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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목 :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
성경 본문 : 시편 50장 7절-23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20년 11월15일 주일 오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저는 우리 성도들이 태산을 옮길 믿음이 있음을 압니다.
어떤 낙심도 이기게 하는 하늘의 소망이 있음을 압니다.
어떤 흑암도 이길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있음을 압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고난과 역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기에 있음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당했든지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다시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가슴 가득히 희망을 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제일 되고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모든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내가 <하나님>을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여러분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들을 가리켜서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제는 기독교인 가지고는 안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종교 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의 체취가 물씬 나는
사람 속에 자신을 채우시고 나타내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의 불이 땅에 내리게 하시는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세상으로 흘러 넘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십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 있는 축복의 백성들입니다.
나는 과연 주님 앞에서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주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보시기에 근심의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오래전 어느 교회에 냉정하기로 소문난 여 집사님이
주일 예배에 나와서는 그날따라 눈물을 줄줄 흘리더랍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는 시간에는 더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께서 그 집사님을 목양 실로 불러서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눈물이 날 만큼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오늘 예배가 집사님에게 그토록 은혜가 되셨습니까?"
"아이 목사님 쑥스럽게 그런 걸 다 물어요."
좀처럼 대답을 않던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은 목사님, 교회 오기 전에 재방송으로 보았던
<드라마>가 너무 슬퍼서 그래요.
'장밋빛 인생'에서 암으로 죽어 가는
<최 진실>이가 불쌍하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평생 눈물 한 방울 없던 집사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이유가
고작 드라마 주인공이 불쌍해서 울더라는 말입니까?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물 여러분의 기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 에게는 배부를 때에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졌을 때에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잃었다가 찾았을 때에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본능적인 기쁨이 내 기쁨의 전부라면
우리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지극히
불행한 존재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배가 부르던지. 고프던지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가졌던 못 가졌 던지 간에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성령께서 내 안에 샘솟듯 부어주시는 기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여러분의 심령에
기쁨의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오기를 축복합니다.
인생 여정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문제 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문제는 풀리기 위해서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문제는 오직 믿음 안에서 풀린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역경과 맞서면
어느 날 기적의 주인공이 될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도의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권능으로 다시금 일어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진리를 깨달았던 <이사야>는
<이사야> 50장 7절-8절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7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위 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절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올지어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라면
여러분은,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들 에게
항상 요구하시는 것은 용기 있는 믿음입니다.
본능적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된 용기는 두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일어날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취한 자는 언제나 용감합니다. 취한 자에게는
놀라운 용기가 나타납니다.
초대 교회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성령의 새 술에 취하였더니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전에는 두렵고 떨리던 그 사람들 앞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새 술에 취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고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활화된 기도가 몸에 배여야 됩니다.
기도 생활의 승리에 대한 체험 화가 몸에 배여야 됩니다.
성령의 체질화가 몸에 배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 가운데 들어가도, 물 가운데 들어가도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환난과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믿음을 붙들고 나아 가야 됩니다
제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잘 믿으십시오. 제대로 믿으십시오.
복 받은 자로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평강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타향살이 20여 년을 비전과 믿음을 붙들고 살았던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형제 들의 시기 때문에 먼 나라에 노예로 팔려온 신세가 되어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이 아무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속에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악한 행동을 <하나님>은 선한 섭리의 손길로
<야곱>의 가정에 오히려 축복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내가 저지른 잘못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꾸어 쓰신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에게 무너지지 말고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을 보면서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 때문에 넘어지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충성된 사명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나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임할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오늘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래 <추수 감사절>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감사를 드렸던
<청교도>들의 믿음 정신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사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사의 정신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말씀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에서 '범사'라는 말은 흠정 역인 KJV 영어 성경에서는
'모든 일에'라는 의미의 'in everyth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 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는 모든 일 가운데에서,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처해 진 환경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사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그렇게 감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1장 6절에 보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지금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는 말은 명령어입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은 복종되어 져야 합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 명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감사의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적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그러니까
감사는 환경이 좋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환경이나 여건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여건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감사할 수 있는 인격은 성숙한 인격이요,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버틀러>는 찬송가 438장에서 이렇게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습니다.
♬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그는 주님이 함께하시면 높은 산도 문제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거친 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에 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모신 바로 그곳이 천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2장 7절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7절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 같이 감사하면서 살수도 있고
불평하면서 살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불평 거리를 찾기로 말하면 끝이 없습니다.
결국 오늘 저와 여러분은 감사하는 신앙인이
될 수도 있고 불평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감사가 사라진 것은
환경과 조건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환경을 열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 전에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그 입술에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술에서는 언제나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아삽>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삽>은 성전에서 찬양 대를 지휘하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통찰하고 예언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아삽>은 찬양의 은사뿐만 아니라 자기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예언의 은사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의 신앙이었습니다.
진실이 없는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아삽>은 백성들의 이러한 신앙을 마음 아파하면서
감사가 없는 제사, 감사하는 삶이 없는 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언약이라. 함은 소를 잡아서 둘로 쪼개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 번 맺은 언약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맹세의 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사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너는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우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성대하게 제사를 잘 드렸습니다.
<시편> 50장 8절 말씀에서
8절 "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형식적인 면만 놓고 본다면 전혀 나무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만 형식적으로 성대하게 드리면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양과 소를 잡아 바치면서 마치 <하나님>께 호의라도
베푼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우상이나 귀신처럼 생각하고
살살 달래서 복을 얻어내기 위한 그런 제사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제사를 싫어하실까요?
