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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름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찜통 폭염 더위가 일상이었는데, 그나마 입추 지나고 태풍도 한 번 왔다 가고 나니까 기온이 살짝 괜찮아졌어요.
이쯤 휴가 가는 사람도 많다죠?
하지만 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해당 사항 없습니다. 저는 업무 일정상 광복절에도 출근해야 합니다. ㅎㅎ
원래 연휴 때 써서 올릴 계획인 감상문을 지금 등록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죠.
도서명: 풍수전쟁
저자: 김진명
* 이 도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통신망 아이프리 도서관과 넓은마을 도서관에 데이지 형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예전에 김진명 작가의 <글자전쟁>을 읽은 적 있다. 중국 글자로 알고 있는 한문, 그러나 그 글자에 우리나라 지분도 있다는 것, 한문의 기원은 갑골 문자인데 그 문자는 동이족이 기원이고, 동이족은 곧 우리나라 민족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문이 우리의 영향을 받은 글자라는 논지에 픽션과 논픽션을 더해 엮어낸 소설.
당시 그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었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제목인 《풍수전쟁》이 전자도서로 제작된 게 아닌가.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 《풍수전쟁》 - 대통령에게 날아온 저주의 예언, 그 의미란?
“나이파 이한필베. 저주의 예언이 이루어지도다.”
어느 날 대통령의 핸드폰으로 괴이한 메시지가 전송된다. 대통령 정도 되면 아무나 함부로 연락을 취하지 못할 것 같은데, 설정인지 작품 내 전개를 위한 허용인지 대통령이 검사 시절의 휴대폰 번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메시지는 그에게 전해졌다.
그렇다. 현직 윤석열 대통령이 소설에 등장한다. 그런데 저주의 예언은 대체 무엇인가? 나이파 이한필베. 무슨 주문 같은 이 문장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대통령은 왠지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아 메시지의 내용을 파악해보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막상 메시지를 보낸 핸드폰 주인은 어느 노인이었다. 그가 보낸 것도 아니었다. 카페 테이블에 잠깐 핸드폰을 두고 화장실에 간 사이 누군가 그의 핸드폰을 슬쩍 빌려 저주의 문자를 보낸 것.
결국 이 찜찜한 주문을 해석하기 위해 대통령실 행정관 김은하수가 뛰어든다. 사실 고참 행정관들이 미루고 손 놓은 걸 맡게 된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은하수는 언어 학자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보고, 관련 서적도 찾아보는 등 사방팔방 문장의 의미를 추적한다. 하지만 실마리는커녕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굳어져만 갈 뿐이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바로 대학 동기 형연이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책을 읽겠다며 대학 도서관에 눌러앉은 괴짜 친구였다. 심지어 사주나 풍수 등 은하수는 터부시하는 비과학적인 영역까지 탐구하곤 했다. 🌌
과학적, 논리적, 전문적인 분야에서 실마리를 건지지 못한 은하수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미지의 영역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미지수의 가능성을 품고 형연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그녀와 그는 역술가, 풍수사, 법사 등 술사들이 모이는 회합장을 찾아 질문한다. 나이파 이한필베, 그 주문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그러나 어떤 고명한 술사조차 감도 잡지 못한다. 은하수는 실망하지만 의외롭게도 형연이 그 주문의 정체를 밝힌다. 힌트는 생뚱맞게도 경제 예측 보고서에 있었다. 나이지리아, 이집트, 파키스탄, 이란, 한국, 필리핀, 베트남 이 나라들의 첫 글자를 딴 미래의 경제 성적표.
“우리 한국의 몰락이 애를 안 낳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란 말입니다. 나라의 경제력이 이란이나 이집트보다 떨어진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립니까?”
한편 현대경제연구소의 서동규 연구원이 네 명의 노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보고서에서 2050년 나라별 경제력 예상 순위를 위에 나열한 대로 예측했다.
노인들은 우리나라가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등에 뒤쳐지게 되리라는 예측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예측을 내놓은 연구원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납치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노인들 중 주동자는 어느새 스리슬쩍 행방을 감추고, 납치 사건은 대통령에게 전해진 나이파 이한필베 저주 메시지와 맞물리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다. 동시에 대두되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인구 절벽’이었다.
