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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rtex
깨달은 뒤에는 이미 늦어있는 것
b y . E v e r K e y 's
8. carpe diem
순간을 즐겨라
“이제 오면 어떡해요. 내가 못살아 진짜”
려욱은 혁재를 웃으며 흘겨보다 얼른 바쁜 걸음을 옮겼다. 혁재는 연신 미안미안, 하고 중얼거리며 쭐래쭐래 려욱의 뒤를 따랐다. 계단 벽에 가득 붙어있는 D-Day is Today! 라는 문구를 보자 혁재의 가슴은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 꼭 시집가는 새신부의 마음처럼. 오늘은 이래저래 기분이 좋은 혁재다. 담배도 샀고, 클럽에서는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 같고, 이따 새벽에 환영회도 해준다고 했고. 통통 계단을 튀기며 내딛는 걸음마다 기분 좋은 떨림이 배어났다.
클럽 안은 한창 분주했다. 마치 새로 오픈 하는 가게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들 들떠있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바로 클럽 데이 이기 때문이다. 클럽 데이에는 입구까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중 절반은 음악 마니아들에게 까지 소문 난 재즈 공연을 보러 오고, 나머지 절반은 공연이 끝난 후 자정부터 시작되는 파티를 즐기러 볼텍스를 찾는다. 파티는 올나잇으로 진행되는데, 시간대에 따라 음악이 바뀌다가 마지막에 끈끈한 음악으로 바뀌면서 술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서로 엉키기 시작하는 때가 가장 피크 타임이다. 일종의 부비부비 댄스가 주를 이루는 데, 그러다 눈 맞은 사람들은 다소 격한 스킨십을 보여주기도 하고, 아예 손을 붙잡고 클럽 안을 나가버리기도 한다. 어디로 가는 지는 저희들 마음. 또 그러다가 눈이 돌아간 사람들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 손찌검을 하기도 한다. 이때 동희의 임무가 막중해진다. 희철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달 중 유일하게 신동희가 밥 값하는 날이 바로 클럽데이인데, 엘레강스하고 럭셔리한 볼텍스 손님들 때문에 사실 평소에 동희는 그다지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어찌되었건 오늘은 한 달 중 볼텍스 매출액이 가장 많은 날이기도 하고, 가장 바쁜 날이기도 하고, 가장 사고가 많은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만큼 기대되고, 걱정되고, 기다려지는 날이기도 하고. 특히 려욱에게는 더욱 그렇다. 클럽데이의 공연 게스트가 다름 아닌 김종운이기 때문이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몇 시간째 바닥청소에 몰두하고 있는 려욱 탓에 검정색 타일 바닥이 거울같이 빛난다. 아서라, 파리 미끄러질라. 희철의 시덥잖은 농담에 옛날 같았으면 재밌어요? 라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되물었을 려욱이 오늘은 슬쩍 웃어 보일 뿐 대꾸가 없다. 려욱의 마음을 알 길 없는 희철은 뜬금없는 려욱의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한다. 수상해. 뭔가 냄새가 나. 칵테일 잔을 마른행주로 닦으며 중얼거리는 희철의 앞에 너 뭐 잘못 먹었냐, 하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선 동희가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게, 진짜 뭔가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동희의 말에 이때다 싶었는지 마른행주와 잔을 바 위에 쨍그랑 소리 나게 내려놓은 희철이 그치 그치? 라고 말하며 동희를 재촉한다. 웬일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희다.
“진짜, 냄새가 나”
“그렇다니까, 아무리 봐도 수상해. 분명히 뭔가 있....”
“너 방구 뀌었지”
싸하게 식은 대기 중으로 피융,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희철을 향해 아니 나는 그냥, 구린내가 나길래, 라고 말하며 희철이 내려놓은 잔을 뽀득뽀득 소리까지 내며 닦기 시작한 동희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희철은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저래 뵈도 동희 저 녀석 개그하나는 끝내주게 웃겼는데, 저 자식이 아무래도 나 때문에 저렇게 개그 같지도 않은 개그를 구사하게 된 것 같다고, 희철은 생각했다.
“근데, 어쩌냐. 깽아”
“뭘 어쩌냐, 신통”
신통, 이라는 호칭은 희철이 기분 좋을 때 동희를 부르는 호칭이다. 동희의 성은 신, 성과 이름을 같이 부르면 신동희인데 희철은 이름을 다 부르는 것은 시간낭비라며 앞의 두 글자를 따다 신동, 이라고만 불렀다. 그게 서로 막 통성명을 하던 푸릇푸릇한 고등학생 시절 때 이야기니까 벌써 오년은 넘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동희가 클럽에 놀러왔다가 술에 취해 시비를 거는 한 취객을 너끈하게 곤죽을 만드는 것을 보고 희철이 고놈 참 신통방통하네, 라고 중얼거렸었는데 돌연 아, 하고 뭔가 떠오른 듯 신통 신통, 하고 중얼거린 희철은 씩 웃는 얼굴로 동희를 바라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신통, 당신을 우리 클럽 보디가드로 임명합니다아. 그러자 뭐 씹은 표정으로 희철을 내려다 보다 툭, 하고 던진 동희의 대답은 참으로 멋들어진 것이었다. 깨갱? 어디서 개가 짖냐, 아니면 말라깽이가 비틀어지는 소리냐. 동희는 불현듯 떠오른 옛 생각에 슬며시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호스트. 정말 둘로 밀어 붙일 작정이야?”
