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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乙巳年) 1월 둘째 주 일요 정기 법회 및 지장 재일 법회 일입니다.
봉사자분들은 현관에서 법회지 배포, 데스크 안내, 법회 안내 배너 및 재 안내 표시판 설치, 엘리베이터 안내 분주한 아침입니다.
사무국에서는 재 접수 및 위패를 제작하여 붙이시는 작업을 하시고, 회장님을 비롯한 정수위원님들은 회의를 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보광당엔 보문부에서 재 공양물을 준비하여 영단에 올리시고, 거사님들께서는 영단 위패를 모시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법회가 시작되기 전에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는 모습은 정말 여법한 불광법회 형제들의 모습입니다.
보광당 입구에서 강남구(대오행, 정진행), 강동 1구(법계정), 강동 2, 3구에서 떡과 생수 보시하시고 법회 참석 형제들께 나눔 봉사를 하시고, 법회안내팀, 다도팀, 새법우 안내 봉사팀이 자리매김을 하고 계시니 법회 준비가 여법하게 되고 있습니다.
법회 현수막 설치, 안내문 부착, 방송실 세팅 등, 불광 형제 여러분들의 많은 수고 덕분에 이제 곧 법회가 시작되겠습니다.
심진 거사님의 천수경 독송, 타종, 혜안 거사님 시작 말씀 따라 헌향, 헌다, 영단에도 헌다를 올리며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한파 특보가 내려졌던 추운 날씨임에도 보광당이 빈틈없고 발코니 석에도 자리하신 불광 형제들은, 정법을 지키고, 불법을 이어가기 위해 이렇게 모였습니다. 법회가 있으므로 자발적으로 모여든 불광 형제들의 이 모습을 주지스님도 보고 계실 텐데. 왜 이 많은 불자들을 외면하시고 어떠한 화합기도를 하시는 것인지 저희들은 궁금할 따름입니다.
금주의 법문 : 불광법회 선덕혜담 스님
금주의 법어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지성(智性)의 세계와 본성(本性)의 세계]
존경하고 사랑하는 불광법회 불광사 법등 가족 형제 여러분 고맙습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하여 오늘의 불광법회를 함께 하시는 전국의 사부대중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형제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이 항상 함께 해서 가족 모두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축원해 마지않습니다. 법문에 앞서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대각회 이사 가운데서 유일하게 불광법회를 편들고 도움 주시는 혜총스님이 가끔 말씀하십니다. 자기는 어릴 때 부모님께서 보니까 명이 짧아서 그 짧은 명을 면하려면 출가를 해야 된다고 해서 부모님이 출가를 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옛날부터 사주가 잘못 됐다, 명이 짧다 하면 출가를 하든지 절에 판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의 속임수죠. 사주 상에 명이 짧다고 하면 그 사주를 길게 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으로 사주를 바꾸는 겁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절에 출가를 하면 사주가 역할을 못 한다 그래서 명을 길게 한다는 것에 근거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실 출가를 해서 승복을 입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큰 복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지금 우리는 불광법회의 회장님도 만나고 수석 부회장님과 보관 감사님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어른들이 물론 다른 거사님, 보살님들 직업은 잘 모릅니다만 그런 분들이 더러 있을 겁니다. 이런 어른들을 우리가 지금 절에 있기 때문에, 스님들로 말하면 출가를 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지 보통 절에 있지 않는 일반인이라면 아마 다음 생에도 못 만날 겁니다. 그만큼 참 만나기 힘든 그런 분들입니다. 지난 번 송년 잔치에서도 보살님들이 하는 걸 보면서 참 다양한 재능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 있는 법회 임원들이나 보살님 거사님 다들 보면 절에 오지 않았더라면 만나기 힘든 어른들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출가를 해서 승복을 입었기 때문에 그냥 쉽게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불광법회 불광사를 운영하는 스님들입니다. 자기들이 스님이 안 되었더라면 아마 돈을 천억을 준다 해도 못 만날 보살님이나 거사님들입니다. 이걸 모르고 신도니까 그냥 막 대하는 겁니다.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의 복이 있으면 귀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복이 없으면 못 만나는 겁니다. 복이 없는 사람이 어쩌다 승복을 입고 그 복에 의해서 현진 법회장이나 현문 수석 부회장이나 보관 감사 같은 이런 어른들을 만날 수 있는 겁니다. 