🕴️ 《풍수전쟁》 - 한국에 뿌리내린 저주, 그 정체는 무엇인가?
“이 땅에 최면을 걸어라.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최면을, 그리하여 조선을 사발 안에서 끓게 하라! 이것은 묘망한 천년의 저주로다!”
초반은 대통령에게 온 저주 메시지로 시작했지만, 은하수와 형연이 실마리가 될 단서를 추적하며 드러나는 숨겨진 저주가 또 하나 있다. 소설의 서두를 여는 장면에 등장하는 ‘회신령집만축고선’이다. 아니, 척 봐도 어려울 게 분명한 이 한자들은 또 뭐란 말인가? 누가 저주 아니랄까 봐, 보는 사람 머리에 저주 거는 것 같은 이 문자열이라니!
때는 일제강점기 시절, 고승 무라야마는 스승 다이이치의 비방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이케다를 통해, 그리고 친일파를 통해 다섯 개의 산에 쇠말뚝을 박는다. 한국의 정기를 흐리게 하고 약화시키려는, 일종의 저주의 목적이었다. 그때 그 일을 도운 이케다에게 준 전언이 바로 위에 나온 ‘회신령집만축고선’인데, 은하수와 형연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주문의 ‘회신령’이 철령임을 알아내고, 그것에 얽힌 일제의 음험한 수작도 드러낸다.
“고려와 조선의 국경을 철령으로 잡아매어 역사로 가르쳐라!”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이야기가 있다. 고려 말, 조선 건국 직전에, 이성계가 요동 정벌하러 갔다가 칼자루를 돌린 사건, 일명 위화도 회군과 관계된 철령위의 비밀이다.
당시 명나라는 철령위를 설치해 땅을 다스리겠다고 선언한다. 고려는 그에 부당함을 사절과 서신을 통해 항의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고려는 요동 정벌을 나가기로 중지를 모았다.
🔎 이때 철령은 함경남도와 강원도 사이가 아닌, 지금은 중국 땅인 철령시를 의미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관련 근거는 이렇다.
👉 첫째, 천령위는 명나라 중국이 설치한 기관이다. 중국의 사료가 정확하다.
👉 둘째, <명태조실록>에는 황제 주원장이 명과 고려와의 국경선은 철령을 기준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고, <명사> 지리지에는 철령 서쪽으로는 요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 셋째, 요하는 중국 요녕성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즉, 철령은 중국의 요녕성 철령이다.
국사 교과서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작가가 없는 말 지어내지는 않으리라 본다. 이 역사 왜곡이 누구 소행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진정 분노해야 할 부분, 경계해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함경남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는 고개, 철령. 중국의 철령시. 그 두 발음은 둘 다 ‘철령’이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일제는 그 발음상의 공통점을 이용해 고려의 국경선을 대거 축소시키는 역사 왜곡을 저질렀다는 것. 그리하여 한 민족의 긍지를 꺾고 역사를 왜곡해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자주권까지 박탈하려 했던 음모.
더 웃긴 건, 우리나라는 근 100년 동안 조선총독부, 즉 침략자들이 설파한 것을, 조선사편수회, 즉 일제가 만들어낸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사실 확인도 안 하고, 고증 다 때려치우고, 배운 대로, 아주 착실한 호구처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분노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역사 왜곡을 한 놈은 분명 나쁜 놈이지만, 그걸 그대로 따른 것도 잘못이니까.
😤😡 허, 대체 뭘 믿고? 착취한 나쁜 놈인데, 걔가 그랬다고, 아하 그렇구나 믿으면, 그건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것이다. 강도 살인범한테 가족과 친구를 잃고 납치당해 염전이든 멍텅구리 배든 끌려가서 착취당하다가 풀려나게 되었는데, 그 강도 살인 납치범이 가르친 지식은 또 곧잘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입네 생각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일까? 스토콜롬 증후군이야?
