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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글 이름 발자취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
머리말
우리 배달겨레는 단군시대로부터 5000년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니 그 때부터 우리 겨레말이 있었을 것이고 이름도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글은 그 보다 더 늦게 2000여 년 전 쯤 고구려, 백제, 신라 때부터 중국 한자를 들여다 썼기에 삼국시대부터 한자로 적었을 것이다. 한자로 적었어도 삼국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우리식 이름을 한자로 적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한 뒤 통일 신라 경덕왕(757) 때 당나라 문화를 섬기기 시작하면서 사람이름이나 땅이름, 관직 이름까지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중국 문화식민지가 되었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중국식 이름이 뿌리를 내린다. 1446년에 우리 글자인 한글이 태어났는데도 한글은 하층 글자로 취급하고 중국식 이름을 그대로 써오다가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면서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1945년 광복 뒤부터 우리 글자인 한글을 쓰는 시대를 열었고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7년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회장 이봉원)에서 ‘고운이름 자랑하기’를 해마다 하면서 5000년 우리 겨레 역사에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는 바람이 분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식으로 이름을 짓고 쓰는 사람이 많고, 요즘에는 미국식 영문으로 이름을 짓는 이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신라 때 당나라 식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국 문화 식민지가 된 것을 다시 되풀이하는 꼴이다. 왜정 때는 왜놈들이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했으나 지금은 우리 스스로 미국식 창씨개명을 하니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다.
여기서 ‘한말글 이름’이란 무엇인가 살펴본다. ‘한말글 이름’이란 중국식 한자이름이나 일본이나 미국식 이름을 외국 글자로 적은 이름이 아니고 우리말을 우리 글자인 한글로 적은 이름이다. 전에는 ‘토박이말 이름’, ‘순우리말 이름’, ‘한글 이름’이라는 말을 썼으나 이제 ‘한말글 이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에서도 한말글로 이름을 짓고 있는데 우리보다 늦게 시작했다.
이제 초기 시작 단계지만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고 쓰는 한말글 시대임을 밝히면서 오늘날 한말글 이름짓기 시대가 오기까지 발자취를 살펴본다.
1. 중국식 이름 짓기
오늘날 우리는 중국식 성씨와 이름을 짓는 방식인 “김, 이, 박...”들 성씨에다가 ‘김유신’처럼 세 글자로 이름을 짓고 쓰는 것은 신라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외솔 최현배님은 1922년 9월 4일 동아일보에 “우리말과 글에 대하여 (6)”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이렇게 먼저 성씨를 버리기를 용이하게 한 우리 선조, 신라인들은 그 역리되고 허위스러운 걸음을 더 내켜 나라의 이름을 버리고 벼슬의 이름을 버리고 다 한자로 새로 지었습니다. 제 22세 지증왕 4년 (서기 503년)에 ‘서라벌’을 ‘신라’라 고치고 ”거서간,니사금, 마립간,차차웅“ 들의 존호를 버리고 ‘왕’이라 일컷기로 정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신라말엽에는 벼슬 이름은 흔이 지나식의 이름을 쓰고, 고려에 이르러서는 실로 유교와 함께 극단으로 한문을 숭상한 결과 한어가 수없이 우리말에 침입하여 우리말을 심히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 신라 22대 지증왕 때부터 중국식으로 이름을 짓고 쓰기 시작하여 신라 제35대 경덕왕(742~765 재위) 때에 중국 당나라 문화를 철저하게 받아들여서 신라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우리 문화 발전이 아니라 완전 중국 문화의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쯤 불경이나 중국 시문을 그대로 들여다가 쓰고 관직이나 땅이름까지도 중국식으로 뿌리 내리기 시작하니 설총이 ‘이두’라는 우리식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중국 문화에 대한 반감에서 나왔다고 본다. 중국은 그 때 인도 불경을 들여오면서 범어를 그대로 쓰지 않고 중국 한자말로 바꾸어 썼는데 우리는 그 불경을 그대로 들여다가 지금까지 쓰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 식인 세 글자로 이름을 짓는 것이 뿌리 내리기 전에는 “연개소문, 을지문덕, 박혁거세”처럼 네 글자로 이름을 짓거나 성씨가 없는 이름이 보인다. 신라 김씨 시조인 "알지"는 '아이'를 가리키는데 다음에 중국식 성씨인 ‘김’을 붙여서 ‘김알지’라고 했으며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이름인 ‘추모(주몽)’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인데 다음에 “고주몽”이라고 ‘고’란 성씨를 붙여서 부르고 있다. 우리가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통일 신라 뒤부터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성씨 본관이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처럼 거의 대부분이 남쪽 지방인 것도 그 영향이 있다.