그걸 모르고 승복 입었다는 그 자체로 내가 잘났다 하고는 무시하려 하고 온갖 방해하려 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스님들 특권이 아니라 중물이 덜 든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제발 불광사에 소임 사는 스님들, 창건주도 그렇고 주지도 그렇고 스님들이 현실을 바로 알고 얼마나 귀한 어른들이 불광법회를 장식하고 있는가 하는 데 눈을 떠서 불광법회가 정상화 되도록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일체유심조’ (지성의 세계와 본성의 세계)로 말씀을 드리기로 했는데 좀 양이 많아서 다음 2월 2일에 다시 한 번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화엄경의 사구게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문으로는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한글로 되어 있는 걸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계와 일체의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응당히 법계성을 관할지니라. 일체는 이 마음이 지었느니라. 이런 말이 나오는데 마지막 말이 일체유심조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마음이 지었다고 나오면 우선 우리 불자들로서도 부처님 말씀이지만 참 믿기 힘듭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것이 내 마음이 지었다고 하면 소위 말해서 서울에 우뚝 솟아있는 저 남산이나 한강물이 내 마음이 만들었다고 믿기가 힘들죠. 그래서 세상만사가 전부 부처님 말씀대로 내 마음이 만들었다고 되면 그 말씀 자체가 당혹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일체유심조, 일체는 마음이 만들었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보통 우리가 마음이라 할 때 너도 마음 있고 나도 마음 있지. 그렇게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굉장히 깊이 분류를 했어요. 마음을 말할 때 심, 의, 식 세 가지를 말합니다. 마음 심(心), 뜻 의(意), 알 식(識)자를 합해서 마음이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뭐냐? 심의식 세 가지로 나눌 때, 심(心)이란 것은 소위 말해서 아뢰야식, 우리가 지은 바 모든 것이 축적되어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다음에 나오는 의(意)란 보통 하는 말로는 의식(意識)입니다. 말은 의식이라 하지만 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최첨단을 걷고 있다는 학자들도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의를 못 내리고 있어요. 우리가 의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다 압니다. 그런데 의식이 어디에 있느냐? 어떤 과학자들은 뇌에 있다고 하지만 뇌에 있는 건 아닙니다.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현대 과학자들이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이런 것이 의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5학년 되었을 때 산에 가서 개미집을 파서 개미를 많이 모아서 가져 와서 큰 병 속에 넣어서 흙을 채우고 신문지로 말아서 캄캄하게 했다가 일주일이나 지나서 신문지를 열어보면 개미들이 집을 잘 지어놓았어요. 3층 4층으로 정확하게 지었어요. 그 개미들이 집을 짓는데 감독하는 개미도 없고 스스로 지어요. 저 개미들은 도대체 어디서 지시를 받고 무슨 업으로 정확하게 집을 지을까? 그건 어느 개미집도 마찬가집니다. 그 개미들이 집을 지을 때는 아마 개미들의 의식이 있을 겁니다. 개미의 의식이 개미한테만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의식이라는 자체는 뭐냐? 풀이를 하자면 의식은 사량분별입니다. 사량하고 분별하는 것이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이란 것이 뇌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과학자들도 이것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만 보통 쉽게는 뇌 속에 있다고 하지만 뇌에 있는 것은 아니죠. 만약 뇌 속에 있다면 그 의식이란 것이 양파 조각처럼 조그만 곳에 의식이 들어있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죠. 의식은 뇌 속에 있기도 하지만 뇌를 벗어나 있는 겁니다. 의식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저런 사량 분별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알 식(識)자는 의식이 분별을 해서 설탕과 소금을 비교해서 먹어보든지 해서 이건 소금이 아니고 설탕이라고 정하는 것은 식이죠. 처음에 설탕인지 소금인지 구별이 안 가죠. 그러나 경험상 여러 가지를 해서 맛을 봐서 이건 소금이다, 이건 설탕이라고 결정하는 겁니다. 이것은 식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이란 것은 결정적으로는 의식이 짓는다는 말입니다. 내 의식이 모든 것을 짓는다는 말이 더 맞습니다.
