지혜의 사람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동쪽에서
예루살렘에 와서는 아기를 숭배하고 선물을 바쳤다." [윌리스 반스토운/ 숨겨진 성서 2권 / 이
동진 역 / 문학수첩 / P.66]
괄호안의 조로아스터라는 글자는 필자가 덧붙인 것이 아니다. 어쨋든 예수가 공생애를 하기
전까지 어린시절을 담은 이 외경은 당시 네스토리우스파를 비롯하여 많은교단에서 다른 복음
서와 함께 일반적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수세
기전에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구세주 탄생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이뤄졌다고 생각한것 같다.
한편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짜라투스트라가 주창한 원래의 유일신관이 흔들리면서, 조로아스
터교의 이단이라고 부를수 있는 종교들이 파생되기 시작한다. 옛 아리아인의 자연신들이 조로
아스터교에 침투해 아후라 마즈다의 힘을 나누어 가지는 강력한 존재가 되기도 했다.
스펜타 마인유는 하위신격인 야자타(Yazata)천사보다 덜 중요하게 되었고, 야자타 중 하나였
던 미트라는 대중의 인기를 끌기시작했다. 심지어 아후라 마즈다, 미트라(Mithras), 아나히타
(Anahita)여신을 삼위일체로 여기는 이단적인 믿음도 퍼져나갔다.(참고로 조로아스터교도들
도 이쉬타르를 아나히타와 동일시 하기도 했다)
미트라 신은 조로아스터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던 옛 아리아인의 신이었던것으로 여겨
진다.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하위신격인 야자타 천사로 격하 되었다
가, 결국 조로아스터교의 주요교리를 흡수하고 독자종교가 되기도 했다.
도덕적인 갱생의 추구를 중요시하게 여겼던 짜라투스트라의 사상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제의
적인 청정(淸淨)의 추구가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인간의 시신과 접촉하는 것이 가장 큰
오염이었는데, 그 경우 물이나 소의 소변으로 오염을 씻었다. 살아있는 몸에서 절단된 부분도
모두 부정한 것이고, 내쉬는 숨도 부정한 것이다.
한편 짜라투스트라가 거부했던 하오마즙으로 만든 술을 바쳐 악을 쫓기도 했고 과거의 주술도
다시 침투했다. 악령 퇴치를 위한 강력한 만트라(manthra. 베다와 힌두교의 mantra)를 사용했
으며, 그 내용은 가타에서 뽑은 구절이었는데 "그 뜻을 이해하든 못하든간에 정확하게 외우기
만 하면 신통력이 발휘"한다고 믿어졌다.
결국, 사산왕조의 붕괴로 이슬람교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된 조로아스터교는 급속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아랍 정복자들은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숫자의 신자들이 인
도로 이주했고 이들은 파르시인(페르시아인)이라 불리웠다.
현재 이란남부에는 소수의 조로아스터교인 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고신 아후라 마
즈다를 비롯하여, 악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고 성화를 지키는 미흐르(Mihr =미트라)와, 미
흐르를 도와 인간을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사로쉬(Sarosh)같은 수많은 하위신격들을 함께 믿
는점으로 보아, 오늘날 이란의 남부지역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조로아스터교는 상당히 많은
변질을 겪은 후기종파에 해당 되는것으로 추측된다. [J.B Noss / 세계종교사 상권 / 윤이흠
역 / 현음사]
▶ 예수보다 150년 앞선 에세네파의 메시아
과학동아 1998년 8월에는 사해사본에 대해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
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
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는 인내와 인간성과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든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퀴즈에 낸다면 거의 모두 예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을 예수라고 단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 구세주가 예수보다 1백5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찬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사
람의 인물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설교된 것을 예수가 되풀이한 것이 아닐까." [과학동아 1998년 8월호]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Dead Sea Sc
rolls)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Essenes)의 고문서이다.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896년 캠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중 옛 카이로에 있는 벤
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중세시대에 씌여진 다메섹 계약(Damascus Covenant)을 구하게 된다.
이 문서는 또 다른 이름으로 '자도크 문서'(Zadokite Faragments)라고도 명명 되었는데,
당시에는 이 문서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쿰란에서 사해사본이
발견될때 동일한 문헌들이 제 4, 5, 6 동굴에서 발견 되었다.
다메섹 계약을 비롯하여 공동체의 규칙과 다른문서들을 사해사본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1986년 처음 언급된 이 분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 문서는 매우 다른 두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앞 부분은 경고가 담겨져 있고 뒷 부분
에는 법규정인 율법에 대하여 언급이 되어 있다.
문서에 따르면,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바빌론 유수가 일어난지 400년 후, 신(神)이 보내신 '의
로운 선생'은 새로운 종파를 창설하여 세례를 베풀며 40년동안 가르쳤다. 그는 죽기전에 성찬
을 베풀었으며 사악한 제사장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40년
후에 종말이 다가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메섹 계약뿐만 아니라 사해문서와 함께 발견된 그들의 경전 주석서(페샤림)에서도 의로운 선생을
되풀이하여 계속 언급하고 있다. 에세네파는 일종의 은유적인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으로 구약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주석)을 했는데, 그것과 관련해서는 '억지로 끼워맞춘 예수신화'에서 소개한바 있다.
이 종파의 창시자인 의로운 선생은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했을 무렵의 인물로
추측되며,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의 수도원은 BC 135~104년 기간의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
스 히르카누스가 통치 할 무렵에 형성 된것으로 보인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와 같은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에세네파는 금욕생
활을 기반으로한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2차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세력이었던 사두개
파와 바리새파로부터 심한 공격과 체포, 구금등을 당한 반체제 세력으로, 쿰란 수도자들은 사
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에세네파는 AD 68년에 로마군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인들의 약탈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졌다. 외경을 다룬책인 숨겨진 성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필사본에 나오는 사악한 사제는 마카베오 가문의 요나탄이나 시몬일 것이다. 선한사제는
정의로운 스승이다. 정의로운 스승에 관해서는 그 동안 논쟁이 많이 벌어졌다.
듀퐁-조머 보고서는 쿰란문서, 특히 정의로운 스승이 에세네파 안에 그리스도교의 싹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씨오더 H.가스터는 그러한 주장이 엉터리라고
반박했다. 구약과 신약 중간시기에 나온 많은 문헌이 묵시록적이고 메시아적인 점을 고려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의 출현이 의외는 아니었다.
유대교 비경전들의 메시아적 성격 때문에 그 문헌들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열심히 읽었
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수정을 거쳐 그리스도교화 하였다. 심하게 말하자면 위조되어 그리스
도교의 진리를 증거하려고 했다. 에세네파나 다른 유대교 종파가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연결된
다는 보고 견해에 전혀 무리가 없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1권 / 이동진 역 / 문학
수첩 / P.264~265]
에세네파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Philo Judeaeus)의 글과 요세푸스의 고
대사 그리고 플리니(Pliny)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에세네파라는 이름은 처음 필로가 '거룩'이
라는 뜻의 단어 호시오스(hosios)를 사용한데서 유래했으며, 이 종파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학파와 비교했던 요세푸스는 에시(Essi)와 에세니(Esseni)라는 말로 표현 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종파를 따르는 추종자를 제외한 수도자들만의 숫자만 해도 약 4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결혼한 이들은 소득의 일부를 이 공동체에 지불했고 그들을 위해 옥수수와 식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유대교의 한 갈래로 영지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집단이었던 에세네파는 유대교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더욱더 강화 시켰다. 유대교와는 다르게 흘르는 물에 몸을 담그는 세례절
차를 거친후에나 입교가 가능했던 에세네파는 동굴에서 철저한 금욕적인 종교 생활을 실천했다.
그들은 당시의 유대교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던것과 디르게 일요일을 중요하게 여겼으
며, 성전에서 행해지는 피의 제사를 거부했다. 수도자들은 성(性)을 불결하게 여겨 상당수는
독신 생활을 했으며,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를 모두 함께 했는데, 이들의 생활은 중세시대
수도원과 비슷했다고 보면 되겠다. 육식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채롭다고 할수 있겠다. (모든
에세네파에게 독신을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에는 예외를 두었다고 한다)
농사와 농지경작 그리고 가내업에 종사했던 그들은, 의복들과 신발들이 다 헤어질 때까지 입
었고, 물물교환 이외에는 어떠한 상업적 활동도 불허했다. 특히, 에세네파는 병자들에 아주 큰
관심을 기울였고 방문자들에게 친절과 환대를 베풀었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여겼기에 노
예제도는 천륜을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에세네파는 금욕적인 생활뿐만이 아니라 종말론에도 심취해 있었다.
