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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이란 말이 아귀의 심식에 꽂히는 순간 / 최봉수 교수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백중기도에서 최봉수 교수가 법문을 하면서
영가 천도의 핵심인 복덕을 쌓는 세 가지 방법과 함께 천도의식에 있어
금강경을 독송해야 하는 연유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관세음보살
저쪽 대웅전보다 이곳 옥불보전은 무척 시원하네요?
그쪽 법당에 앉아 계시는 분들은 오늘도 노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원한 곳에 앉아 있어도 제 등에서는
사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어요.
저는 이번 백중재 동안 제가 맡은 시간을 통해서
이 금강경이라고 하는 경이 천도를 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드리는
기회를 삼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금강경 자체의 무게랄지 백중재가 지니고 있는 나름의
의미심장함을 생각하면 사실 저 같은 학자의 입장에서
감당할 내용이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벗어서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오늘 이야기가
제대로 될 지 안 될 지 사실은 걱정이 많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러분이 듣기에도 만만치 않은 내용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마음을 가다듬고 제 이야기에 집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학자입니다. 학자는 반드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경전이야말로 그 근거로서 작용하며 최상의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제공하는 이야기는 저 혼자 대충 생각으로
'아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속에서 할 것이고, 해석을 하더라도
그 속에서 근거를 찾아서 여러분께 이야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경전의 말씀이 되다 보니까 조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또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양해를 부탁드리는 것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야 됩니다.
중간쯤 듣고 나가버린다든지 말아버리면
그 이야기가 제가 본래 목표했던 바와는
다른 결론으로 알아들을 우려가 있습니다.
좀 힘들더라도 다 듣고 난 다음에
그 결론을 여러분들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그 업이 결과를 불러들일 때는
살아계신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개입할 수 없어,
업과 관련된 진실
지난번 2재 때 제가 드렸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입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대 명제는 선업이나 악업을 짓고
그 결과를 받을 때가 오게 되면
살아계신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개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업자득입니다.
자기가 선업을 지어서 선과를 받고
자기가 악업을 지어서 악과를 받는 것은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개입하여서 바꿀 수가 없다는 이 명제를 어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을 우리가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선업이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받을 때가 되면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제 삼자가 개입할 수 없다, 라는
이 이야기는 선업을 짓거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아직 받기 전이라고 한다면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은 행간에 지니고 있는 그런 표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눈치를 채야 합니다.
선업을 지어서 선과를 받고 악업을 지어 악과를 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금방 그 과를 받지는 않습니다.
선업을 지어서 선과를 받는데 그 사이에 인터벌interval이 있습니다.
악업을 지어서 악과를 받는 데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흐릅니다.
그 기간이 다 흘러가고 난 뒤 이제 결과를 받을 때가 되어버렸을 때는
아무도 어쩌지를 못합니다.
살아 계신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건 손을 못 댑니다.
그러나 업을 지어서 과를 받을 때는 그 기간이 있는 것이고
그 기간 내에서는 제삼자가 개입할 틈새가 있다, 없다?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부처님의 일화 중 많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 중 여러분들이 자세히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세수로 여든까지 사십니다.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얻으시고 45년 간 교화를 하셨지요.
세속 나이로 여든, 할아버지가 되셨을 때 아주 가슴 아픈 일을 겪으십니다.
바로 당신의 종족이었던 석가족이 멸종을 당하는 일을 겪으십니다.
열반에 드시기 일 년 전쯤의 일입니다.
석가족이 멸종을 당하는 이야기가 경전 속에는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위두다바’라고 하는 한 인물이 개입됩니다.
당시 인도에는 가장 큰 나라인 코살라국이 있었습니다.
금강경이 어디서 설해졌지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이라고 나오지요?
그 사위국 할 때의 사위국은 사위성이라고 써야 합니다.
나라 이름이 코살라이고 그 나라의 수도가 사위성입니다.
흔히 ‘사와티’라고도 하고 ‘스라와스티’라고도 합니다.
스라와스티가 한자 문화권에 와서는 실라벌로 번역이 되고
서라벌이란 말이 그 실라벌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예요.
코살라국의 왕은 파세나디 왕이었지요.
한자 경전에서는 파사익왕이라 나오기도 하는데
파세나디왕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가까이 뵐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부처님과 좀 더 가까운 신분을 형성할 수 없을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부처님의 혈족인 석가족의 공주를
당신의 아내로 맞아 사돈관계가 되면 부처님하고도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해요.
그래서 카필라국에다 사신을 보내가지고 공
주 한 명을 보내주면 내가 왕비로 삼을 테니 사돈을 맺읍시다,
하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석가족에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코살라라는 나라하고 석가족의 카필라라는 나라는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카필라국에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코살라국은 강한 나라인데
그 나라의 왕이 사돈을 하자고 하는데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싸우자는 말 밖에 더 되느냐는 겁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석가족의 공주를 파세나디왕의 아내로 보내기는
또 싫은 겁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는데
부처님의 사촌 중에 ‘마하나마’라는 왕자가 있었습니다.
이 마하나마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자기 집의 ‘나가문다’라는 아름다운 노예와 자기 사이에서 태어난
‘와사바카티아’라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딸이 있는데
이 노예 소녀를 공주로 위장해서 파세나디에게 보내자는 겁니다.
그렇게 작전을 짜서 보냅니다.
이 노예 소녀는 파세나디왕의 아내가 되고 왕비가 됩니다.
인도에서는 어머니든 아버지든 어느 한쪽이라도 신분이 좋지 않으면,
좋지 않은 쪽으로 신분이 결정 납니다.
왕족이면 양부모 모두가 7대 조상까지 모두 왕족이라야
진짜 순수혈통의 왕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와사바카티아는 아버지는 왕족이지만
어머니가 노예이니 소녀도 노예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 노예소녀를 공주라고 속이고 보낸 겁니다.
와사바카티아는 왕비가 되고 파세나디왕과의 사이에서
아주 황금빛이 나는 아들을 낳습니다. ‘위두다바’왕자입니다.
왕자로서의 수업도 잘 받고 아주 잘 자라 열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두다바가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것이 하나 있는 겁니다.
외갓집 식구를 만난 적이 없는 겁니다.
외가 쪽은 갈수가 없었던 거지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자기가 노예출신이니
거기 가면 일이 다 들통이 나잖아요,
그런데 이 위두다바는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거예요.
어머니가 막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친위부대를 이끌고 카필라국으로 갑니다.
그러자 어머니인 와사바카티아가 석가족에 연락해
내 아들이 가는데 잘 좀 무마시키라며 전령을 먼저 보냅니다.