현대의 양자물리학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의식의 문제 그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과학계의 뉴턴 물리학에서 큰 우주 문제라든가 대단위 현상계를 할 때는 맞았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물질과 정신은 전혀 다른 것이라 주장했고 그 사상이 한 400년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1925년에서 1930년 때에 물리학자들이 양자물리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돼요. 양자물리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면서 현상적으로 엄청난 과학계에 변혁이 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뉴턴 물리학이 혹은 데카르트의 물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건 아니다. 보니까 뉴턴 물리학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있는 겁니다. 거시 세계에서는 맞아요. 지구가 어떻게 움직이고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건 맞아요. 그런데 조금 더 미세한 부분으로 가면 그건 안 맞는 겁니다.
우리가 어릴 때 과학 시간에 보면 원자핵이 있고 그 원자핵 주위로 전자가 돌고 아주 예쁘게 그려놓아요. 그런데 양자물리학이 발견되면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닐스 보어라는 사람이 보니까 그렇게 원자핵 주위로 전자가 돌고 하는 예쁜 그림이 아니고 그 이론이 잘못 됐다는 것이 발견된 겁니다. 19세기 말에 양자물리학에 의해서 뉴턴물리학이 거시 세계에는 맞지만 미시 세계에는 안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도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오래 되어서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4~5년 전부터 계속 물리학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 왜 말씀드리느냐 하면 저는 출가해서 계속 어떻게 하면 도를 이룰까 해서 화두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벽암록을 텍스트로 해서 거의 30년을 씨름한 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화두에서 오는 억압에서 풀려나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책들을 보게 되면서 처음 접한 것이 양자물리학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보는 순간에 전혀 다른 세상을 본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양자물리학에서 보니까 이 세상의 모든 현상계는 사람의 의식이 만들더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일체유심조로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든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이 아니고 의식이 만들더라.
그래서 의식이 어떻게 만드느냐? 닐스 보어의 양자물리학 이론에서 보면 본래 원자라는 것은 어릴 때 과학책에서 배운 것처럼 딱딱하게 동그랗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물결처럼 퍼져있는 파동이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파동이 물결처럼 공기처럼 있다가 사람이 의식적으로 관찰하면 이것이 파동이 붕괴되어서 고착화되는 겁니다. 원자가 되는 겁니다. 파동이 단일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관찰함에 의해서 되니까 사람의 의식이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개가 그것을 관찰하면 되느냐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사람만 되는 겁니다. 사람의 의식이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 파동이 붕괴되어서 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의식이 정하는 것이다, 일체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1999년도에 일본인 마사로 에모토라는 과학자가 ‘물은 알고 있다’라는 책을 냈어요. 이 책을 보면 물을 떠서 세 군데로 나눠서 한 유리 상자에는 ‘너는 참 예쁘다, 잘 생겼다, 고맙다’는 말을 써서 붙였어요. 두 번째 상자에는 ‘아이고 지겨워, 너 나쁜 놈이야,’ 붙여놓고 세 번째는 아무 것도 붙여놓지 않았어요. 그렇게 두고 보니까 똑같은 물을 향해서 의식적으로 너는 아주 좋은 존재야, 고마워 라고 붙였던 물속에는 물을 사용해보니까 보통 육각형으로 나타나는데 아주 정교하게 분자가 육각형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너는 나쁜 놈이야 라고 한 것은 그것이 찌그러져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붙이지 않았던 것은 그냥 물이여.
이렇게 된 것은 물이란 것도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그 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예쁘게 나타나기도 하고 예쁘지 않게 혼란스러운 분자 양식을 보이는 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물조차도 우리가 마음을, 의식적으로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서 물이 바뀌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물질계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이런 종류의 상황들을 양자물리학자들이 발견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일체 모든 것은 우리 의식이 만들어낸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런 것이 만들어진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내가 좋은 마음을 갖고 사물을 바라봤을 때 현상계가 그렇게 변하고 내가 나쁜 마음을 갖고 바라보면 현상계가 그렇게 변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이 배가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혼란된 적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저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많은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승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데모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 같이 이렇게 혼란되었던 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혼란된 것을 우리 마음으로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항상 우리가 보살계 서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밤인즉 마음을 거두어서 고요를 가져라.’ 그러면 너 주변도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한다는 것은 내 마음으로 노력하는 거죠. 그래서 주변이 혼란될수록 내가 마음을 거두어서 맑아지고 고요해지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도 맑아지고 고요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과학적으로 이것을 말합니다. 대중의 40%가 같은 마음을 먹고 있으면 그 주변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마음을 고요히 했을 때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자동차가 좀 고요해지고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보리광 보살님 녹취)
저는 원래 미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유튜브를 통해서 봤을 때, 서기 2025년이란 해는 굉장히 어려운 걸로 되어있어요. 지진이 나고 이런 것들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지구인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마음이 통했을 때, 그리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그래서 우리 모두가 아무리 주변이 혼란되고 소란스럽더라도 우리가 마음을 거두어 한곳에 모아 두었을 때, 그렇게 되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보통 한국불교는 수행 방법이 간화선이죠. 간화선인데, 며칠 전에 어느 스님이 전화가 왔어요. 현재 총무원장이신 진우스님이 주창하고 있는 ‘선명상’ 그 말이 맞는 말이냐, 아니냐, 이것을 물어요.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잘못 짚은 것 같아. 선(禪)이란 것이 명상인데 선 명상이 말이 안 되지 않느냐, 그런 얘기를 해서 나도 공감한다고. 원래 명상이란 말 자체가 불교사전에는 명상이란 말이 안 나와요. 다만 선(禪)이란 말은 나옵니다.