동희가 말하는 둘은 물론 성민과 정수다. 두 명의 호스트가 갑자기 그만 두어버린 상황에서 그래도 성민과 정수의 몸 사리지 않는 서비스 정신으로 어찌어찌 그동안은 용케 잘 버텼는데 문제는 앞으로였다. 나날이 입소문은 늘어가고 나날이 손님도 많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두 명 가지고는 턱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테이블마다 호스트를 두지 않는다고는 하더라도 말이다. 희철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 나쁜 자식들. 하필이면 저희들끼리 눈이 맞아 가지구서는. 처음부터 주고받는 눈빛이 예상치 않더라니. 에이 씨, 남 좋은 일만 시켰네. 꿍얼꿍얼 하는 희철의 불만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만두어버린 두 명의 호스트의 인기가 워낙 컸던 데다가 희철 나름대로의 계획도 있었던 터라 어느 날 갑자기 둘이 손을 붙잡고 와서는 사표를 척, 하고 내미는데 희철로서는 뒷목잡고 쓰러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나중에 깨졌느니 어쩠느니 하고 울고불고 찾아와도 국물도 없어, 김재중 정윤호. 희철은 다시금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람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잘 아는데, 그러다 여우랑 나비, 둘 다 죽는다”
알아, 안다구. 희철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마치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뭉실뭉실한 회색 연기 같았다. 희철의 머리위로 고민거리가 두둥실 떠올랐다. 허공을 향하는 듯한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진짜, 어쩐담. 희철은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혁재가 보았던 구인광고는 호스트를 구하려는 의도의 광고였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혁재가 겁도 없이 자기를 취직시켜달라고 덤벼들었을 때 희철은 속으로 웃었었다. 그 정도면 외모도 괜찮고, 성격도 괜찮아 보이고. 급한 김에 잘 걸렸다 싶었는데 려욱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호스트를 시키기에는 애당초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희철이다. 한 입 가지고 두 말 할 수는 없어서 혁재를 서빙으로 시키고는 있지만 혁재가 들어오고 난 뒤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새로운 호스트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뭔가 결심이 필요한 때가 오기는 온 것 같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내막을 모르는 혁재만 빼고.
“볼텍스. 우리는 지금 소용돌이 안에 들어와 있는 거야. 우리를 제외한 모두는 소용돌이 안으로 빠져들게 될 거야. 소용돌이 안에 누구와 손을 잡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단지 맞잡아 줄 손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뭐래”
“누가 되었건, 단지 우리는 손을 내밀어 주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야. 호스트고 보디가드고 하는 게 대순가. 한 가지 틀에만 고정되어 있을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동희는 너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놀리기라도 하듯 희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설마가 사람을 참 잘 잡지.
“이로써 우리 클럽 호스트는 다섯 명이 되는 건가?”
희철의 말에 동희가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아 화장실에서 신문지 구겨지듯 서럽게 구겨졌다. 너 아니야, 혁재 뺀 거야. 뻔뻔스럽게 말하는 희철은 동희의 반응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너한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은근히 손님들 중에 너 찾는 손님도 많았어. 사람 취향이 얼마나 다양한지 네가 모르는 구나. 너 보러 찾아오는 단골도 여럿 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 희철의 말에 동희는 눈은 울고 입은 웃는 기묘한 표정으로 허허, 하는 헛웃음을 쳤다. 앞으로의 나날들이 심히 걱정되는 동희의 이마에는 내천(川)자가 깊게 새겨졌다. 희철이 키득거리며 동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내리 눌렀음은 물론이다.
“아, 근데 신통아”
“왜, 깽아”
“여우가 취하는 거 본 적 있어? 마치 술독에 푹 빠졌다 나온 것처럼”
“늘 상 취해 있지 뭐, 요즘은”
“그래, 그건 그런데....... 아, 아니다”
“뭐야, 싱겁게. 짖다가 끝내기냐”
동희는 희철의 째림을 슬그머니 비켜서며 끙끙거리며 탁자를 옮기고 있는 성민에게로 다가갔다. 이상하네, 하고 희철은 중얼거렸다. 여우는 아무리 취해도 제 정신을 잃지는 않아. 그 녀석 기억력은 끔찍할 정도로 좋단 말이야. 정말 기억 못하는 걸까, 여우 저 녀석.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철이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모르지, 그날은 정말 취해버렸던 걸지도. 냉랭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어깨를 피해 지나가는 성민과 혁재를 멀리서 바라본 희철은 어깨를 한번 으쓱, 올렸다 내렸다.