그래서 마치 혈통 좋은 집의 자제가 오는 것처럼
아주 일을 잘 꾸며서 연회를 베풀어 줍니다.
잘 속여 넘겼어요. 할아버지도 뵙고 위두다바는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막판에 일이 벌어집니다.
연회장소를 청소하던 청소부가 위두다바가 앉았던 자리를
묽은 우유로 닦으면서, “에이 더러워라,
노예소녀 와사바카티아의 아들이 앉았던 자리여서 더럽구나.”
이렇게 말을 한 겁니다.
위두다바의 호위병 중 한 명이 두고 간 투구를 찾으러 왔다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청소부를 잡고는 이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진실이냐고 취조를 합니다. 그래서 전모를 알게 되지요.
호위병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코살라국으로 돌아가서는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해버리지요.
그 동료들은 자기 아내에게 말하고, 친족들에게 이야기하니
코살라국 전체에 ‘왕자 위두다바는 노예소녀의 아들이란다’
소문이 나고 왕자는 시중의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위두다바는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으며
‘나를 이렇게 모욕당하게 한 석가족은 지금은 내 자리를
묽은 우유로 닦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만약에 왕이 된다면
석가족의 목에서 나온 피로 내 자리를 닦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자 파세나디왕은
위두다바를 왕자의 자리에서 강등시키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납니다.
석가족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나를 모욕할 수 있느냐며
왕이 부처님을 찾아가 따집니다.
부처님께서 위로를 합니다.
“아버지가 왕족이면 되었지, 어머니 쪽을 무어 그리 따질 것 있소?”
우리 부처님은 어떨 때는 또 “어머니가 훌륭하면 됐지,
아버지는 왜 그리 따져요” 하시기도 합니다.
부처님말씀을 듣고 파세나디왕은 위두다바를 다시 왕자로 세웠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위두다바가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됩니다.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벌여서 왕위를 차지합니다.
왕이 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원한을 떠올려요.
그래서 석가족을 치러 갑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을 하지요.
부처님께서도 이 정보를 들으셨어요.
위두다바가 군대를 이끌고 당신의 친족인
석가족을 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그 군사들이 이동하는 행진로에 나가 계십니다.
잎이 하나도 없는 마른 고목나무 아래 앉아계십니다.
대구의 날씨가 덥다 덥다 해도
인도의 날씨는 기본이 45도입니다.
인도의 여름날은 공기가 눅찐 눅찍해요, 공기의 열기가 느껴져요.
그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잎사귀가 하나도 없는
고목나무 아래 앉아계시는 겁니다.
위두다바가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하다가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은 누구나 가집니다.
설령 악인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을 뵙고는 “석가 세존이시여,
저기 그늘이 많은 나무도 있는데 왜 이렇게
마른 고목나무 밑에 앉아서 뙤약볕을 쪼이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위두다바에게 뭐라고 하신지 압니까?
“대왕이시여, 그대의 말이 맞다.
그러나 동족의 그늘이 충분히 시원하도다.” 이말 한 마디만 하십니다.
위두다바가 멍청이가 아니거든요?
‘아하, 동족에게 보호막을 치시려고 나에게 암시를 주시는구나,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하고는 회군을 합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또 침공하러 갑니다.
부처님께서 또 나와 계십니다. 또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나 또 침공하러 가고,
부처님께서도 또 나와 계시고, 이러기를 세 번 했습니다.
위두다바가 네 번째로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나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가족을 침공해서는 젖먹이 아이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는 대표로 석가족 한 명을 잡아와서는 목을 치고
거기서 나온 피로 자기의 자리를 닦습니다.
자기 말대로 해버린 거지요.
이 이야기가 인도전체를 들쑤시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뭐하셨느냐는 거지요.
그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석가족이 지은 과거의 악업이 그 결과를 불러들일 때가 되었을 때는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그 업이 결과를 불러들일 때는 시퍼렇게 살아계시는
(시퍼렇지는 않습니다. 그때 여든이니까요.)
부처님도 그 업의 결과가 발생할 때는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도 개입을 하셨어요, 언제였나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출정을 할 때는
부처님께서 나가셔서 군사를 돌렸지요.
그때 군사들이 돌아갔기 때문에 석가족의 수명이 그만큼 연장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심식이 맑은 석가족의 사람들은 출가를 또 합니다.
그래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그 업의 과보가 도래했을 시기에는
부처님도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업과 관련된 진실입니다.
# 과보를 받기 이전 유예된 기간의 중간자적 존재,
영가의 업에 제삼자가 개입할 수 있는 틈새
다시 정리하자면 선업이든 악업이든 결과를 불러들일 때가 되었을 때는
제삼자가 개입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 업이 결과를 불러들이기 전의 중간자적 상태에 있을 때는
제삼자가 개입할 틈새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도 선업이 되었든 악업이 되었든 업을 짓고 삽니다.
그리고 선과가 되었든 악과가 되었든 그 결과를 받을 겁니다.
그러나 바로 받지 않고 중간에 유예기간이 어느 정도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유예기간에는 우리가 개입할 수 있지요.
그런데 죽음이라고 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이 이론이 어떻게 되느냐?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생에 업을 짓고 그 과를 다 받지 못하면
죽어서 다음 생에 받는 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셨지요?
그런데 죽어서 다음 생에 그 과보를 받을 때도
그 과보를 받을 때가 되어버린 결정적인 때에는 누가 개입을 못하지요.
그런데 어떤 경우, 사람이 업을 짓고 죽어서
다음 생에 과보를 받게 되는데 아직까지는
그 과보를 바로 받지 못하고 유예하는 중간적 상태가 존재한다면
그때는 제삼자가 그 사람의 업에 개입할 수 있는 틈새가 생기겠지요?
학자들은 그럴 때 그 중간적 상태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최장 49일을 중간자적 상태로 머문다, 라고
하는 소위 중유설이 있어요. 여러분은 중음신이란 이야기를 들어봤지요?
우리가 업을 지어서 그 과보를 받는데 당장 받지 않는다, 라고
하는 그런 이론을 가지고 있는 불교학파가 있어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학파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일체유부에서 하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중생이 업을 지었을 때 그 업이 아주 강렬하면
머무는 기간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지옥에 떨어져야 할 업을 지은 자는
죽자마자 지옥에 바로 가지, 중간에 머무는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선한 업을 지어 천상에 태어날 사람은
죽자마자 천상에 나며 중간에 머물지 않는다고 그래요.
그런데 사람들이 보면 대개 그렇게 선한 업도 안 짓고
그렇게 악한 업도 안 짓지요?
