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무는 십이월 끝자락 일요일이었다. 앞서 이틀 동안 산과 들로 쏘다녔다. 그로인한 죄벌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왼 무릎이 시렸다. 마침 집사람이 요청하길 남은 토종마늘을 까리기에 묵묵히 깠다. 이렇게라도 다리한테는 안식을 주어 다행이었다. 아침나절 바깥으로 나서질 못하고 두어 시간 김장 때 못다 깐 마늘을 깠다. 고향의 여름마늘은 고층아파트에서 용케도 곯지 않았다.
고급인력이 마늘 까기는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가부좌를 틀었다 풀었다 하면서 겨우 마쳤다. 작업을 끝내니 점심때가 일러 시립도서관으로 갔다. 먼저 빌려 읽었던 천연기념물로 보존된 나무 문화재 이야기를 담은 책은 갚았다. 그리고 젊음 학자가 풀어 쓴 마음속에 마르지 않은 우물을 파라는 주역을 해설서를 뽑았다. 나머지 두 권은 고건축과 역사에 관한 책을 들고 나왔다.
집에 돌아와 점심식사 후 등산화 끈을 묶었다. 막상 나서려니 딱히 갈 곳이 없어 집 뒤 반송공원으로 올랐다. 휴일을 맞아 산책객이 더러 보였다. 야트막한 산정에서 시가지를 굽어보다 반지동 까치아파트로 내려섰다. 창원천 다리를 건너 봉곡동으로 갔다. 봉곡중학교 뒤 태복산에 오르려다 마음을 접었다. 무릎관절에 더 탈이 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하여 110번 시내버스를 탔다.
내가 목표한 곳은 창원향교였다. 십년쯤 전에 그곳을 한번 다녀온 적 있었다. 향교를 둘러보고 마침 2일과 7일이 소답 장날이기에 시장구경을 하고 싶었다. 시내버스로 잠시 이동하니 창원향교 앞이었다. 향교는 남해고속도로 동마산요금소에서 가까운 구룡산 아래다. 옛 창원 흔적으로는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이었다. 주택가 골목 끝난 곳 홍살문 곁에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보였다.
향교 서쪽에 오래 전 찾았을 때 보이지 않던 건물이 보였다. 유림회관과 유도회경남지부였다. 보수적인 어른이 머무는 곳에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공존했다. 아마도 건물유지비 일부를 충당하기 위해 보육시설로 임대했지 싶었다. 일요일이라 유치원생도 유림도 만날 수 없었지만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현장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 이어 손자가 대를 잇고 있었다.
유림회관 뒤를 둘러보다 눈길 머문 곳이 있었다. 계단 위에 문이 가려 있긴 해도 예사롭지 않은 구조물이 보였다. 내 예감에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문은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 열 수 있었다. 이미 그전 내 시야에 대리석 석상이 들어왔다. 직감으로 공자상임을 알았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경내를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곁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새긴 빗돌이 있었다.
느티나무를 앞에 둔 향교 정문 풍화루는 잠겨 있었다. 향교를 에워싼 돌담엔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돌았다. 담 너머 명륜당 계단에는 마삭넝쿨이 뻗어있었다. 나는 향교 동쪽 주택가를 돌아 기와집을 한 채 찾았다. 명륜당과 쪽문으로 연결된 향교 관리동이었다. 섬돌에 놓인 신발로 봐 관리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부담 주지 않으려고 발자국소리 내지 않고 향교 경내를 둘러보았다.
이어 나는 소답시장으로 갔다. 창원바닥에서 드물게 산 짐승을 파는 곳부터 찾았다. 창원초등학교 담장 아래는 오후까지 임자를 만나지 못한 가축이 있었다. 닭과 오리는 물론 강아지와 토끼도 여러 마리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으로 헤아려지는 자매가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흥정하고 있었다. 주인은 만 오천 원은 받아야 한다하고 학생은 돈이 만원 밖에 없다 했다.
나는 한약건재상 앞에서 기웃거렸다. 탕제원의 이름이 붙은 가게 곁이었다. 두충, 구절초, 익모초, 영지, 우슬, 작약 등 평소 잘 아는 한약재를 말려 잘게 썰어 팔았다. 개량한복을 입은 젊은 주인여자가 따뜻한 오미자차를 건네주어 고맙게 마셨다. 나는 약재를 팔아주지 못해 미안했지만 주인은 괜찮다고 했다. 이후 연락 닿은 친구랑 명태전을 앞에 놓고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다왔다. 09.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