전쟁 두루마리라 불리는 19개의 원주로 구성된 문서에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의 전쟁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 문서는 다분히 신학적인 내용이지만 마카비 시대에
경건한 사람들이 수행하였던 전쟁에 대해서도 간간히 언급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의 40년간의 성전을 치른 후 메시아의 도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두 종류의 메시지를 기다렸는데, 다윗 계통의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묵시 문학과 종말론적 기대에 찬 그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면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새 하늘과 새 땅'이도래 하리라고 생각했다. 흰색 복장에서부터 종교의식에 따른 식사, 기도에서 두루마리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일상사는 다가올 최후의 결전에 맞추어졌다.
에세네파는 오늘날의 유대교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들어 에세
네파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대신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
대로 전승되었다.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신약에 등장하는 의로운 선생님이라는 표현이나 산상수훈의 설교 내용
은 쿰란의 사상을 비교할 때 이해하게 된다. 쿰란문헌 속에는 "네 형제를 너 자신처럼 사랑하
고, 가난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우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의로운 선생이 "나는 참회하
는 자를 치유하며, 단순한 자를 위한 지혜이며, 마음이 약한 자의 위로"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고유한 것으로 믿어지던 성령, 신의 아들, 복음, 새로운 약속(신약), 율법의 일들,
신의 교회, 의로운 신, 빛의 아들들등의 표현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 예수 가르침의 중요 부분 산상수훈의
묘사와 거의 같은 구절도 보인다.
"지혜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고난을 겪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며 가난한 자, 배고픈 자, 근심있는 자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하고 있다. 이미 예수에게 부여된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 그리고 신약 속에 예수가 직접
말한 것으로 되어있는 교훈들이 에세네파의 문헌 발굴로 인해 신학적 논쟁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또한 에세네파가 초기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초대교회 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
의 집단적 공동체 생활이나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하는 새벽기도 등이 그것이며, 초대
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프스(Episcopus)는 감독을 의미하는 오버서(overse
er)라는 에세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에세네파에서 중요한 절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쩌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쿰란의 텍스트 발견 50년을 맞아 이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독일의 슈피겔지는 "예수가 가르친
교훈을 당시 유대교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던 종래의 주장은 이제 기독교 교리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에세네파의 창시자인 의로운 선생이 복음서속의 야고보(James)혹은, 세례
요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에세네파의 의로운 선생은 그가 실존했다고 하더
라도 BC 2세기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쿰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것은 주
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쿰란의 사해문서중 가장 오래된것중의 하나인 공동체의 규칙은 초대 기독교와 중세시
대의 수도원의 규칙서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숨겨진 성서의 저자가 공동체의 규칙에 대해 해
설한 것을 아래에 옮겨보도록 한다.
"공동체의 규칙은 카이로의 에즈라 공회당에서 1896~1897년에 발견된 자도크 문서-다마스
쿠스 문서와 그 내용이 비슷하다. 쿰란 문헌의 12세기 필사본인 자도크 문서도 공동체 구성원
들에게 율법의 준수를 지시하는 규칙서인 것이다.
이러한 규칙서들과 유사한 것이 유대교 고대문헌들 가운데서는 찾아볼수가 없고 다만 이와 비
슷한 문헌들이, 기원후 2세기에서 4세기 사이 그리스도교에서 교회규칙이라고 일컫는 것이 많
이 나왔다. (게자 베르메스, 사해문서, 71페이지참조)
에세네파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를 시어도어 H.게시터는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게스터,영어
로 번역된 사해문서 35페이지 참조)구성원들이 이 공동체를 부를 때 사용한 명칭은 팔레스티
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사용한 교회라는 명칭과 똑같다. 공동체에는 거룩한 사람이 12
명 있어서 이 사람들이 전반적인 지도를 했는데, 그리스도교의 열두 사도와 놀랍게도 상응한다.
12명의 거룩한 사람 위에는 고위 지도자 3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요한,베드로,야고버가 초
기 그리스도교의 세 기둥으로 지정된 것(갈라디아서 2:9이하)과 같다. 공동체는 또한 메바케
림(감독자)이라는 정규 조직이 있었는데, 메바케림은 그리스어 에피스코피(주교)와 같은 말이
다. 공동체는 사막에서 길을 준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규정했는데, 이말은 세례자 요한이 자
기 사명을 규정할 때 구약성서에서 인용해 온 것이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제3권/
이동진 역 / 문학수첩/ P.262~263]
▶ 초대교회의 강력한 라이벌, 미트라교!
미트라(Mithras)는 고대 아리아인의 남신(男神)으로 빛, 진실, 맹약(盟約)을 관장했다.
BC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인 '리그베다'는 미트라의
이름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이 문헌에서는 미트라를 태양신이라고도 기록했으며 소
마술과 암소를 둘러싼 신화와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오래된 사료는 BC 14세기의 '보아즈쾨
이문서'로, 거기에서는 히타이트인과 미탄니인 사이의 '맹약의 신'으로 나타난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에서는 미트라(Mithra)라고 불리며, '미트라 찬가'에서 '죽음에서의
구세주','축복을 주는 자','승리자','전사(戰士)','목장(牧場)의 주인' 등으로 불렸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은 페르시아 제국의 전신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아르탁세륵세스 1세
가 BC 449년경에 남긴 비문(碑文)에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미트라의 기원에 관해서는 조로아스터교 보다도 더 오래된 고래 아리아인의 토속신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로마에 미트라교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을 무렵 이 종교는 페르시아의 조르아스
터교의 영향 아래 진실과 빛의 신으로 되어 있었고, 최고의 창조신인 아후라 마즈다 신성(神
性)의 한 분신으로 등장했다.
미트라는 아케메네스, 아르사케스, 사산왕조 등에서 왕조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고, 그것이
로마제국에서는 밀의종교(密儀宗敎)로 크게 유행을 떨쳤다.
두산세계대백과는 미트라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BC 1세기 전반 그리스도교의 유럽 침투 이전에 로마제국(帝國)에 널리 유포되어 있어서 새
종교인 그리스도교와는 유력한 경쟁적 종교였다. 미트라의 기원은 고대 인도, 이란의 민족시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발전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자연히 로마로 전파되어
밀의종교로서 특히 군인층에 널리 신앙되었다. 미트라교에 대해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르탁세
륵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의 비문(碑文)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로마에 나타났던
종교 형태는 이미 그 내용이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소(小)아시아나 메소포타미
아 지방의 토착종교와 혼성(混成)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BC 106∼BC 48)
황제의 동정(東征)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그리스도교로 개종(改宗)을 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
후 점차 모습이 사라져 갔다. 신자의 제례는 종종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행해
졌는데, 그 깊숙한 곳 암벽에는 '수소를 도살하는 신'의 부조(浮彫)를 볼 수 있다. 미트라 신전
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
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미트라교 (Mithraism)
항목]
미트라의 비밀이 흥미로운 것은 그 종교가 기독교의 근원을 추적할수 있는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트라의 전승은 기독교의 것에 비해 적어도 600년은 앞서고 있으며, 초대 기독교와 같은 시
기에 번성했다. 이 종파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으며, 3세기에는 수백 개의 미트라에움(미트라
를 숭배하는 지하 사원)들이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소아시아,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과 스코틀랜드 국경에 퍼졌다.
당시 초대교회와 미트라교가 공존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에 대해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두 종교가
로마에서 서로를 맞대고 존재하던 수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미트라교가 기독교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두 종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유사성들을 낳았다.
그러나 AD 5세기에 이르면 기독교가 힘을 얻자, 미트라교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한다. 기독교는 미트라교의 추종자들을 자신들에게 편입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
며 수많은 미트라에움들을 교회로 변신시켰다.
오늘날 많은 로마 교회들, 특히 로마의 성 클레멘타인 교회의 지하의 아치형 매장 토굴은 이것이 미트라에움들
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후에 많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의 숭배자였고, 그의 영
향아래 예수는 솔 인빅투스와 동화 되어 버렸다. 심지어 카톨릭의 교황이나 주교들이 대관식
이나 미사 때 쓰는 큰 모자의 이름은 '미트라'(Mitra)이다! (이 모자의 한글이름은 '주교관'이다)
미트라는 아래의 특징을 예수와 공유하고 있다.
① 미트라는 12월 25일에 태어났다.
② 미트라는 동굴, 바위, 처녀 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③ 미트라를 기리는 거룩한 主의 날은 즉 일요일(sunday)이었다.
④ 미트라는 천궁의 12궁도에 해당되는 제자를 거느렸다.
⑤ 미트라 교도들은 그가 부활한 날에 축제를 베풀었는데, 그 날은 지중해의 여러나라에서 춘
분축제 였으며,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이 되었다.
⑥ 미트라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미트라 성 삼위일체설을 형성하였다.
⑦ 전투를 끝낸 미트라는 무덤에 들어갔으며 3일 후에 다시 일어났다.