이런 일련의 주장을 알게 된 은하수는 역사 학자를 만나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류 사학자들은 근거도 없고 허무맹랑한 가설일 뿐이라며 상대도 안 하고 일축해 버린다. 그렇게 주장은 주장에서 끝나고, 일방의 공허한 메아리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교육부 장관이 백주대낮에 납치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납치범의 목적은 모호하다. 그는 장관과 대화를 나누고, 반성을 촉구하고, 사진 몇 장 찍고, 인터넷에 그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게시했을 뿐이다.
“교육부 장관은 철령위의 철령에 갇혀 있다.”
결과적으로 교육부장관은 무사히 풀려난다. 아니, 범인이 풀어주었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철령’을 사회적으로 이슈화시킨 후에 말이다.
🇰🇷 《풍수전쟁》 - 역사의 절벽에 선 오늘, 우리는 우리의 땅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스스로를 깊숙이 돌아보면 반드시 역사를 마주치게 돼. 그러나 마주칠 때마다 보이는 건 중국과 일본에 의해 형편없이 구부러지고 축소된 모습이지. 싫을 수 밖에 없어. 외면하고 싶은 게 당연해.”
최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고려장이 우리나라 풍습이었다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장’이라고 칭하던 게 있었다. 고려에서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를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가서 버리고 왔다는 풍습.
그런데 사실 그거, 우리나라 풍습 아니다. 고려 풍습도 아니다. 애초에 고려에는 효도 안 하면, 법으로 처벌하는 게 관행이었다. 하물며 자신을 키워준 부모를 산에 버린다고?
고려장의 둔갑 까닭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첫째 불교 이야기의 기록국 설화가 민간에 전해지면서 민간 설화로 굳어졌다. 즉, 불교 경전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는 주장이다.
🔎 두 번째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역사 왜곡을 했다는 설이다. 애초에 고려장이란 단어 자체가 일본의 사주로 외국인 그리피스가 쓴 ‘은둔의 나라 한국’이란 책을 통해 알려지게 된 명칭이라고 한다. 덧붙이자면, 그리피스, 그 작자는 한국에, 아니 조선에 온 적도 없고, 심지어 그의 전공은 역사가 아닌 자연과학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일본이 돈 주고 역사 왜곡시킨 것이고, 그 외국인 학자는 양심 팔아먹은 것이고, 우리나라는 그 역사 왜곡을 참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우리 아버지와 같은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한 것이고, 한국은 뻘짓한 것이고, 호구된 것이고. 아오, 이, 쓰면서 욕 나오게 만드네!
난 두 가지 설의 혼합형을 지지한다. 기로국 설화가 있었고, 그걸 일본이 날조해 알차게 써먹었고, 한국은 생각 없이 낼름 받아먹은 거.
심지어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 ‘악법도 법’이라는 그것조차 와전된 것에 불과했다. 나는 이걸 몰랐던 시간 동안 속은 것이고, 당한 것이고, 물 먹은 것이고. 결국 욕 쓰게 만드네! 이런, 씨, 망할! 🔥
나는 <글자전쟁>을 읽었을 때처럼 약간 공부하는 기분으로 이 책 《풍수전쟁》을 읽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배운 교과서 국사책이 너무 까마득한 기억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위화도 회군은 떠오르는데, 그때 왜 요동 정벌을 나갔더라? 중국, 그러니까 명나라가 뭔가 딴지를 걸었을 텐데, 뭘로 시비 털어서 고려가 빡쳤지?
이다지도 빈곤한 기억력이 좀 많이 부끄럽지만, 세월에는 장사 없는 법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그나마 《풍수전쟁》에서 왜 고려가 요동 정벌을 감행했는지, 철령위란 무엇인지, 특수학교 점자 교과서에서 점자 지도 만져봤는지 설명을 들었는지도 가물가물한 고려 국경선까지도 상세히 다루고 있어 내용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데는 별로 무리되지 않았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저주와 두 가지 사건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두 가지 논쟁을 다룬다.
저주 하나, ‘나이파 이한필베’는 2050년 후, 뒤바뀌게 될 경제력 순위를 의미했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바로 출산율 감소, 인구 절벽이었다. 현실의 우리가 당면한, 아마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미래에 관한 저주의 예언.