업 자체의 성격이 애매모호한 중간 단계일 때는
결정이 빨리 안 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정을 짓는 데 최장 49일까지 끈다는 겁니다.
이럴 때는 아직까지 결과를 결정적으로 받지 않고
중간적 상태에서 유예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간에는 불교의 업설을 적용했을 때
제삼자가 개입해도 된다는 겁니다.
이게 소위 말해서 49재를 우리가 지내는 이유가 됩니다.
# 오늘 여기 왜 오셨어요?
중유설과 백중재의 상충
그런데 이 이론에 입각하면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중유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죽어서 과보를 받는데
최장 49일을 머문다는 이론에 입각하면 백중재는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백중재에서 천도하고자 하는 대상은 선망부모지요?
오래전에 돌아가신 부모들이 대부분이거나
또는 7세대 전에 돌아가신 부모이니 그분들은 돌아가신 지가
49일을 벌써 넘겼잖아요. 맞아요, 틀려요?
그럼 이미 결과를 받았다는 소리입니다. 결과를 받을 때가 되면
부처님도 어떻게 못한다 했는데
이미 결과를 받았는데 우리가 어쩌자는 겁니까?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친지가 돌아가신지
아직 49일이 안 지나가서 틈새가 열려있으니
이때라도 우리가 잘해 보자고 모인 겁니까?
아니면 이미 돌아가신 어른들, 돌아가셔도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어른들이 혹시 천도가 된다면
천도해 보자고 모인 겁니까?
후자 쪽이잖아요, 여러분.
그럼 49일간 머무니까 49재를 지내자고 하는
이 이론에 입각하면 백중재는 효과가 있다? 없다?
솔직히 얘기해도 됩니다.
오늘은 학자하고 이야기 하는 거라 생각하면 되니까요.
위의 이론으로 보면, 죽은 뒤 49일간은 빈틈이 생기고
중간 유예기간이 생겼으니까 그때 개입하려면 해야 하는 거지,
그거 지나면 끝이지요.
최근 49일 안에 친지 중 누가 돌아가신 분, 손들어 보세요.
아, 두 분 계시네요.
그럼 나머지 분들은 뭣 때문에 여기 오셨어요?
이미 결과 다 받았는데요.
그러니까 중유설에 입각하면 백중재는 설명이 안 됩니다.
# 아귀보餓鬼報설과 백중재
그럼 우리가 백중재는 왜 지내지요?
아까 중간단계,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중간단계와 관련된 견해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그 남아 있는 한 가지가 뭐냐 하면 남방상좌부를 중심으로 한 아귀보餓鬼報설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제가 왔을 때
아귀가 영가의 대표격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남방상좌부라는 부파가 있어요.
아까 49재를 우리에게 안겨다 줬던 중유설을 주장하는 부파를
무슨 부파라고 했지요?
아, 누구지요? 설일체유부 다섯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대단해요.
남방상좌부는 요즘으로 치자면 쓰리랑카, 미얀마, 타일랜드,
캄보디아 등입니다. 이런 나라들의 불교를 상좌부불교라고 합니다.
‘테라와다 부디즘’이라고 해요.
그런 나라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 49일을 중유 상태로 머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49재를 안 지냅니다.
혹시 그런 나라에 여행 가 보셨어요? 그 사람들 49재 지내는 거 보셨어요?
가면 파파야 먹는데 신경 쓰고 과일 먹는데 신경 쓴다고
그런 건 꼬치꼬치 안 물어보셨겠지만 49재 안 지냅니다.
왜?
죽으면 다음 생을 바로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도 천도재는 합니다. 아귀餓鬼 때문입니다.
저번 시간에 제가 아귀를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 조상의 영혼’이라했지요. 기억납니까?
여러분들은 기억의 상한선이 일주일이기 때문에
3주 전에 한 이야기를 아직까지 머리속에 담아 두는 일은 있다, 없다?
없다. ^^*
그런 여러분들이 저는 늘 고마워요,
이야기 하다가 막히면 전에 거 또 하면 돼요.
그래도 ‘아...’ 하고 새로 들어요.
아귀라고 하는 말은 배고플 餓 자에 귀신 鬼자를 쓰지만
중국 사람들이 번역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인도말로 페타, 혹은 프레타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페타나 프레타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미 간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이미 죽은 조상의 영혼이나 혼령이지요.
불교에서는 혼령, 영혼 이런 말을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가靈駕라고 하지요.
죽은 조상 중에는 지옥에 떨어진 분도 있을 수 있고,
천상에 가신 분들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지옥이나 천상에 가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대개는 죽은 뒤에 아귀보를 받습니다. 왜지요?
아주 좋은 업을 지으면 죽은 뒤에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아~~주 좋은 업을 지어야 죽은 뒤에 천상에 태어납니다.
아주 나쁜 업을 지으면 죽은 뒤에 축생으로 태어납니다.
아~~주 나쁜 업을 지으면 죽은 뒤에 지옥으로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좋은 업은 잘 안 짓고,
아~~주 좋은 업은 더 안 짓지요.
그리고 아주 나쁜 업은 잘 안 짓고,
아~~주 나쁜 업은 진짜로 안 짓지요.
대개는 그리 좋지도 않고 그리 나쁘지도 않은,
대충대충 업을 짓다가 갑니다.
그러니까 딱히 좋은 업을 지은 것도 없으니까
인간이나 천상에 가지도 않을 거고,
딱히 나쁜 업을 지은 것도 없으니
지옥이나 짐승으로 태어나는 일도 드물어요.
그래서 대개의 중생들이 죽은 뒤 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 아귀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조상의 영혼이 제일 많이 차 있는 곳이 아귀이다 보니까
영가 하면 아귀영가, 아귀가 바로 영가의 대표, 요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그것 외에도 의미가 많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천상이나 인간, 지옥이나 축생계에 가면
그건 우리가 손을 못 댑니다. 여러분.
특별한 경우엔 문이 열리기도 해요.
지장보살본원경 같은 것을 보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지옥에 태어난 사람도 구하는 도리가 나옵니다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지 여러분이 함부로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까지 기대할 필요는 없어요.
일단은 우리와 인연 있는 조상들 중에서 그리 좋은 일도 안하고
그리 나쁜 일도 안하고 굳이 말하자면
약간 나쁜 일을 하고 산 분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어때요? 여러분들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지요?
여러분들 중에 아주 나쁜 일을 한 사람 손들어 봐요.
여러분들 중에 아주 좋은 일만 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없잖아요.
그런데 어떤 일을 합니까?
