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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지는 비
신영배
비의 고요한 한가운데
물울
어디쯤일까
한 발자국을 떼어놓고 안과 밖을
살피던 여자는 몰아치는 비에
우산을 앞으로 하고 둥글게 몸을
말았다 안간힘으로 거센 비의
옆구리를 밀었다
- 신영배 시집 《물속의 피아노》, 문학과지성사, 2013
〈휘어지는 비〉는 몰아치는 빗속을 뚫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말하지는 않는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아마도 여자일 것이다. 그 여자는 ‘문 뒤에 여자’다. 시집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드라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누군가 가고/밖을 훔쳐보는 여자/문 뒤에서 먹는 여자/누군가 오고/밖을 훔쳐보는 여자/문 뒤에서 중얼거리는 여자/누군가 가고/문 뒤에서 자는 여자/누군가 오고/문 뒤에서 소리 지르는 여자/누군가 가고/문 뒤에서 하품하는 여자/누군가 오고/문 뒤에서 웃는 여자/누군가 가고/문 뒤에서 달리는 여자”(〈문 뒤에 여자〉). 오로지 문 뒤에서 제 삶을 꾸리던 여자다. 물론 이것은 상징어법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문은 일종의 차폐막이자 벽이다. 여자는 문 뒤에 섬으로써 자신의 자아와 사생활을 바깥의 세계로부터 단절한다. 바깥이란 누군가 가고 오는 세상이다. 여자는 그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여자는 오로지 문 뒤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품을 하고 웃고 달리고 가끔은 바깥을 훔쳐본다. 다시 말해 여자는 가고 오는 일을 그친 채 유폐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왜 자신의 삶을 문 뒤로 유폐시켰는지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다. 여자에겐 자폐와 고독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여자가 어쩐 일인지 비가 휘몰아치는 날 문 바깥으로 나왔다. 단지 비의 정취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빗속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가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몰아치는 비에 몸을 둥글게 말고 비의 옆구리를 밀며 앞으로 나아간다. 가야 할 길의 절박성을 암시한다. 거칠게 내리는 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난폭한 물이다. 사납게 퍼붓는 물은 여자에게 우호적이 아닌 거친 공격성을 품고 있다. 유폐는 끝났다. 몰아치는 빗줄기와 가슴의 격류가 조응한다. 오랜 자폐의 관습에 비춰보자면, 이 난폭한 물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자의 모습은 거의 ‘진격’의 수준이다. 여자가 문 뒤에 제 삶을 유폐시켰을 때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얼어붙은 물이었다. 여자가 얼음의 이마, 얼음의 가슴, 얼음의 유두를 가진 시절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존재의 심연이 얼음이었던 시절에서 풀려나 물이 되어 저 세계 어딘가를 향해 흘러간다. 애초에 여자는 물이었다. “바닥에 물자국이 놓여 있다 그녀가 가만히 디뎌 본다 물로 걸어가 본다 물로 뛰어가 본다 동시에 물로 돌아온다”(〈물구두〉). 여자는 물로 서 있고, 동시에 물로 걸어간다. 여자는 물로 된 사람이니 당연히 물구두를 신는다. 물사과를 먹고 물구두를 신던 시절에는 “물의 요일”(〈물의 요일〉)들이 지나간다.
여자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물울’이라고 한다. ‘물울’은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단어다. ‘물울’과 더불어 ‘물로’ 역시 시인이 창안하여 처음으로 시집에 올린 말이다. 이 시집에는 〈물울〉이라는 같은 제목을 가진 시들이 일련번호를 붙이지 않은 채 여러 편 실려 있다. 시인은 그중 한 편에서 “서 있던 저녁이 앉을 물, 두 다리가 젖을 울, 발끝이 떨릴 물, 잔잔하게 퍼질 울,/서 있던 꽃이 앉을 물, 엉덩이가 젖을 울, 붉을 물, 둥글 울, 아플 물, 울 울,” “서 있던 바람이 앉을 물, 얼굴을 묻을 울, 고요할 물, 잊을 물.”이라는 구절을 선보인다. 이것으로 그 모호한 뜻을 더듬어 짐작할 도리밖에 없다. ‘물울’은 서 있던 저녁과 꽃과 바람이 앉을 ‘물’과 두 다리와 엉덩이가 젖을 ‘울’이 합해진 어휘다. ‘물’은 발끝이 떨리고, 붉고, 아프고, 고요하다는 뜻을 머금고 있다. ‘울’은 잔잔하게 퍼지고 둥글며 운다는 뜻을 머금고 있다. 그 모든 의미를 더하면 ‘물울’의 의미가 분명해질까. ‘물울’의 의미를 특정하려면 할수록 더욱 모호해진다. ‘물울’은 특정한 시공을 가리키는 어휘다. “비의 고요한 한가운데” 따위가 그 ‘물울’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시공이다. 시인은 “어디쯤일까”라는 의문문을 남김으로써 시인 자신도 그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를 특정하지 않는다.