“늦어서 미안, 다들 와서 한 병씩 해”
딸랑, 하는 종소리만큼이나 경쾌한 목소리로 클럽 안에 나타난 정수는 제 잘못을 때울 거리를 바 위에 올려놓았다.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는 손길에 눈동자를 굴리며 기대하던 희철은 정수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는 에이, 하고 잔뜩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여간 구닥다리 박정수, 옛것이라면 마냥 좋지? 넌 비타 오백도 모르냐? 툴툴거리면서도 정수가 내려놓는 박카스를 익숙한 손길로 뚜껑을 따 목으로 넘기는 희철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포장지에 새겨진 피로회복, 이라는 글씨에 눈이 반짝거렸다. 예쁘장하게 웃으며 고마워요, 라고 말하는 려욱의 목소리에서는 까닭 없는 안쓰러움이 묻어났고 동희는 괜히 정수의 어깨를 한번 툭, 쳤으며 제 것을 챙기고 마지막 남은 혁재의 것을 아무렇지 않게 작은 손으로 쥐고 씩 웃으며 탈의실로 향하는 성민과, 그런 성민을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혁재가 있었다. 하여간 이성민 저거 저거. 혀를 차는 동희의 목소리에 정수는 그저 엷게 웃었다.
“근데, 너”
다시 자기가 하던 곳으로 돌아가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을 무렵,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바 의자에 나란히 앉은 정수와 희철이었다. 힐끔 주위를 두리번거린 희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여자 만난다면서. 정수의 얼굴이 살짝 찡그렸다 곧 원래의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긍정의 뜻이라는 걸 알아차린 희철의 얼굴이 조그맣게 구겨진다.
“생각보다 단순하더라, 여자들”
조롱조로 말하는 정수의 목소리에 안도하는 희철이었다. 실은 내심 걱정했던 터였다. 혹시 사랑에 질려버려서 막 가기로 작정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런 희철의 마음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만나는 건 맞는데, 연애하는 건 아니야, 라고 말하며 또다시 엷게 웃는 정수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정수씨.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반짝이는 눈을 하고 제 품에 안기던 수아가 떠올랐다. 갑자기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그녀, 너무 아름다운 그녀. 너무 착한 그녀. 그래서, 더 미운 그녀. 희철아, 나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어졌어. 그녀가 내 것을 뺏어가 버려서.
오늘따라 희미한 미소만 짓는다.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봐 불안한 마음이 든다. 잡히지 않는 의미만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수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희철은 왜 이렇게 사방에서 구린내가 나냐, 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쯔쯔, 혀를 찼다. 난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희철은 괜히 쩝쩝 입맛을 다셨다. 때마침 눈앞에 지나가는 려욱을 확, 붙잡은 희철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네 임무가 막중하다, 꼬맹아. 희철의 말에 려욱은 이게 웬 자다가 화장실 변기 내려가는 소리냐, 하는 표정을 짓는다. 뭐 언제는 안 막중 했나, 내가. 새로 들어온 보드카를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채워 넣으며 중얼거리던 려욱이 근데 무슨 임무요? 라고 슬쩍 궁금증을 내비친다. 꼬맹이, 해병대 가본 적 있냐? 뜬금없는 해병대 얘기에 려욱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 독한 교관이 필요한데. 멸치 교육시킬 독한 교관. 할 수 있겠어? 희철의 말에 려욱이 큭큭 거리며 웃는다. 네, 자신 있습니다! 대답한번 시원하다.
“근데 갑자기 독한 교육은 왜요? 혁재형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그게 말이야....”
“어어.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요. 혹시 뭐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구해지지 않는 호스트를 클럽 식구들로 밀어붙이겠다는 식의?”
역시 꼬맹이가 커도 너무 큰 것 같다고, 희철은 다시금 생각했다. 아하하, 하고 웃으며 어색하게 끄덕여 지는 희철의 고개에 맙소사, 하는 탄식이 려욱의 입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난 몰라. 려욱은 울상이었다.
“어, 왜 이렇게 울상이실까, 우리 꼬맹이는?”
싱긋, 웃으며 턱을 괴고 바에 기대서는 종운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려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와앗, 종운이혀엉! 하고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이야, 꼬맹아. 그동안 잘 지냈지? 강아지를 쓰다듬듯 려욱의 머리를 헝클이며 쓰다듬는 종운이다. 따스함이 한가득 묻어나는 눈빛에 려욱은 수줍게 웃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지난 달 에는 삼십분이 지나도록 안 나타나서 속을 끓이더니만”
“그래서 잔소리 안 들으려고 이렇게 십 분이나 일찍 왔다는 거 아니냐, 이 바쁘신 몸이”
희철은 샐쭉하게 웃었고 종운은 능글맞게 그 웃음을 받아 넘겼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둘의 모습에 려욱은 슬쩍 웃었다. 다했다아, 하고 외치는 혁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게 무대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붙잡고 아아, 하고 울림을 만드는 종운의 목소리가 그렇게도 그리웠던 려욱이었다. 밀려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뜨자 어느덧 사람들로 가득 찬 클럽이 눈에 들어온다. 기대에 찬 사람들의 눈, 따스한 공간, 꿈꾸는 듯한 기분. 오늘 같은 밤에는, 해가 뜨지 않아도 좋을 텐데.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일지라도 기대하는 것은, 순간마저 아쉬운 오늘이기 때문에. 려욱은 후우,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김종운입니다. 오늘도 잊지 않고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그럼 첫 곡 오버 더 레인보우 들려드리겠습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어두운 공간아래 보랏빛 조명이 산란하는 빛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몽환적인 빛을 만들어 냈다. 안개가 퍼지듯 조용히 울려 퍼지는 종운의 노랫소리에 사람들은 일상을 잊고 무지개를 건너 천국의 어딘가로 걸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혁재는 아, 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살며시 눈을 감은 종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혁재는 그와 같은 모습으로 클럽의 맨 뒤에서 벽에 기대 서있는 려욱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느덧 익숙해져버린 공간은 스스로를 참 어색할 정도로 바꾸어버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낯설고 이상하게 보였던 모습들이 차츰 일상의 것이 되면서 익숙한 것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클럽 안에 있는 모두는 남자와 남자. 그리고 어쩌면 그들 안에 존재하는 것은, 사랑. 일종의 방정식 같은 깨달음에 혁재는 작게 어깨를 떨었다. 분명 그것은 무서운 변화였다. 무언가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된다는 것은.