⑧ 미트라는 소와 관련이 있으며 '목장의 주인'(목자)으로 불렸다.
최근에 20~30 명이 들어 설 수 있는 지하 동굴들이 이탈리아를 포함 해서 북쪽 으로는 영국,
남쪽 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굴 되었다. 당시 로마 군대가 주
둔 했던 곳 에서는 어김 없이 발견되는 이 동굴들에는 이상한 인물과 장면을 묘사 하는 그림과
유물들이 공통적으로 발견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동굴들이 미트라교의 예배 장소 임을 밝혀
내었다. 이 미트라 숭배의 흔적이 발견된 지역은 영국, 이탈리아, 로마니아, 독일, 헝가리, 불
가리아, 터키, 이란, 알메니아, 시리아, 이스라엘 및 북부 아프리카등이다.
밀교였던 관계로 그들의 경전과 여타 정보가 전무 했지만, 부분적인 정보들이 당시 역사가들
의 서술이나 초대교회인들의 비판서에서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정보는 영웅전으
로 유명한 역사가 플루타르크의 진술이다. BC 67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 하고 있다
"소아시아 남 동부 해안의 '실리시아'에 미트라의 밀교 의식을 행 하는 큰 무리의 해적 떼가
있었다"
실리시아는 바울이 출생한 다소 라는 도시가 위치한 지역 이었다. 가장 오래 된 유물들은
AD 1 세기 말의 것으로, 3 세기에 교세가 가장 확장 되었으며, 5 세기 초 기독교의 득세로 수
그러 들었다. 신도들은 군인, 관료, 상인이 주를 이루었고 여성은 배제 되었다.
태양신 미트라는 '정복 불가능한 신' 또는 '불멸의 젊은 신'으로 묘사되어 주로 신도들은 군인,
관료, 상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여성신도는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후 미트라는 귀족과 황실
에서 받아들여 제국과 황제의 수호신으로도 격상 되었다. 5 세기경 기독교는 맹위를 떨쳐 많
은 미트라의 지하 사원을 접수 하여 기독교 사원으로 개조 한 곳이 여기 저기 드러난다. 기독
교 교회라고 생각 된 곳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미트라 그림들이 발견된 것이다.
몇 단계의 의식을 거쳐야만 최고의 진리에 접할수 있었던 그 들의 가르침은 철저히 신도들 사
이에 구전으로 전수 되었기에 학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교의에 대해 학설이 분분 했다.
미트라라는 이름은 페르시아 어로 계약 을 뜻하고, 지역에 따라 마이트로스, 미어, 메어 등 으로
불리기도 한다. 힌두교의 '마에트라'는 불교와 결합해 미륵신앙으로 발전해 나갔다.
로마의 미트라는 '솔 인빅투스'라고도 불렸으며, 로마의 저술가들에 따르면 미트라의 근원이 페르시아에
있다고 서술했다.
세상의 어둠과 악을 정복하기 위해 태양신 보냈다는 미트라는 사자상으로도 상징되었는데, 사
자의 입에는 벌(Bee)이 물려져 있다. 그 벌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갈대아어에서
'벌'은 '로고스'란 뜻도 된다.)
미트라는 '우라노스'(Ouranos, 빛을 비추는 자)로도 불리는데, 우라노스는 '크로노스'(Kronos)
와 동의어로서 크로노스는 '광선을 보내는 자' 혹은 '뿔이 나온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태양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빛을 준다는 것을 타오르는 등불과 켜진 밀랍초(wax candl
e)로써 상징하게 하였고(밀랍초를 사용한 것은 밀랍이 벌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양신 숭배종교의 모든 의식에는 타오르는 등불과 밀랍 촛불의 행렬이 필수적 요소였다. [Al
exander Hislop / 두 개의 바빌론 / P.193~197] 이런 영향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절대적
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 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
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월 25일로 경축 되었으며, 만인의 죄
를 대속 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 했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춘분)주기와
일치 하며 점성학의 12궁도(宮圖)에 해당되는 12 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마제국
에서 국가적 축제로 행했던 농신제(農神祭)중에 미트라신을 섬기는 절기로 12월 25일을 정하
고 있었다. 이 12월 25일이 로마달력으로는 서양의 동지절에 해당되는데 이 문제는 뒤에서 자
세히 설명하겠다.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안식일(토요일)을 지켰으나, 일요일을 신성하게
여긴 미트라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송낙원은 '제2기 사도 후 시대'(100~313년)를 정리하며
초대교회에서의 안식일(토요일) 예배가 말기에 이르러서 서서히 일요일 예배로 바뀌었다고 설
명하고 있다. [송낙원 / 세계기독교회사 / 이건사 / P.101]
결국 이런 문화적 토양속에서 로마교회는 일요일 예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모든 교회가
일요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러자 태양신 숭배자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Sunday)에 쉬어야 한다"고 법령을 제정하게 된다.
[교회사 핸드북 / 생명의 말씀사 / P.144]
"콘스탄틴 대제는 처음으로 칙령을 내려 일요일에 정무와 사법의 일을 쉬게 하고 이어서 이날
에는 군대의 조련, 공연물의 관람을 금지 하였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의 제도를 그대로 옮기
려고 하지는 않았다. 동방에 있어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서 지켰다." [김의환 박사 감수 / 교
회사 / 세종문화사 / P.145]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들은 2세기경에 미트라교의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동방 교회들은 321년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이 내려질 때까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황제의 칙령 속에 나타난 '존엄한 태양의 날'이라는 표현을 볼 때, 일요일 휴
업령은 로마의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미트라교도들을 배려한 칙령이었다고 볼수 있다.
미트라교에 따르면 그 전에 등장했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따라 세상이 선과 악의 끊임없는
전쟁터였다고 주장했다. 이 세계는 악마의 숙주들과 신을 섬기는 선민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
장소인 것이다. 신성이 육체들, 그리고 빛의 선한 운명을 망치는 어둠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미트라는 태양신의 신성한 아들이자 우주의 어둠에 대항해 싸웠던 선한 구원자를 나타낸 것이
며,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악의 앞잡이들과 싸웠다.
미트라는 천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아
졌다. 미트라는 남녀간의 동침을 거치지 않고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동굴속의 바위
에서 솟아났다. 미트라의 조각이 알 모양의 '생식 바위'(petra genetrix)로부터 뛰쳐나오는 벌
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의 출생을 나타내고 있다. 미트라는 악마의 억압으로 동굴속 바위
에 감금되어 있다가 '애욕의 열에 의해서'(solo aestu libidinis)태어난다.
미트라는 12월 25일,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낮은 날에 있는 동지 전날, 목동들만 출생의 과정
을 지켜보는 가운데 태어났다. 새벽빛이 밝아올 때, 사제가 미트라의 동굴사원에서 나와 "신이
태어났도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신도들은 종을 울리고, 축가를 부르고, 촛불을 켜고, 선물을
나누고, 빵과 물로 성찬례를 행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신화를 살펴보면, 어머니인 데메테르 여신에 의해 동굴에 감춰진 페르세포
네에게 제우스가 뱀으로 변장하고 그녀를 임신시켰다. 미트라와 디오니소스 신화속에서 그들
이 태어나고 잉태된 동굴은 대지(垈地)의 자궁(子宮)을 상징한다.
"이윽고 동굴에 이르자, 마리아가 해산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 마을로 돌아갈수 없다고 고백
하고는 '이 동굴로 들어갑시다'라고 말했다...(중략)...동굴은 빛으로 가득찼다. 그 빛은 등불과
촛불의 빛보다 밝고, 태양자체의 빛보다 더 찬란했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 2권 /
이동진 역 / 문학수첩 / P.63~64]
"요셉이 산파에게 '자 마리아를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산파가 더 들어가려고 할때 두려움을
느꼈다. 동굴이 찬란한 광채로 가득찼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 2권 / 이동진 역 /
문학수첩 / P.21]
위에서 인용한 것은 예수의 어린시절을 담고 있는 전혀 다른 2개의 외경이다.
초대교회의 여러 전승들에 따르면 예수도 동굴에서 태어났다. 순교자 저스틴과 3세기의 오리
겐은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렀던 집이 동굴 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술 더 떠서 콘스탄티누스
의 모후 헬레나(Helena)는 유대땅을 돌아다니며, 기적을 통해 예수가 매달린 진짜 십자가를
동굴에서 발견했다며 그곳에 성묘교회를 짓고, 다시 예수가 태어난 동굴을 발견했다고 주장하
면서 그곳에 예수탄생교회를 지었다. 헬레나가 발견한 예수 유적이 날조된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예수와 관련된 유적이 동굴과 관련 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탄생이 동굴에서 이루어 졌다고 믿은것이 확실하다.