나는 〈휘어지는 비〉를 난폭한 물과 싸우며 제 삶의 길을 열어가는 여자의 고투(苦鬪)를 묘사하는 시로 읽었다. 이 시 속의 여자가 유폐의 벽을 깨고 나와 거센 빗줄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고투이기도 하고 생의 놀라운 도약(跳躍)이기도 하다. 시의 어조는 무겁거나 어둡지 않다. 마치 여자가 난폭한 물과 유희라도 하고 있는 양 밝고 명랑하다. 지금 여자는 집을 나와 ‘물울’로 가는 여행자다. 여자는 “지붕만큼 부푸는 치마를 갖고 싶어”(〈물울〉)라고 말한다. 이때 “지붕”은 “사막을 딛고 서서 물로 지붕을 짓는”(〈아름다운 지붕〉)이라는 구절에 따르면, 물의 지붕이다. 물의 지붕, 부푸는 치마는 바다라는 이미지의 변주로 읽힌다. ‘물울’은 물로 된 지붕을 가진 집, 모든 물방울이 흘러서 귀착하는 곳, 곧 사막과 같은 세계 저편에 펼쳐진 넓고 따스한 바다가 아니었을까. ‘물울’은 “우울하고 둥글고 아찔”(〈물울〉)하다고 했는데, 둥근 바다는 곧 거대한 하나의 물방울이 아닌가!
신영배(1972~)는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2001년 황현산과 김혜순이 편집인이던 계간지 〈포에지〉에 〈마른 피〉 외 시 네 편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그동안 《기억이동장치》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물속의 피아노》 등 시집 세 권을 펴냈다. 2013년 봄, 내가 원주의 토지문화관에 입주 작가로 머무는 동안 시인도 입주 작가로 머물고 있었다. 토지문화관의 구내식당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쳤으나 길게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시인은 거의 말이 없었다. 올해 나온 매혹적인 새 시집 《물속의 피아노》는 수성(水性)에 침윤된 도저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시인은 물의 질료성을 자아에서 세계 전반까지 확장하면서 사유한다. 시집을 열면 비·빗방울·물방울·물뱀· 물고양이·물고기·물비늘·물병·달물·물사과· 물꽃·물방울 나무들… 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거기에 오줌·바다·강·저수지. 그리하여 시집은 온통 물로 이루어진 하나의 모호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이룬다. 나비조차 “물로 반짝반짝 물로 팔랑팔랑”(〈물과 나비〉) 난다. 세계는 물로 출렁이고, 이 물의 세계 안에서 여자가 산다. 여자는 자신이 물로 된 사람이라는 걸 잘 안다.
사회가 하나의 바다라면, 사람들 하나하나는 그 바다를 이룬 물방울이다. 물의 최소단위로서의 물방울은 둥글다. 그 물방울의 둥 안에서 여자는 제 몸을 둥글게 만다. 여자는 “물방울을 안고 몸을 둥글게 만다”(〈물방울 알레그로〉). 자궁의 양수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태아와 같이 제 몸을 마는 여자는 그것으로 제가 하나의 물방울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여자가 일어나 몸 아래 물을 들여다” 보고, “여자가 소녀들과 함께 물을 나른다”(〈물을 나르다〉). 여자는 자주 운다. “울다 울다 물은 둥글어”(〈문을 여는 여자〉)진다. 물방울의 상상력은 “나는 몸뚱이 없이 두 방울의 눈물로 서 있네”(〈물사과〉)라는 구절을 낳기도 한다. 물의 몽상 속에서라면 사람은 물로 태어나 물사과를 먹고 물잠을 자며 물로 살다가 죽어서 물의 무덤에 묻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