자기 욕심에 받쳐서 조금 나쁜 일을 하지요.
남보다는 자기가 먼저 먹으려고 하고,
남의 새끼보다는 자기 새끼가 잘 됐으면 싶고 그렇지요?
그러다 보면 눈 슬쩍 감고 학력도 위조하고 그렇지요.
그러다 일이 커지기도 하는데
거의가 나쁜 일을 약간 하다가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아귀로 가는데 이 아귀보라고 하는 것이
아까 말한 제삼자의 개입이 가능한 중간자형태입니다.
# 아귀와 관련한 두 가지 이론,
주처가 없으며 배가 고프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업이 그렇게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으니까
벌써 경계이지요? 중간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아귀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이론이 제시됩니다.
첫 번째 이론이 아귀는 주처가 없다는 겁니다.
지옥 중생은 지옥이라는 주처를 가집니다. 지옥계가 있지요.
짐승들도 자기 보금자리가 있어요. 굴에라도 들어가 삽니다.
주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집이 있고, 천상은 천상의 저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귀는 주처가 없어요.
경전에서 아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이런 것까지 제가 말씀 안 드려도 되지만
한국불교대학이 요즘 뭐하나 하고 오랜만에 오신 분들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이 여러분들이 ‘티로쿠테스 티탄티’ 하고 외우면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르쳐 드리는 겁니다. 따라해 보세요.
티로쿠테스 티탄티
산디 상가타케스 처
드와라 바후스 티탄티
아간트와나 사칸가라
이런 팔리어 원전 게송을
여러분들에게 외워드릴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은
실지로 이런 원천적인 자료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여러분들이 신뢰를 가지라는 뜻에서 제가 소개를 한 것입니다.
티로쿠테스 티탄티- 담 벼락 너머에 서 있네.
산디 상가타케스 처-너희 집 근처의 큰 길가 십자로에 서 있네.
드와라 바후스 티탄티-네 집 문 밖에도 서 있네.
아간트와나 사칸가라-자기 옛날 살던 집을 찾아 와서.
우리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귀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 집 담벼락 너머에 서 있네”라고 하셨습니다.
아귀는 아귀세계가 따로 없고 주처가 따로 없기 때문에
인연 있는 후손들의 집 근처를 떠돌 수밖에 없는 겁니다.
떠돌이 귀신이 되는 거지요.
경전에 딱 그렇게 나옵니다.
지금 제가 소개한 이 경전은 부처님 당시에 유행했던 경전입니다.
나중 후대에 만들어진 위경이 아닙니다.
경전도 후대에 와서 부처님의 권위를 빌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위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전을 그렇게 할 때는 위조라 하지 않고 위작, 혹은 위경이라 합니다만
지금 제가 소개한 게송은 부처님 당시에 읊었던 내용입니다.
이처럼 아귀는 주처가 없습니다. 주처가 없으니 떠돕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귀의 특징 중 하나가 먹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주처가 없으니 먹을 게 없어요.
거지는 주처가 없으니까 얻어먹으러 다녀야 되지요.
그건 자기 것이 아니지요. 집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는 법입니다.
아귀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뭐에 시달린다?
배고픔에 시달리지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프페타’, ‘페타’를 ‘배고픈 귀신’으로 번역한 게 아귀입니다.
원래 프레타, 페타란 말에는 ‘이미 죽은 조상의 영가’란 뜻이 있습니다.
지옥 중생도 자기 먹을 것은 있습니다. 배는 안 곯습니다.
그걸 먹다보면 속이 다 타서 그렇지 쇳물이라도 마십니다.
그리고 짐승들도 어떻습니까? 분뇨라도 먹습니다.
우리 인간은 밥을 먹지요.
천신들은 오자를 먹습니다.
그런데 아귀가 먹는 음식은 경전에 안 나타납니다.
그걸 드라마틱하게 표현해서 아귀는 목구멍은 바늘구멍 만한데
배는 산더미 만하다고 해서 배고픔을 희화한 거지요.
그림으로 표현한 거지요.
어찌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남의 세계의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을라치면 그나마 목에 걸려 불로 바뀌어서
배고픔과 갈증이 더 하는 고통이 끊이지 않는 중생,
이 중생을 아귀라고 하는 거에요.
이 아귀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결정적인 과보를 못 받았어요.
주처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는 것은 뭡니까?
결정적인 과보가 아직 안 나타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아귀는 아직 중간자적 상태에 머물기 때문에
제삼자가 개입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방상좌부 같이 영혼이 49일간 머무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동네에서도 대개의 중생들은 죽어서 아귀라고 하는
중간적인 과보를 받기 때문에 그때만은 우리가 개입해서
그 아귀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조절 할 수 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천도를 합니다.
천도라는 것은 아귀영가를 천도하는 겁니다.
이미 짐승으로 태어났거나, 이미 지옥에 떨어져 버리면
거기서 닳도록 살아야 돼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건 어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났거나 이미 천상에 복락을 누리고 있는데
거기다가 뭐하려고 천도를 해요, 괜히 천도하다가 거꾸로 떨어지면 어떡하려고요.
우리가 천도를 하려면 어떤 중생을 천도합니까?
그렇지요, 약간 안 좋은 일을 해서 배고픔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이 아귀 영가들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해탈하게 하는 것,
이게 백중재의 목표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아귀들을 천도하자고 모인 자리가 이 자리라고 생각하면
그건 목적에 맞는 겁니다.
# 배고픈 존재에겐 먹을 것이 최고,
아귀 영가의 음식은 복덕식福德食 한 가지 뿐
그럼 이 아귀 영가들을 어떻게 해탈을 시켜야 할까요?
내가 저번 시간에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아귀영가 한 명만 해탈을 시켜도 우리는 다음 생에 아귀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 여기 잘 왔어요? 못 왔어요?
왜 백중재를 49일 동안 하느냐? 이유는 또 있습니다.
49일 동안 머물고 안 머물고를 떠나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 아귀 영가를 어떻게 해탈시키느냐 하는 방법이 경전에 설해집니다.
간단합니다. 아귀는 자기 주처가 없고 자기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기 때문에 아귀 영가를 해탈시키는 방법은 배만 불려주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배고픈 중생은 먹을 것 줘버리면 끝납니다.
아귀는 배고픈 중생이기 때문에 배만 불려주면 됩니다.
문제는 뭡니까? 아무 음식이나 먹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아귀 영가가 그 음식을 먹고 아귀고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음식은 딱 하나 뿐입니다.
두 가지도 아닙니다. 세 가지도 아닙니다.