선(禪)을 변론을 해서 명상이란 말 자체를 서양 사람들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선 자체가 명상인데 선 명상이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그런 생각이라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결론을 못 내었지만, 선 명상 말 자체가 모순이다. 선(禪)이 명상이고 명상이 선(禪)인데, 왜? 이걸 붙여서 이상한 수를 만드느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내가 나의 현실을 막는다고 하는 것은, 즉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고 이것은 마음이 그냥 마음이 아니고 우리 의식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된다 이 말입니다. 이 의식이 어떻게 만드느냐,
그런데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법문인 일체유심조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이 ‘마음[심(心)]은 하나다.’ 라는 막연한 지식 혹은 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마음이 하나라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아 살고 있는데, 이 지식이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능엄경(楞嚴經)』에는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시하고 있다. “원래 범부들이 시작 모를 옛적부터 미혹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생사의 근본인 미혹된 마음을 자기 본성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둘째는 깨달음의 본성인 청정본심(淸靜本心)이 자기에게 갖추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능엄경 얘기로는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청정본심이고 하나는 차별되지 않는 꽃이 붉다 강물이 흐른다 하는 것들은 본성이 아니라 의식이 나눈 분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인줄 알아요. 실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것은 가짜다. 가짜 마음을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마음에는 청정본심이 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이라고 하는 원만 구족한 청정본심이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기 때문에 망상에 사로 잡혀 망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참선을 하고 바라밀염송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망상이 떠오르죠. 그렇게 망상 속에 살기 때문에 내가 망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마음을 한곳에 모아서 바라밀 염송을 하던 참선을 하던, 화두를 관하면 망상에서 벗어난 다른 것이 보입니다. 참선을 하거나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할 때 왜? 망상이 나오느냐 청정본심을 찾게 될 때 마음속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통 망상 속에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망상을 벗어난 다른 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청정본심이다. 그것을 아는 마음은 참마음이 아니고 분별하고 꾸미[계교(計巧])는 마음이라는 것이다.나에게 청정본심이 있다는 것에 눈을 떠야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전부 마음은 하나 밖에 없어 내가 지금 시비하고 따지는 이 마음이 전부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능엄경의 말씀입니다.그래서 그 망상을 떼어 놓는 내 본래 청정본심이다.
사실 스님들이 왜 출가를 할까? 스님들께 질문하지 않아야 될 몇 가지 있는데, 스님 왜 출가하셨습니까?
요즘에 와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출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스님이 직업이라 승복 입고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 그래서 출가하게 되었다는 것을 근래에 와서 알았습니다. 저희들이 출가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시비하고 따지는 마음 아닌 본래청정 이 마음을 찾기 위해서 출가를 했습니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왕이 될 숙명인데 그런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 세상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것을 팽개치고 출가하셨습니다.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 출가를 결심하셨고, 이 현상 세계를 벗어나게 된 겁니다. 스님들이 출가를 하는 근본은 휘황찬란한 속세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나의 고통은 어디 있고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인가 찾는 것이 바른 출가입니다.