현재 정경으로 인정된 예수의 어린시절을 담고 있는 2개의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은 예수가
태어난 장소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부모는 여관을 구하지
못해 갓태어난 예수를 구유에 눕혔다고 한다. (누가복음에서도 특별히 장소에 대한 정확한 언
급이 없다) 따라서 4복음서만 받아들인 후대 기독교인들은 "구유가 있으니까 그 곳은 당연히
마굿간이나 외양간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세진 박사 같은 고고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베들레헴에서는 동굴 위에 집을 짓고 아래층의 동굴은
외양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바위를 깎아 구유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트라는 점성학에서 말하는 천궁의 12궁도에 해당되는 제자들을 거느렸으며, 길, 진리, 빛, 말씀,
신의 아들, 착한 목동 등 다양하게 묘사 되었다. 종종 죄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어린양을 이끄는 것으로
그려졌다.
미트라교의 신자들에게는 정의와 사랑의 신인 오시리스를 찾는 40일이 있었다. 이 종파는 또
한 불길한 금요일(예수가 처형된 성 금요일과 유사)을 지켰는데, 그 날은 지구를 비옥하게 한
미트라의 희생적인 황소 도살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전투에서 지친 미트라는 상징적으로 시체
로 표현되며, 신성한 동굴(바위 무덤)에 안치된다. 이것은 후에 기독교의 부활절 전의 예수의
고난주간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미트라는 3일후에 동굴에서 부활한다. 이것은 당시의 춘분 이었으며, 이스터 여신의
축제(봄의 여신축제, 이스터는 지구의 여신을 이르는 라틴어에서 딴 말)는 미트라의 부활절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종교회의에서는 이날이 예수의 부활절이 되어 버린다.
또, 미트라의 숭배자들은 태양의 에너지가 인간의 두뇌에 축적 된다고 믿었고 이것이 후광으
로 나온다고 믿었다. 어것은 후에 중세시대 성화에서 예수의 얼굴모습을 표현할 때 묘사했던
얼굴의 후광에 영향을 끼쳤다.
미트라 숭배자들은 천국과 지옥, 마지막 심판, 구원, 부활등의 교리를 믿었다. 마지막 성만찬
의 이야기도 매우 흡사하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
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 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
이다. 미트라 교의 입문은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세례를 시행했다고 한다.
미트라 동굴에서 자주 발견되는 하나의 벽화가 있는데, 그것은 태양 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황
소를 죽이는 그림이다. 돌에 새겨진 벽화에는 황소, 개, 까마귀, 뱀, 전갈들이 나타나며 여러
곳의 그림 중 사자와 물잔도 종종 포함 되어 있다. 뒷 배경으로 많은 별들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 부조물에 나타나는 동물들은 모두 별자리를 가리킨다. 황소는 황소자리이며 그 외에
개, 사자, 뱀, 까마귀, 전갈 등 각각 별자리에 해당된다. 이 그림이 페르시아의 미트라 에서는
발견 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최근의 학자들은, 로마의 미트라가 이름 만 빌렸을 뿐이지
새로운 신앙 체계 임을 밝혀 내었다. 로마의 미트라 지하사원에는 황소 도살 장면이 항상 동굴
안에 놓여져 있었는데 이것은 점성술과 관련이 있는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은 뒤에서 언급하겠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종교가 불교의 미륵신앙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미륵(彌勒)이란 산스크리트어의 마이트레야(Maitreya)라는 말을 소리글로 옮긴 것인데, 이 단
어는 '계약','약속'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미트라도 '계약','약속'을 의미한다
는 점에서 같은 어원이라고 볼수 있다.
"특히 말세사상과의 연관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부각되어 사회 모순을 해결짓
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미륵 彌勒 항목]
불교의 미륵사상은 종말론적인 사상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배화교(拜火敎)를 믿다가 부처
의 제자가 된사람도 있다고 불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종교라는것은 이렇게 서로간에 영향을 받
아서 생기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할수 있겠다.
▶ 물고기좌의 시대
필자가 점성술(占星術)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일반적인 기독교인은 "그런 미신이 기독
교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라며 반문을 하시리라 본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점성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배경을 분석하기 위해 점성술
을 논하지 않을수 없다. 비록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점성술을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독교가
등장할 당시 사회상황에서 점성술의 영향은 막대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천체를 관측하는
것은 농사와 관련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천체의 상황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역사를 좌우한다고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더욱이 필자가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것은 기독교의 주요상징이 점성술과 관련 되었으며, 점성
술에 의하자면 예수는 기원을 전후로 해서 필연적으로 등장할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예수가 등장하는 그 무렵, 즉 기원을 전후로 한 그때는 점성술로 따지자면 상당히 주목하지 않을수
없는 시기이다.
BC 1세기의 로마의 저명한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년~BC 19년)
는 쿠마에의 시빌의 신탁을 상기시켰다. 이 시인은 에콜로구스 제4권에서 구세주가 올것을 예
언했다!
"우리는 시빌의 노래처럼 마지막 시대에 이르렀다. 시간의 여신은 잉태를 했으며 위대한 일련
의 시대가 새로워 진다. 정의의 성처녀가 우리에게 돌아 올것이다. 이미 새로운 시대의 첫 탄
생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보내졌다. 이 탄생과 더불어 철의 종족은 멸하고 황금인간이 세계를
물려 받으리라. 아기의 탄생을 웃음으로 맞아 들여라. 영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황소는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너의 요람은 꽃으로 장식되어 너를 어루 만지리라. 시간이 임박
했으니 어서오라. 모든 창조물이 다가올 시대를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라! 아기여, 너의 어머니
를 미소로 맞이하라." [Virgil /The Pastoral Poems/ Eclogue4 P.53]
시빌(Sibyl)은 천년을 살았다는 그리스 신화속의 무녀(巫女)로 그녀의 위명(爲名)으로 수많은
신탁(神託)이 등장했다. BC 2세기 무렵에 들어서는 유대인들도 시빌의 신탁집을 작성했는데,
AD 2세기 무렵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들이 기록한 시빌의 신탁집도 등장하게 된다.
시빌의 신탁집에는 종말론과 메시아 사상들로 가득한데 그것을 통해 BC 1세기경의 로마인이
구세주를 예언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할수가 있다는 말인가? BC 1세기의 로마인이 여호
와의 계시라도 받았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 당시 만연했던 점성술을 살
펴보지 않으면 않된다.
농경문화가 시작됨과 더불어 씨를 뿌릴 때, 추수 할 때, 겨울을 나고 봄 농사 준비 할 때를 놓
치지 않기 위하여 4 계절의 구분점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의 문명이 북 반구에서
일어났으므로 이러한 지식들은 북 반구에서 관찰 한 것을 나타 낸다.
당시의 태양은 12월 22일 경 가장 낮은 곳에서 떠 오르다가 3일 쯤 지난 12월 25일 경 부터
다시 지구에 가까이 다가 오기 시작 하는데 이것이 바로 동지(冬至) 이다.(태양신의 탄생)
3월25일경 부터 드디어 밤보다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春分)을 맞게된다. (봄의 여신축
제, 태양신의 부활) 6월25일경 태양은 지구와 가장 가까워지는 하지(夏至)다. 하지를 전 후로
밤이 길어지기 시작 하면서 추수를 준비 할 때가 다가온다. 9월25일 추분(秋分) 이후에는 어두
움의 길이가 빛을 능가 하기 시작 한다. 이 4 계절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지구의 회전 축이 태
양을 도는 면에 대해 23.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남 북을 오락 가락 하는 태양의 운행은 12궁도(Zodiac)를 따라 움직인다.
지구에 적도가 있듯이 천구에도 적도가 있고, 천구 적도와 태양의 운행 항로가 교차하는 곳에
바로 춘분과 추분이 일어난다. 춘분과 추분의 바로 중간 지점들에 하지와 동지가 있는 것이다.
그 교차로는 십자가(X)의 모습과 유사하며 그것을 통과하여 암흑 권세(추분)를 이기며 다시 부
활한 것이 태양(=주님)이다.
고대인들은 태양과 달, 움직이는 별들(행성들), 혜성들, 그리고 기타 천체들이 고정되어져 있
는 지구 주위를 움직이고 있는 천상의 신들이라고 믿었다. 태양신(Sol invictus)이 천상의 신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특별히 경배되었고 12월 25일 동지 동안 하
늘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매년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되었다.
황도면(태양이 하늘에서 이동하는 길)이 12궁도를 형성하고 있는 열두 가지의 별-패턴 지대
를 지나쳐가기 때문에, 태양은 12궁도의 신들을 낳는 혹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는 신으로 생각
되었다.