내가 중국 소흥시 대우릉 우씨 종친회 간부를 만났는데 하나라 우왕의 자손이 4000년이 지나면서 “우씨, 서씨, 이씨” 등수백 개 성씨로 갈라졌는데 한국의 많은 성씨가 중국 성씨를 본 땄으며,‘이’가인 나도 중국인과 종씨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조선 초만 해도 성씨 있는 양반은10%뿐이 안 되었는데 조선중기 양반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입으로 전해오던 자료를 모아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들은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 말기에도 노비나 상민들은 성씨가 없는 사람이 많았는데 왜정 때 민적부를 만들면서 모두 성명을 갖게 되었다. 일본도 18세기까지 성씨가 없었고 몽골과 티벧은 지금도 성씨가 없다고 한다.
2. 일본식 창씨개명
일본은 이 땅을 제 식민지로 만들고 30년이 되면서 완전히 이 겨레까지도 없애고 일본 민족으로 만들려고 한다. 일본은 처음에 민적을 만들면서 성씨가 없는 노비들도 한자로 이름을 짓게 했는데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고 한다. 여자 이름에 “영자, 순자”처럼 ‘子(자)’자가 들어간 것은 일본식 이름이고, 왜정 말기엔 우리 성씨와 이름을 왜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제로 시키고 우리 말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우리 말글로 내는 신문과 잡지도 폐간시켰고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말글을 지키고 살리려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감옥에 가둔다. 이들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을 제 국민으로 전쟁터로 몰고 가려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1939년에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조선인 호주는 6개월 이내에 새로 씨(氏)를 정해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조선인은 행정 기관에서 일을 볼 수 없게 하고, 물자를 배급해 주지 않는 등 각종 불이익을 주었다. 또, 각 급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으며, 겉봉에 조선식 이름이 쓰인 우편물이나 화물은 배달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행정 조직과 경찰을 총동원해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이니 조선인 약 40퍼센트가 창씨개명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말할 것이 없고 왜정시대까지도 노비나 머슴들은 이름도 성씨도 없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돌쇠’나 ‘꽃님이’처럼 우리 토박이말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면사무소에서 일본식으로 모두 이름을 올릴 때 주인의 성씨를 따르거나 마음대로 지어서 민적에 올렸다. 이때부터 온 백성이 한자말로 성과 이름을 지어서 쓰게 되었으니 모두 성명을 갖게 된 것은 100년도 안 된 셈이다. 그래서 ‘돌쇠’는 ‘石鐵’ ‘꽃님’은 花子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 땅이름도 우리 토박이 땅이름을 한문으로 모두 바꾸었다. ‘새말(새마을)은 新村(신촌)으로 ’돌섬‘은 石島(석도)로, ’밤고개‘는 塛峴(율현)으로 대나무가 많다는 ’대섬‘은 竹島(죽도)로 ’얼음골‘은 氷洞(빙동)으로 ’벌말‘은 坪村으로 ‘한밭’은 ‘대전(大田), ’빛고을‘은 광주(光州), 삼개는麻浦, 노들나루가 鷺梁津노량진이 되었다. 왜정 때에 조그만 시골 마을 이름도 이 때 모두 일본식 한자말로 바뀌었는데 내 고향의 돌개는 石浦가 되었다. 그래서 광복 뒤에 우리말 도로 찾아서 쓰자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일본식 한자혼용 세력이 반대해서 이루지 못했다.
3. 한말글 이름 짓기
조선 말기 19세기에 기독교가 한글 성경을 쓰면서 우리 한글이 많이 퍼졌고, 고종이 한글을 국문이라고 하면서 공문서에도 쓰게 했으나 바로 일본에게 이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 말글이 살아날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일본 말글에 밀려 우리 토박이말이 사라지게 되었다. 다행이 1945년 일본이 연합국과 전쟁에서 패망함으로써 나라를 다시 세우고 우리 말글로 말글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한양’이나 ‘경성’이라고 하는 한자말 땅이름을 ‘서울’이라는 새로운 우리 토박이말로 바꾸었는데 참 잘한 일이다.