하지만 도무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있었다. 처음 혁재가 볼텍스에 발을 담그게 된 이유, 이성민이 그것이었다. 성민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생각을 못했다. 서로 말을 놓은 것이 그 경계가 되어버렸달까. 성민은 시종일관 무표정과 냉소로 일관했다. 그것은 사람을 참 맥 빠지게 하는 일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나쁜 의도로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복수를 위한 접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 생각은 채 하루도 가기 전에 금이 가고 있었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바람이 안고 갔는지, 물이 삼켜버렸는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사실 혁재는 그렇게 마음이 독한 사람이 못되었다. 늘 시원에게 한심한 놈, 미친놈, 비잉신, 하는 욕을 얻어먹는 것은 그 탓이다. 넌 너무 착해빠졌어. 언젠가 시원은 혁재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혁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무 착한 게 분명해. 야, 이거 놔, 아파! 악다구니를 쓰는 성민을 질질 끌고 나오면서 혁재는 탄식했다. 아, 난 정말 착해. 영문을 모른 채 끌려나온 성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인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혁재를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뭐야, 이 미친놈.
“나 지금 너 구해준거다”
너 뒤에서 어떤 머리 벗겨진 아저씨가 이상한 짓 하고 있었어. 무슨 부비부비 댄스도 아니고. 근데 너 하나도 몰랐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성민에게 조근조근 설명하는 혁재다. 이상한 짓?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민이 되묻자 딸딸이, 라고 뚝뚝 끊어 말하는 혁재는 친절해도 너무 친절했나 보다. 갑자기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성민이 우욱,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젠장. 씹어 삼키듯 욕을 하는 성민은 상당히 기분이 많이 상한 듯 했다. 당연한거다. 나라면 그 자식 거시기를 열 번은 걷어찼을 거야. 혁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
“응?”
“.......고맙다?”
고맙다, 라고 말하며 성민은 살짝 웃었다. 혁재에게는 처음보이는 웃음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성민의 반응에 당황한건 혁재 뿐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어색해져버린 기류가 인적 없는 계단 위에서 들이쳤다. 어느 샌가 와르르, 하고 무너진 담벼락을 넘어갈 생각은 아무도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웃지 마라, 정 든다”
혁재는 무너진 담 너머로 슬쩍 손을 뻗어 보았다. 역시, 넘어가면 안 되겠지? 그때였다. 지레 포기하고 돌아서던 발길이 붙잡힌 것은.
“정 들면 되지, 까짓것”
정말, 담은 무너져 내렸나보다.
톡, 하고 말을 던진 성민은 춥다며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묘한 기분에 휩싸인 혁재는 그것을 날려버리겠다는 구실로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들었다. 후후우. 희뿌연 담배연기가 눈앞에서 흩어졌다. 아, 이 얼마만에 피워보는 담배인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근대 나 정말 담배의 노예가 되어버린 건가. 갑자기 든 생각에 서둘러 담배를 껐다. 아무리 담배가 좋아도 목에 구멍 내고 싶지는 않아. 꺼져가는 장초를 발로 비빈 혁재는 으 춥다,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덧 공연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분주한 손길로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려욱의 눈이 혁재를 발견하고 가늘게 휘어진다. 마치 빨리 안와욧! 하고 말하는 것 같다. 혁재는 입으로 미안, 하고 말한 뒤 쭐래쭐래 걸음을 옮긴다. 형, 오늘부터 특훈이에요 특훈. 어차피 칵테일 종류랑 제조법은 다 외웠으니까 금방 배울 수 있죠? 기다렸다는 듯 말하며 혁재의 손에 쉐이커를 쥐어주는 려욱은 딱 귀엽게 얄미울 정도로만 웃었다. 그럼 수고해요. 아연실색한 혁재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무대 쪽으로 걸어가는 려욱이었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종운의 마지막 곡은 언제나 달콤한 사랑의 노래. 그래서 언제나 려욱은 마지막 곡을 듣게 되면 울고 싶어진다. 사랑은 달콤한 건데, 왜 내 사랑은 아프기만 한걸까요. 나를, 이런 나를 당신은 알까요.... 흐려지는 시야 때문에 서둘러 눈을 깜빡였다. 채 흐르지 못한 눈물을 후우, 하는 한숨과 함께 날려 보낸다. 아프게 깨물어진 입술이 작게 떨렸다. 어느새 려욱의 옆에 다가온 정수가 작아진 려욱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싼다.
