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 피에트로 트라파시(필명 : 메타스타시오)
초연 1735년 1월 로마 토르디노나 극장
<2011 예지 페르골레시 극장 / 170분 / 한글자막>
아카데미아 몬티스 레갈리스 연주 / 알레산드로 데 마르키 지휘 / 이탈로 눈치아타 연출
리치다...........크레타의 왕자................................제니퍼 리베라(메조소프라노, 바지역할)
아리스테아.....시키온의 공주................................류보프 페트로바(소프라노)
클리스테네.....시키온의 왕. 아리스테아의 아버지.....라울 히메네스(테너)
아르네제........리치다의 옛 애인............................예자벨 아리아스 페르난데스(소프라노)
메가클레........리치다의 친구................................소피아 솔로비(메조소프라노, 바지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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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당대 최고의 인기 리브레토를 토대로 완성한 페르골레지의 오페라
메타스타시오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피에트로 트라파시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오페라 대본작가였다. 그의 리브레토 중에서도 유래 없이 큰 인기를 누렸던 작품이 바로 <올림피아드>다. 1733년에 그가 칼다라를 위해 처음 완성되었던 이 대본은 이후 바로크와 고전시대를 거치면서 비발디, 갈루피, 하세, 피치니, 치마로사 등을 포함한 최소 60명 이상의 작곡가들에 의해서 오페라로 재탄생되었다. 페르골레지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올림피아드>는 자신이 사망하기 일 년 전인 1735년 1월에 로마의 토르디노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지만, 작곡가 특유의 간결하고도 매력적인 선율미를 가득 담은 이 작품의 매력은 그가 완성한 오페라 세리아들 중에서 첫 손에 꼽을 정도다.
본 공연은 2011년 작곡가의 고향 예시에서 펼쳐졌던 실황으로, 극장의 독특한 구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이탈로 눈치아타의 연출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원전연주 스페셜리스트인 알레산드로 데 마르키의 생기발랄한 음악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는 1710년 이탈리아반도의 중동부에 위치한 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이후 나폴리로 건너가 포베리 데 제주 크리스토 음악원에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학창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과시했던 그는 자신의 첫 오페라인 <라 살루스티아>를 1732년에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에서 초연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하지만 희극 <연애하는 수도사>, <명예로운 포로>, <하녀에서 마님으로> 등이 연이어 성공을 거두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작곡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1736년 불과 2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오페라의 내용은 메타스타시오가 완성한 리브레토의 전형을 그대로 따른다. 즉 네 명의 청춘남녀들 사이의 복잡하게 얽힌 애증관계가 주요 내용이다. 크레타의 왕자인 리치다는 시키온의 공주인 아리스테아를 짝사랑한다. 아리스테아의 아버지인 클리스테네는 올림픽의 우승자와 자기 딸을 혼인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운동에 소질이 없던 리치다는 자신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었던 친구인 메가클레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여할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메가클레와 아리스테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애정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메가클레는 결국 올림픽에서 우승하지만, 리치다의 옛 애인이었던 아르네제에 의해서 리치다의 속임수가 탄로 난다. 우여곡절 끝에 리치다는 아리스테아의 쌍둥이 오빠인 것이 밝혀지고, 마침내 아리스테아/메가클레, 아르제네/리치다의 두 커플이 맺어지면서 오페라가 마무리된다.
=== 인물 정보 === <다음 백과>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1710.01.04, 이탈리아 예시 ~ 1736.03.16, 이탈리아 포추올리
그의 막간극 <마님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는 18세기의 가장 뛰어난 극음악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성은 원래 드라기(Draghi)였으나 페르골라에서 예시로 옮겨온 후에는 '페르골라 출신의'라는 뜻을 지닌 페르골레시라는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1726년부터 나폴리에 있는 포베리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큰 명성을 얻었다. 1732년 나폴리 스티글리리아노 공의 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나폴리의 오페라 부파 〈연애하는 수도사 Lo frate 'nnammorato〉와 미사곡 1곡(F장조 미사곡으로 추정됨)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733년 오페라 세리아 〈콧대 높은 죄수 Il prigionier superbo〉가 공연되었으나 정작 성공을 거둔 것은 이 작품의 막간에 삽입된 〈마님이 된 하녀〉였다.
1734년 페르골레시는 나폴리의 부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에는 F장조 미사곡의 연주를 지도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뒤이어 발표된 오페라들은 간헐적인 성공만을 거두었을 뿐이다.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자 1736년 나폴리를 떠나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의 카푸킨 수도원으로 요양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마지막 작품인 〈성모 애가 Stabat Mater〉를 완성했다.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극심한 가난 속에 숨졌으며 포추올리에 있는 성당에 묻혔다. 그가 죽은 무렵 그의 이름은 로마나 나폴리 외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다음 세기에는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마님이 된 하녀〉의 성공은 대부분 사후에 이루어졌으며, 1752년 파리에서 공연된 이후 절정에 다다랐다. 이로 인해 '부퐁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페르골레시의 작품을 위조하려는 표절음악가가 많이 생겨났다. 이로써 페르골레시의 것으로 알려졌던 작품들의 신빙성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무용곡 〈풀치넬라 Pulcinella〉(1920)를 위해 편곡했던 페르골레시의 작품 중 일부도 그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페르골레시의 딱딱한 스타일은 그의 〈성모 애가〉와 미사곡들에 아주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곡들은 또한 그가 대규모의 합창과 기악을 잘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품을 희극적으로 처리하는 그의 재능은 〈마님이 된 하녀〉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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