조선시대까지도 노비나 머슴들은 성씨가 없는 사람이 있었고 “돌쇠, 개똥이, 꽃님이” 처럼 우리 토박이말 이름만 가진 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한자로 이름을 짓고 썼다. 그런데 1945년 광복 뒤에 뜻있는 분들이 제 아들딸의 이름을 우리 말글로 짓기 시작한다. 그 분들 가운데 정종 전 동국대 교수, 금수현 음악가, 김철 전 사회당 당수가 제 아들딸들 이름을 토박이말로 지었을 뿐 정부도 국민도 중국식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1967년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가 ‘고운이름자랑하기’ 대회를 열면서 우리 토박이말로 이름을 지은 사람들을 뽑아 세상에 알리고 칭찬함으로써 우리말로 이름을 짓고 한글로 적는 세상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 토박이말 이름짓기는 서울대학이 ‘고운이름 자랑하기’라고 하다가 너무 어린아이 이름처럼 보인다고 ‘한글이름 짓기’라고 하다가 2007년에 ‘한말글 이름의 날’을 5월 8일로 정하면서 우리말로 이름을 짓고 한글로 이름을 적는 이름을 ‘한말글 이름’이라고 정하게 되었다. 그 계기는 2005년에 한글학회 부설 한글문화협회 이름을 한말글문화협회로 바꾼 것이었다. 광복 뒤부터 한말글 이름을 짓기 시작했으니 한말글 이름 역사는 70년 정도 되었다.
3.1.한말글 이름 선구자 세 분
왼쪽부터 한말글 이름인 정어지루 교수, 금난새 지휘자, 김한길 국회의원
3.1.1. ‘정어지루’의 아버지 정종 교수
동국대 불교대학과 원광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근무한 정종 교수는 광복 뒤에 자신의 아들 이름을 우리 말글로 지어서 호적에 올리려고 면사무소에 가니 한글이라고 받아주지 않더란다. 그래서 군청에 가니 군청에서도 안 된다고 하고, 도청까지 찾아갔는데 마찬가지 안 된다고 해서 “왜 왜정 시대도 아닌데 우리 말글로 이름을 못 쓰게 한단 말인가? 한글 이름이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으면 내놔라!”라고 따지니 그런 규정은 없다고 말해서 그러면 호적에 올려 달라고 했고 ‘정어지루’라는 토박이말 이름을 호적에 올리게 되었단다. 그 ‘정어지루’는 목원대 광고언론홍보학과 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내고 2012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3.1.2. ‘금난새’의 아버지 금수현 선생
금수현 선생은 음악가로서 광복 뒤에 외솔 최현배 선생과도 가깝게 지내면서 음악 학술용어에서 높은음자리표, 쉼표, 도돌이표 등 우리말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이 이 분 덕이다. 이 분은 아들딸 이름을 “금난새, 금내리 금누리, 금노상”처럼 우리 말글로 지었다. 금난새는 1967년 국어운동대학생회가 시작한 제 1회 “고운이름 자랑하기”에서 1등으로 뽑혔고 오늘날 유명한 음악감독이고 지휘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동생들도 교수와 지휘자이다.
3.1.3. ‘김한길’의 아버지 김철 선생
김철 선생은 진보정치인이다. 사회민주주의 운동 선구자로서 사회민주당 당수도 지냈다. 김철 선생은 정치도 개혁과 진보 정치인이였는데 그의 아들 이름을 광복 뒤에 우리 한말글로 지었다는 것은 대단한 개혁이다. 큰 아들 ‘밝힘’은 학교에 다닐 때 이름이 남다르기에 놀림도 받았다고 한다. 1970년대도 학교 선생이 한말글 이름을 가진 학생들을 놀려서 기죽게 한 일이 있다. 둘째 ‘한길’은 문화부장관도 지내고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다. 셋째 ‘누리’는 대학교수다.
3.2.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 고운이름 자랑하기
광복 뒤에 깨어있는 분들이 한말글 이름을 지었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1967년 봄 서울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에서 '고운이름 자랑하기'대회를 해마다 열면서, 한말글 이름짓기 운동이 일어난다. 이 행사는 1986년까지 17회를 이어갔다. 이 운동은 5000년 우리 역사에 빛날 새바람이고 개혁이다.