“고백이라도 한 번 해보지 그래, 꼬맹아”
알고 있었어요? 라고 묻는 려욱에게 살짝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수다. 다분히 말수가 적고, 조금은 무심한 듯 하면서도 아프거나 힘들 땐 제일 먼저 알아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정수였다.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겉과는 다르게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고, 생각은 한없이 깊다. 그래서 언제나 고민이 있거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모두는 정수를 찾는다. 아니, 그들이 찾기 전에 정수가 찾아간다.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상처를 기꺼이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거라던, 희철의 말이 떠올랐다. 늘 짓고 있는 저 미소는,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걸까. 려욱은 씁쓸한 마음을 내리누르며 작게 대답했다. 안돼요, 아직은. 난 지금으로 만족할래요. 려욱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별이었다. 다시는 종운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정수는 말없이 빙긋이 웃으며 려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많이 컸네, 우리 꼬맹이. 힘내. 형은 네 편이야”
얼굴가득 환하게 미소 짓는 려욱이 종운이 노래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먼저 가볼게요, 라고 말하며 서둘러 뒷문 출입구를 향해 뛰어간다. 녀석 참. 정수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근데 꼬맹아, 그거 아니. 사랑에 만족이라는 건 없다는 것을. 하루하루 아프고, 많이 힘들게 될 거야. 그러면서 너도 자라게 되겠지. 힘내라, 우리 꼬맹이. 정수는 쓸쓸히 비어버린 무대를 보며 나란히 노래를 하고 있는 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는, 너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만히 바라는 것은, 사랑에 서툰 어린 가슴들이 아프지 않기를.
“정확히 십 분 뒤에 파티가 시작됩니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오셨겠죠?”
희철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종운의 공연만을 보러 왔던 사람들과 파티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의 이동으로 클럽 안이 시장처럼 북새통을 이룬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잘 봐둬라, 멸치. 희철은 제 옆에 얼을 빼고 서 있는 혁재를 팔꿈치로 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야,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와서 테이블이나 밀어! 멀리서 소리치는 동희의 목소리에 혁재와 희철은 일제히 네에! 하고 대답하며 쪼르르 뛰어간다. 꼭 말 잘 듣는 유치원생들 같다. 테이블과 의자를 구석으로 치우고 나자 꽤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에 순식간에 조명이 팟, 하고 나가면서 어둠만이 자리 잡는다. 출입구가 어디인지, 옆 사람 얼굴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어둠.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정적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혁재다.
“어, 대장 지금 정전...”
혁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의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혁재의 눈이 그제야 무대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찢어질 듯한 환호성과 함께 혁재의 입에서도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빨강과 검정의 두 가지 색으로 만들어진 조각 같은 형상이 무대위에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민이었다.
“오늘 여우 무대 선다고 내가 말 안했었나? 아무튼 잘 봐둬. 언젠간 너도 해야 할 거야”
동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혁재였다. 쿵 쿵 거리며 사방을 울리는 음악 때문이었다. 심장 박동과 교묘히 맞아 떨어져 가는 음악에 맞추어 조금씩 성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있어서 그런지 흐릿한 형상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혁재는 저도 모르게 무대 가까이로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날씬한 다리 선에 피트되는 검정색의 바지 위로 받쳐 입은 붉은 색의 셔츠가 아찔할 만큼 매혹적인 색으로 보이는 것은 혁재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쿵, 쿵. 점점 박자를 빨리해가는 전주 부분에 따라 가슴도 그 박자를 같이 하고 있었다. 검정색의 중절모를 깊게 눌러 쓴 탓에 성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혁재는 춤추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늘 슬픔을 안고 있는 듯한 눈동자가 춤출 때마저도 슬프게 보일지 궁금해진 탓이었다. 가까이 가까이 다가서던 걸음은 어느덧 무대 바로 앞까지 옮겨졌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중절모를 벗어 던진 성민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
묘한 비트의 드럼과 기계음이 섞인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조금 빠른 듯한 음악에 금세 적응해버렸다. 성민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넥타이를 밑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박자에 맞추어 조금씩 몸을 움직이면서 짓는 미소가 붉은색의 조명 때문인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천천히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손길이 가슴 중간에서 멈추고, 살짝 혀를 내밀고 수줍게 웃은 성민은 맨 위까지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단추를 하나 풀었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점점 느릿하게 흘러가는 음악에 따라 성민은 느릿하게 단추를 풀었지만, 사람들의 심장은 비트와는 상관없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무대 정 중앙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성민이 네 번째 단추를 풀자 뽀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헐렁한 셔츠사이로 어깨와 쇄골 뼈가 스치듯 보이는 모습이 묘하게 야했다. 의자에 앉아서 춤을 추기 시작한 성민의 몸이 땀으로 젖어 들어가면서 붉은 색의 셔츠가 달라붙었다. 한번씩 고개를 돌릴 때마다 튀는 땀방울이 조명 때문에 붉었다. 젖혀진 턱을 따라 땀 한 방울이 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혁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성민이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 어.....!”