네 가지도 아니고(안 말립니까? ^^*), 다섯 가지도 아니고
여섯 가지도 아니고, 아귀영가가 먹고, 벗어나고
해탈할 수 있는 딱 한 가지의 음식은 뭘까요?
깐풍기? ^^*
그 하나가 뭘까요?
후손의 복덕식 뿐이다, 경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후손이 지은 복덕의 음식만이
아귀 영가의 그 주린 배를 채워 주노라’,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백중재를 지냅니다만 백중재의 연원이 되는 경전이 있습니다.
그 경전이 어떤 경전이냐 하면 [불설우란분경]을 기본으로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그 간에 고승대덕들을 통해서
우란분경과 관련된 소식을 들은 것도 몇 차례 있었겠지만
우란분경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 공양은 대덕 승단에,
재자의 복덕식은 아귀 영가에게
시방의 승단은 7월 15일에 자자를 거행한다.
그때 마땅히 7세대 전 부모를 비롯해 현재의 부모도 좋으니
그들에게 닥쳐온 위험과 어려움을 위해
첫 번째, 정성껏 지은 밥과
두 번째, 온갖 맛을 갖춘 과일과
세 번째, 좋은 향기를 은은히 풍기는 향로와
네 번째, 깨끗이 정제된 기름을 그릇 안에 잘 담아서 상을 펴고
좌와구를 갖추어 시방 승단의 대덕들에게 공양하도록 해라.
자, 보세요. 밥 과일 같은 온갖 좋은 먹을거리 마실 거리를 준비해서
누구에게 주라고 하는지 잘 보십시오.
지금 배고픈 건 누구입니까? 아귀이지요.
그런데 밥, 과일을 가지고 누구를 대접하라 합니까?
스님들께 대접하라고 나옵니다.
자, 어느 쪽을 향해 대접하라고 하는지 잘 보라 이겁니다.
마땅히 이날은 일체의 성중으로서
혹은 산속에서 선정에 들어 있거나 혹은 육신통이 자재하여
성문 연각을 좋아하는 자이거나,
누구라도 대중 속에서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루에 밥을 받게 된다.
이처럼 청정한 계율을 지닌 성스러운 대중들의 도에는
그 복덕이 바다처럼 넘쳐나니 그것이 아귀의 양식이 되나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준비한 밥을 바로 아귀에게 베푸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세간 생활하면서 제사 지낼 때 어떻게 합니까?
음식 조금 차려놓고는 죽은 혼령들에게 와서 먹고 가라고 그러지요?
불교에서 봤을 때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혼령이 배는 고프지만 못 먹는다는 거지요.
아귀 영가의 배를 불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누구에게 공양해라?
시방승단의 대덕스님들께 공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의 심중에 복덕이 바다처럼 넘쳐나며
그 복덕이 아귀의 배를 채울 음식이 되느니라.’
이게 이렇게 쓰리쿠션입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
내 밥이 스님들께 가서 튕겨서 다시 내게로 돌아와
복덕이 된 다음에 아귀 쪽으로 가는 것이지,
‘아나~ 밥 먹으라’해서
아귀가 낼름 받아먹고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천만에 만만에 콩떡입니다.
이 말씀이 써진 경이 [불설우란분경]인데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후대의 작품이지
부처님 당시에 직접 설해진 경이 아니라며 의심을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대체 의심할 수 없는 경이 없나 하고 찾았으니,
아까 ‘티로쿠테스 티탄트’ 하고 외운 그 게송이 설해진 경이
[담벼락너머경]인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탁 나옵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도 외웠던 겁니다. 들어보세요.
빔비사라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법왕이 있었어요.
이 왕이 한 번은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아주 시끄러운
괴성에 시달려서 부처님을 찾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 괴기스런 소리가 무엇인지 설명하시면서
설한 경이 [담벼락너머경]인데 그 괴성은 바로 아귀들이
지른 소리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귀들이 왕에게서 나오는 공덕을 받아먹으러 왔다가
왕이 공덕을 베풀지 않는 바람에 배를 채우지 못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였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가 공덕을 많이 지어서 네 속에 있는
복덕의 음식을 아귀들에게 많이 나누어 주면
그들이 해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은 부처님의 손에 물을 부으면서 말했다.
부처님께서 공양전에 손을 씻으실 때
왕이 황금의 그릇에 물을 담아 부처님 손에 직접 부어드립니다.
이것도 좋은 일이지요? 이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당메 야티낭 호투-이 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복덕이 있다면
그것은 내 친지 영가들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말이나 인도말이나 못 알아듣기는 매 한가지다,
이런 표정 짓지 마세요.
깨끗한 물을 붓는 이 보시의 복덕이
내 친지 영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되어라, 이렇게 외웠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누어 준 복덕을
왕의 옛 친지 아귀 영가들이 어떻게 받는 것인가?
그들이 누릴 수 있도록
다섯 종류의 연꽃이 핀 연못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거의 모든 인연영가들은 연못의 물을 마셨고,
그 속에서 목욕했고 그리하여 슬픔과 걱정과 피곤함과 목마름 등에서
완전히 벗어나 황금의 안색을 얻었다.
다시 왕은 부처님과 비구승단에게 쌀로 만든 죽, 경식, 연식과 같은
아름다운 음식을 올렸고, 앞서와 같이 자신의 복덕을
옛 친지 영가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여러 가지 음식이
아귀들이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났고
그들은 이전에 느꼈던 심각한 배고픔을 채우는 것 이상으로
만족스럽게 천상의 음식을 먹듯이 먹게 되었다.
그들은 눈, 귀, 코, 혀의 감각기관을 모두 갖춘
신선하고 건강한 육체적 외모를 띄면서
아귀보로부터 해탈할 수 있었다.
# 인연 영가가 천도되려면 천도재자에게 복덕이 있어야 하고,
‘제게 복덕이 있다면 친지 영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되소서’,
회향선언이 있어야 함
이 이야기가 거기에 나옵니다.
자, 여기에서 여러분 중요한 이야기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뭐냐? 복덕이 있어야 아귀를 해탈시킬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가천도를 하기 위해서는
천도의 주체가 되는 당사자에게 복덕이 갖추어져 있어야지
인연 있는 조상들을 해탈시킬 수 있고 천도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복덕이 없고서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 박복한 중생은 조상천도도 못한다는 거지요.
어때요? 여러분은 복이 좀 있는 편입니까, 없는 편입니까?
배 고픈 사람에게 밥을 줘야 하는 것처럼
영가가 먹을 음식은 후손의 복덕 밖에 없으니
그 복덕이 있어야 영가가 먹고 천도가 되는데
본인이 복덕이 하나~~~~~도 없으면 뭘로 천도가 됩니까.