지구는 또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속성을 알면 당시의 미트라교와 기독교의 밑바닥에
깔린 메시아 사상을 읽을수 있다. 지구는 온통 딱딱한 물질로 되어 있는 줄 알지만 사실, 지구의 많은
부분을 물이 차지 하고 있다. 땅들도 여러 종류로 되어 있어서 딱딱한 바위질도 있지만 더 연한 흙으로
이루어 진 곳도 있다. 즉, 밀도가 균일 하게 분포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못 느끼지만, 태양과 달은 지구에 막강한 인력을 행사 하고 있다. 부드러운 물이 달의
인력에 끌려 간만의 차이가 일어나듯이, 태양과 달이 행사하는 인력에 대해 지구는 균일 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지구는 밀도가 다른 물질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구의 자전
축이 미세 하게 떨리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잘 조여진 차 바퀴는 떨림이 없으나 덜 조여진 바퀴
는 구르며 좌우로 떨려 대는 현상과 마찬가지이다. 이 떨림은 전체적으로 매우 미세 해서 북극
이나 남극점을 기준으로 불과 직경 수 미터의 원을 그려 대고 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BC 128 년 그리스 천체 관측가 히파르코스(Hipparchos) 였다.
그는 12궁도의 별자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뒤쪽으로 천천히 흘러서, 동지에 다다른 태양의
위치와 비교할 때 하늘의 새로운 위치에 나타난다는 발견을 한것이다. 물론, 당시의 히파르코
스는 지구는 움직일 수 없었던 것으로 믿었으므로 지구의 떨림현상을 지구 밖의 것, 즉 천체
적도의 후진으로 관측했다.
'분점의 세차 운동'(Precession of Equinox)으로 불리워지는 이 현상은 12 궁도중 하나를 완
전히 벗어 나는데 2,160 년이 걸리며, 12궁도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데 25,920 년이 걸린다. 이
주기는 현재 인간이 발견한 정확히 반복 되는 주기 중 가장 커다란 것이다. 히파르코스가 이런
발견을 하던 당시에는 태양신의 부활이라고 말할수 있는 춘분은 양자리에서 나타났다. 양자리
전에는 춘분이 황소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예수가 등장할 무렵부터 현대까지 춘분은 물
고기 자리에서 일어 나지만, 2040년경에 이르면 춘분은 물병자리에서 일어 나게 되어 있다.
마찬 가지로 지금의 북극 성(Polaris)은 훗날 우리의 북쪽에서 벗어 나게 되며, 과학자들은 이
미 각 시대의 새로운 북극성들의 리스트를 작성 해 놓고 있다.
이제 미트라와 점성술의 관계를 살펴 보자. BC 2000 년 경 부터 예수가 등장할 그 무렵까지
춘분은 양 자리에서 일어 났다. 바로 전 시대, BC 4000~BC 2000 무렵에는 춘분이 바로 문제
의 황소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 때의 천구 적도는 개(Canis Minor the Dog), 뱀(Hydra the Sn
ake), 까마귀(Raven), 전갈 (Scorpio the Scorpion)의 자리를 교차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 뱀, 까마귀, 전갈은 12궁도(Zodiac)가 아닌 88개의 별자리를(Constellations)뜻한다. 이
모든 동물들이 미트라 사원 벽화의 동물들과 일치 하고 있다.
또한 황소 자리 시대의 동지와 하지는 각각 사자(Leo the Lion) 자리와 물병 (Aquaries the W
ater Bearer)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트라 벽화에 있는 또 다른 비밀 즉 사자와 물잔(Cup)은 이
절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미트라 사원 벽화에 대해서 분분했던 학자들은 위의 설명이 나오자
조용 해져 버렸다. 가장 명쾌한 대답 이었기 때문이다. 미트라는 12 제자(별자리)를 거느리고,
춘분의 교차 지점에서 하늘의 십자가에 매달려 만인을 대속 해 죽으시고, 3 일 만에 부활 해
황소를 희생 제물로 삼아 만인을 구속 한다!
"영 중의 영이시여, 당신의 뜻이 그러 하시다면, 저희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탄생을 주시어 저
희로 거듭 나게 하옵소서. 또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호흡할 지어다" [미트라 기도 문 중]
또 한가지 말해 둘것은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점성학과 떨어질수 없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상징할 때 가장 우선시 되는 기호는 십자가지만, 그 다음 상징으로는 두 마리의 물고
기를 들수 있을 것이다.
그 물고기상징에 대해 예수가 어부 베드로를 제자로 삼았기 때문 이라고 하거나, 초기 기독교
가 박해받을 때 그 기호가 기독교 신자들끼리의 암호였다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어째서 두 마리의 물고기인가? 점성술에 대해서 약간알고 계신 분이라면, 즉시 그것
이 물고기좌의 상징임을 알아채신 분이 많이계실 것이다. 점성술에서 물고기좌는 서로 꼬리를
묶고 반대방향으로 헤엄치고 있는 한쌍의 물고기로 그려진다. 일부학자들은 크리스트(chirst)
의 어원이 그리스어의 물고기(ichthys)에서 기원되었다고도 한다.
당시 지중해에서 만연한 점성술로 인해, 그 당시 춘분점이 양좌에서 물고기좌로 넘어가면서
약 2천년동안 물고기좌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믿음이 퍼져나갔음이 분명하다. 점성술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믿음은 곧바로 새로 등장할 태양신의 전설로 퍼져 나가게 되었을것
이다.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BC 2000년 경 부터 예수 시대 까지 춘분은 양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외 3 절기는 각각 염소, 저울, 게 자리에서 일어 났고, 이 4절기는 천구 적도
의 후진이 발견되기 훨씬 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 양의 자리가 끝나고 물고기좌의 시대가 도래
하니 어린양이 희생 되어야 할 시대가 온것이다.
미트라교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보면, 원래의 미트라 신앙은 조로아스터교 보다도 오래된것으로
추측된다. BC 15세기경의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 '리그베다'에 따르면 미트라를
태양신으로 부르며 소와 관련 짓는다.
여러정황으로 보아 미트라 신앙은 애초부터 천문학과 관련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로아스터교의
등장 이후 미트라는 그 종교의 하위천사로 흡수 되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거꾸로 조로아스터교의 교리까지
흡수하고 새로운 미트라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기원을 따지자면 고대 아리아인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트라 신앙에는 황소좌가
끝나던 시대의 종교관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추측된다. 미트라에움의 벽화들이 BC 4000~BC
2000년에 해당되는 별자리와 관련 되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황소좌의 시대가 끝나자 미트라는 황소를 잡는다. (실제 현대까지 통용되는 서양의 카드 점치기-Tarrot-에는 아직도
황소시대의 조디액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부질없는 짓이지만 이런 이유로 더 더욱 쓸모 없음을
아시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양좌의 시대가 끝나니, 유대인의 여호와는 어린양(예수)을 잡는다. 미트라
와 예수는 '죽이는자'와 '죽임을 당한자'로 구별되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 한 시대
를 마감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미트라는 힘겹게 황소를 죽였으나 치명상을 입고 무덤에 들
어간다. 그리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3일후에 부활한다!
이집트 피라밋들이 세워 졌던 시대로 돌아가 보면, 춘분은 황소 자리에서 일어 났으며, 추분은
전갈 자리에서, 동지와 하지는 사자와 물병 자리에서 일어 났다. 피라밋 시대의 주요 절기는
각각 황소, 사람, 사자, 독수리로 대표 되었던 것이고 이집트의 피라밋이나 스핑크스는 이런
지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이집트 인의 천체 지식이 성경에 흡수 된 흔적이 보인다. 기독교인중 황소, 사람의 얼굴 같
은 생물, 사자, 독수리 하면 금방 알아 차리시는 분이 있을 것이다. 바로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케루빔의 모습인데, 이 천사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점성학에서 쓰이는 별자리가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에스겔 1장 10절]
여기서 등장하는 황소는 황소좌를 뜻하고, 사자는 사자좌를 뜻한다. 사람의 얼굴같은 생물은
고대 점성술에서 물병좌에 해당 하는데 현재까지도 점성학 책에선 물병좌를 얼굴이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독수리는 현대에서는 전갈좌로에 해당된다. 현재에도 전갈과
독수리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그런데 케루빔의 4개의 얼굴은 점성술로 치자면 황소좌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에스겔이 실
존인물이라고 가정해도 그는 BC 597년 유대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는 인물
이다. 그 시기는 양좌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본 케루빔은 어째서 황소좌의 시대를 반
영하고 있을까?
앞서서 지적했듯이 케루빔은 상당히 오래된 가나안의 토속신 이었을 것이다. 황소좌에 해당되
는 시기를 반영하여 케루빔의 모습이 형성 되었으나, 시대가 바뀌어 양좌에 가서도 시기를 반
영하지 못한것으로 추측된다. 또 양좌로 바뀐 그 시기에 맞춰 다른 신이 등장 했으나 케루빔의
인기는 여전 했을지도 모른다. 미트라가 계속해서 인기를 끌었듯이 말이다. 이 에스겔의 케루
빔과 비슷한 네짐승,네생물등이 요한 계시록에도 등장 한다.
