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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김소리 목사
누가복음 23:26-38
자비와 연민
본문은 예수님께서 끌려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입니다. 그렇기에 보통 고난주간에,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요일인 성금요일에 많이 묵상하는 말씀입니다. 사순절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절정을 향해 간다면, 이 말씀은 지금 묵상하기엔 다소 이른 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함께 이 말씀을 나누고 싶은 이유는,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올해 떼제 기도회 때 이사야서와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년엔 주로 마가복음으로 묵상했는데, 올해는 누가복음으로 묵상하는 있습니다. 그런 만큼 누가복음만 말하고 있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복음서를 비교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비슷한 구조와 방식으로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비교연구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관점이 비슷하다는 의미로 공관복음이라 부릅니다. 복음서를 비교하며 읽는 것은 비단 학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읽는 사람들 중에는 복음서의 차이를 발견하곤 비교해서 읽기도 합니다.
때론 복음서 내용 전체를 통합하기도 합니다. 저에게 대표적인 것은 <가상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후 하신 7가지 말씀이란 뜻으로, 복음서 네 권에 기록된 것을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땐 고난주간이 되면, 교회학교에서 가상칠언을 배우고 하루에 한 구절씩 묵상하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은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고대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라는 책인데요. ‘넷을(tessara) 통하여(dia)’라는 뜻으로, 170년경에 타티아누스가 사복음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편집하여 한 권의 복음서로 만든 것입니다. 이 책은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호응을 받았는데, 특히 동로마 지역의 시리아 교회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200년 이상 시리아 성경과 성구집에서 사복음서를 대신하여 이 단일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정경으로 사용한 셈이지요.
이 표는 학자들이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외에도 각 복음서별로 다 정리 되어있는데, 신약개론 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표 역시 제가 신대원 때 공부했던 신약개론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절반 분량이 누가에만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처럼 학자들은 복음서를 비교하고 단독으로 언급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 복음서의 고유한 특징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 복음서의 고유한 생각, 사상, 신학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각 복음서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싶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누가만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본문이 다루고 있는 예수님께서 끌려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가 다루고 있으니, 정확히는 누가만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자 절정인 십자가 죽음이라는 상황에 처한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 말이지요. 이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다 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누가가 이해하고 있는 그리고 전해 받았고 전하고 싶은 예수는 이런 분이신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렇다면 본문에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일종의 유사성, 공통점이 느껴지진 않으셨나요?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본인을 보며 통곡하는 여자들을 보시곤, 뒤돌아 하신 말씀에서 무언가가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게 한 자들과 그런 자기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에서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자신보단 다른 사람을 걱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상황이 편안하고 살기 좋기 때문에 걱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모욕적인 신문을 당한 후 곧 죽기 위해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걱정하신 것입니다.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들을 행한 사람들과 방관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을 걱정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자비하심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만약 자비에도 급이 있다면, 이보다 자비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상형 자비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누가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 그리고 전해 받았고 전하고 싶은 예수의 모습 중 하나는 바로 이토록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모멸과 죽음이라는 불명예라는 상황에 놓여있지만, 오히려 그들이 겪을 고난과 불행을 걱정하시고 맘 아파하시는 분이시며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것 말이지요. 예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 아닙니다. 꾸준히 나왔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의 여인들과 그 자녀들을 걱정하시는 모습은 19:41-44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누가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오히려 멸망을 슬퍼하시고 그 과정에서 겪을 주민들의 재난을 함께 아파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멸망의 책임이 예수님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예수를 죽게 함으로써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는 자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그들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분이라는 것을 대조적으로 분명하게 밝힙니다.
다음으로, 본문의 자신의 목숨을 빼앗고 조롱하며 모욕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모습은 6:27-36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배의 말씀으로 읽었던 구절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은 누가만 말하는 것은 아니고, 마태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는 반면, 누가는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즉 누가가 더 직접적으로 자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이것을 가르치셨는데, 누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이것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를 때리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옷을 강탈하며 목숨도 빼앗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십니다. 저들을 용서해달라는 간구를 하시며 그들을 선하게 대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그대로 실천하십니다.
그리고 누가는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모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직접적인 원인이자 동기라고 이해하고 강조합니다. 대표적으로 1장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누가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동력은 그분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누가는 명시합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자비를 끝까지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 땅에 임하는 직접적인 원인이자 동기이며 원초적인 힘인 하나님의 자비를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이 땅에 실현시키신 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 예수는 죽기 위해 끌려가는 와중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이 떠나가는 와중에도 자비를 잃지 않고 그들을 걱정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며 용서하신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누가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평화를 주시기 위해 취하신 방식이 어떠한지를 말이지요. 무지하여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힘을 통해 무고한 사람을 고발하고 죽이며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말이지요. 그들과 똑같이 증오와 멸시로 그들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그들은 그렇게 대했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자비로 대하셨습니다. 무지한 저들을 용서해달라는 자비의 마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강제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시지 않고, 용서와 자비라는 하나님의 힘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모진 고문을 받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처형 당해도 그 참혹한 현실을 동정하고 연민의식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반면에 자신이 죽음에 내몰리는 상황에도 다른 사람들이 겪을 재앙과 고난을 걱정하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이 겪을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연민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고 동참하고 있는 참된 지도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에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조롱하고 모욕하는 쪽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겪을 아픔을 걱정하시는 쪽인지 말이지요. 또한 멸시하며 증오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힘으로 찍어 누르는 쪽이 참된 지도자인지, 아니면 그런 그들을 위해서 용서를 간구하며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는 쪽이 참된 지도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인지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보인다면, 우리 역시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누구의 뒤를 따라야 하는지, 어느 길을 선택하며 나아가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어느 길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어느 길로 인도하시는지도 말이지요.
한 가지 오해를 방지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이, 힘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결코 저항하지 말라, 그들이 하는 일을 비판하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잘못됨을 예수님께선 주의하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맞이하고 있는 죽음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바른 소리를 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들의 잘못을 결코 모른 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증오가 아닌 자비와 연민의 방식을 취하셨고, 그것으로 저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자비와 연민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자신을 목숨을 빼앗는 자들에게도, 자신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말이지요.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원과 평화를 베푸시는 방식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온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아파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한 여전히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며 다른 사람들을 힘으로 누르며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일이 반복되면서 증오가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힘과 세력을 키워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를 연민과 자비의 길로 부르십니다. 이 길로 인도하십니다. 부디 이 땅에 구원과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연민을 깊이 묵상하며 그 길을 따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