무대라고 해봤자 바닥에서 20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높이였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다가 무대위에서 끌어당기면 별 수 없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망설이지 않는 걸음으로 혁재의 손을 잡아 무대위로 끌어당긴 성민의 행동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가득채운 음악 소리와 들뜬 공기, 사람들의 환호성, 눈앞이 흐려질 정도의 아찔한 조명. 혁재는 끊어질 것 같은 정신을 바로잡으려 도리질을 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성민은 푸, 하고 웃었다. 왜 자신이 무대위에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혁재는 이미 자신이 의자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겁을 했다. 그런 혁재의 어깨를 한 손으로 내리누르며, 나머지 손으로 넥타이를 끝까지 잡아당겨 목에서 풀어 낸 성민은 싱긋 웃으며 넥타이로 혁재의 눈을 가려 묶기 시작했다. 당황함에 허공에서 손이 멈춰버린 혁재를 향해 쫄지마, 멸치! 하고 소리친 희철이었지만 함성 속에 파묻혀 혁재의 귀에 닿지 않았다. 쿵, 쿵. 심장소리인지 음악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소리만 혁재의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여우의 유혹, 시작인가.......”
검은 색의 뿔테안경을 손으로 밀어 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린 정수의 말이 신호탄이 된 듯, 성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악에 따라 천천히 혁재의 주위를 맴돌던 성민은 두 바퀴쯤 주위를 맴돌다가 어정쩡하게 벌려진 혁재의 허벅지 왼쪽 위에 걸터앉았다. 움찔, 하는 혁재가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멈출 성민이 아니었다. 날카롭게 뻗은 혁재의 턱 선을 따라 내려가던 손이 넥타이를 느릿하게 잡아당겼다. 스르륵, 힘없이 풀리는 넥타이를 가지고 혁재의 두 팔을 뒤로 모아 묶는 성민은 교활했다. 천천히 혁재의 셔츠 단추를 풀어 갈 때마다 성민이 그랬을 때와 마찬가지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심장과 같이한 비트를 따라 한없이 유연한 놀림으로 혁재의 셔츠 단추를 푼 성민은 돌연 셔츠를 뒤로 확, 젖혔고 그와 동시에 미칠 듯한 흥분의 목소리가 클럽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티 하나 없이 매끈하게 뻗은 혁재의 몸이 조명을 받아 붉게 빛났다. 성민만큼이나 아찔한 모습이었다. 느릿하게 혁재의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린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비트를 빨리하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성민은 혁재의 몸을 쓸면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이면서 혁재의 몸에 성민의 손이 닿을 때마다 혁재의 입에서는 으, 하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음악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면서 저마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은 한결같이 무대위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혁재의 다리 위에 앉은 성민이 두 손으로 혁재의 가슴을 지나 허리를 끌어안았다. 땀으로 젖은 혁재의 가슴에 잠깐 입술을 대었다 뗀 성민이 이번에는 두 손으로 혁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음악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고, 기대감으로 충족된 사람들의 눈은 한결같이 성민의 입술을 향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성민이 혁재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고, 다시금 찢어질 듯한 함성과 함께 짙어져 가는 입맞춤 앞으로 거짓말처럼 막이 내려졌다. 가려져 버린 무대 앞에서는 모두의 파티를 알리는 음악이 축포처럼 터져 나왔고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철이 말했던 ‘진짜 파티’의 시작이었다.
“어, 또 오셨네요. 전에 드셨던 걸로 드릴까요?”
종운을 배웅하고 오느라 이제 막 클럽에 들어선 려욱이 바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들 춤을 추고 즐기기 시작한 와중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여간 쓸쓸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에게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라고 명랑하게 말한 려욱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누구지, 분명히 단골인데 기억이 안 나네. 힐끔 고개를 뒤돌아 확인하려는데 눈이 마주쳐 버려서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이쯤 되면 뭐라고 한 마디 할만도 한데 끝끝내 말이 없다. 그러자 아, 하고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죽어라 물어도 대답이 없는 남자가 있다고,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내 여자’ 마티니만을 찾는 남자가 있다고. 드디어 그 남자 이름을 알아냈다고. 희철이 이야기 했던 게 꼭 한 달 전 클럽데이였던가. 려욱은 완성된 칵테일은 잔에 부으며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주문하신 엑스트라 마티니 나왔습니다, 한경씨”
남자는 놀라는 눈치다. 그러면서 고맙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긴 손가락이 잔을 잡아 쥐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기요, 한경씨. 려욱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한경이 잔에서 입술을 떼고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왜 말 안 해요? 려욱의 물음에 한경은 살짝 웃는다. 어쩐지 그 모습이 조금 서글프다는 생각이 드는 려욱이다. 혹시, 라고 운을 뗀 려욱은 살짝 망설이다가 마저 말을 잇는다. 혹시 말 못해요? 려욱의 물음에 한경은 조금 전의 미소보다 한층 짙어진 서글픔을 담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미안해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죄송해요”
한경은 천천히 손을 내저으며 입 모양을 해 보였다. 괜, 찮, 아, 요. 려욱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과일 안주를 예쁘게 담아 한경에게 내밀며, 오늘 칵테일은 제가 쏘는 걸로 할게요. 그러니까 더 맛있게 드시고 가시고, 다음에 또 오세요, 라고 말하는 려욱이다. 려욱의 말에 한경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멋스러운 고급 정장과 잘 생긴 외모, 그리고 엑스트라 마티니. 그는 그와 참 잘 어울리는 칵테일만 마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려욱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우리 클럽에는 왜 찾는 걸까.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궁금증을 잊어버린 것은 바 앞에서 우두커니 걸음을 멈춰 선 희철 때문이었다.
