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적 감수성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소식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국뽕[1] 끼가 심해졌나? 아니면 ‘작품상’이라는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기생충>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의 적확(的確)함과 치밀한 표현력에 감동을 받았던 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느껴 본다.
<기생충>에 대한 찬사는 들을 만큼 들었을 테니 이 정도로 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고 싶다. ‘봉테일’이라는 별명답게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들도 모두 완벽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다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상소감 어디에서도 그 영화의 주제인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는 우리 체제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대가로, 바로 그 체제의 정점,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올랐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반지하에 남고, 봉 감독님은 ‘박 사장’의 위치에 올라 대중의 ‘리스펙’을 받게 되었다.
지난 2월 9일,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는 봉준호. ⓒGetty Images.
수상 이후 여러 논평들을 들어보아도 현실 변화를 위한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감독의 천재성과 노력, 배우와 스텝들의 열정, 한국영화 101년 역사의 영광,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 총선에서의 유불리 등이 입담의 주제이다. 영화가 제기한 문제의식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이고, 심지어 이 평론들은 영화가 비꼬는 기존 질서의 가치 위에 서 있는 것들이다. 감독은 스크린에서 우리 사회 문제를 폭로하고, 관객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영화관에서 이를 소비하며, 이를 통하여 영화 ‘산업’은 융성해진다. (감독이나 배우가 아닌 제작사와 배급사 대표가 작품상 수상소감을 말한 것은 상징적이다.) 흥미로운 분석이 하나 있다. 미국 주도의 영화제에서 아시아인이 상을 휩쓴 것은 트럼프로 상징되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할리우드의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항은 딱 거기까지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연극적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허구 세계의 불쌍한 자들에게는 애정과 동정심을 가지면서도, 막상 현실 속에서 만나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심리를 일컫는 말이다. 예컨대 연극을 보면서 주인공의 불운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귀부인이 자신의 마부는 추위에 떨든 말든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감수성이다.
거대한 속임수
영화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하다. 2014년,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다룬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영문판은 50만 권이 넘게 팔렸다 하고, 우리말 번역도 8만 부가 넘게 팔렸는데, 완독률이 가장 낮다는 평판을 보면 끝까지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듯싶다. 한 학자가 세계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이론과 해결책을 내놓으면, 수십 명의 명망 있는 학자들이 달려들어 각자 자기 입장에서 분석하고 칭찬하고 비교하고 비평하다가, 너덜너덜해지면 폐기하는 것이 학계의 관행이다.
토마 피케티를 필두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들이 계속 번역 출간되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으로서 상위 1% 부자의 탐욕을 다룬 『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2016년)나, 중산층 붕괴를 분석한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퍼트넘이 쓴 『우리 아이들』(2017년), 중상층의 위선을 고발한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2019년) 등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보수적 매체들도 이 저서들을 앞다투어 소개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런 책들을 읽을 정도의 지식인들이라면, 이 책들이 제시하는 해법을 행동으로 옮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리라.
기고자가 소개한 도서.
책은 사람을 계몽시키는데, 계몽시키려면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객관적으로 사태를 보는 사람은 무모하게 뛰어들지 않는다. 책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 해결책을 실행할 동력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책을 쓰는 사람도 이를 읽는 사람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거대한 속임수다! 너무 심하게 말했다면 용서하시라. 좀 더 온건하게 표현하자면, 행동할 능력과 의지가 없는 사람이 책을 쓰고 읽는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대답해야 할 때
마르크스주의는 그 이론의 허망함과 실천의 폭력성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된 지 오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남긴 흔적 가운데 다음과 같은 명언이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해석과 변화, 이론과 실천, 설교와 삶, 교리와 선교는 뗄 수 없이 한데 얽혀 있다. 이론을 정립하면 실천의 방식이 도출된다는 생각은 근대주의(모더니즘)의 착각일 뿐, 성경의 사고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실현된 적도 없다.
성경의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걷다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맹인을 만났다.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9:2).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제자들의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불평등에 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맹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폭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맹인도 엄연히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인데,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상태에 대하여, 그의 죄에 대하여, 그의 부모의 죄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안 그래도 고통받는 사람에게 종교적 죄책감까지 얹어주었다.
영화 <기생충>의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인 ‘냄새’ 문제를 생각해 보자. 냄새에 관한 신(scene)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다. ‘이 감독 참 날카롭네. 마치 문제를 핀셋으로 콕 집어 올리는 것 같구먼. 그런데 좀 얄밉네. 냄새나는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언젠가 설교 중 내가 경험한 외국인들의 냄새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설교 후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미국에 살 때 김치 냄새, 마늘 냄새로 위축되었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아차!’하는 자책감이 들고 지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봉 감독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이제 냄새는 ‘구별 짓기’(부르디외)[2]의 한 기준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영구히 각인되어 버렸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다시 요한복음의 맹인 이야기로 돌아가자. 예수님은 이 맹인이 들었을 것을 염려하셨는지 급하게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9:3). 예수님은 죄와 질병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한 아름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죄와 질병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예수님은 이 맹인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다. 제자들은 그를 쓸모없는 잉여 인간으로 대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일하실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게 기독교다. <기생충>은 질문을 던짐으로 사명을 다하였고,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이 대답해야 할 차례다. 피케티, 라이시, 퍼트넘, 리브스는 진단과 처방을 내렸고, 이제 기독교인들이 실천해야 할 차례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그 대답을 몸으로 보여주셨고, 선배 교회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 문제인 경제적 불평등을 고칠 동력을 제공하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는다. 현재의 한국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위하여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어떤 방식으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접근하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현재의 한국 교회가,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으며 제 몸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한국교회가, 도대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을 수 있나?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앞으로 두어 차례의 글을 통하여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1] 국가+히로뽕. 우리나라가 단연 최고라고 여기는 태도나 감정(편집자 주).
[2] 문화적 취향과 소비 행위를 바탕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