서울대 고운이름 자랑하기 첫 대회 금상 수상자는 ‘금 난새-내리-누리-노상’(작곡가 금 수현의 아들딸) 남매들이였고, 은상 수상자는 '민 달래', '오 귀염' 그리고 장려상 수상자는 '신 봄메', '김 송이', '장 푸르메-슬기로-다사로-하아루' 남매, '박 한미리-한누리-한서리-한기리-한수리' 형제였다. 이 행사에 여러 언론이 보도해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울대국어운동학생회 고운이름뽑기 알림표와 첫 행사 때 금상을 타는 금난새 남매들 사진.
3.2.1. 한글이름펴기모임
1976년 9월,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가 주최한 '고운 이름 자랑하기'에서 상을 받은 밝한샘,배우리 선생들, 한글 이름 가족들이 모여 '고운 이름 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 단체도 다음 해에는 '한글 이름 펴기 모임(회장 밝한샘)'으로 명칭을 바꿔, 한글 이름을 널리 보급하는 일을 했다.밝한샘 선생은 통일된 나라 이름을 ‘아름나라’로 하자고 한 일이 있다. 성씨도 우리 식으로 짓자고 ‘박’씨를 ‘밝’으로 쓰고 있다.
1990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가 < 한글물결 >이라 모임 이름으로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글이름 짓기 큰 잔치'라는 행사를 시작했고, 한글학회는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연례행사, 모두 11회) '온 겨레 한말글 이름 큰잔치'를 벌여, 한말글 이름 가진 어린이들을 기렸다.
3.3. 내 한자 이름 ‘李澤魯’를 ‘이대로’로 바꾼 이야기
1968년 겨울방학 때 대학 농촌운동 모임 친구 이순섭군이 내게 보낸 엽서
1968년 10월 9일 한글날 전국국어운동대학생회 회원들은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에 꽃 바치기 행사를 하고 한글이름 펴기 운동에 함께 나서기로 했다. 그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지어준 한자 이름 ‘李澤魯’를 ‘이대로’로 바꾸어 썼다. 나는 이름을 바꿀 때 부르고 외우기 쉽고, 내가 죽는 날까지 한글운동과 농촌운동을 두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담아 내 형제 돌림자인 ‘로’자를 살려서 지어서 쓰다가 1993년 국회의원들 이름패를 한글로 바꾸라는 운동을 할 때 호적까지 재판으로 바꾸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름을 바꾸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오늘까지 국어독립운동을 열심히 할 수 있는 힘이 났으며, 이 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생각이 된다. 내 한말글 이름이 한말글 운동 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고, 남다른 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고 본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 사람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내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3.4. ‘한말글 이름의 날’ 법정 기념일로 만들기
2007년 5월 8일에 한글회관에서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처음 서울대국어운동학생가 1967년 5월 8일에 ‘고운이름 자랑하기’ 행사를 한 것을 기념하는 뜻을 담아5월 8일을 [한말글 이름의 날]로 정하고 “한말글 이름의 날 법정기념일 추진위원회(회장 이봉원) 출범식을 했다.
2007년 한말글 이름의날, 20010년 한말글이름자랑하기 행사
3.5. 세종시가 한말글로 마을이름과 길 이름, 학교 이름을 짓다.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와서 기관이나 단체이름도 우리 말글로 많이 짓고 있다. 일찍이 국립극장 이름이 ‘해오름극장’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고양시가 문화센터를 만들면서 그곳 극장이름을 ‘어울림누리극장’이라고 지었다. 이름난 방송 연출가 이상만 선생이 개척한 이름들인데 처음엔 낯설어 했지만 지금 모두 좋아하고 칭찬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새로 도시를 만들고 있고 그 도시 마을이름과 거리 이름을 우리말로 새로 짓고 있다. 충남 공주에 짓고 있는 세종시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올해 초에 한글학회는 그 일을 한 실천한 행복도시건설청 최민호 전 청장에게 ‘한글을 빛낸 큰별’이라 불림(칭호)을 주어 칭찬했다. 이 일은 우리 겨레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이기 때문이다.