덧붙여서 최근에 등장한 모 종교 단체에서 케루빔을 가르켜 UFO라는 주장하는등 만화영화 같
은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 야훼를 가르켜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을 보아할
때, 노아의 방주가 실존했다고 우기는 창조과학회와 그야말로 막상막하 용호상박이다!
▶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의 기원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알려진 예수의 존재가 얼마나 허구적이라는 점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로도 알수가 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하필이면 고대 중근동의 동지축제와 춘분축제와 정
확하게 일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예수는 기가막히게 동지 축제에 태어나고, 춘분 축
제때 부활 했는가?
(1) 크리스마스의 기원
독일의 종교개혁가였던 파울 어니스트 야블론스키(Paul Ernst Jablonski)에 따르면 12월 25일
을 예수의 탄생일로 기념 한것은 4세기 교회가 채택했던 기독교가 이교도화 된 많은 일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베네딕트 수도사인 돔 쟌 하도용(Dom Jean Hardouin)도 카톨릭 교회가 이
교도 축제 들을 끌어들였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급물살을 타게 된
다.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 혁명을 이끌었던 비국교도들(dissenters)은 1664년 법령(Act of Pa
rliament)에 따라 크리스마스때 가게들을 열도록 했다.
1659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를 금지했고, 1870년에는 크리스마스에 학교를
닫지 않고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초창기의 개신교는 크리스마스를 거부했으나 1836년 미국 앨라바마
주에서부터 공휴일로 지정한 이후 크리스마스 반대의 물결도 점차 수그러 들었다.
그렇다면 초기의 청교도들이 크리스마스를 그토록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와 Mas(미사,축제일)의 두 단어가 합하여 이루어진
말로, '메시아 제전'이라는 뜻이다.
12월 25일(크리스마스)은 예수가 태어난 날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정확한 예수의 탄생은 알
려져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12월25일은 조로아스터교와 미트라, 로마인들의 태양신을 맞이
하는 축제였다! 그날은 엄연하게 예수탄생 이전에도 동지날 축제와 수많은 메시아와 신들의
축제 였다.
12월25일은 일년 중 낮의 길이가 짧아지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속한다. 농경 생
활을 하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태양은 곧 절대자의 상징이었고 태양이 다시 그 힘을 회복하여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이날은 생명의 소생을 예고하는 날로서 고대인들이 메시아 신
앙으로 미래를 소망하던 날이었다.
알렉산더 히슬롭은 그의 저서 '두 개의 바빌론'에서 12월 25일의 기원은 고대 바빌론 종교에
서 하늘의 여왕인 이쉬타르의 아들 탐무스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종교적 축일이었으며, 이집트
의 하늘의 여왕인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가 태어난 날이라고 언급한다. [알렉산더 히슬롭/ 두
개의 바빌론 /도서출판 안티오크]
그런 종교적 관습은 후에 등장한 조로아스터교와 미트라교에도 이어지게 된다. 12월 25일은
다시 조로아스터교의 태양신의 생일이 되었으며, 다시 미트라 숭배자들에게 태양신(미트라)의
탄생을 숭배하는 날로 이어졌다.
BC 336년경 부터 로마에서는 12월 중순부터 연말까지 농신제(Saturnalia)를 지키면서, 축제
를 베풀고 거리에서 가면을 쓴 채 술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기독교가 헬레니즘문화에 뿌리
를 내리기 위해서 그들의 풍습을 하나둘씩 흡수하면서 손쉽게 이방인들을 교화시킬 수가 있었
다. 이것을 기독교의 토착화라고 한다.
예수가 태어난 날은 복음서에 기록이 없는데, 다만 2세기 때 이집트의 동방교회에서는 1월 6
일을 성탄절로 기념했다고 한다. 그러나 353∼354년경 교황 리베리어스가 1월 6일을 신현절
혹은 세례절로, 12월 25일을 성탄절이라고 공식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BC 45년 경
시작된 로마의 율리안 달력에 따르면 12월 25일이 동지(冬至)였기 때문이다.
매클린톡과 스트롱의 교회문헌 백과사전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해 놓았다.
"크리스마스 기념은 신이 명령 하신것도 아니며, 신약에서 기원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탄
생일은 신약이나 여타자료에서도 확인 할수없다. " [ J. 매클린톡 & J. 스트롱 공저 / 교회 문
헌 백과사전 (Cyclop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뉴욕 1871
년판 2권 / P.276]
헨리 대니얼 롭스의 예수당시의 일상생활에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양은...(중략)...겨울에는 우리안에 넣는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겨울에는 전통적인 크리
스마스날짜가 옳을 수 없음을 알수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는 그때 목자들이 들에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 [헨리 대니얼 롭스 / 예수당시의 일상생활 / 뉴욕 1962년판 / P.228]
이스라엘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북부와 남부의 기온 차가 커서 12월에 남부 해안에선 해수욕
을 즐길 수 있는가 하면 북부 지방에는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 하다. 북반부는 지중해
성 기후이고, 요르단 지구대는 여름에 찌는 듯이 더우며, 남반부는 전체가 네게브 사막이기 때
문이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겨울철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는데, 10월 말 이후에 목자들이 들판에서 자
신들의 양떼들을 먹이고 지키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 아닐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경부터 양떼들을 들판에 방목하다가 10월경 첫 비가 내
릴 때쯤에는 추위로 인해 양떼를 몰고 돌아와서는 우리 안에서 겨울을 나게 했다. 에스라 10장
9~13절을 보면, 에스라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았을 때인 아홉째 달 이십일 경(현재달
력으로 11월 중순경 이후임)에 비로 인해 추위에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탄생할 때 목자들이 밤을 세워 들판에서 양을 몰았다고 한다.
(참고삼아 말하면, 팔레스타인은 여름철에도 밤과 낮의 기온 차이가 40도나 될 때가 있고,
밤은 떨릴 정도로 기온이 내려간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채권자에게 담보로 잡은 외투를 저녁에는
채무자에게 돌려주라고 권고하고 있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한 이유는 좀 모호한 면이 있지만,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느 동
지 즈음에 ' 태양의 재탄생'을 위해 지켜졌던 이교축제 기간과 일치하게끔 그 날짜(12월 25일)
가 선택되었다는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중략)...로마의 농신제(농업의 신인 사투르누스와
신생되는 태양신에게 바쳐진 절기)는 또한 이 시기에 지켜졌으며, 일부 크리스마스관습들은
그 고대 이교 축제에서 유래된것으로 생각된다. " [아메리카나백과사전 6권 / 1977년판 / P.666]
신 카톨릭백과사전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복음서에서는 그 달과 그 날짜를 알려주지 않는다...(
중략)...H.유시너가 제기하였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는 가설에 의하면, 그리
스도의 탄생이 동짓날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 이집트인에게는 1월 6일)로 지정된 이유
는, 그 날 태양이 북쪽 하늘로 되돌아 오기 시작할때 이교도인 미트라 신봉자들은 무적 태양의
탄생일을 축하 하였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아누스는 274년, 12월 25일에 태양신을 제국의 으뜸가는 수호신으로 선포 하였으며
한 신전을 마르티우스 광장에 있는 그 신에게 바쳤다. 그 후 크리스마스는 태양숭배가 로마에
서 특히 성행할 때에 시작하였다. " [신 카톨릭백과사전 3권/1967년판 / P.656]
두산세계대백과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던 봄의 광명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동지(冬至)의 축일, 다시 말하면 태양숭배의 습속을 이용하여 그리스도 탄생을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농경사회의 로마에서는 '사투르날리아'라는 농경신 새턴의 제일
(祭日)이 12월 21~31일(혹은 17~24일까지, 또는 1월 1일)까지 계속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이 신은 본래 그리스에서 왔다고 전해지는 고대 이탈리아의 신으로서, 크로노스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그리스에서 와서 더 오래된 야누스의 도움으로 '황금시대'의 즐거운 날을
보내다가 문명화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새턴은 특히 사람들에게 대지의 경작법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새턴은 재배와 포도의 채집과 관련되어 있다. 이 크로노스 신(로마에서는 사투르누
스신)을 제사하는 '사투르날리아' 기간에는 노예도 자유롭게 주인의 연회에 참석할 수가 있으며,
혹은 주인이 거꾸로 노예에게 봉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연령, 성별, 계급의 구별 없이
연회, 경기, 행렬 따위가 벌어졌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도 서로 선물을 교환 하였다.