나중에 얘기 하지만 우리가 7.7이라 해서
시간을 길게 잡는 이유가 있어요.
물론 49재의 영향도 없잖아 있는 걸 인정합니다만
하루 달랑 정성들여 조상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뭔 나눠 줄 복덕이 생겨 천도가 되겠습니까?
49일 정도는 갈고 닦아야 그나마 복덕이 조금이라도 생기겠지요.
복덕도 없는 박복중생들이 조상 천도는 하고 싶지요.
그것도 복 짓는 건 짓는 거지만 그래가지고
무슨 효율 있게 복이 지어지겠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뭡니까?
자기에게 복덕이 일단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내 복덕을 인연있는 친지영가들에게 나누어 드립니다, 하고
선언을 해야지 복덕의 음식이 영가 속으로 들어가지
아무 말 안하고 입을 닫고 있으면 영가들이 못 가져간다는 겁니다.
왜? 자기 복덕이 아니고 후손의 복덕이기 때문에
가져가면 도둑질이 되기 때문에 악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영가는 준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못 가져갑니다.
그런데 빔비사라왕이 복덕을 잔뜩 짓고서도
아무 말 안하고 있으니까 아귀 영가들이 얻어먹으러 왔다가
못 얻어먹자 괴로워서 신음소리를 낸 겁니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복덕이 내 친지 영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되소서’ 하고
선언을 한 겁니다.
다음 주면 우리도 막재를 올리지요?
그동안 여러분들이 쌓아온 복덕이 만약에 있다면,
“이번 복덕만큼은 나와 인연 있는 선망부모면 선망부모,
친지 영가면 친지 영가들의 행복을 위한 음식이 되소서.
제 복덕을 그분들께 다 돌려드립니다, 회향합니다.” 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직접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받아먹습니다.
경전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 저도 못 봤습니다. 그래 받아먹는지 안 받아 먹는지
저도 본 거는 없습니다만 경전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학자가 경으로 말하면 됐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여기까지는 제가 작년 백중 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금강경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 복덕을 얻는 세 가지 방법,
諸惡莫作-止惡懺悔, 衆善奉行-行善布施, 自淨其意-금강경 독송
지금부터 금강경 이야기 들어가는데 잘 들으세요.
복덕이 있어야 천도를 하든지 말든지 하는 거지요. 그 이론은 말씀드렸지요?
지금까지 이론이 몇 구비를 넘어서 들어오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면 대단한 불교적 교리가 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복덕을 얻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 방법을 잘 들어보고
여러분들이 그 방법대로 하고 있으면
여러분들에게 복덕이 있다고 판단하여 평가해도 좋고,
그 방법에서 어긋났으면 복덕이 없어요.
복덕도 없으면서 ‘내 복덕 잡수세요.’,
그래서 와 보니 먹을 복덕이 없는데 어쩌나요. 누구 놀리나요?
그러면 꿈자리가 뒤숭숭해집니다.
복덕을 얻는 세 가지 방법을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바 파파스 아카라나
쿠살라스 우파삼파바
사치타 파리요다파나
에탐 부다스 사사나
팔리 원전 게송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여기 한국불교대학은 유명해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작년에 제가 백중재에 와서 이야기 한 것이
동영상으로 만들어져서 인터넷에 막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전혀 엉뚱한데서 인사듣기를 영남불교대학에서
백중재 때 강의하는 거 잘 들었다고 그래요.
인터넷에서 그 강의가 아주 인기라기에 저도 한 번 봤더니
아, 얼마나 창피한지요. 어째 그리 생겼는지.....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폼 나는 것도 좀 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꼭 폼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 원천적인 권위를 가진 자료들은 인용을 합니다.
큰스님들 오시면 게송부터 한편씩 외고 하시지요?
한문 문화권에선 그렇게들 하고
우리처럼 원전을 하는 사람들은 한자 외워서는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팔리어 원문을 여러분께 외워 드리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구족하라.
자기 마음을 그리고 완전히 정화하라.
이것이 복덕을 얻는 것과 관련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아는 법구경 말씀입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제불통계게라고도 그래요. 한 번씩 들어 봤지요?
여러분들의 표정이 아주 위태롭습니다. 딱 두세 명만 들어봤다고
그러고 나머지는 그런 거 들어본 적이 없다고
또 눈을 확 까뒤집으시는데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얼마나 덥습니까? 오늘 저는 사실 여기 오기 싫었습니다.
대구 이야기만 들어도 사람들이 머리가 지글지글 댄다고 해요.
그래도 여러분들 뵈려고 새벽밥 먹고 쫓아와서
이런 게송 들어보셨냐고 물어보면 들어본 사람은 들어봤다고
크게 답을 하고, 설령 안 들어봤어도 ‘아하, 그런 걸 들어봐야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려 주셔야지 ‘와? 못 들어봤다’, 그거는 아닙니다.
복덕을 얻으려면 악을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은 일단 행해라.
제악막작은 지악止惡이라고 해요. 그칠 지자에 나쁠 악자를 쓰지요.
나쁜 짓은 뭘 보고 나쁜 짓이라고 합니까?
이기적인 것을 불교에서는 악이라고 정해 버려요.
자기 좋으려고 남에게 피해 가게 하는 것을
이야기하거나 방조하면 다 악입니다.
선은 뭡니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공리를 선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미 저지른 악은 그럼 어떻게 합니까?
참회해야지요.
제악막작이란 말은 지악참회止惡懺悔입니다.
앞으로 나쁜 짓 하지 말고 남에게 피해 주는 일 하지 말고,
이미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다면 참회해라.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저지르고 난 뒤 입이다. 참회는 제대로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참회도 네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자기 잘못을 인정하라.
두 번째, 책임져라.
세 번째, 다시 짓지 마라.
네 번째, 결코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행선보시입니다. 선을 행하는 대표적인 행이 보시입니다.
저는 지악참회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7일을 일곱 번 하면 49일이지요? 오래 참회하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야 그동안 죄지은 물이 빠집니다.
어떤 스님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최소 3.7일간(21일)을
매일 365배를 해야 한다고 해요. 매일 참회한다는 뜻으로
365배를 최소 21일을 해야지 복덕을 생성하기 위한
나쁜 독이 빠진다는 겁니다.
저는 그다지 악독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365배는 못하고 108배는 합니다.
이제 막재가 일주일 정도 남았지요?
지금부터라도 여러분, 매일 부처님 전에 108배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동안 내가 지은 죄가 있다면 참회합니다, 하는
그런 마음이 심중에 있어야 복덕이 생깁니다.