“어, 꼬맹아. 멸치 못 봤어?”
“네? 못 봤는데요. 왜요?”
“이상하네. 무대 끝난 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안 보이는 거야.......”
미심쩍다는 듯이 말끝을 흐린 희철이 갑자기 설마, 하고 중얼거리더니 오늘 들어온 위스키 수량 확인 해봐, 라고 려욱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장고 안에 들어갔다 나온 려욱이 들고 나온 것은 반도 안 남아있는 푸른빛이 나는 검정색의 양주병.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은 희철과 려욱 둘 다 마찬가지 였다.
“로얄 샬루트38년산? 못돼먹은 여우새끼. 먹어도 비싼 것만 처먹었어”
성민이 왜 그 술을 먹었는지는 알고 있다. 로얄 샬루트는 38년산은 이 클럽 안에서 오로지 규현만이 시키던 술이었기 때문이다. 성민에게 있어서 그 술은 일종의 상징 같았던 것. 때문에 규현이 사라진 이후로 사지 않았던 것을 굳이 들여 놓은 것은 얼마 전 한 손님이 들여놓아 달라는 부탁을 해 와서 였다. 역시, 거절 할 것을 그랬나. 희철은 머릿속이 띵, 하고 아파왔다. 어쩐지. 오늘따라 무대 위에서 여우 눈빛이 흐려 보이더라니. 관객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던 키스를 끝으로 막을 내린 무대가 마음에 걸렸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었다. 그녀석, 보나마나 지금 쯤 술에 취해 조규현을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다. 희철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창 흥이 오르기 시작한 클럽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사람들을 뚫고 무대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 구석을 향해 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희철의 팔목을 턱, 하고 붙잡았다. 짜증이 솟구친 희철이 어떤 새끼야, 하고 사납게 고개를 돌리는데 그 손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뭐야. 너는, 그때 그 꼬마?
“안녕해요? 오랜만에 보네요”
생각났다. 편의점 싸가지 꼬마. 희철의 눈이 우악스럽게 떠졌다.
“그렇게 눈 안 떠도 충분히 크거든요. 그러다 눈 나오겠어요”
대꾸 없는 희철을 향해 너무한다는 표정을 지은 기범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희철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빳빳하게 날이 선 교복바지와 곱게 다려진 주름 하나 없는 와이셔츠를 잘 차려입은 소년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대한 아이러니 때문이었다. 뻔뻔하게 교복을 입고 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 온 거야. 만에 하나 경찰한테라도 들리면 끝장인데. 희철은 입술을 깨물었다. 빨리 돌려보내야지, 안되겠어. 아, 가뜩이나 골치 아파 죽겠는데. 희철은 기범의 등을 돌려세워 마구 밀기 시작했다.
“거 참 성격도 급하시네. 갑니다, 가요. 안 그래도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요”
기범은 잽싸게 몸을 돌려 희철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에 무언가를 올려놓는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한 희철의 얼굴위에 황당함이 넘쳐흐른다. 손에 올려져 있는 것은 딸기 맛 막대사탕 두개.
“오늘 먹은 물 값이에요”
빙긋이 웃고 뒤로 돌아서서 걸어가는 기범은 머리위로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물 값이 사백원밖에 안 하냐, 이 멍청한 꼬마야. 학교는 안가고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가지고서는. 희철은 들리지 않을 투덜거림을 했다. 그 투덜거림을 하느라, 막이 내려진 무대를 향했던 걸음을 우두커니 멈춰 세우고 말았다. 희철은 한참이나 기범이 쥐어주고 간 막대 사탕과, 마지막으로 얼굴을 돌리며 손을 흔들던 입구에서의 기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희철은 사탕 하나를 입 안에 쏙 집어넣으며 까닭 없이, 웃었다.
막이 내려진 무대 뒤는 아무도 모른다. 철저히 단절되고 가려진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과 본능뿐. 혁재는 끝날 줄 모르는 입맞춤에 호흡이 곤란한 지경이었다. 코끝과 입술 끝으로 전해지는 뜨겁게 달아오른 숨결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입술 끝에 닿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더랬다. 부드럽게 와 닿는 알콜 향에 처음에는 술인 줄 알았는데, 삼키고 보니 술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꼬여가는 혀끝과 뜨거운 기운. 그제서야 깨달았다. 두 번째 입맞춤이라는 것을. 그것을 깨달은 혁재는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성민은 막무가내 였고 혁재는 두 팔이 의자 뒤에 묶여 있는 상황. 혁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성민에게서 예전의 알콜향이 났다. 분명 취해서 내게 이러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자 혁재는 또다시 불쾌감이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약하게 두 번이나 당할 수는 없다. 혁재는 사정없이 손목을 조이고 있는 넥타이를 비틀면서 몸을 움직이며 바닥을 아무렇게나 굴렀다. 급기야 흔들리기 시작한 의자가 바닥으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그때야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떨어졌다. 바닥에 솟아 있던 못에 걸려 찢어진 넥타이 덕에 두 손이 자유로워진 혁재는 제 눈을 갑갑하게 가리고 있던 것을 풀고 가쁜 숨을 내쉬며 성민을 찾았다. 바닥에 쓰러진 성민의 모습, 어둡게 막이 내려진 무대, 그리고 겹쳐지는 과거. 혁재는 이를 악물고 성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지만 그러다가 주춤한 것은, 붉게 충혈 된 성민의 눈 때문이었다. 성민은 울고 있었다.