3.6. 한말글 이름짓기 방법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말글로 아기 이름을 짓고 기업이나 모임 이름도 한말글로 지으려고 애쓰고 있다. 주민등록등본이나 호적도 한자 이름이지만 한글로 쓸 수 있게 한다. 이봉원님 이름은 한자이름이지만 한글로 봉원이라고 쓸 수 있다는 법원 판결도 받았다. 술집에 ‘곤드레 만드레’처럼 재미있는 한말글 이름이 많았는데 요즘 병원 이름에 ‘튼튼병원, 우리병원“들들 한말글 이름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한자를 잘 안 쓰는 세상인데 왜 한말글 이름이 줄고 있을까? 지을 줄 몰라서 한자말이나 영문으로 이름을 짓는 사람이 많다. 한말글 이름을 어떻게 지으면 좋을까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이름은 부르고 기억하기 좋게 하고 느낌이 좋아야 한다. ‘솔아’는 ‘소라’ 들린다. 뜻과 소리가 뚜렷하게 들어나는 이름이 좋다. 2. 좋은 뜻이 있으면 더욱 좋지만 자신만의 꿈과 소망이 담아 되새길 수 있는 이름이 좋다. “하늘 뜻대로 사는 사람”이란 말을 줄여서 “하람”이라고 해도 좋다는 말이다. 3. 이름은 꼭 두 글자로 짓거나 맞춤법에 맞지 않아도 된다. “어진 이”란 뜻을 담아 ‘어지니’로 해도 괜찮다. 4. 복합어나 문장을 줄인 이름도 괜찮다. 한글학회 김한빛나리 부장처럼 네 글자도 좋다. 김하얀언더기 교수, 오 아름나라 선생도 좋다. 6. 형제 자매 이름이 돌림자처럼 어울리게 지어도 좋다. 누리 -내리, 은별 - 샛별처럼 말이다. 7. 성씨가 어울리지 않거나 놀림감이 되는 이름, 너무 아기 이름은 피하자. ‘예쁜’이라는 이름도 ‘안 예쁜’은 성씨와 어울리지 않고 놀림감이 된다. '갓난이' 도 어려서는 괜찮지만 늙어서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8. 너무 흔한 이름보다 저 만의 개성이 있는 이름으로 짓자. 왜정시대 ‘영자’ ‘순자’는 전화 번호부에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길에서 영자를 부르면 여러 사람이 뒤돌아본다는 농담도 있다. 한말글 이름에도 고운 이름을 짓다보니 같은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저만의 꿈과 뜻을 담는 것이 좋다.
3.7. 일본 한자말 학술, 전문 용어도 빨리 한말글로 바꾸어야 한다.
1945년 광복 뒤에 한글학회(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땅이름과 또 전문 학술용어는 말할 것이 없고 일상용어로 우리 토박이말을 도로 찾아 쓰자는 운동을 하고, 우리 토박이말이 없으면 새로 만들어 쓰기도 했다. ‘건널목’이란 말도 없었는데 그 때 신문과 방송에서 먼저 쓰기 시작하여 뿌리 내렸으며, ‘도돌이표’ 같은 음악 용어에서도 새로 만들었고, ‘산수’나 ‘수학’이란 말이 아닌 ‘셈본’이란 말을 찾아서 쓰고, ‘문법’이 아닌 ‘말본’이 뿌리 내렸으며, 1948년에 서울사대 이기인 교수는 “생물학 사전”을 “사리갈만 말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식 생물학 용어로 우리 토박이말로 바꾸었다.
그런데 왜놈 교육과 왜식 한자말 말글살이에 길든 일본 제국 교육의 노예들은 외솔이 ‘학교’들 ‘배움집’으로, ‘비행기’를 ‘날틀’로, ‘이화여자전문학교’는 ‘배꽃계집애오로지문배움집’’으로 바꾸자고 한다며 이 운동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외솔은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말모이’란 사전을 만들고, ‘소리갈’이란 문법책을 낸 주시경의 제자 외솔은 ‘우리말본’, ‘한글갈’이란 책에서 한말글을 살려 쓰려고 애쓴 것이 보인다. 그러나 박승빈, 이희승, 이숭녕은 일본 냄새가 많이 나고 이들을 따르는 세력이 지금까지 한말글 살리기를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교육 세력은
1962년 친일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말본, 이름씨, 그림씨”같은 문법 용어로 “문법, 명사,형용사”처럼 일본식 용어로만 쓰게 만들고 한글로만 만들던 교과서를 1964년부터 일본처럼 한자혼용으로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오늘날은 영문으로 회사 이름도 바꾸고, 전문 학술용어로 영문으로 바꾸고 정부 부서 이름도 바꾸면서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를 하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세력까지 생겼다. 이런 우리 겨레의 얼말글을 죽이는 흐름을 막지 않으면 안 되기에 한자말로 된 학술용어를 빨리 한말글로 바꾸어야 한다.