이 기간 중에서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으로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라고 하여 특히 기념
되었다. 또 '미트라의 축일'도 이 날이었다. 미트라는 본래 페르시아인의 신으로서 태양과 동
일시된 인도-유럽 민족의 옛 신성(神性)이었다. 이것이 로마 사람들, 특히 군인 ·병사 사이에
서 숭배되어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것은 태양신, 불패의 태양으로서 숭경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켈트 민족의 제사(祭司)계급이었던 드뤼도들도 그들의 높은 성소(聖所)에서 이 기쁜
날을 축하하고, 또한 게르만인도 이 날을 유쾌하게 축하하였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
이 이러한 농경력(農耕曆)상의 성대한 제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을 결합시킨 것이 크리스
마스이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크리스마스 Christmas 항목]
로버트 J. 마이어의 '축전-미국인의 축일 전집'이라는 책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축하되기 이전, 로마 세게에서의 12월 25일은 나탈리스 솔리스 인비크티, 즉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이었다. 율리우스력의 동지 직후에 벌어졌던 이 축제는 태양신
미트라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중략)....미트라 숭배의 영향외에도, 이교의 힘이 작용하였다"
즉, 크리스마스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교도적인
관습들을 흡수한 것이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같은 개혁자들과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은 이같은 크리스마스의 비성
경적인 배경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의 미사는 물론이고 크리스마스를 교회
의 절기인 양 받아들이는 것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지만, 이미 오랜기간동안에 지켜져왔던 축
제일 이기에 사라질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관습은 고대 이집트에서의 동지제(冬至祭) 때의 나뭇가지를 장식하고, 로
마의 동지제 행렬에서는 촛불을 단 월계수 가지 장식을 들고 행렬을 했던 성목(聖木)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있다. 흔히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된데는 8세기경 독일에 파
견된 선교사 오딘에 대한 전설이 있지만, 그것은 전설일 따름이고 신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교도들이었던 유럽인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던 나무숭배는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에도 존속하였는데, 마귀를 추방하기 위해 신년에 집과 헛간을 전나무로 장식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새들을 위해 나무를 세우는 스칸디나비아의 관습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 [The New E
ncyclopedia Britannica / Christmas Tree 항목]
고대 로마인들은 농사의 신 새턴을 위해 농신제 기간인 12월25일에 감탕나무 가지로 신전들
을 장식했다고 한다. 또, 고대 켈틱 영국의 드루이드(Druids) 교도들은 겨우살이 나무가지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가지는 악귀와 마법과 그 밖의 재액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호신부로 사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우살이 가지 밑에서 입맞춤을 하면 결혼하게 된다
는 미신도 생겨나기도 했다.
또, 크리스마스 트리와 더불어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주인공인 산타클로스는 일반적으로 알려
진바에 의하면 미라(Myra)의 주교 성 니콜라스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성 니콜라스에 대한 상당부분은 거의 전설에 지나지 않고, 알렉산더 히슬롭의 설명에
따르면 산타클로스의 실체는 다름아닌 로마의 농신 새턴(Saturn)의 분신이라는 것이다. 가령
농신제의 풍습 중에 작은 인형을 선물로 교환하는 풍습도 변형된 것 이라고 주장한다. [알렉
산더 히슬롭 / 두 개의 바빌론 / 도서출판 안티오크]
그렇다면 이런 이교도축제일이 어떻게 예수의 탄생일이 되었는가?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날짜를 무적 태양의 탄신일을 알리는 표가
되는 이교 로마 축제일과 일치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
a / Christmas 항목]
(2) 부활절의 기원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부활절 역시 이방종교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부활절은 영어로 이스터(Easter)라고 하는데 그 단어는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 혹은 유
대교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이교 여신 즉, 낮과 봄의 떠오르는 빛의 여신 이름으로부터 온 말로, 지중해에서 지냈
던 춘분축제(봄의 여신축제)가 기독교식으로 토착화 된 것을 의미한다. 튜튼족 여신 에아스트
레(Eastre)의 날이 토착화 되어 영어 이스터(Easter)가 된 것이다.
부활절을 뜻하는 명칭인 이스터(Easter)에서 알수 있듯이, 그 기원은 춘분(春分)때 봄의 여신
축제의 변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부활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해마다 바뀌는 것도 그것이
춘분의 영향이다.
이스터(Easter)는 에오스트레(Eostre), 오스테라(Ostera), 아스타르테(Astarte), 이쉬타르(Ishtar)의 현대적
표현이며, 히슬롭(Hislop)에 따르면 이 중 마지막 것인 아쉬타르(Ishtar)가 오늘날 우리가 발음하고 있는
부활절(Easter)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미국인의 연례 기념일 편람'은 여신 오스테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스테라는 발할라 신전의 문을 열어 발데르를 맞이하는 여신이다. 발데르는
그의 순수함 때문에 백색의 신이라 불리며, 그의 이마로 인류에게 빛을 비춰주기 때문에 태양
신이라 불린다." [Stephen G. Christianson, Jane M. Hatch / The American Book of Days]
웹스터의 신 국제 사전에서는 부활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고대 이교도들의 봄 축제, 2.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로서 3월 21일 춘분이 지
난 뒤에 오는 만월을 기준으로 해서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된다. 부활절은 춘분과 음력
이 연결된 일자이기 때문에, 그 날짜는 매해 달라진다." [Webster's 3rd New International Di
ctionary / Easter 항목]
'성서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스터라는 명칭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비드(Bede)에 의하면, 이 명칭은 고대 튜우튼
족이 4월에 희생제물을 바쳤던 봄의 여신 '이스터'(Eastre)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
의 부활을 기념하는 크리스천 의식은 아마도 이 이교도 축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정인
찬 / 성서대백과 / 기독지혜사 ]
중세의 성일과 축일이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성일의 명칭이 새벽과 봄의 여신인 오스테르라는 이교의 신에게서 따온 것이다." [Mediev
al Holidays and Festivals / Piatkus]
이 부활절(Easter)이란 말에서와 같이, 이 부활절 기간에 행하는 많은 관습들 역시 이방종교의
풍습에서 시작 되었던 것이다.
3세기경, 교회에서 지킨 부활 축일은 오늘날 '파스카' 즉 '유월절'로 불렸고, 이 날 기독교인들
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 '파스카'를 '이스터'라 불러 '춘분
뒤에 오는 만월(滿月) 직후의 일요일'에 축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였다. AD
325년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교회가 니케아 공회에서 춘분축
에에 맞춰 부활절을 정한 것이다. [카톨릭 백과사전, P.505]
부활절에 나누어 주는 달걀의 유래는 십자군 전쟁에서 어느 군인의 아내로 부터 비롯 되었다
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이 있으나, 그것보다 훨씬 전에 이집트와 중근동의 춘분 축제때 달걀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달걀은 생명이 싹트는 봄의 생명의 부활과 다산을 상징하고 있다.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E
aster)는 하늘로에서 유프라데스강으로 떨어진 거대한 달걀로부터 부화 되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종교의식에서 알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비밀스런 목적을
위해 사원에 알의 형상을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영국의 고대 드루이드교도(Druids)들은 자기
들 단체의 거룩한 상징으로 지니고 다녔으며, 로마의 풍작의 여신 케레스(Ceres) 행렬에서는
달걀이 앞서 갔다. 아테네에서는 박카스 제전이나 디오니시아카의 제전 때 달걀을 성별하여
바치는 종교행사가 거행 되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금빛을 띤 창조의 알을 숭배했다.
고대인들에게 달걀이 상징하는 의미는 두 가지 였다. 즉,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달걀과
티폰(Typhon)의 달걀이 그것이다. 이집트인들에게는 달걀이 태양, 즉 황금달걀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염색한 달걀을 거룩한 제물들로 사용하였다.
카톨릭 백과사전의 다음 인용구는 의미심장하다.
"사순절 동안 달걀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부활절 즐거움을 상징키 위해 붉게 물들인 달걀들을
부활(절)날 상위에다 갔다 둔다. 이 관습은 그 기원을 이교주의에 둘 수도 있다. 이는 봄
이 다시 오는 것을 경축하는 대단히 많은 이교 관습들이 부활절에 끌리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유럽에서 인기 있는 관습들의 사례였다. 부활절 불은 산꼭대기에서 마찰을 일으
켜 붙인 새 불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이것은 이교도에서 기원한 관습으로 겨울에 대해 봄의 승
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교들은 이 신성 모독적인 부활절 불들을 금하는 엄한 칙령을 발하였
으나 각지에서 이 관습을 폐지시키지 못하였다." [카톨릭백과사전 /제5권/ P.227]
대중 관습의 진기한 특징의 윌리엄 역시 카톨릭백과사전과 같은 견해를 보였다.