사건 하나, 현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의 납치가 벌어지는데, 그것은 인구 절벽을 이슈화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저주 둘, ‘회신령집만축고선’은 일본이 저질렀고 우리가 방기한 역사 왜곡을 다룬다. 대거 축소된 고려의 국경선, 그것을 방임한 학자들, 그렇게 뿌리내려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오늘에 저주.
사건 둘, 교육부 장관의 납치는 물밑에서 이루어지던 철령 논쟁을 세간의 관심으로 이끌었다.
소설 《풍수전쟁》은 이 두 가지 암호 같은 문장을 해독해가면서 지금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는 우울한 기운을 엿본다. 제목은 ‘풍수전쟁’이지만 좌청룡이니 우백호니, 배산임수니 하는 풍수적 이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인구 절벽과 역사 왜곡에 대한 해결을 촉구한다. 아니, 각성을 촉구한다.
또 소설은 김은하수와 이형연의 갈등과 대화, 일본의 고승 기미히토의 행동을 통해 반목 대신 화해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때 이형연은 작가를 대리한 캐릭터이고, 김은하수는 독자 혹은 현대인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인다. 둘은 처음에 협력하는 듯 다투는 관계였다. 정확하게는 은하수가 형연의 가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풍수와 사주 등의 비과학적인 것들은 배척하고 틀린 것으로 여기며 세상의 가치, 이를테면 학력과 좋은 직장과 성공 등을 우선시했다.
물론 나도 사주나 풍수를 마냥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학문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터부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럴 수도 있고, 그런 것도 있고 하면서 받아들일 뿐이다. 아니, A형, B형, O와 Ab형 혈액형 가지고 A형은 소심하네, O형은 다혈질이네 하는 과학적 근거 없는 건 받아들이면서 풍수와 사주는 못 받아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초반에 은하수는 소통을 거절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그러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어떤 사고의 전환을 통해 편견을 깨고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는 눈을 뜨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소설 속에서 잘 드러나지 못한 것 같아 좀 아쉬운 부분이다. 내가 읽다가 행간을 놓친 걸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은하수의 심경 변화가 어느 순간에 어떤 작용을 통해 어디의 지점부터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좌우간, 나는 형연과 은하수를 통해 작가는 역사 왜곡 문제뿐 아니라, 어쩌면 소통과 대화, 받아들임, 학문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학문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익히기 위한 것이다. 언어든 문학이든 음악과 미술이든 모든 분야의 학문은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한 기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도 그에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역사에는 흔히 정사와 야사가 있다. 우리는 둘 중 뭐가 맞고 틀린 건지 알 수 없다. 정사는 주류가 되는 논지, 야사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논지일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사가 무조건 진실이라고, 야사라 해서 무조건 아니라고,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지금의 우리는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단지, 그 둘 중에 진실에, 사실에 더 근접한 기록과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주장 A와 B를 가지고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즉, 서로의 주장을 덮어놓고 백안시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학문은 학문 본연의 기능보다 수직적 기능을 하게 되었고, 대학은 취업율이 판단 척도가 되었다. 그럴 거면 왜 대학이라 하는가? 자격증 취업반 양성원이 더 맞는 표현 아닐까?
“대통령님한테 나서라고 소리는 쳤다만 사실은 누군들 뭘 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 쭉 생각해 봤는데, 인구 많은 나라들과 공동체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 그게 인구 문제의 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동아시아 위주가 그림이 좋으니까 이름은 EAU 같은 것으로 하면 어때?”
대한민국은 인구 소멸국 1순위로 손꼽히고 있다. 학교도 회사도, 한국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IT 기술과 인공지능 발달로 인력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이 아니라, 역사는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고, 그 역사를 지켜갈 국민이 없어 나라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솔직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내 일이라는 생각으로 크게 와닿지는 않는 문제였다. 평범한 소시민, 더구나 시각장애인인 내가 뭘 하겠는가. 그다지 생각 없는 결혼?
옛날이야 집안 대가 끊기니 뭐니 하는 게 중대사였지만, 요즘은 그런 건 다 옛말이고 구시대적 사고가 됐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뭐.