마무리 말
지금 한말글 이름짓기는 70년 정도 되었기에 5000년 역사에 견주면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1945년 광복 뒤부터 뜻있는 분들이 처음 이름을 짓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중국 당나라 식으로 이름을 짓고, 일본처럼 한자로 이름을 쓰자는 사람이 많다. 2006년에 서울 광양고등학교 학생들 가운데 한말글 이름인 사람을 조사하니 남자는 1.5%, 여자는 11.5%로서 여자는 많은데 남자는 아주 적었다. 전체는 6.5%만이 한말글 이름이다. 안양의 유치원에 올해 130명 원생 가운데 한말글 이름이 4명이고 서울 반포 아람 유치원은 이렇다. 김숙희 원장님이 알아본 바로 한 초등학교에 165명 가운데 5명으로 한말글로 이름을 짓고 싶어도 마땅한 이름을 짓지 못해서 못 짓는 부모들이 많고 오히려 20여 년 전보다 한말글 이름이 줄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한말글 이름짓기에 대한 연구나 교육도 없었고 노력도 안했다.이제 한말글 이름 짓기 전문가도 나오고 이 문제에 대해 연구도 많이 하고 토론도 많이 해야 한다. 서울 방배동 아람유치원 박문희 원장은 “엄마들이 우리 말글로 애기 이름을 지어주려고 해도 잘 짓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한자말로 이름을 짓는다.”고 말한다. 앞으로 한말글 이름짓기 연구를 하고 전문가도 많이 나오도록 정부와 학계가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 이름뿐만 아니라 회사나 모임 이름도 한말글로 지어야 한다.
기업이나 단체 이름을 영문으로 많이 짓고 있다. 선경이 SK, 럭키 금성이 LG로 회사 이름을 바꾸더니 정부 돈으로 설립한 공기업인 포항제철이 COSCO로 바꾸니 문화부 산하기관인 공익광고공사는 COBACO로 바꾸었다. 새로 생기는 마을 이름을 영어로 바꾸는 지방자치단체도 있었다. 대전시 유성구가 테크노동이라고 바꾸었다. 다시 옛 지명으로 되돌렸다. 주민들이 아파트나 마을 이름이 영문이면 집값과 땅값이 올라간다고 그걸 바라고 있단다. 참으로 한심한 나라요 얼빠진 나라다. 정신 개조혁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 행정도시로 건설하고 있는 세종시는 마을과 학교, 거리 이름을 우리 한말글로 짓고 있다. 잘하는 일이다. 앞으로 이 나라는 앞으로 잘 될 것이다. 나는 이번 세종시가 우리 한말글 이름으로 지은 마을 이름을 살리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꿈을 갖게 되었다. 세종시의회 의원들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보다 수준이 높은 분들이다. 세종시는 빛날 것이다. 이제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 이름부터 한말글로 짓고 중국 당나라와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 잃어버린 우리 한말글 땅이름도 되찾자, 그리고 미국식 창씨개명은 제발 하지 말자. 정부와 학자의 책임이 크다. 남북 통일하게 되면 나라 이름도 한말글로 짓자. 너 나아가 성씨도 이제 우리 식으로 짓게 하자.
전문 학술용어로 영문으로 바꾸고 정부 부서 이름도 바꾸면서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를 한다.그리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세력까지 생겼다. 이런 우리 겨레의 얼말글을 죽이는 흐름을 막지 않으면 안 되기에 한자말로 된 학술용어를 빨리 한말글로 바꾸어야 한다. 통일 뒤 나라 이름도 우리 말글로 짓자. [2013년 한말글문화협회 이야기 마당 발표 글]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글들]
한글만 쓰기 주장 - 정음사. 최현배
우리말 연구사 - 태학사. 김석득.
한글학자 주시경 - 학국독서지도회. 김경선 엮음.
우리 말글 독립운동 발자취 - 지식산업사, 이대로
밝한샘 이름말 - 한글학회 . 밝한샘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누리집
동아일보 왜정 때 신문
한글 이름짓기 사전 - 미래사, 김슬옹, 김불꾼, 신연희 함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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