두 달 전에 한양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스님이 되어 해인사 강원에 들었는데, 해인사 학인스님들 행동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 강원을 뛰쳐나온 거야. 사미승인데 자기가 머무를 곳이 있는지, 동국대 불교학과를 가라고 코치를 해 줬는데 이 스님은 내 말에 수긍을 안 해요. 출가를 해서 옆에 있는 도반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걸 참아 내야 한다. 못하면 문제가 있다 그걸 참아 내는 것이 수행인데 그런 생각이 들어 수행자의 본분을 지켜라 이렇게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전화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현상을 바로 알 때 청정본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정본심 그 자체에 가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것은 본래 마음이 아니다. 본래 마음 벗어난 더 깊은 곳에는 청정본심이 있다. 그것을 찾았을 때 나는 그 삶을 살고 있다.이렇게 결론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현상 세계 속에서 헐떡거리고 짜증내고 하는 이것을 내 던지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청정본심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을 때 비로소 참된 불자가 되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 현상 세계에 있는 이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재미있는 그 세계만 쫓아가면 수행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불자로서는 여기에 착안을 해서 큰 스님부터 시작해서 계속되어 왔는데 하루에 30분이라도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하면서 마음을 모아야 됩니다. 그랬을 때 내 주변이 편해지고 내가 편해지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한국 사회가 편해지고 세계 평화가 오는 겁니다. 이런 삶 속에서 우리들이 보살로서 실질적인 행을 했을 때 보살마하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일체유심조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2월 2일날 법문할 때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월광화 보살님 녹취)
♬ 찬탄곡 : 님께로 가오니 ( 조용하 작사. 조영근 작곡 ,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억겁을 떠돌던 불쌍한 이 중생 님께로 가오니 거두어주소서
시방세계 속에서 겹겹이 묻은 때 세존의 자비로 용서하여주소서
때늦은 귀의를 나무라지 마시고 불쌍한 이 중생 거두어 주소서
영겹을 떠돌던 미혹한 이 중생 님께로 가오니 거절치 마소서
사바세계 속에서 삼독의 번뇌를 성존의 자비로 용서하여 주소서
때늦은 귀의를 나무라지 마시고 미혹한 이 중생 거두어주소서.
발원문 낭독 : 차석 부회장 보성화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반갑습니다. 불광으로의 첫발걸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젊으신 보살님들의 앞으로의 삶이 불광 법회와 함께해서 행복하여 지길 바라며 정법을 배우고 호법(護法)하시는 참 불자가 되시도록 불광 정상화가 조속히 이루어지길 발원합니다._()_
보문부 보살님들께서 힘드실까봐 회장님, 부회장님들께서 공양물을 상단에서 영단으로 옮겨주시고 계신 동안, 혜담스님과 연화부 거사님들께서는 의식 집전을 하시기 위해 영단쪽으로 자리하시어 지장재일 시식이 시작됩니다.
한분한분 줄을 서고, 손 소독제로 손을 닦고 영단에 잔을 올리고 정말 아름답게 의식을 진행하는 불광법회 형제들 대단합니다.
마하보디 합창단이 '무상게' 음성공양 올리고, 불광 형제 다함께 '빛으로 돌아오소서' 를 끝으로 원만하게 의식이 끝났습니다.
법회가 끝나고 보문부에서 공양물을 나눔 해 주신 것을 드시며 안내팀의 배웅을 받으며 귀가하시는 불광형제분들의 행복한 미소가 참 좋습니다. 다음 법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두런두런, 각 구 법등끼리 모여 법등모임을 하시며 각기 준비해 온 먹거리로 점심 공양을 하고 계시는 보광당 풍경입니다.
무겁게 잠가진 상태임에도 공양실 앞에서 준비해 온 점심 공양을 하는 구법회도 있습니다. 스님, 공양실 개방해 주십시오!
일요법회가 끝나고, 오늘도 대웅전에서는 많은 분들이 동참하여 금강경 독송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청정팀 봉사팀에서는 유난히 한파가 심하던 토요일에도 쓸고 닦고 의자를 옮겨 배치하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멋집니다.
손이 시려워 꽁꽁, 발이 시려워 꽁꽁. 너무너무 추웠던 지난 주에도 조계사, 봉은사에서 1인 시위 정진을 하고 계신 불광 형제들.
토요 집회 정진하신 불광 형제여러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무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추워도, 더워도, 변함없이 불광 정상화가 이룩되는 그날까지 정진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훌륭하게 법회일지 작성하신 마음님, 스님의 귀한 법문 풀어 쓰신 월광화님, 법회의 다양한 모습 사진으로 남기신 지일심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_()()()_
바라말 보살님, 녹취 도움을 주셔서 훨씬 수월하게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