“너, 나 똑바로 봐”
성민은 술에 취해 보였다. 무대 위에서만 해도 안 그랬었는데, 대체 언제 술을 마신 걸까. 성민은 혁재를 보더니 피식, 하고 웃으면서 대꾸한다. 봤어. 말 같지 않은 대꾸였다.
“내가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그러니까, 내가 누구냐고”
자꾸 풀리는 눈으로 애써 혁재를 바라보던 성민은 자꾸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을 뿐, 대답을 안 한다. 정신이 없는 건지, 그래서 대답을 못하겠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누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는 건지, 그래서 대답을 하기 싫은 건지. 갑갑해진 혁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되었건,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간다.
“똑바로 봐, 나 이혁재야. 네가 찾는 조규현이 아니라, 이혁재라고”
“.......”
“네게 두 번이나 닿았던 입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이혁재 입술이었어”
“.......”
“그리고 기억해. 지금 닿는 이 입술도, 이혁재 입술이라는 걸”
성민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끌어당기며 입 맞추기 시작한 혁재는 지금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지 헷갈리고 있었다. 복수 때문이야. 두 번이나 당해서, 억울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 그러는 거야. 그렇게 애써 다잡았던 생각은 제 가슴을 더듬으며 허리를 끌어당기는 성민의 여린 손길에 파직, 금이 나버렸다. 젠장, 복수가 아니면 뭐란 말이야. 혁재는 아프게 성민의 입술을 깨물었다가 혀를 감아 올렸다. 감싸 안은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 떨림이 이상하게, 마음에서 느껴졌다. 정말 이상하게, 가슴이 간지러웠다.
혁재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질투’라는 것을.
- 흐미, 아무튼 이 놈은 쓰면 쓸수록 늘어나는군요. 그래서 겁나 긴 8편이 되었네요'-); 이정도 내용이면 만족하실는지...(아니라고 하시면 밤새 울겁니다ㅜ_) 엉엉) 내 표현력이 이것밖에 안되! 집어치워! 라고 절규하면서 썼지만... 그래도 쓰면서 막 괜히 혼자 좋아했어요. 이번편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 참 많죠? 이해를 돕기 위해 성민님 춤 출때 배경음악을 넣고 싶었는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나왔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있는데 소설 전체를 다 그런 배경음악을 넣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포기-_)...끈적한(;) 클럽음악 아무거나 들어주세요. 뭐든 소화할 수 있을거에요, 성민님은.(웃음) 아, 근데 저 실수 한거 있죠. 원래 쓰고싶은 종운님 캐릭터 때문에 좀 웃긴 에피소드를 넣었는데, 그걸 깜빡하고 빼먹고 글을 써버렸어요. 이미 글을 써서 올려버렸으니, 고칠수도 없고. 아 속쓰립니다....... 뭔지 한번 맞혀 보세요. 으흥. 참참, 드디어 수능이 끝났네요. 수능 보신 분들 모두 수고하셨어요'-) 결과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시고, 이제 저와 함께 달려요~ (이르구;)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구요, 행복하세요♡
ps. 이번편은 답코멘 없이 갈게요ㅜ_) 죄송해요. 코멘 달아주셨던 시간의저편님, 소중한내성민♡님 감사합니다. *'-) 항상 달아주시는 코멘 보고 많은 힘을 얻고 있어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아! 완성된 볼텍스8편!!!! 두둥!! 너무 멋져요~ 아 숨겨진 종운님 에피소드가 너무 궁금해요!!! 에버님의 소설은 질도 양도 모두다 최고급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멋져요~ 표현력 최고인데요!! 잘쓰시면서 너무 그러시네요 키득키득< 히히^^ 다음편도 화이팅이예요!!
읽으면서도 이번편 정말 길다~생각했었지요ㅎㅎ 잘쓰셨어요~당연히 만족합니다^^ 성민님, 혁재님 담이 무너졌군요. 이 표현 정말 좋았어요 >ㅡ< 근데 여유의 유혹 장면이 넘 리얼한데요? 에버키스님의 생활이 어떠신지~<ㅡ이르구 ㅎㅎㅎ 항상 멋지게 쓰고 계시니까 더욱 힘내세요^^
아아~ 오랫만에 들어온 노블... 그새 볼텍스가 2편이나 올라왔군요~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귀여운 기범님이랑 려욱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네요~ 그런데 한경님이 말을 못하신다는 건 좀 속상하네요 ㅠ 아// 그리고 여우의 유혹 장면 정말 최고였어요~ ㅋㅋ 표현력이 완전 구뜨~ ㅋㅋ 무튼 오늘도 잘 보고갑니다~ ^ ^ 에버키스님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