자기 속이 시커먼데 무슨 복떡(복덕)이 생깁니까?
복떡이 생겨도 그건 썩은 떡이지요. ^^*
그 다음, 행선보시行善報施를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남을 도우라고 하는데 이런 기간에 하는 행선은 보시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깨끗한 봉투에다 깨끗한 돈을 넣어야 돼요.
액수의 많고 적음은 상관없습니다.
헌 돈이면 다려서 넣든지 하여튼 깨끗한 돈을 넣어요.
자기가 불전함에 돈을 넣는 것을 절대 남이 보지 못하게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이것만큼은 자기만 알게 보시를 해야지
진짜 보시가 되고 행선을 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게 복덕이 되는 겁니다.
21일 동안 최소한 매일 108배를 하면서 지악참회하고,
이 백중절을 맞아서 그간에 준비한 돈을 정성을 담아
아무도 모르게 부처님 전에 바치는 그런 행선보시까지 하게 되면
이 두가지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대개의 도량에서도 다 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인 자정기의自淨其意가 가장 중요합니다.
스스로 그 마음을 맑혀야 된다고 하는데 그냥 맑히는 것이 아닙니다.
‘파리요다파나’, 완전히 맑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완전히 맑히는 겁니까?
제악막작이 지악참회에 해당되고
중선봉행이 행선보시라고 한다면
자정기의는 금강경 독송입니다.
다른 경도 아니야, 딱 금강경 독송입니다.
# 무량 무변 공덕을 심중에 구족하려면,
무주상 법문인 금강경을 독송하라
왜 자정기의가 금강경독송이냐? 이게 이제 결론이니까 잘 들어봐요.
전혀 안 그럴 줄 알지만 여러분, 희한한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부처님 경전 중에서 복덕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하는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 금강경 독송하셨지요?
네 번째 묘행무주분에 뭐라고 했습니까?
‘무주상보시하면 기복덕 불가사량이라’, 복덕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리고 그 복덕이 생각할 수도 없을 양이라고 했습니다.
여섯 번째 정신희유분이지요? 거기에 보면, 금강경 한 구절만 외워서
남에게 들려줘도 칠보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운만큼 부처님께
보시한 공덕보다 복덕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덟 번째 의법출생분이랄지 복지무비분, 무위복승분이
모두 금강경 독송 한 번으로 그 공덕이 일곱 가지 보배를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부처님 앞에 한없이 보시한
공덕보다도 월등히 큰 복덕이라는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금강경은 한마디로 ‘무량. 무변. 무한한 복덕의 창고’와도 같은 경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 한 구절만 외워도 복덕이 무량한데 여러분들은
매 재마다 와서 금강경 전편을 다 외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지악참회한 복덕이나 행선보시한 복덕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지악참회, 행선보시가 바탕이 되어야 되지요.
그러나 그 복덕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양이 그렇게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내 주위를 떠돌고 있는 아귀 영가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수도 없는 유주 무주의 인연 영가들이 떠돌고 있는데
그들에게 복덕의 음식을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다 먹이려면 어떻습니까?
누구는 주고 또 누구는 안 줄 겁니까?
지악참회 행선보시로는 복덕이 모자라서 금방 바닥이 납니다.
무량복덕이 심중에 구족되지 않으면 아귀 영가 천도가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무량무변 그런 복덕을 심중에 갖출 수 있느냐?
그게 바로 금강경 독송입니다.
여러분들 오늘도 큰소리로 금강경을 독송했지요?
그걸 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겁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천도재에서 금강경을 외우는 것이
복덕생성을 통한 결정적인 천도효과를 누리겠습니까?
한 마디로 딱 끊어서 말씀드리면, 금강경은 무주상無住相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나왔지요? 무주상보시하면 기복 불가사량이라,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할진댄
그 복덕이 생각할 수 없는 양이 된다고 했지요.
무주상이란 무슨 뜻일까요?
상에 머물지 말라 했는데 무슨 상일까요?
허상虛相에 머물지 말라는 말입니다.
상이란 나누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 되고
한마디로 모으면 허상에 머무르지 말라는 겁니다.
# 모든 것이 집착에서 연유,
천도한다는 것은 아귀의 짙은 집착을 타파해 주는 것
결국은 집착입니다. 여러분은 집착이 심합니까?
우리 살아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때는 똑 같이 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힘들게 죽습니다.
죽을 때 힘들 게 죽으면 사후가 흉합니다. 안 좋습니다.
죽을 때 편하게 죽어야 사후가 편합니다.
나는 죽을 때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나는 죽을 때 대개 힘들 것 같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백중 그날이 오기까지는 손을 절대 못 들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
그럼 누가 죽을 때 편하게 죽고, 누가 죽을 때 어렵게 죽느냐? 다 집착입니다.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힘들게 죽습니다. 집착이 옅으면 옅을수록 편하게 죽습니다.
그러니까 중생이 누구이며 보살마하살이 누구이며
부처님이 누구이신지는 다 집착으로 분류됩니다.
집착이 하나도 없이 여읜 분을 부처님이라 그럽니다.
미세 집착이 남아 있으면 보살이라 하고,
조금 더 남아 있으면 성문 아라한, 그 다음 천신, 인간의 순으로
집착이 많아지지요. 좀 더 심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귀,
그보다 더 심한 집착이 축생,
그리고 집착이 아주 강한 자가 극악한 범죄를 저질러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이 모두 집착으로 결정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귀를 천도한다는 것의 속을 들여다보면
아귀의 그 짙은 집착을 타파해 주는 것, 이게 아귀 천도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인간도 스스로 돌아보면 아집이 강하잖아요.
그런데 아귀는 그보다 집착이 더 강합니다.
이 아귀의 집착을 끊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지요.
금강경이 필요한 이유가 이 틈새에서 설명이 됩니다.
# 집착, 잘못 보는 게 버릇까지 되어 버린 것
허상을 실상이라고 잘못 본 것, 이것이 아귀의 집착
여러분, 집착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나쁜 말이 엉겨서 집착이 됩니다.
하나는 邪見이고 또 하나는 惡習입니다.
일단 뭘 잘못 보는 겁니다. 그런데 잘못 보는 걸로 그치지 않고,
잘못 보는 게 나쁘게 버릇 들어 버린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뭘 집착한다고 하는 말 속에는 뭘 잘못 봤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 보는 게 버릇까지 되어 버린 걸 보고
너는 집착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작은 뭘 잘못 보는 겁니다.
집착이 강하다는 것은 그 잘못 보는 정도가 심하다는 겁니다.