작가는 인구 문제 역시 소설 속에서 나름의 해결 실마리를 제시한다. 역사 왜곡을 다룬 게 형연이라면, 은하수는 인구 문제를 다루는 셈이다.
아버지는 인구 절벽의 타개책으로 지나가듯 한마디 툭 하신 적 있다. 외국인법을 개정해서 그들도 국민의 4대 의무(납세, 교육, 근로, 국방)를 지도록 해 완전히 우리나라 국민화를 시키자고 했던가.
사실 대강 들어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작가가 소설에서 제안한 방법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 《풍수전쟁》 - 진정한 저주의 실체는 어쩌면, 무관심과 방관
소설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오늘날의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저주는 무관심과 방관이 아닐까 한다. 누가 뭔가를 비꼬고 왜곡해도 그러려니 하는 태도, 외교적인 대응도 안 하고 나랏밥만 축내는 무능한 정치인,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면 무조건 터부시하는 사고 방식, 획일화된 교육책 등이 다 저주가 아닐는지.
얼마 전 뉴스에서 중국이 윤동주 시인 생가를 폐쇄했다는 소식이 화제로 떠오른 바 있었다. 한국의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 애국 시인으로 포장했다는 중국의 날조도 함께 소개됐다. 그 뉴스 보다가 뭐 저런 XXX한 놈들이 다 있나 방언 터지듯 욕부터 나왔었다.
내가 욕은 안 하는 주의긴 한데, 이건 욕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윤동주의 출생지가 비록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이라고 해도, 당시 만주 등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한국(조선)의 민초들 상황은 어디로 갔느냐 이 말이다. 그가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했다지만, 1935년 평양의 숭실 중학교에 편입해 조선에서 공부했단 말이다.
무엇보다 다 차치하고, 윤동주는 시를 한글로 썼다. 영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닌, 세종대왕님이 창제한 그 훈민정음, 한글!
그가 조선족 중국 동포면, 중국어 한문으로 한시 쓰지 왜 한글로 시를 썼을까?
그런데 우리나라 대응이 별로 신통치 않은 게 더 짜증난다. 내 눈에는 신통치 않은 말만 몇 번 하고 끝난 걸로 보인다. 최소한 중국 외교관 멱살이라도 잡든가!
소실한 역사도 중요하지만, 복구하는 것도 중요하다지만, 있는 역사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건, 정말 국가적으로 무능한 것이다. 정부의 무능이다. 이러니 대한민국 국민은 자랑스러워도, 대한민국 국회는 부끄럽다는 우스개가 나오는 거지.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모두가 싫어하겠지. 어째서 안정을 깨느냐고. 조용히 살아갈 수는 없겠냐고.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해. 누군가는 계속 돌을 던져야만 해.”
《풍수전쟁》도 <글자전쟁>처럼 픽션과 논픽션이 절묘하게 들어가 있다. 통일교라든가, 현직 대통령 등이 소설의 실감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끝에 가서는 반전도 숨어 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중반부 읽다가 다 눈치챌 법하지만 말이다. 대통령에게 괴상한 문자 보내고, 연구원이나 교육부 장관 납치하는 등의 일을 저지른 인물이 다 한 명이라는 거.
글쎄, 일본의 좌도밀교 어쩌고 하는 저주 풍술은 약간의 상상력이 들어간 것 같지만, 이야기의 요소로는 제법 흥미진진했다.
논란거리, 논쟁거리가 좀 많긴 하지만, 작가는 형연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 같다. 돌을 던질 수밖에 없었노라고.
마지막 부분의 반전과 형연의 행동이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 같았으면 그냥 확 태워버렸을 텐데.
어쩌면 그는 일본의 대다수 시민들에게 너희들의 위정자들은 이런 막장 짓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놈들이고, 너희들은 그런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 그 점에서 수치스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쪽팔려서 수치사하라는 저주?
첫댓글 참신한 내용의 책 이군요.
작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을 위한 애정은 여전하군요.
미래를 준비하는 민족만 지구상에 남을 것 같습니다. 21세기가 무색한 전쟁과 투쟁으로,극개인주의가 만연 되어가고 함께가 아닌 나만의 이익 추구를 지양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