<시편> 기자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소나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감사로 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재물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십니다.
나를 온전히 갖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로 <하나님>은 삶과 유리된 제사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 전체로 드리는 제사, 삶이 제사가 되고
제사가 삶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너희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죽은 제사를 드리지 말고 삶이 동반된 산 제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시편> 50편 22절 –2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잊어버린 사람이 나옵니다.
22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을 것이다."
23절 말씀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본문 <시편> 50편 23절 말씀에 보면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로 바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전등을 주시고,
전등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별빛을 주시고,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이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기적이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한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길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내 인생에 대한 감사가 일어납니다. 남편에게 감사하고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그 남편이 내 남편이 되고
그 아내가 내 아내가 됩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남은 내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아십니까? 감사는 남을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때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영화로운 존재로 만듭니다.
그래서 감사는 행복해지는 연습이고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입니다.
믿음의 가정을 보십시오.
믿음의 가정은 언제나 감사와 찬양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색과 감사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요 도리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이 축복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인격은 감사할 줄 아는 인격입니다.
제일 저주받은 생명은 감사를 모르는 생명입니다.
심령이 어두워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혀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 이란 감사의 인격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감사 생활이 인간의 행복의 원천입니다.
꽃이 향기만 있으면 언젠가 벌과 나비가 날아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은 감사의 향기만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향기만 있으면 어느 때엔가
<하나님>의 축복도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하는 마음은 환난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결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이고,
또 하나는 본문 <시편> 50편 15절의 말씀입니다.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세상에 환난이 있어도,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되는 일이 있어도
거기에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그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환난'이라는 단어는 포도를 틀 속에 집어넣고
뭉개고 짓눌러서 포도를 짠다는 뜻이 있습니다.
포도가 뭉개질 때에 포도주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환난 날에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런 사람은 환난의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신앙과 인격이 깊어지고 높아집니다.
그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나무는 가뭄 때에 뿌리가 더 깊어지고,
겨울 찬바람에 단단해지는 법입니다.
진한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어머니는
자녀에 대해 진한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부부는 고생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함께 정이 듭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섬기면서도
함께 고생을 해 봐야 정을 알고 은혜를 알게 됩니다.
목사와 교인이 정이 드는 것도 어렵게 교회를 섬겨봐야
그 맛을 압니다.
고난을 당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에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 날에 망하는 사람이 있고,
환난 날에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단 후에 죽어서 송장이 되어 나오는 사람이 있고,
연단 후에 순금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모조리 까먹고 나오는 사람이 있고, 순금같이
귀한 믿음을 얻어서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아흔 아홉>까지 두고도
한가지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흔 아홉> 가지를 잃어버렸음에도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그 한 가지를 가슴에 끌어안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승리하는 사람이고 누가 망하는 사람입니까?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가 순금 같은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 때문에 불행해 울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기를 축복합니다.
<감사>라는 뜻 안에는
고백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감사의 고백을 동반합니다.
감사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확신입니다.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더 크게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감사가 없는 인생은
결국 열매가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어떤 복을 받기 위한 전주곡이 아니라
그 감사 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응답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한 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았기 때문에 하는 감사는
세상 사람 누구나 할 수가 있는 감사입니다.
환경 때문에 하는 감사는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이것은 기복적인 감사입니다. 감사의 차원을 높이십시오.
받은 복을 세어보는 계산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신앙인의 감사는 다른 사람들이 한 번 감사할 때
두 번 감사하는 양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때문에 감사하고,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내가 좀 잘산다고 자랑하지 말고, 못 산다고 비굴해 하지도 마십시오.
내 자식이 공부를 좀 잘한다고 자랑하지 말고, 못한다고 기죽지도
마십시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자신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이 부러워 하게 만들고 싶다면
내 인격을 부러워하게 만드십시오. 내 신앙을 부러워하게 만드십시오.
내 기도를 부러워하게 만드십시오. 무엇보다 내 비전을
부러워하게 하십시오.
전도하여 제자를 만드는 내 비전의 능력을 부러워하게 하십시오.
내 환경을 자랑하지 말고 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며 살아 갈 때에 나도 행복해 질 수 있고,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인생 여정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무릎에
강한 힘을 공급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고
하늘이 갈라지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의 땅을 기면서 몸부림치는 분이 계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믿음의 날개를 달아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능히 세상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는 저 높은 창공 위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땅에 것들은 작아 보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비전의 세계를 향하여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이 한 주간을 지나면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십시오.
우리의 감사의 본질과 기초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격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나온 한 해를 살아오면서
우리의 삶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어떤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은 은혜만으로도
일평생 감사와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은사로 주신 믿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 주심을 감사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삶에 승리를 주시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품에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와 복에 감사하는 것은
더욱 귀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합니다.
제일 잘못된 인격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격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슬퍼하는 믿음은 감사를 모르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17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한촌에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들의 간절히 부르짖는 외침에 주님의 대답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명령이셨습니다.
저들의 순종하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제사장에게로 가는데 놀라운 사실은
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의 시작은 기적의 문을 엽니다.
모든 인생의 고난은 신분을 초월합니다.
질병 중에는 신분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사람의 신분을 같게 만들었지만
감사는 사람의 신분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고침을 받아서 각기 제 길을 찾아갔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 혼자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순종의 시작은 기적의 문을 열지만
감사의 시작은 신분을 바꾸어 놓습니다.
감사하는 생명 속에
<하나님>의 깊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보다 더 귀한 것은
감사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