아귀가 인간보다 집착이 심하다면 아귀는 인간보다
뭘 더 잘못 봤다는 소리이지요.
뭘 잘못 봤을까요?
답을 말씀 드립니다.
실상을 실상인 줄 몰라보고 허상을 실상이라고 잘못 본 것,
이게 아귀의 집착입니다.
배가 산더미 만하다는 아귀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아귀로 표현될 때 짐짓 띄고 있는 가짜 모습일까요?
가짜 모습이지요. 아귀의 모습이 영원합니까?
아귀보를 벗으면 떠나버릴 모습이지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인간의 모습이 영원한 모습 아닙니다.
우리 역시 천신으로 태어나면 천신의 모습을 띄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띄고 있는 모습은 잠시 띄고 있는 일시적인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짜입니다. 그런데 아귀는 이것을
마치 영원한 자기의 본래모습인 양 착각하고 있는 이 집착 때문에
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아귀에게 지금의 모습은 허상이기 때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가르침이 베풀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을 다시 하겠지요? 그것을 바로 무주상이라고 그랬지요.
무주상이라고 할 때의 상을 뭐라고 했지요? 허상이라고 했지요.
부처님께서는 허상에 머물지 말라 하셨지요.
무주상이란 말은 아귀에게도 인간에게도 다 같이 통합니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모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이다.
진짜 너의 본래 모습은 지락영생至樂永生이다, 라고 합니다.
즐거움으로 충만한 보편타당한 영생의 실체적 흐름이
우리의 본래모습이라는 겁니다.
진짜 우리의 모습은 상락아정常樂我淨하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꼬이다 보니까 지금 아귀의 모습이 되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귀의 모습은 허상이니 머물러서는 안 되고
진짜 모습인 실상을 얻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자기한테 해 주느냐는 거지요.
후손이 공덕이 있으면 그 이야기를 합니다.
금강경을 통하여 그 이야기를 합니다. 무주상, 무주상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집착을 여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지요?
부처님의 교화라고 하는 것이,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습은 허상이니까 거기 머물지 말고 떠나라,
그리고 진실한 모습인 실상을 얻으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 교화는 어쩔 수 없이 말로 해야 합니다. 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을 베푸실 적에 천신이나 인간은 부처님 말씀을
잘 알아들을까요? 네, 심식이 맑아서 잘 알아듣겠지요.
여러분들도 제 이야기가 제법 빠르게 진행되는 데도 알아듣잖아요?
그런데 짐승들이나 지옥중생들에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잘 알아들을까요, 못 알아들을까요? 아마 통 못 알아먹을 겁니다.
고통에 짜부라져서 못 알아먹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에 ‘쇠 귀에 경읽기’라는 말도 있지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아귀에게 부처님 말씀을 베풀면
그 말씀을 잘 알아들을까요? 못 알아들을까요?
천신이나 인간처럼 잘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지옥중생이나 축생처럼 전혀 못 알아듣지도 않겠지요.
어쩌다 한마디씩은 알아들을 겁니다.
그래서 하루 제사 지내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번 거듭 하는 이유입니다. 그 중에 한 번이라도 알아들으라고
7.7재를 지내는 겁니다.
# 상에 머물지 마라!
연발로 때리는 금강경(벼락경)의 벼락
그리고 금강경을 외웁니다. 금강이 뭡니까?
‘와즈라’입니다. 영어로 하면 ‘선더볼트thunderbolt’ 벼락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니고 원말은 벼락입니다.
정확한 경명은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입니다.
벼락과 같은 금강경의 법문이 모든 집착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 금강능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벼락이라 해서 우리나라의 벼락이 아닙니다.
인도의 벼락입니다. 다릅니다. 벼락이라는 것은
냉기단과 온기단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거든요.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기단이 좁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봤자 단발성입니다. 빠방~하고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인도는 넓은 국토이기 때문에 기단이 엄청 대규모입니다.
저쪽 끝에서부터 기단이 부딪치면서 오기 때문에
벼락이 어떻게 떨어집니까?
짝짝 짝짝짝 짝짝 짜잔~(교수님 특유의 동작을 곁들여 주심),
이렇게 옵니다.
그냥 빠방~이 아니고, 빠 빠 빠 빠 빠 빠방~ 이렇게 칩니다.
벼락은 한 방만 맞아도 갑니다.
한 방의 강력한 그 벼락이 바로 무주상이라는 겁니다.
상에 머물지 마라! 하고 한 방 때리는 것이 벼락입니다.
그 무주상의 벼락을 금강경에서는 한마디 달랑 하고 그치지를 않습니다.
빠빠빠빠빠빠방~
계속이지요. 상에 머물지 마라, 상에 집착하지 말라,
허상으로부터 떨어져라, 무주상 부주행의 보시를 하라,
계속 연발로 무주상 법문을 내리시는 경이 금강경입니다.
# 황망하고 배고픈 중에 어쩌다 ‘무주상’이란 말이
아귀의 심식에 꽂히는 순간 ‘아호~’ 하고 그들이 천도되다
여러분들 주위에 아귀 영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로부터 생성되는 복덕의 음식을 얻어서
아귀의 배고픔을 면하려고 기대하는 아귀 영가가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담벼락 밖에도 서 있고, 저자거리에도 서 있고,
문 밖에도 와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 자신의 인연 있는 후손을 찾아서 아귀 영가들이 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7.7일 동안
지악참회하고 행선보시해서 복덕이 생겼어요,
그 복덕의 음식으로 조금이라도 배를 채웠어요.
이런 아귀들에게 인연 있는 목소리가 외칩니다.
“무주상! 무주상! 무주상!!
아귀 영가들이여, 아귀의 모습에 머물지 마소서” 하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그 황망한 중에, 배고픈 중에 어쩌다 한 마디 무주상이란 말이
아귀의 심식에 꽂히는 순간 어떻습니까?
아귀의 집착은 탈락되고 무량복덕이 그 주린 배 속을 채우면서
아귀보로부터 해탈하면서 ‘아호~’하고 천도가 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
어느 도량이 금강경을 외웁니까. 난 참 안타까워요.
이 무주상 법문이 있는 금강경을 외워야
아귀가 허상으로부터 해탈을 하고 천도가 되는데 기껏
지악참회하고 행선보시하면서 쌓은 유루의 복덕으로
어떻게든 한 번 천도해 보려고들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천도가 된다한들 잘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스토리를 잘 이해하셔서
이번 천도재가 반드시 복덕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최봉수 교수 / 동국대 교수, 불교학자, 역경위원
출처 :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