"초기 교회들이 확고 부동한 방침은, 근절하기가 불가능하였던 이 이교 의식들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부활절의 경우에는 변환시키기가 특히 쉬웠다. 자연의 태양이 떠
오르고 자연이 겨울의 죽음으로부터 깨어날 때의 기쁨은, 정의의 태양이 떠오를 때, 즉 그리스
도가 무덤에서 부활할 때의 기쁨으로 바뀌었다. 또한 5월 1일 경에 있었던 일부 이교 의식들은
부활절 축하에 대응하는 것으로 변경 되었다." [WALSH, WILLIAM S. / CURIOSITIES OF PO
PULAR CUSTOMS / Illus Lippincott Phila]
달걀과 더불어 부활절 토끼에 관하여 한가지 더 인용키로 한다. 부활절 토끼와 부활절 달걀은
둘 다 성적(性的) 의미의 상징이 있었으며 다산의 상징 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그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 상징 사전'은 부활절 달걀과 마찬가지로 부
활절 토끼도 고대의 관습으로부터 기독교에 흡수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부활절 달걀과 마찬가지로, 부활절 토끼도 고대 이교로 부터 기독교화 된 것이다. 토끼는 고
대 이집트의 전설에서나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달과 관련되어 있다. 토끼에 해당되는 이집트
어 'um'이 '열린'(open)이란 의미와 '기간'(period)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이 토끼는 어떤 주기
성 사상과 관련을 갖게 되었다. 즉 달과 인간에게, 그리고 젊은 청춘 남녀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다산과 새로운 삶의 상징이 되었다. 이와 같이 토끼는 부활절...(중략)...달걀
과 관련 되어 있다." [Encyclopaedia Britanica]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에, 부활절 달걀 혹은 토끼는 춘분에 즈음하여 생명의 새로운 탄생과 갱
생을 가져다주는 상징이었다. 야생토끼나 집토끼는 게르만의 여신 오스타라(중세 영국의 에오스트레)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마도 이 여신의 이름이 이스터의 어원일 것이다." [진쿠퍼 / 그
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 상징 사전 / 이윤기 역 / 까치]
부활절 시즌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출 예배에 참석한다.
기독교인들은 해가 막 떠오르는 부활절 일요일 아침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
문에 그런 종교행사를 한다고 주장하는데, 복음서에서 예수의 부활은 사실상 해 돋을 때 일어
나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 무덤이 이미 비어있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아직도 어두
웠을 때였다. 정확히 따진다면, 이 일출 예배의 원형은 고대 태양 숭배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
다. 에스겔서에서 볼수 있듯이 에스겔 시대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태양숭배를 했다고 기록하
고 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 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낮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에스겔 8장16절]
엘리야 시대에 바알 선지자들이 바라 보았던 곳도 역시 동쪽이었다.
바알은 태양신도 되고 번개와 천둥, 불의 신도 되었다. 이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을 부르기 시
작한 때가 하루 중 어느 때였는가? 열왕기상 18장 26절에 의하면 동틀 때 였다.
동틀 때의 태양과 연관된 의식들은 많은 고대 국가들 사이에서 알려져 왔다. 이집트의 스핑크
스는 동쪽을 바라 보도록 그 위치가 정해졌다. 로마의 미트라 교도들도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
해 동틀 때 함께 만났다고 한다.
이스터(Easter)란 말이 나온 이름인 봄의 여신은 East-er(동쪽-자) 말에서조차도 함축하고 있
는 것으로 보이는 동쪽(east)에서 태양이 솟아 오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동쪽에서
태양이 돋는 것과, 이스터(Easter)라는 부활절 이름과, 봄 계절과는 모두 관련이 되는 것이다.
부활절과 함께 사순절 역시 이교도의 것이다.
옛 전설들에 따르면 탐무즈(Tammuz)는 죽임을 당한 후 명계(저승)으로 하강했다. 그러자 그
의 연인 이쉬타르(Ishtar)가 애곡함으로 인하여 그는 봄에 신비하게 소생했다. 또 다른 신화에
의하면 이쉬타르가 그를 구하기 위해 명계로 하강 했다고 한다.
농작물의 성공과 사람들의 다산을 보증하기 위해서 매년 바빌론 사람들은 이쉬타르와 함께 탐
무스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고 그녀의 은총과 은전(恩典)을 새롭게 얻기 위해 신의 귀환을 축하
해야 했다. 새로운 식물이 싹트고 나올 때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구세주가 이승에서 나와 겨울
을 끝 마치게 하고 봄을 시작하였다고 믿었다. [우르딘 / 축제와 성일과 성인의 날들]
유대인 조차도 이교도의 축제의 가르침과 의식들을 받아 들였다. 에스겔 8장14절에서도 유대
여인들이 앉아 탐무즈를 위하여 애곡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전승에 의하면 탐무즈가 40세 때에 멧돼지에게 받혀 죽었다고 한다.
바빌론의 풍습에 따르면 탐무즈가 부활하기전 40일간의 금식기간이 있었다. 이것은 고대에는
신이 지하 세계에서 나와 봄을 시작하도록 40일 동안 자신에게 매질하는 기간이다. 이러한 관
습은 바벨론인 뿐만 아니라 페니키아인, 이집트인, 유대인, 그리고 미트라교에도 흡수 되었다.
미트라교에도 미트라가 부활하기전 40일간의 고난주간이 있었다. 알렉산더 히슬롭은 이교도
들 가운데서 이 사순절이 탐무즈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대축제의 필수 불가결한 전
제조건이 되어진 것처럼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알렉산더 히슬롭 / 두 개의 바빌론 / 도서출판
안티오크]
이집트에서도 오시리스를 위해 40일간의 금식을 행했는데, 이집트학으로 정평이 나있는 윌킨
슨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봄축제와 관련된 이교도들의 여러 가지 관습이 이미 카톨릭 교회 안에 유입된 고로, 이 축제
에 앞서 행해지던 이교도의 금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단계로의 발전일 뿐이었다.'카톨
릭백과사전'은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말한다. 4세기의 저술가들은 확실히 그렇다고 여길만한
주장이 없는 이 사도적 제도에 관하여 많은 관행들(예를 들면 사순절의 40일간의 금식)을 기
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Richard Wilkinson / The Complete Temples of Ancient Egypt]
"사람들이 고기와 다른 몇 가지 음식들을 삼가는 동안을 거룩한 금식이라고 부르면서 교황이
사순절 준수를 공식적으로 명령한 것은 6세기에 가서 였다. 카톨릭 학자들은 교회 안에 이교
주의에서 빌려온 관습들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카톨릭 백과사전 제11권 / '이교주
의' 항목 / P.390]
그리고 많은 카톨릭 교인들이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념키 위해서 매 금요일마다
고기를(물고기로 대체하였지만)먹지 않는다. 미국에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인들에게 사
순절 기간 외에는 금요일 날 고기를 먹지 말라고 이전과 같이 요청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
은 신자들은 아직도 금요일 날 물고기 관습을 따르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금요일과 물고기가
관련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금요일(Friday)이란 말은 프레야(freya)란 이름으로부터 왔다는 설도 있는
데, 이 프레야는 평화, 기쁨 및 다산의 여신 즉, 다산의 상징인 물고기로 알려졌다.
옛날부터 물고기는 중국인, 앗시리아인, 페니키아인, 바벨론인 및 그 밖의 사람들에게 다산의
상징이었다. '물고기'(fish)란 말은 번식 혹은 다산을 암시하는 다그(dag)에서 유래되었고, 이
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한 마리의 대구가 매년 9,000,000개 이상, 넙치류는 1,000,00
0개 이상, 철갑상어는 700,000개 이상, 농어류는 400,000개 이상, 고등어는 500,000개 이상,
청어는 10,000개 이상... 등등의 산란을 하고 있다.
성병(veneral disease)이라는 영어단어가 비너스(Venus)여신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처럼 , 비
너스는 로마인들에게 성적 다산의 여신으로 불리워졌다. 금성 (planet venus)이 금요일의 첫
시간을 다스리는 비너스의 날(dies Veneris)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금요일을 비너스의 거룩한
날로 보게 된 것이다. 또한 비너스에게는 물고기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 이교도와 현대 그리스도인 상징주의'(Ancient pagan and Modern Christian Symbolism)
라는 책에서 볼 수 있는 삽화는 여신 비너스가 자기의 상징인 물고기와 같이 있는 것을 보여
준다. 가나안 지방의 아스다롯(Ashtoreth)에게 이 물고기는 거룩한 것으로서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에서 이시스(Isis)는 때때로 머리에 물고기가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금요일이 성
적 다산의 여신을 따라 이름이 지어졌고, 금요일이 이시스의 거룩한 날인 것과, 물고기가 그녀
의 상징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카톨릭 교인들에게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고 물고기를 먹게
하는 날로 가르치는 것이 우연한 일치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모든 학자들이 수긍하고 있듯이 이스터(Easter)라고 번역된 말은 유월절 이란 헬라어 말인 파
스카(pascha)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